미국의 파시즘화와 한반도 정세

노동사회

미국의 파시즘화와 한반도 정세

admin 0 3,177 2013.05.1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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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3년 5월16일 연구소에서 열렸던 김민웅 목사 초청 강연회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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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에 한국을 방문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성서 강연이었고, 다른 하나는 반전평화운동강연이었다. 두 가지는 하나의 맥을 갖고 있다. 왜냐면,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 이후에 미국과 국내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방향에 있어서 혼란, 무력감, 패배감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민족자존과 노동운동의 역할

노 무현 대통령 취임 전과 후의 모습이 극단의 변화를 보이고 있어 여기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미국 문제에 대해서 태도를 결정할 때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대책이 없으니 어쩔 수 있는가 하는 입장이 있다. 이런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저항도 해야 되지만, 대책이 없는 저항은 무책임해질 수 있다. 분노가 힘을 발휘할지는 모르지만, 그 운동이 지속적인 힘을 바탕으로 능동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대책과 연구가 필요하다. 스스로 문제를 적극 제기하면서, 문제 제기 자체가 현안이 되게 하는 운동이 절실하다.

지난 시기 우리의 운동을 반성해 보자면, 현안이 발생하면 그것을 놓고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방식이었지, 우리 자체가 본질을 꿰뚫어 보면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이 사회적 쟁점이 되도록 만들지는 못한 측면이 있다. 이것은 단기적으로는 사람의 관심을 모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큰 전망을 갖고 우리의 힘을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모아나가는 체계화된 운동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이라크 침략전쟁에 대한 반전운동이 있었지만, 일단 전쟁이 끝난 후에는 상황이 종료됐다는 인식이 많이 생겼고, 그 다음에 후속 조치로써 운동 차원의 문제 제기가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되어버린 지금 상황은 일종의 허무주의까지 생길 수 있는 현실을 낳고 있다. 지속적으로 현안을 제기하고 그것을 토대로 역사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모아 나갈 수 있는 그런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삼일 후면 5·18 광주 항쟁이 있다. 광주 항쟁은 미국의 실체를 역사적으로 각성하게 된 중요한 계기인데, 이런 시기에 노무현 정권이 방미 과정에서 보였던 어처구니없는 수준의 발언과 허리 굽히기를 보면서 참담함을 느꼈다. 이와 관련해서 노동운동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노동운동이 이 문제와 어떤 관련을 맺어야 하는가의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미 외교에서 노무현 정부가 수세에 몰리고 고개를 숙인 요인으로 경제 협박을 많이 든다. 민족의 자존도 중요하지만, 경제적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때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불가피론이 한쪽에 있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는 데 있어 노동운동의 역할은 중요하다. 노동운동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항하고 초국적 자본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데 앞장서지 않는다면 민족자존을 바로 세우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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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16일 포럼은 이원보 소장의 사회와 김민웅 목사(사진 왼쪽)의 경연으로 진행되었다. ]

미국 사회의 파시즘화

미 국이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고, 내부적으로는 미국판 파시즘이 전개되고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 점이 노동운동이 꿰뚫어 봐야할 대목이고, 민족운동과 결합해서 해결해야할 중요한 지점이다. 혹자는 미국과 같은 사회에서 어떻게 파시즘인가하고 반문할 것이다. 파시즘은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에 대한 체제적 대응의 한 형태이며, 대자본과 군사주의의 동맹적 결속이다. 바로 이러한 체제적 위기의 대응이 오늘날 부시 정권의 속성을 보여준다.

파시즘적 동맹관계 속에서 미국 노동운동은 현재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미국 사회 안에서 공화주의의 기초인 민주적 권리 자체가 제한되기 시작하고, 파시즘 동맹체제의 기본 특징인 권력 집중을 통해서 제국주의적 발전 경로가 확장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정치사회학자인 풀란차스가 적절히 통찰했듯이, 파시즘은 제국주의적 발전단계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체제적 대응이다. 파시즘은 단순히 반민주적 정치체제가 아니라, 제국주의라는 동전의 다른 면이다. 제국주의는 반드시 공화정을 파괴하게 돼있고, 공화정을 파괴하면서 등장하는 체제가 파시즘이다. 오늘날 미국의 강경파 진영은 바로 미국판 파시즘 체제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등장한 세력인 것이다.

