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종속국에서의 노동운동 발전

노동사회

식민지·종속국에서의 노동운동 발전

admin 0 7,322 2013.05.11 10:18

파리 코뮌 이후인 1871년부터 러시아에서 1차 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904년에 걸친 전 기간을 통하여 식민지·종속국에서 전개된 노동자운동의 수준과 규모는 매우 다양했습니다.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종속국의 노동운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전개된 노동운동에 비해 조직성이나 투쟁성, 그리고 계급의식의 수준, 나아가 정치, 경제, 사회적 착취와 억압에 대한 저항의 형태에서 현저하게 뒤떨어져 있었음은 분명합니다. 이런 후진성은 경제·사회적 발전수준이 낮았음을 반영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이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들을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로 편입하면서 착취와 억압을 강화한 결과이기도 했어요.

하 지만, 제국주의 지배를 받게 된 식민지·종속국들에서도 노동자계급 운동은 자기발전의 길을 개척하게 됩니다. 이들 나라의 노동자계급은 자국의 생산력 발전에 따른 일반적 형태의 자본주의 전개가 아니라, 제국주의 본국의 필요에 따른 왜곡되고 파행적인 자본주의 추진과정에서 성장했으며, 이런 제약 밑에서 노동자계급 운동도 발전하게 됩니다. 당시까지 높은 수준의 발전을 쌓은 선진 공업국가들의 노동운동 경험과 역사가 큰 영향을 주게 되었고, 또 민족해방운동이 강화됨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조직화와 투쟁이 촉진되었습니다.

gskim_01_2.jpg1. 라틴아메리카의 노동운동 발전

19 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카리브 해역에 위치한 나라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치적 독립을 이룩했고, 비슷한 시기에 산업혁명을 겪게 됩니다. 한편, 19세기 말부터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에 대해 외국투자가 급증하게 되었는데, 20세기 초에는 특히 북미 자본의 진출이 늘어났습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외국자본의 침투는 순수한 경제적 과정만은 아니었어요. 이 과정은 제국주의 열강이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에 도발한 전쟁,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항만 봉쇄와 폭격,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에 걸림돌이 되는 정부 전복 같은 모략을 수반했습니다. 외국 독점자본의 침입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경제를 크게 왜곡시켰고, 공업발전을 늦추었으며, 후진성을 더한층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가들 사이의 불균등 발전을 촉진했어요.

이런 정치 경제적 구조는 노동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1870년대 초까지 노동자계급은 낮은 수준의 투쟁 경험을 갖고 있었어요. 국가에 따라서는 (소수의 조합원이기는 하지만)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있었던 경우도 있었지만, 노동자 계급의 자립적인 정치조직은 어느 나라에도 존재하지 않았죠. 라틴아메리카의 노동조합운동은 20세기 직전에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조합은 일반적으로 직인, 농업노동자, 광부, 운수노동자, 섬유노동자, 철도노동자 등을 포용했어요. 1차 세계대전 이전에 라틴아메리카 노동자들은 각국에서 전국중앙조직(national center)을 만드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페루(1884년), 아르헨티나(1890년), 쿠바(1890년), 칠레(1909년), 멕시코(1912년) 등의 경우가 그러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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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0년 신식무기로 무장한 아르헨티나 군대 ]

아르헨티나

19 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풍부한 경험을 축적한 노동운동은 아르헨티나의 노동운동이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870년대 초에 인쇄공, 목공, 목수 건설노동자의 노동조합과 상호부조조합이 결성되었고, 제1인터내셔널 지부도 설치되었죠. 1872∼1876년에 걸친 경제공황으로 노동운동이 후퇴하고 인터내셔널 지부도 해체되었지만, 187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는 노동운동이 고양되었어요. 1878년에는 인쇄공들이 파업을 일으켰고, 1887년에는 제화공들이 총파업을 단행했는가 하면, 1888년에는 철도노동자의 파업이 있기도 했어요. 이러한 투쟁과정에서 노동자의 임금인상을 비롯한 경제적 요구들이 관철되었고, 여러 부문에 걸쳐 노동자조직이 결성되었죠.

