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화를 꿈꾸게 하는 사회

노동사회

방화를 꿈꾸게 하는 사회

admin 0 2,929 2013.05.11 10:12

파업에 돌입하면 당연히 노동자 개인의 수입이 불안정해진다. 그런데 '조만간 끝나겠지'하고 생각했던 파업이 자꾸만 길어지면, 그 동안 월급에서 공제됐던 각종 융자나 할부금, 그리고 의료보험 등의 세금 고지서가 하나둘 쌓여가고 빚이 늘어난다. 게다가 파업이 장기화되면 대부분 사용자들이 '불법행위'로 인한 파업 피해를 보상하라며 엄청난 금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노동자들의 월급, 통장, 집 등이 가압류로 묶여버린다. 그리하여 노동자 개인을 보호해주던 최소한의 경제적 보호막이 제거된다. 

어쩔 수없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고, 그로 인한 모멸감, 불안, 죄책감 등이 생겨난다. "사용자들이 사용하는 최소한의 자구책"이라는 손배·가압류는 가뜩이나 불안정한 처지에 놓인 파업노동자들에게 후유증을 남기는 엄청난 폭력이기도 하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정신적·경제적 피해는 파업에 참가한 개인이 당연히 책임져야할 몫일까? 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해 사용자와 정부가 '손해배상'해야 할 몫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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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노동자 = 신용불량자

유난히도 궂은 날이 많았던 이번 여름이 끝나갈 무렵, 어느 아침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사, 아니 파업현장으로 출근하기 위해 버스에 오른 흥국생명 홍순광 조직국장은 신용카드를 별 생각 없이 요금등록기에 갖다댔다. 하지만 그 순간 기계에서는 익숙지 않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번을 다시 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현금으로 버스요금을 계산하고 회사로 온 그는, 회사에서 받은 융자금의 이자를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신용불량자'로 등재됐음을 알게 됐다. 여섯 살 난 아이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터였다. 다행히 11월21일 지방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철회 판정을 받은 홍 국장은 "막연한 불안감이 생기고 모멸감까지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우자동차판매의 노동조합 간부 전원, 흥국생명의 노조위원장과 조직국장, 재능교육 노조간부 상당수. 이들은 민주노총이 11월13일 발표한 『손배·가압류로 인한 노동탄압 실상과 해결방안』을 통해 파업과정에서 신용불량자가 됐음을 공식적으로 밝힌 사람들이다. 51개 사업장 사례가 담겨있는 이 보고서에는 손배·가압류로 인한 빚 때문에 임대아파트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거나, 무리한 부업 때문에 병을 얻는 등 생계가 막막한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당연히 실제 파업 과정에서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들은 훨씬 많다. 게다가 효성, 한국시그네틱스처럼 투쟁이 몇 년을 넘기며 계속되고 있는 장기 투쟁 사업장에서는 노조간부가 아니라 일반 조합원 중에서도 신용불량자가 흔하다.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것은 노동자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며 노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호막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임금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고 사회보장제도가 허술한 한국 사회에서 '신용불량자' 낙인의 압박감은 개인이 홀로 감당하기 힘들다. 결국 인간관계를 강퍅하게 만들거나 자아가 붕괴하기 쉬운 상태가 된다. 

최근 한국빈곤문제연구소가 125명의 신용불량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4%가 가족이나 친구와 갈등이 꽤 심하거나 이미 관계가 깨졌고, 20%가 넘는 사람들이 별거와 이혼 가능성이 크거나 이미 별거·이혼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응답자의 61%가 자살을, 13%가 장기매매를, 그리고 100%가 방화를 한 번 이상 생각해봤다고 대답했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경제적 궁핍을 겪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개인을 절망하도록 만드는 지독한 폭력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사실 파업으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것은 빈곤문제연구소의 조사 결과와는 조금 양상이 다르다. 개별적으로 신용불량자가 된 이들과는 달리, 파업 노동자들에게는 '동지'라는 단결된 운명공동체가 함께 있다. 그리고, 불안과 분노를 털어 낼 투쟁현장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곧 파업이 타결되고 일터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이 대부분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신용의 붕괴가 자신의 무능력이 때문이 아니라 일시적인 외부상황에서 비롯된 것이고, 투쟁과 협상을 통해 곧 힘든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믿음이 자살을 하고, 확 불질러 버리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개인이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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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거농성을 하고 있는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   - 출처: 참세상 ]

깨지는 가정 

그러나 장기 투쟁 사업장의 경우는 이야기가 또 다르다. 부당노동행위와 불법행위가 복잡하게 얽혀 해결점을 찾기 어려운 데다가 노골적으로 노조를 무력화시키고자 하는 사용자들이 완강하게 버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들에게 청구되는 막대한 손배·가압류 금액은 장기 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의 고통을 신용불량자의 것 이상으로 만든다. "천만 원, 이천만 원이면 아이고 큰일났구나 했겠는데 몇 십억, 몇 백억이니 실감이 안 나니까, 처음에는 장난처럼 받아들였죠. 신용불량자요? 내부터도… 여기 많아요."