1980 년대 미국의 한 정치학자는 ‘미소 짓는 파시즘’(friendly fascism)이라 했는데, 오늘날 이것은 미소를 짓고 있지 않다. 미국은 제국주의적 발전경로를 규정해서 팽창 정책을 강화하고, 미국 내부에서는 민주적 권리가 소멸되고, 외적으로는 약소민족들의 생존이 위협당하는 문제가 생기고 있다.

파시즘의 역사적 발전 경로를 살펴볼 때, 1919년과 1939년 사이, 즉 전간기(戰間期)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서 1, 2, 3 인터내셔널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이해한다면 이 기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제1인터내셔널은 1차 대전을 막는데 실패했다. 유럽의 사회주의 진영은 전쟁을 막지 못했고, 이것이 결국 1차 대전을 초래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베르사유 체제가 출현했지만, 이 역시 국제적 평화체제를 유지하지 못한 채 승전국과 패전국의 구도로 이어지면서 2차 대전의 배경이 되었다. 이 시기 유럽의 노동운동, 사회주의 운동, 유럽의 국제주의 연대가 중대한 동요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를 경험하는 1930년대까지 독일을 중심으로 파시즘 체제가 강고하게 형성된다.

이 시기를 주목해보면, 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게 아니라 전쟁의 조건을 그때그때마다 축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19년부터 1939년까지 이십년 동안이 중요하고 결정적인 시기였다. 당시 유럽의 진보 세력은 처음엔 전쟁의 위협을 그다지 크게 느끼지 않았다. 진보 세력은 반동적 부르주아 체제를 지키려고 했던 세력에게 자신들의 권한을 넘겨주고도 나름대로 의회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발등을 찍었다. 작은 양보 조치 하나하나가 큰 맥락에서 보자면 전쟁 추구 세력의 권한을 강화시켜 주는 기회를 부여했다. 결국 전쟁을 막고자 했던 세력들은 팔다리가 잘린 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십년 세월을 통해서 전쟁의 조건들이 축적되고 유럽 사회에서 파시즘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자본주의는 전쟁의 방식으로 위기를 돌파하는 과정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인류는 말할 수 없는 참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북폭론의 심각성을 바로 인식해야

부시 정권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이는 것들을 하나하나 치밀하게 축적하고 정책으로 만듦으로써 두 번의 전쟁을 일으켰다. 두 번의 전쟁은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는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다.

지 난 해 미국 언론들이 한반도 정세에 대한 긴박한 상황인식과 선제공격의 다급성을 논의할 때 여러 매체에 글을 쓴 적이 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일부는 너무 긴장을 유발하는 게 아니냐는 반응을 보인 적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조건과 상황 인식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전쟁의 조건이 축적되어 간다는 점이다. 왜냐면, 이미 미국은 전쟁 준비를 상당 부분 완료한 상태이다. 전쟁은 적을 필요로 하는데 적을 설정하고 적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부정적으로 만드는 작업이 일단 완료되면, 전쟁의 중요한 부분을 완료한 것이다. 미국과 세계 여론의 북한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으로 굳어질 대로 굳어진 상태다. 이러한 상대를 향해서 전쟁을 한다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내가 지적하고자 한 바는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 자체에 대한 고집이 아니라, 미국이 전쟁의 환경과 조건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을 치밀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을 보면, 추가적 조치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게도 전쟁이라는 조건의 추가이다. 이런 내용을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 사이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알 수 없게 된다. 이런 차원에서 전쟁 조건의 형성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규명하고, 문제 삼아야 한다.

북한체제 붕괴론이나 북한 폭격론 얘기가 나올 때마다 부시 정권은 자신들의 공식 이야기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 정부는 미국의 공식 입장이 아니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안심하라고 국내 여론을 진정시킨다. 그러나 이렇게 넘길 일이 절대 아니다. 만일 다른 나라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 미국과 관련된 도발적 발언을 하면 미국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상황을 만든다. 우리나라가 그런 방식까지 동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문제를 신랄하게 제기할 수는 있다. 누가 얘기했는가, 어떤 자리에 있는 사람인가, 무엇 때문에 얘기했는가, 어떤 과정에서 논의됐는가, 공식적이 아니라면 왜 비공식적으로 얘기했는가를 문제제기 해야 한다. 민족의 운명이 달린 문제이기에 묻고 따져야 하는 것이다.