1890년에는 메이데이 기념식을 치르기 위한 조직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위원회는 ① 메이데이의 개최, ② 아르헨티나 노동자연맹의 결성, ③ 노동자 옹호를 위한 신문의 발간, ④ 노동자를 위한 법률 채택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하원에 제출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청원서에는 8시간 노동일제, 여성의 노동조건 개선, 14세미만 연소자의 고용금지, 14∼16세 미성년자의 6시간 노동제 실시와 야간작업 금지, 일요일 휴일제 실시,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공장감독관제도 확립, 산재보험 실시, 식품위조 방지를 위한 법률 채택 요구가 담겨 있었죠. 이 청원서에는 2만 명이 서명했고, 1890년 메이데이 집회에는 3천명의 노동자가 참가했어요.
한편, 아르헨티나의 노동운동은 1896년에 창립된 아르헨티나 사회노동당과 밀접한 연대관계를 맺게 됩니다. 사회노동당은 1900년에 당명을 아르헨티나 사회당으로 바꾸는 한편, 노동자와 농민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1890년대에 선거에 적극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사회당이 1896년과 1900년에 시도한 노동조합연합 조직은 성공하지 못했으나, 1901년에 아르헨티나 노동자연맹이 결성됩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지도한 이 조직은 투쟁 방법으로서 보이콧과 사보타지밖에 인정하지 않았죠. 아르헨티나 사회당은 노동자의 계급적 자각, 노동자의 조직화, 국제 연대 강화에 기여하였으나, 당 지도부의 개량주의 경향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발전시키는 데 일정한 한계를 보인 것으로 평가됩니다.

gskim_03_3.jpg브라질

브 라질 노동운동은 노예제의 존속과 군주제의 질곡에 부딪혀 발전을 저지 당했어요. 이런 조건에서도 노동자와 수공업자는 조합이나 상호부조단체를 조직했죠. 1880년대 들어 파업투쟁이 일어났고, 1890년에는 철도노동자 파업이 근속연금을 쟁취하는 성과를 낳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브라질 노동운동은 노예제 폐지와 군주제 철폐를 목표로 전개되었고, 이 투쟁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참가하였죠. 투쟁의 결과로서 1889년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 수립이 선언되었는데, 이것은 19세기 말에 있었던 세계사 중요 사건의 하나로 평가됩니다. 한편, 1892년에는 각주의 대표자가 참가한 가운데 사회주의자 대회가 열렸고, 1902년에는 제2회 사회주의자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에는 노동자 조직의 대표자도 참가했습니다. 대회는 민주주의 실현을 비롯하여 노동자의 요구 해결을 위한 행동강령을 채택했어요. 주요 내용은 파업권의 승인, 노동시간의 법적 제한, 산업안전·보건을 위한 법률 제정, 노동자상태의 개선을 위한 노동회의소·직업조합·저항동맹의 결성 등이었죠.

1903년에는 노동자연맹, 노동조합, 저항동맹 등이 조직한 경제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대중 파업이 일어났어요. 브라질 노동자계급 최대 투쟁의 하나는 1903년 8월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한 리오데자네이로 방적공들의 총파업 투쟁이었죠. 방적공노조연맹이 주도한 이 파업은 20여일 간 계속되었고, 노동자 4만 명이 참가했어요. 그러나 정부의 혹심한 탄압과 연맹지도부의 결단력 부족으로 노동자들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이 밖에도 1903∼1904년에는 인쇄공과 제화공 등이 일으킨 파업이 각지에서 일어났어요.

노동운동의 고양과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은 지배체제의 불안을 가중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노동자 조직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을 시행했는데, 파업 진압을 목적으로 군대가 투입되었고, 노동자집회에 발포가 행해지기도 했어요. 파업 지도자는 변방으로 추방되어 고무공장의 노예가 되기도 했습니다.

