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아래서

노동사회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아래서

admin 0 3,290 2013.05.11 10:10

10월17일 오전 8시30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는 전면파업 88일을 맞이하고 있었다. 김주익 지회장의 35미터 크레인농성 129일째 되는 날이었다. 

지난 7월22일 전면파업에 돌입하고 나서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한 아침 집회였다. 그런데 변함 없이 지브크레인 위에서 우리와 함께 해야 할 김주익 지회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투쟁의 광장에 집결한 조합원 모두가 "나와라", "나와라" 두 세 번 외치고 함성을 보내면서 집회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날 아침집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할 지회장 동지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간부들이 크레인 위로 달려갔다. 그리고 통곡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회장이 죽었다." "지회장이 죽었다."
모두들 투쟁의 광장에 한동안 할 말을 잃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울부짖었다. 새로운 투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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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넘긴 투쟁의 시작

한진중공업은 지난 2002년 2월26일부터 구조조정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노동조합과 어떤 협의도, 논의도 없이 '인력체질 개선'이라는 미명 하에 일방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사무직에서 시작하여 점차 생산직으로 옮겨갔다. 특히 30년 가까이 근무한 50대 늙은 노동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부산, 울산 ,마산 등 650여명의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렸다. 

이에 노동조합은 사측의 일방적인 구조조정을 규탄하며 불법적인 정리해고를 중단하고 즉시 특별단체교섭에 응할 것을 요구했으나 사측은 이를 거부했다. 지리한 싸움의 출발이자 본질은 바로 여기였다. 이때부터 노동조합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상집 간부 출근투쟁, 중식 집회, 현장 순회, 조합원 간담회, 138명 교육생과 함께 하는 신관 앞 거점투쟁, 지회 임원 단식농성, 금속노조 전간부 집중투쟁, 전면파업, 부분파업, 파상파업 등 할 수 있는 모든 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러자 사측은 조합비 손배가압류, 김주익 지회장을 비롯한 상집 간부 20여명의 임금과 주택 에 대해 7억4천4백만 원에 이르는 손해배상 청구와 가압류를 자행했다. 또 김주익 지회장 등 간부 14명을 업무방해·폭행 등으로 사업당국에 고소·고발해 노용준 부지회장을 구속시키고, 결국 해고시켰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산적한 현안문제와 2002년 임단협 교섭은 답보상태에 빠졌다. 특히 임금교섭은 3주에 한번 꼴로 개최되었지만 사측의 무성의한 태도로 인해 거의 제대로 된 교섭 한번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임금동결을 강요받았으며, 단협 갱신 교섭은 아무런 의견접근 없이 해를 넘기게 되었다. 

2003년 새해가 밝아왔다. 조합은 설날을 앞두고 다시 한번 4일간 조합원 전면파업을 전개했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다. 간부들도 서서히 지쳐갔다.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 투쟁을 힘있게 전개하던 차에 가족대책위가 꾸려지고 가족들이 앞장서서 투쟁하기 시작했다. 특히 손배가압류로 집안생활이 벼랑 끝에 몰린 상집 간부 가족들의 투쟁은 눈물겨웠다. 매일 아침 7시 조합원 출근시간 때 아침선전전을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했으며, 노동청 앞 선전전, 부산역 가두선전전, 신관 앞 1인 시위 등 가족들의 생존권 사수투쟁은 피눈물나는 것이었다. 

합의 번복, 전면 파업

김주익 지회장은 현장 조합원들이 잘 모이지 않는 과정에서 결국 스스로 결단했다. 

2003년 6월10일 신관 앞 광장에서 금속노조 전국 지회장 결의대회가 개최되었다. 김주익 지회장은 이 자리에서 '끝나지 않은 2002년 투쟁, 2003년 투쟁'을 반드시 승리로 이끌어 내겠다는 결의를 분명히 했다. 

다음날 6월11일 밤 10시 김주익 지회장은 아무도 모르게 어둠을 뚫고 35미터 크레인 위로 올라갔다. 85호 크레인 농성이 시작된 것이다. 크레인 농성 한 달만에 사측으로부터 구두합의를 이끌어냈다. 7월19일 아침 9시 노사는 현안문제 해결과 임금인상 등에 의견을 모으면서 지리한 싸움의 종지부를 찍는 듯 했다. 노동청장의 중재 하에 △ 손배가압류 철회, △ 해고자 복직, △ 징계철회, △임금 7만5천원 인상, △ 타결금 50만원, △ 성과급 100% 등의 현안문제를 일괄 정리하는 것으로 사측은 분명히 약속했다. 하지만 7월21일 오전 10시 사측은 합의를 완전히 뒤집었다.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전면파업이 결정되었다.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비록 패배할 지라도 반드시 응징하고 말겠다는 굳은 결의로 7월22일 아침 8시 전면파업이 선언되었다. 우려하고 걱정했지만 600여 조합원들이 김주익 지회장이 농성중인 85호기 크레인 아래로 집결했다. 모두들 상기된 표정으로 지회장의 투쟁 결의와 지도부의 교섭보고를 듣고 곧바로 천막농성장 설치에 돌입했으며, 2시간만에 85호기 크레인을 중심으로 조합원들이 함께 할 천막농성장이 마련됐다. 모두들 승리를 확신했다. 비록 전체 인원의 절반이 모였지만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렇게 전면파업은 시작됐다. 매일 아침, 저녁 크레인 위에서 들려오는 김주익 지회장의 목소리는 너무나 우렁찼다. 