북폭론을 다룬 럼스펠드의 메모가 돌았을 당시 우리는 그것을 묻고 따져 더 이상 그런 얘기가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 내부에서는 북폭론의 현실 가능성만을 따졌을 뿐이다. 북한 폭격이란 발상 자체를 거부했어야 했다. 이러한 문제 제기와 사회적 공론화가 그때마다 우리의 역량으로 축적되지 못함으로써 한편에서는 북폭의 근거가 없다고 하면서도 선제공격을 얘기하는 현실이 발생하고, 여기에 대해 아무런 문제제기도 못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북폭론 등의 이야기가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에 미국 사회에서 대세가 되고 합의가 되어, 미국 정부가 합의를 기초로 행동에 나서게 된다면, 그때 가서 그것을 막아내기가 굉장히 어려워진다. 전쟁 조건의 축적을 막기 위한 지속적 문제 제기만이 미국의 군사 행동을 막을 수 있는 우리의 대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미 정상회담의 문제점

미국은 이미 설득의 대상이 아니다. UN의 설득과 유럽의 설득도 실패했다. 설득이 아니라 분명한 자세와 의지를 보여야 한다. 생존이 걸린 문제를 애매모호하게 표현해서는 안 된다. 해석상의 애매함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미국과의 힘 관계를 고려할 때 ‘대등한 외교’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대등한 관계’가 아닌 ‘정당한 관계’가 대미 외교의 원칙이어야 한다. 역량의 차이를 무시한 채 외교를 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촛불시위 이후로 노무현 대통령이 촛불시위 자제를 부탁하면서 ‘친미자주론’을 얘기했는데 이는 틀린 방향이다. ‘자주친미’가 올바른 방향이다. 북한 역시 자주친미를 주장한다. 자주적 입지를 근거로 미국과 국제적 선린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것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친미’를 자주보다 앞세우는 것은 굴종의 자세를 전제로 하며, 굴종을 전제로 한 자주는 서로 모순된다.

한미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을 보면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그 중 한 가지가 북경회담에 대한 평가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북한의 제안, 평가, 대응, 자세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것은 결국 북한의 입장을 안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해상봉쇄 정책을 결정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데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노무현 정부를 길들이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중동 문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라 한반도 문제를 다급하게 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시간을 벌면서 서서히 조이는 방식을 선택할 것이며, 미국 대선과 관련지어 이 문제를 풀어나갈 것이다.

햇 볕정책은 민족공조 정책이었는데, 노무현 정부가 택한 방식은 이것을 폐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 하다. 정상회담에서 남북관계를 북핵문제와 연계하고, 한미공조로 접근하겠다는 발상은 민족문제의 주도권을 미국에게 넘겨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북핵 위기의 근본 원인에 대한 성찰이 없는 가운데, 한반도 문제에서 군사적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을 정당화하는 발언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노무현 정권이 미국에 가서 미국이 가한 통합과 포섭 전략에 그대로 흡수돼 버린 양상을 보여주었는데,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과 전략의 핵심은 민족 생존과 관련된 주도권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것이 무너지면 노동운동의 의미도 사라진다. 왜냐면 이러한 재앙은 계급적으로 차별해서 가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미관계를 50년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정전협정 50년과 맞물려 있다. 정전협정은 준전시상태의 지속을 의미한다. 준전시상태에서 군사적 보장을 동맹관계로 해결해온 한미관계를 기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의 밑바탕에는 정전협정이 있다. 따라서 동맹의 성격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정전협정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럴 경우 지금의 동맹관계를 지탱하는 명분과 근거가 사라진다. 정전협정의 내용을 평화협정의 내용으로 전환시켜야 동맹관계의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재배치 문제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이에 대한 군사적 접근과 선택이 아니라 평화적 접근과 선택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미국은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는가. 미국의 정치학계에서 존경받는 셸던 월린 같은 온건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자조차 『네이션』(Nation)지에 글을 기고하여 오늘날 미국 부시 정권이 전도된 전체주의 사회로, 과거 독일 나치스의 파시즘적 전체주의의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비판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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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 참석자들 ] 

미국 외교정책의 본질

겉 으로 보기에 미국 사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풍요하고 안락하고 사람들의 모습엔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면에서는 정말 문제가 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민자들의 삶이 어려워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략 전쟁 이후 아랍권 사람들에 대해 무차별 단속, 투옥, 송환이 자행되고 있다. 미국 인권단체나 이민자 권익을 옹호하는 단체들이 문제를 제기해도 별 소용이 없다. 그리고 반전운동에 나섰던 문화인과 지식인들도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학교에서 반전운동에 관해서 논쟁을 할 때 아이들이 반전을 주장하기 쉽지 않다. 추상적으로 전쟁을 반대하지만, 구체적 현실에서 반전운동은 미국의 체제적 본질을 건드리면서 미국 시스템 전체에 대한 반란을 조성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1960년대 마르틴 루터 킹은 인권운동에서 반전운동으로 전환하자 암살당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미국 자본주의 체제의 제국주의적이고 군국주의적인 본질을 의미한다고 설파했다.