멕시코

gskim_04_2.jpg멕 시코에서는 수공업자와 노동자가 적극적으로 참가해 추진한 1860년대의 개혁운동이 성공을 거둠으로써 노동자들은 조직화의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그러나 내전과 영국, 프랑스, 스페인의 군사개입으로 노동운동이 민주화운동으로부터 분화하여 독자적인 위치를 확립하는 일이 늦추어지게 되었죠. 한편, 멕시코 정부는 노동운동에 대해 탄압과 온정주의 정책을 병행하면서 노동운동을 억제함과 동시에 노동운동을 정부 통제 하에 두고자 했어요.

1872년 9월에는 노동자 서클이 결성되었고, 1876년에는 처음으로 노동자대회가 열렸습니다. 대회에서 채택된 선언은 노동자의 당면 요구인 최저임금제 실시, 파업권 승인, 교육 받을 권리 보장, 여성노동자의 노동·생활조건 개선 등이 포함되었어요. 1870년대 전반에 노동자계급은 통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파업을 감행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멕시코 노동운동은 무정부주의와 아나코 생디칼리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됩니다. 1870년대에는 매우 강력했던 사회주의 운동노선이 위기에 빠지게 되고, 노동운동의 헤게모니는 무정부주의자 쪽이 쥐게 되었습니다.

칠레

칠 레에서는 1870년대부터 노동자의 상호부조 조직이 증가했고, 1884년부터 1888년까지 약 70건의 파업이 발생했습니다. 1890년에는 최초의 전국적 파업이 일어났는데, 이 파업은 임금인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것이었고,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진행되었어요. 정부 당국은 노동자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고, 군대의 공격으로 발파라이소에서는 50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부상당했으며, 산티아고에서는 1,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습니다. 1891∼1900년에 걸쳐 노동쟁의가 300건 이상을 기록했는데, 그 가운데 많은 노동쟁의는 군대에게 진압당했죠.

한편, 1887년에는 수공업자와 노동자 조직을 토대로 민주당이 창립되었습니다. 이 당은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노선에서는 소부르주아 당이었지만, 사회적 기반에서는 프롤레타리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어요. 1889년 채택된 당 강령은 사회경제적 해방이 정치적 해방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명시했습니다. 1890년대에 들어서는 사회당을 창설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1902년에는 노동자대회가 열렸는가 하면, 1904년에는 산티아고에서 칠레노동조합회의가 결성되었어요. 그러나 칠레 노동운동 안에서 아나키즘과 무정부 생디칼리즘이 큰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노동자 정당의 결성은 오히려 제약 당했습니다.

쿠바

쿠바 노동운동은 민주주의운동과 민족해방운동으로부터 분화되는 과정이 천천히 이뤄졌습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쿠바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19세기말까지 식민지 상태였으며, 독립한 뒤에도 사실상 미국의 보호국으로 있었기 때문이죠. 더욱이 1880년대 말까지 노예제도가 존속했던 점도 노동운동의 발전을 가로막은 요인이었습니다.

1887년에 제1회 노동자대회가 열렸는데, 이 대회는 쿠바 노동자계급의 높은 정치적 성숙을 보여주었지만, 이 대회의 결의들은 무정부주의 노선으로 일관했습니다. 그 이듬해 무정부주의자들의 주도로 노동자연합이 결성되었고, 같은 해 노동자연맹이 결성되었는데 이 연맹은 노사협조주의를 표방했습니다. 1892년 열린 제2회 노동자대회에는 대표자가 1천명 이상 참가해 강령을 채택했는데, 8시간 노동일의 시행, 인종차별 반대, 여성과 미성년자의 노동보호, 노동자의 단결권 존중 등이 주요 내용이었어요. 또 이 대회에서는 정치적 결의가 채택되었는데, “노동자계급이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하지 않는 한 해방을 쟁취할 수는 없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 대회는 노동자계급이 독립을 위한 해방투쟁에 참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성명도 발표했어요.