전면파업 일수가 늘어나면서 회사는 더욱 간교해졌다. 추석 전 교섭에서 사측은 "지회장이 85호기 크레인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교섭할 수 없다"고 했다. 전면파업 50일이 넘어가도 500명의 파업대오가 흐트러지지 않자, 사측은 초조해지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인 파업파괴 책동에 돌입했다. "지회장이 내려오면 전향적으로 풀어보겠다.", "울산, 특수선 대오가 빠지면 풀린다", "해고자는 법적 절차에 따른다", "기존의 손배가압류는 풀겠다. 하지만 7월22일부터 파업기간 동안 사측이 300억 이상 손실을 입었다. 그 중 150억 정도는 노조가 책임져야 한다.", "특수선 조합원은 불법파업 중이기 때문에 10월15일까지 파업대오에서 빠지지 않으면 조합원 개개인에게 손배·가압류를 청구하겠다." 등 총체적인 파업대오 흔들기 작업이 전방위적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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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9일 노동자대회 참여한 노동자들이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손배.가압류 철회를 주장하며   - 출처: 참세상 ]

김주익 지회장의 죽음

결정적인 일은 늘 파업대오가 지켜보고 있던 MSC(90%이상 공정이 끝난 배)를 사측이 4도크에서 빼내는 작업이었다. 사측은 10월14일 새벽 2시부터 배를 빼내는 작업에 돌입했다. 조합원들은 '배가 도크에서 바다로 빠져나가면 파업은 끝장이다'는 심정으로 죽을힘을 다해 사측과 공방을 벌였지만 10시경 결국 배를 빼앗기고 말았다. 

배를 빼앗긴 조합원은 허탈한 심정으로 하나 둘 파업대오를 이탈했다. 10월16일 파업인원이 200대로 줄어들었다. 10월17일 아침 8시30분 216명이 모여서 아침 집회가 진행되었다. 

김주익 지회장은 결국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나의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나의 주검이 있을 곳은 85호기 크레인입니다. 이 투쟁이 승리할 때까지 나의 무덤은 크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어서라도 투쟁의 광장을 지킬 것이며 조합원의 승리를 지킬 것입니다." 
"조합원 여러분, 지회장의 죽음을 모든 조합원에게 알려주십시오." 새로운 투쟁이 시작됐다. 

10월17일 저녁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민중연대 등이 함께 모여 '악질 한진자본과 노무현 정권 노동탄압에 항거한 한진중공업 김주익 노동해방열사 전국투쟁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구성했다. 다음날 오전 10시 기자회견을 통해서 대책위는 김주익 지회장의 죽음은 한진재벌과 노무현 정부의 노동탄압이 부른 참극임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 노동탄압 중단, △ 손배가압류 철폐, △ 부당노동행위 근절과 악질 한진자본 처벌을 요구하며 강력히 투쟁할 것을 천명했다.

파업기간 중에 처음부터 결합하지 않은 조합원 다수가 속속 투쟁광장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3일만에 900명 넘게 모였다. 모두들 무거운 마음이었다. 끝까지 파업대오를 사수했던 조합원들은 지회장의 죽음을 결코 헛되이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단순히 7월19일 잠정합의했던 수준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없다는 마음, 그리고 자본과 정권의 노동탄압, 손배가압류, 부당노동행위 근절을 위한 실질적인 방안을 쟁취하는 것이 열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갈등의 골은 깊었다. 지회장의 죽음 앞에 아무도 자유롭지 못했지만, 지회장이 살아 있을 때 이렇게 모였더라면 우리는 진작에 이겼을 것이라는 회한과 부끄러움, 반성의 마음이 공장을 휘감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10월30일 곽재규 동지의 투신이 있었다. 또 한번 현장은 고통과 참회의 마음으로 일렁거렸다. 파업이탈에 대한 부끄러움, 김주익 열사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한 마음이 결국 곽재규 조합원의 죽음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슬픈 승리 

조합원 스스로가 서로의 아픈 상처를 보듬어 나갈 마음이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노를 한 곳으로 모아나가기 시작했다. 모두들 피동적인 상태에서 보다 자발적인 모습으로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서울 상경투쟁, 매일 진행되었던 가두선전전, 그리고 연극공연, 가두행진 시 퍼포먼스, 사수대 활동, 물품조달, 신관 항의투쟁, 노동청 항의투쟁, 한진해운 항의투쟁, 대한항공 항의투쟁, 김해공항 가두선전전, 대시민 선전선동 등 모든 활동에서 조합원들은 나날이 진전된 모습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그럴수록 노동운동 탄압분쇄 전국전선은 강고하게 구축되었고, 한진중공업 사측은 더욱 고립되어 갔다. 나아가 외국 선주와 해군, 투자한 외국자본으로부터 압박이 강화되고 회사의 장래가 불투명해지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마침내 사측은 11월 13, 14일 마라톤 교섭에서 △ 손배가압류 전면 철회 및 이후 노조활동을 이유로 손배가압류 금지, △ 부당노동행위 책임자 처벌 및 근절대책 마련, △ 부당징계 철회와 해고자 복직, △ 고용안정확약서, △ 임금·단협 등 현안문제 해결, △ 금속노조 기본협약·조합통일요구안 수용, △ 일방중재 철폐 등의 내용으로 전격 합의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조합원들은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슬퍼했다. 분명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를 통해 이렇게까지 성과 있게 승리한 싸움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조합원들은 결코 기뻐할 수가 없었다. 김주익·곽재규 동지의 죽음을 역사의 제단에 바치고서 겨우 만들어 낸 성과였기 때문이었다. 김주익 지회장이 남긴 말처럼 더 이상 '식물노조, 식물인간'으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새롭게 운동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