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가 자살하는 사회

노동사회

노동자가 자살하는 사회

admin 0 2,810 2013.05.11 10:18

2003년 10월17일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김주익 지회장이 노조탄압에 항의하여 자살하였다. 공교롭게도 노동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 자살한 전태일의 33주기와 거의 일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한국 노동자들의 현실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만든다. 
청년 전태일은 1970년 11월13일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착취에 시달리는 어린 여공들의 권리를 위해서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붓고 산화하였다. 

30년 동안 변하지 않은 노동의 일상

2003년 현재 노동조합 운동은 활성화되어 민주노총이 합법화 되었고, 한국노총도 독립성을 지닌 조직으로 변하였다. 1970년과 비교하면 오늘날 노동계는 너무나 달라졌다. 조직력과 동원력을 갖춘 노동단체들이 만들어지면서 노동자들의 권익도 많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김주익 지회장 자살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노동의 일상은 크게 변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공권력을 동원하여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압살했던 과거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으나, 경영계의 새로운 대응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예전과 같은 압박과 질곡을 느끼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손해배상과 가압류를 이용하여 노동자들의 손발을 묶는 기업의 대응은 과거와는 달라진 것이지만, 오히려 더 노동자들을 속박하고 인생 전체를 파멸로 몰아가는 수단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노동력을 판매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힘든 점은 바로 부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손해배상과 가압류는 노동자들에게 재산이 없다는 약점을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경영의 전략이다. 

한국의 노사관계에서 가장 취약한 점은 노사가 대등한 상태에서 합의를 통하여 서로 상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박정희 정권의 개발 시대에 형성된 노동조합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이 민주화 이후에도 경영진에게 그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활동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한 경영진의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노동자들의 분신자살, 그리고 분신자살 사건을 계기로 형성되는 노사관계 개혁 담론은 항상 비슷한 양상을 보이면서 반복되고 있다.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소모적인 노사관계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어디에

노사관계 혁신에 관한 논의가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노동자 대투쟁 이후 정권마다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논의는 이해 당사자인 노동계와 경영계의 이견 대립으로 언제나 표류하다 흐지부지 되었다. 그리고는 노동자들의 분신자살이 매번 뒤를 잇곤 했다. 언제나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인가?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서 합의를 이루어냈을 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합의를 이루어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할 궁극적인 주체는 정부이다. 정권을 담당한 주체의 비전과 의지를 통하여 정부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시키는 작업을 해야 한다.

21세기 선진 노사관계를 구축하기 위하여 버려야 할 낡은 반노조주의를 극복하고, 노동자들의 구조적인 약점을 이용하여 손발을 묶는 비열한 행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정부의 대책이 필요하다.

정부의 대책은 노사가 대등한 교섭의 주체로 활동할 수 있도록 제반 조건을 만드는 데 방향이 맞추어져야 한다. 

손해배상과 가압류 같은 노동자 가족 전체를 볼모로 삼는 것을 그대로 둘 경우, 노동자들의 권리는 유명무실하게 된다. 노동력을 제공하고 반대급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돈 없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 활동으로 인한 손해를 노동조합과 노동조합 위원장에게 책임 지우는 것은 노동조합 운동 자체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노동3권을 인정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노조활동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 제도가 민주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는가? 

손해배상·가압류 없어져야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도 외형적으로 노동법이 존재하여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업주들이 노동법을 지키지 않았고, 국가가 이를 묵인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절규가 전태일의 분신으로 나타났다. 

외형적으로 노조활동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국가라는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노동조합의 활동을 옥죄는 법률과 관행이 온존하는 상황에서는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의 자살 사건이 또 일어날 수도 있다. 올해 초에 자살한 두산중공업 조합원 배달호의 교훈을 정부는 벌써 잊었단 말인가. 

손해배상과 가압류라는 덫에 걸린 노동자들은 기존의 제도에서 벗어날 길을 찾을 수 없다. 죽음으로 내모는 덫을 그대로 둔 채 노사간의 권력 균형과 노사간의 타협을 논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노동자들 뒤에 덫을 쳐놓고 노사간의 상생을 논의하는 것은 기만이다. 

더 이상 손해배상과 가압류 문제로 노동자가 자살하는 사회가 되지 말아야 한다. 자살로 내모는 사회가 아니었으면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노사문화를 만들려는 근본적인 문제인식에 기반을 둔 정부 차원의 해결책이 필요하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