쿠바에서 스페인의 지배를 종식시킨 1895∼1898년의 전쟁은 본질적으로는 민족해방혁명이었습니다. 혁명의 대중적 기반을 이루었던 것은 농민, 노동자, 수공업자, 도시 소부르주아계급이었어요. 이 혁명에 노동자들이 참가하기는 했지만, 노동자계급의 사상적·조직적 취약성은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1898년 쿠바가 미국 군대에 의해 점령된 후, 노동자계급은 점령군에 반대하는 파업투쟁을 전개했습니다. 1899년 9월 쿠바 노동자는 8시간 노동일의 실시를 요구하여 총파업을 일으켰고, 1900년에는 담배노동자가, 1902년에는 하바나 지방의 도제와 직인이 파업을 일으켰습니다. 미국 정부는 파업 저지를 위해 군대를 투입하는 한편, 공공기업에서 노동시간을 9∼10시간으로 단축시켰어요.

이런 가운데 1899년 사회주의자 그룹이 자립적인 노동자정당을 창설하고자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1900년에 인민당(1901년에 노동인민당으로 개칭)이 출현했습니다. 미국 점령군이 퇴각한 뒤인 1903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그룹이 형성되었고, 이어 1904년에는 사회노동당이 창립했으며, 이 당은 제2인터내셔널과 결합했습니다.

2. 아시아에서의 노동운동의 발전

1875 년 이전까지 아시아는 봉건적 관계 또는 전(前)봉건적 관계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아시아에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 체제를 확립한 제국주의 열강은 이 대륙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시켰습니다. 이와 동시에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후진성을 존속시키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죠. 식민주의자들은 피억압적인 국가의 토양에 자본주의적 생산을 이식하면서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발전 가능성을 차단했습니다. 아시아 국가들에서 전개된 노동운동은 민족해방투쟁의 고양과 더불어 발전되기 시작했어요. 노동운동은 민족해방투쟁의 중요한 구성부분이었으며, 반제투쟁의 고양기에는 활발한 발전 국면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자본과 노동 사이의 사회적 충돌은 벌금이나 처벌에 대한 항의, 관리자 또는 경영주의 횡포와 전횡에 대한 항의로서 나타났습니다. 자본가에 대한 투쟁 형태의 하나는 청원서의 제출이었어요. 이러한 투쟁 형태는 인도나 터키 등을 중심으로 보급되었습니다. 이러한 투쟁의 청원수단이 아무런 효과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노동자들은 파업투쟁 쪽으로 점차 투쟁형태를 전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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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제국주의에 대항한 필리핀 인민들의 항쟁을 묘사한 그림 ]

인도

인 도에서는 1870년대에 강력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국가통치에 참가하고자 했던 민족 부르주아지는 처음에는 지방별로 결합했으나, 1885년에는 전국 정당이라 할 수 있는 인도국민회의를 창립했습니다. 창립 이후 국민회의는 민족해방운동을 일시적으로 지도했지만, 1885년 이후 식민지 지배 반대투쟁의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면서 ‘스와데쉬’(swadesh)운동이 광범하게 전개되었죠. 이 운동은 외국 상품 구매에 반대하고 인도의 공업생산을 지지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죠.

인도에서는 1870년대 말부터 파업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최초로 투쟁에 나선 것은 봄베이 지역의 방적노동자들이었죠. 철도노동자, 항만노동자, 국영기업의 종업원들도 뒤를 이어 파업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투쟁들은 소수 노동자들의 경제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분열적이고 비조직적인 투쟁을 특징으로 했습니다. 1880년대 들어 노동과 자본의 투쟁은 더욱 확대됩니다.