주식회사 효성은 평조합원들 개인에게까지 수십 억 원의 손배·가압류를 청구했고 그 투쟁은 벌써 2년을 넘어섰다. "드문드문 노가다도 나가고 하지만 그게 생활이 되나요. 천 오백만 원이던 카드 빚이 이자 때문에 두 배로 불었거든요. 근데, 이 텐트 안의 문제(현장 문제) 때문에 카드 빚 같은 건 전혀 신경을 못 쓰지요" 장기투쟁사업장 공동대책위원회가 농성하고 있는 서울역에서 만난 중년의 남성 조합원은 낯빛이 매우 무거워 보였다. 그러나 정작 그가 말끝을 흐리며 마지막으로 한 말은 다음과 같았다. "그래도 나는 상황이 좀 나은 편이에요. 저기 저 형님한테 물어보면 더 잘 얘기해줄텐데…" 

대한민국에서 민법의 이름으로 집행되는 손배·가압류는 일정부분 민법의 기본원리를 면제받아야 할 특수관계인 노사관계에서도 엄정하다. 일본의 24배에 이를 정도로 쉽게 남발된다는 가압류는 그 노동자가 부양가족이 얼마가 있든, 법정최저임금 밖에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든, 그 손해배상이 악의적으로 청구된 것이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노동자가 임금가압류에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법적으로 면제받을 수 있는 범위는 터무니없이 낮다. 이는 부양가족 및 소득수준을 고려한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미국, 독일 등과 비교하면 매우 허술한 것이다. 

그런데 일부 사용자는 그 얄팍한 보호조차도 불만이다. 흥국생명의 경우, 조합원 15명의 임금 절반뿐 아니라 나머지 50%도 사용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급여통장에까지 가압류를 신청했었다. 그리고 앞서 인용한 보고서에서 민주노총의 집계에 따르면, 효성은 조합원 개인별로 적게는 20억원에서 많게는 140억원의 가압류를 청구했고, 2001년부터 효성이 조합원에게 가한 가압류금액을 모두 합하면 무려 2조원이 넘는다.

이처럼 장기파업장의 손배·가압류는 개인을 경제적 무능력자로 만들고 절망시켜 생존권을 파괴한다. 그리고 이로 인한 고통은 단지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 노동자들의 가족에게까지 퍼진다. 그 고통의 울림은 특히 기혼여성 노동자들에게 구체적이다. 한 달에 두세 번씩 법원과 노동위원회 등을 오가며 2년이 넘도록 투쟁하고 있는 금속노조 한국시그네틱스지회는 조합원이 거의 여성들이다. 

이들은 행정소송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부당해고 당사자인 조합원들에게 이를 알리고자 할 때도 전화를 해야할지 공고문을 돌려야 할지를 조심스럽게 고민했다. 남편 손에 들어간 공고문이 부를지도 모를 '가정 분란' 때문이었다. 사무실에서 만난 한 조합원은 "우리 남편은 나 여기 있는 줄 몰라. 그냥 부업하러 간 줄 알지", "알면 난리가 나지. 법원에서 고지서가 날아오는 날이 우리 집에서 분란이 터지는 날이야."라고 말했다. 파업이 시작될 당시 기혼여성이 훨씬 많았던 시그네틱스지회는 현재 기혼과 미혼의 비율이 거의 반반이라고 한다. 집안의 압력을 못 이겨 파업대오에서 이탈한 경우도 있고, 가정이 깨진 경우도 있다. 

"사회적 살인" 

한진중공업, 세원테크, 근로복지공단. 손배·가압류, 비정규직 차별 등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던 장기 파업 사업장의 노동조합 간부들이 지난 달 중순부터 잇달아 죽음을 택했다. 그 후, 5만이 모인 집회가 열렸고 오랜만에 서울 한복판에 화염병이 등장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합법적으로 단체행동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차단하는" 손배·가압류 문제를 방조한 것에 대해 국제금속노련(IMF)에 의해서 국제노동기구(ILO)에 제소당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국제자유노련(ICFTU)의 항의서한을 받았다. 

한편, 회사측이 "대승적 차원에서 대폭 양보했다"는 한진중공업의 파업타결 소식에 대해서, 『매일경제신문』을 제외하고는 보수언론들이 제대로 된 '우려'조차 표명하지 못 했다. 올해 초 두산중공업이나 지난 8월 현대자동차의 협상타결 때에 보이던 호들갑을 생각하면 조금 의외다. 정부마저도 가압류신청 요건을 강화하고, 임금가압류 면제 기준을 부양가족에 따른 법정 최저생계비로 바꾸는 안을 추진하는 등 나름대로 부산하다. 

일단, 앵무새처럼 '최소한의 자구책'을 중얼거리는 경총 등을 제외한다면 노동자들의 쟁의행위에 대한 사용자들의 손배·가압류 신청이 폭력적이고 잔인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미약하나마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죽음으로 생겨난 그 공감대라는 것이 너무 미약할 뿐더러, 구체적으로 변화된 모습은 아직 잘 보이지 않고 있다. 

사용자들이 정당한 파업에 대해서 악의적으로 청구한 손배·가압류 때문에 가정파괴, 신용불량이 발생했다면 노동자가 사용자나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을까? 민주노총 법률원 관계자는 그런 사례도 없을뿐더러 쉽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무책임하게 남발됐건 어쨌건 그 손배·가압류는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법체계 안에선 "막강한 파업권에 대항하는 사용자들의 소극적인 권리"에 노동자들의 저항은 거의 허락되지 않는 셈이다. 

도저히 생존할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법의 이름으로 본인 돈을 쓰지 못 하도록 하는 것은 채무자보고 생존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어느 교수는 이러한 관행을 "사회적 살인"이라고 표현했다. 그 '살의'는 올해 여러 곳에서 자신의 뜻을 성취했다. 그리고 전체의 25%에 이르는 공공부문 가압류 규모는 이러한 "사회적 살인"에 대해서 정부가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억대의 돈을 물라는 법원의 판결은 가진 자들에게는 별게 아니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죽으라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신용불량자 대부분이 방화를 꿈꾼다고 한다. 파업 한번 했다고 손배·가압류에 인생을 차압당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에 덩달아서, 죽기 전에 세상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가진 이가 늘고 있다. 이런 판국에 청와대 대변인이라는 자가 말했다. "오히려 참여정부에서는 손배·가압류가 줄었다"고. 참으로 잘 난 '참여정부'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