길게 보면 십년 동안 클린턴 정부의 신자유주의 형태로 자본의 직접 지배가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나 지금은 내부적으로 투기 자본의 거품 현상으로 경제가 어렵고, 외부적으로 반세계화운동으로 인해서 미국의 신자유주의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과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미국 내외에 패권적 헤게모니의 위기를 가져왔다. 미국의 지배 엘리트는 여기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그 결과 과거의 방식, 즉 군사력을 중심으로 문제를 푸는 파시즘을 선택했다.

이 파시즘적 선택에 가장 친화력을 가진 세력이 바로 부시를 중심으로 한 딕 체니와 럼스펠드 같은 인물이다. 클린턴 시기에는 이 세력이 어느 정도 퇴각했었다. 당시는 ‘달러 외교’를 취했는데, 지금은 ‘전함 외교’(gun boat)를 취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양상은 19세기 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외교사를 지배하는 중요한 두 요소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들고 치자’는 ‘빅 스틱’(big stick) 외교를 취해 해군 전함을 동원해서 다른 나라를 침략, 정복하는 ‘점령 정책’을 추진했다.

미국 외교 정책의 근간은 ‘점령정책’이다. 점령의 강도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기본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무장력을 근거로 해서 점령한다는 것은 ‘전함 외교’이고, 반면 돈으로 해결하려는 전략이 ‘달러 외교’이다. ‘말’과 ‘주먹’의 차이만 있을 뿐 몸통은 ‘제국주의’이다. 두 가지 양상은 시기마다 적절하고 융통성 있게 적용되어 왔다. 이것이 미국 외교사의 본질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강온의 문제로 파악하고 미국의 국방부와 국무부의 대결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것은 큰 오류이다. 몸통은 ‘제국’이며 양팔이 ‘전함’과 ‘달러’라면, 이것은 모두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 다른 나라의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파월이 외교 행보를 했지만, 그 내용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 세계 여론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었지 전쟁을 막기 위한 조처는 아니었다.

우 리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말로 조이고 정책으로 조여 모든 저항의 수단을 점점 소멸시키고 난 다음 치는 방식으로 다가 오고 있다. 말보다 행동을 주의 깊게 봐야 한다. 북경회담이후 여러 가지 반응이 나왔지만, 실제 미국이 택한 행동은 북한을 테러리스트 국가 명단에 올리고, UN에 인권문제를 상정하는 것이었다. UN에 인권문제를 상정하는 것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것은 미국의 전략 가운데 이른바 ‘인도주의적 개입’(humanitarian intervention)을 뜻한다. 이는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클린턴 시절 코소보에서 거쳤던 경로이다. 인권문제에 중국과 북한이 저항하는 것은 미국의 이런 숨은 의도 때문이다.

우리는 식민지를 벗어났는가

미 국은 지난 백 년 동안 정복·점령 정책을 변화시킨 적이 없다. 19세기말부터 지금까지 제국주의 국가로 계속 성장해왔지 후퇴한 적이 없다. 미소를 짓지만 선의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미국은 다양한 방식을 쓰고 있으며, 모든 방식은 여기에 봉사하고 있다. 공화당과 민주당간에 차이가 있는 듯하지만, 여기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이 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보자. 그 핵심은 종족 분쟁도, 종교 분쟁도 아닌 점령지 문제가 핵심이다. 이스라엘의 점령정책과 점령구조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다. 이라크 문제도 미국의 점령문제이다. 한반도 문제는 무엇인가? 점령의 양상과 강도만 다를 뿐이지 한반도 전체에 대한 미국 점령정책의 소산이다. 그리고 점령정책에 동화되고 포섭되고 있는 모습이 우리 외교의 종속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함께 힘을 모아서 극복해 나가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피점령 지역에 사는 백성으로 남을 것이다.