중국

중 국에서는 1870년대 이후 외국 억압자에 대한 농민과 도시 평민층의 투쟁이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1850∼1854년에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은 영국 군대의 혹심한 탄압을 받았는데, 태평천국의 난 자체가 강한 반제국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었어요.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의 반란도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미국 등 연합군의 힘으로 진압됩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한 후 민족 부르주아지의 활동이 커지게 됩니다. 손문이 주도한 민족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민주주의 진영은 1894년에 비밀결사 ‘흥중회’(興中會)를 만들어 청왕조 타도와 공화국 수립을 추진했습니다. 한편, 민중세력은 1899∼1900년에 강력한 반제국주의 인민봉기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1880년대 들어서는 노동자계급의 투쟁도 본격화됩니다. 초기에는 민족 부르주아지의 지도를 받았던 노동자계급은 식민지 국가들에서 일어난 민족해방투쟁과 궤를 같이 하면서 사회주의 그룹의 지도를 받으면서 노동조합과 정당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1880∼1895년 사이에 쟝난(江南)공작창, 한양(漢陽)제철창, 카이핑(開平)탄광 등의 최대 관영공장과 영국인 소유의 2개의 조선소와 조선 수리소에서 9건의 파업이 있었습니다. 1890년대에도 경제파업 건수는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파업의 원인은 임금인상 요구와 임금인하 반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말고도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연장과 노동조건 악화 반대, 경영주나 관리자의 횡포 시정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파업투쟁은 주로 반제국주의적인 인민봉기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파업투쟁의 주요한 근원지는 상하이를 비롯한 항만도시였고, 시츠안 또는 동북지방의 여러 성에서도 파업이 발생했습니다.

gskim_06_1.jpg필리핀

필 리핀에서는 1896∼1898년에 스페인 식민주의에 반대하여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기치를 내건 민족해방투쟁이 일어납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성격의 비밀조직 카치푸난(Catipunan)이 주도하여 무장봉기를 일으켰는데, 이 조직은 그 뒤 농민, 도시빈민, 소부르주아, 평민 출신 지식인들의 대중적 혁명단체로 바뀌었습니다. 이들은 민주 헌법과 농민을 위한 토지문제 해결 등을 실천할 독립공화국을 요구했어요. 봉기는 오래 지속하지 못했습니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식민지 지배자가 들이닥쳤고, 이에 대항한 1898∼1901년의 필리핀 혁명전쟁은 민족해방투쟁의 계승이었죠.

이런 정치 상황 속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파업이 1898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초에는 파업투쟁이 확대되었습니다. 필리핀 노동자계급 투쟁의 특징은 파업투쟁이 전개되기 이전에 노동자조직이 형성되었다는 점입니다. 아시아지역에서 비교적 빨리 노동운동이 조직된 것은 스페인의 영향 때문으로 보입니다.

3. 아프리카에서의 노동운동의 발전

gskim_07_0.jpg19 세기 말 대부분의 아프리카 나라들은 자본주의 체제 이전의 발전 단계에 있었습니다. 아프리카가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 편입됨으로써 새로운 사회세력들이 발전하게 되었고, 노동자계급의 형성이 진행되었습니다. 식민지 지배 아래서 발전하기 시작한 공업은 외국자본의 수중에 완전히 장악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만 노동자계급이 비교적 강력하게 형성되었고, 리비아, 알제리, 모로코 등 마그레브 지역(Maghreb, 아프리카 북서부)에 속한 예속국가들과 남아프리카의 주요 부분에 종사한 노동자들은 주로 유럽으로부터 온 이민자들이었습니다. 현지에서도 노동자계급이 형성되고 있었으나 아직 영세한 상품생산자, 즉 농민과 수공업자로부터 분화되지 않고 있었죠.

이런 상황을 반영하여 아프리카 노동자들의 초기 투쟁은 자연발생적이고 우발적인 형태를 취했고, 그것도 많은 경우 전통적 족장들이 주도한 반(反)식민지 민중운동의 한줄기로 진행되었습니다. 더욱이 열대 아프리카에서는 노동자계급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여기서는 식민주의자들이 경제외적 강제로 임노동자 집단의 창출을 위한 조건을 만드는 과정에 있었죠.

이집트와 마그레브 지역

19 세기 말 북아프리카 국가들이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 편입되면서 이들 국가는 제국주의 열강을 위한 농산물과 원료공급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아프리카지역에 대한 자본주의의 침입은 그 지역에서 노동자계급의 형성을 위한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북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외국자본의 침입이 확대됨에 따라 먼저 광산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뒤이어 철도, 수리(修理), 기타 작업장과 전기, 공익기업 등이 출현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토착 노동자들의 수도 증가했으나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 미숙련 노동자들이었어요. 일정한 기능을 지닌 수공업자가 기능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그와 같은 작업에는 대체로 본국에서 온 숙련 노동자가 배치되었죠.

마그레브 지역, 즉 아프리카 북서 지역 국가들에서 노동운동의 단서를 연 것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에서 온 이민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토착 노동자들을 배제한 채 그들만의 독자적인 행동을 취했지만, 노동운동의 초기단계(1870년대)에서부터 토착노동자의 몇몇 그룹과 합류한 경우도 있었죠. 이런 현상이 가장 분명한 형태로 나타난 것은 1870∼1871년의 알제리 사건이었습니다. 프랑스 본국에서 제정(帝政)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선포된 후, 1890년 9월에 알제리공화협회(혁명적 노동자와 쁘띠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의 정치적 연합체)가 창설되었습니다. 거기에는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 각국에서 온 노동자와 아랍인 노동자도 참가했어요. 협회는 모든 도시에 지부를 설치하고 자치체(코뮌)를 만들었어요. 1870년 10월 이민 노동자는 알제리의 도시빈민과 더불어 봉기하였으나, 쁘띠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배반으로 패배합니다.

북아 프리카 나라들에서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1890년대였습니다. 당시 이런 조직은 극소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죠. 튀니지에서는 1894년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1900년에 최초의 파업이 일어났지만, 여기에 참가한 것은 유럽인 노동자들뿐이었어요.

한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민노동자와 토착노동자 사이의 거리를 극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1899년 이집트에서는 유럽인 노동자와 아랍인 노동자가 공동으로 파업을 벌여, 임금인상과 노동일 단축에 관한 요구를 관철시켰습니다. 파업 과정에서 유럽인 노동자와 아랍인 노동자가 함께 참가한 담배노동자연합조합이 결성되었습니다. 그 뒤로 몇 년 동안에 민족과 인종을 달리하는 노동자계급 사이에 연대감이 고양되었고, 특히 1903년에는 많은 기업의 노동자들이 동시에 파업을 결행하기도 했습니다. 튀니지에서도 1904년에 회교도 노동자들이 프랑스인 노동자가 주최한 메이데이 집회에 처음으로 참가하기도 했죠.

gskim_08_0.jpg남아프리카

1870 년대 초 남아프리카에는 보어 공화국(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과 더불어 영국령 식민지 케이프와 나탈이 존재했고, 바수톨란드는 영국의 보호령이었습니다. 남아프리카에 대한 영국의 지배 확립은 보어전쟁에서 완료되었어요. 영국인 정복자는 보어인들이 활용했던 전(前)자본주의적 착취 형태(노예제와 농노제)를 그들이 이식하고자 한 자본주의적 생산에 결합시키고자 했습니다. 임금노동자들이 극히 한정된 규모이긴 했지만, 이미 1870년대부터 유럽인이 경영했던 농장, 항만, 철도 건설에 고용되었죠.

남아프리카의 자본주의 발전에 강력한 충격을 준 것은 1870∼1880년대에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광산과 금광 산지가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따라 유럽으로부터 주로 앵글로색슨계 노동자와 수공업자의 이민이 대량으로 이뤄집니다.