노엄 촘스키와 함께 미국의 대외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이슬람 출신 지식인인 이크발은 ‘진보적 지식인조차도 후기 식민지 시대를 얘기한다. 하지만 제3세계 어디에서도 탈식민지화의 과정을 거쳐본 적이 없다’고 얘기했다. 탈식민지화를 거친 이후에 후기 식민지(post colonialism)을 얘기할 수 있는데, 사실 어느 나라도 탈식민지화를 경험한 적이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우리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식민주의의 양상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인식의 정도가 다르고 관철되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식민주의의 본질에서는 변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주권 역량으로 대통령을 뽑았지만, 대통령 스스로 식민지 총독처럼 행동하는 현실은 사실 이런 역사적 관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국제적 반전평화운동의 중요성

미 국 제국주의의 발전 경로를 볼 때 미국의 지배 영역은 점차 확대되어 왔다. ‘냉전’은 미국의 세계 지배가 일정하게 견제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영향권’(influential sphere)이라는 말이 외교사에 등장한다. 냉전기에는 영향권을 분할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세계지배가 일정한 한계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이 끝난 후에는 미국의 세계지배가 전면화 되었다. 지금 미국은 지구적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한편에서는 지구적 제국으로서의 형성과정이 진행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여기에 저항하는 힘 또한 그에 못지않게 놀랍게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힘은 오늘날 이라크의 현실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지금 문제는 전쟁이 완료된 이후의 사태가 그리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카불을 제외한 전지역을 장악하는 일이 어렵다. 뿐만 아니라 중동 전체에 걸쳐 미국의 행동방식에 대해서 분노가 점증하고 있다.

유럽도 미국의 전쟁에 반대했다. 이것은 미국과 유럽의 서구 제국주의 헤게모니 쟁탈전이라는 의미도 갖지만, 한편으로 유럽에서 미국의 독선적인 행태에 반발하는 유럽인들이 있음도 의미한다. 유럽의 지식인들, 반전평화를 외치는 유럽 시민들이 국가의 이익과는 별도로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반발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국의 파시즘적 선택이 단기적으로는 제국의 위기를 극복하는 형태로 문제를 마무리 짓고 제국의 위상을 강화하는 형태로 공포의 제국을 세계 인류에게 인식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는 움직임이 존재하며 지금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운동진영의 국제연대의 역사적 경로와 비교해 볼 때, 전세계적 반전평화운동이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지탱하고 움직이는 굉장히 중요한 역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운동과 만나서 우리의 역량을 결합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지금 당장은 어려울지 모르나, 이 운동과의 결합은 민족의 진로뿐만 아니라 세계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열정을 갖고 나아가자

유럽은 반세계운동도 하고 반전평화운동도 한다. 이 운동은 지식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운동의 성격이 강하다. 절박한 문제로 제기된 운동이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비극을 보면서 자기 비판과 자기 성찰의 결과로 일어난 운동인 것이다. 반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반전평화운동이 드물다. 대신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반세계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세 개의 운동이 모두 일어나고 있다. 반세계화 운동과 반전평화 운동, 그리고 민족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운동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민족적 독자성도 갖고 있지만, 세계 인류의 가치도 함께 고민하고 있다. 한반도의 운동은 자본 주도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 제국주의 세력의 파시즘적 선택에 의한 군사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운동, 민족 연대 운동이라는 세 가지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 이것은 인류의 생명과 평화, 존엄성을 지키려는 운동이기도 하다.

이것을 이 땅에서 이루어 낼 수 있는가가 대단히 중요하다. 앞으로 이 문제를 끌어안고서 이론적, 조직적으로 사회적 시야를 갖고 국제 연대의 측면에서 함께 생각하고 힘을 모아가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축적된다면 한반도는 식민지적 상황에서 포박당하고, 위협에 떨고, 굴종의 현실을 이어가는 그런 땅이 아니라, 제국의 해체 고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세계 인류 차원에서 중요한 진전이 될 것이고, 제국의 고리가 허물어지면 해체가 빠르게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운동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으면서 오늘의 현실을 보고 결코 꺾이지 않는 의지와 열정을 갖고 함께 마음을 모아서 서로 뜨거워지는 것이 중요하다. 열정이 식으면 알면서도 하지 못한다. 뜨거우면 알지 못하더라도 한다. 뜨거우면 모이고, 만나고, 격려하고, 연구하고, 뜻을 다지게 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