아 프리카 남부에서 요하네스버그나 킴벌리 등 도시가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고, 철도가 부설되었으며, 광산 원료의 채굴이 확대되었고, 농업이 급속히 발전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경제적 변화는 노동력 수요를 증대시켰고, 이런 수요를 이민 노동자만으로 충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죠. 이 때문에 식민지 권력은 노동력 창출을 적극 추진했어요. 그리하여 남아프리카에서 토착 주민의 프롤레타리아화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훨씬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노동자계급은 다양한 인종과 민족으로 이뤄지게 됩니다.

초 창기에 노동자계급은 혹심한 착취를 당했습니다. 강제 노동, 극도의 저임금, 열악한 생활조건은 비(非)백인노동자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어요. 이들이 일으킨 최초의 파업은 1882년 킴벌리에 위치한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는데, 이것은 기업의 임금 인하에 항의하여 이틀 동안 약 1백 명이 참가한 파업이었죠.

남아프리카 노동운동은 케이프타운에서 목공노조가 결성된 1887년부터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노조가 대중적 성격을 띠게 된 것은 20세기 초 십 년 간입니다. 영국이 1899∼1902년 보어인의 저항을 격파하고 이곳의 풍부한 금과 다이아몬드 광산을 탈취했기 때문이죠. 1895년에는 더반 항의 아프리카인 2백 명이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파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백인 노동자들의 투쟁도 경제적 성격을 띠고 일어났죠. 1889년 요하네스버그의 기계공장 노동자들이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면서 2주간에 걸친 파업을 일으켜 성공을 거두었어요. 특히 인쇄노동자들의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그들이 주도한 파업은 1897년(케이프타운), 1898년(프리토리아), 1902년(요하네스버그), 1903년(프리토리아, 마리츠버그)에 일어났습니다.

중국인 노동자들도 견디기 어려운 노동조건에 항의하였습니다. 20세기 초에 란드폰테인 탄광에서 중국인 노동자의 파업이 있었고, 집단 도주 사건도 일어납니다. 식민지 당국이 ‘반란자’에 대한 징벌을 단행하자 영국의 급진파는 항의운동을 전개했고, 그 결과 영국 정부는 앞으로 재판소의 판결에 의해서만 중국인 노동자를 처벌한다고 밝혔습니다.

노동자들의 저항 행동과 더불어 노동조합이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1880년대 초에 백인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했고, 이런 노동조합들은 주로 케이프 식민지와 나탈에서 결성되었습니다. 1881년에는 케이프타운에서, 그리고 1882년에는 더반에서 목수와 목공연합조합이 결성되었고, 1888년에는 더반에서 인쇄노동자의 조합이 결성되었습니다. 1892년에는 트란스발에서 광산노동자기계공조합이 결성되었고, 1902년에는 우편전신협회가 결성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에서 백인 노동자들이 주도한 노동운동은 유색인 노동자들을 경계하는 경향이 짙었습니다. 남아프리카 노동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민족적 인종적 갈등은 식민주의자들이 활용하기 쉬운 통제 수단이 되기도 했죠.

그 럼에도 불구하고 백인 노동자 운동은 아프리카 노동운동의 발전에서 긍정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02년에는 최초의 사회주의 조직인 사회민주연맹이 케이프타운에서 영국 지부의 형태로 설립되었어요. 이 연맹은 노동조합과 연대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후에는 유색인 노동자들 속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열대 아프리카

gskim_09_1.jpg유 럽 자본주의 국가들이 열대 아프리카 지역을 정복하여, 이 지역의 천연자원과 인적 자원을 강제로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복자들은 이 지역을 원료 공급지와 판매시장으로 만들었고, 이 지역의 사회경제적 발전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에 따라 토착민은 강제 노역(도로건설, 항구건설, 화물의 운반, 채벌 등)에 징발되었습니다. 아무런 보상이 없는 노동력 징발은 아프리카인 추장이나 장로들의 협력을 받은 무장 징용대가 주로 수행했어요.

우간다에서는 토지 소유자와 사용자를 제외한 모든 아프리카인에게 연간 1개월씩 유럽인들을 위해 일해야 할 의무가 부여되었고,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는 4개월마다 1개월씩, 포르투갈령 앙골라에서는 1899년 법령에 의해 아프리카인은 1년에 6개월 이내로 포르투갈인 식민지주의자를 위해 일할 의무가 주어졌습니다. 열대 아프리카에서는 식민지 제도가 철폐될 때까지 이런 부불(不拂) 노역이 존속했습니다. 식민지주의자들은 현지의 값싼 식량과 무상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당시까지 족장이 농민들에게 부과하였던 현물 부과와 노역 의무의 전통적 제도를 유감 없이 활용했습니다. 이 같은 성격의 이권은 20세기 초 열대 아프리카에서 진행되었던 농민에 대한 토지 수탈의 전제 조건이었죠. 농민들은 토지로부터 대량으로 내몰렸고, 1904년 케냐에서는 아프리카 최초의 토착민 강제거주지가 만들어졌습니다. 그 후 토착민 강제거주지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에도 널리 확대되었죠.

한편, 유럽 자본으로서는 아프리카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노동력을 유입할 필요가 있었어요. 원주민의 강제 동원과 그들의 토지소유권 탈취만으로는 노동력 확보가 보장되지 않았어요. 이 같은 필요에 따라 식민지주의자들은 현물 부과 대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고, 아프리카 농민들은 납세에 필요한 현금을 입수하기 위해 유럽인들의 회사에서 노동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당시의 임금노동은 실제로는 노예노동과 다름없었어요. 노동자 모집 자체가 강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어요. 또 식민지주의자는 계약노동 자체를 잔혹하게 착취하였고 극도의 저임금을 지불했죠.

gskim_10.jpg이 처럼 임금 노동자 층이 미처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고, 노동자들의 의식 수준이 매우 낮은 편이어서 식민지적 착취에 대한 항의 투쟁도 그다지 강력하게 전개되지 못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저항은 자연발생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고, 소극적 저항형태, 즉 강제징집 기피, 작물재배 거부, 납세회피를 위한 집단 이주, 식민주의자 기업으로부터 탈주 등의 모습을 띠었습니다.

1900 년 10월부터 1901년 3월까지 남로디지아의 광산에서 계약노동자의 25%가 탈주했습니다. 1904년∼1905년에는 벨기에령 콩고에서 노예제와 강제노동에 항의하는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1902년 앙골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투쟁이 발발했죠. 이런 자연발생적인 투쟁의 특징은 징모소(徵募所)와 기계 파괴, 감시인이나 기업주의 살해 등으로 나타났어요. 이런 투쟁의 결과, 정복자의 양보가 이뤄지기도 했죠. 토지세와 가옥세가 일시 철회되기도 했습니다.

20세기 들어 열대 아프리카에서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한 아프리카인 노동자의 자연발생적 파업이 발생했습니다. 남로디지아의 캠퍼다운 광산에서 임금 인하에 항의하여 일어난 1901년의 광부파업이 대표적입니다. 파업 노동자들은 완강한 단결을 바탕으로 승리했지만, 1905년까지는 열대 아프리카에서 파업은 극히 드문 현상이었어요. 이것은 유럽인 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던 노동자들이 사회적으로 동질적이 못했다는 사실과 그들의 대부분이 강제로 징발된 농민들로 구성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종교적·카스트적 편견이 강했다는 사실 등이 빚은 결과였죠. 이 요소들은 아프리카인의 계급의식 성숙을 제약했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의 대중행동은 민족해방투쟁과 결합되면서 점차 고양되기 시작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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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 : 제 7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