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63일의 투쟁이 남긴 과제

노동사회

두산, 63일의 투쟁이 남긴 과제

admin 0 3,751 2013.05.11 10:01

더러운 세상, 악랄한 두산을 하늘에서라도 지켜보겠다던 고 배달호 조합원의 육신은 이제 차가운 아스팔트를 떠나 평온한 땅속에 묻혔다.

그 리고 1월9일부터 63일 동안 벌어졌던 투쟁은 지난 3월12일 권기홍 노동부장관의 중재로 마무리됐다. 개인에 대한 손배와 가압류 취하, 해고자 부분 복직, 파업 기간 중 무결처리 손실분에 대한 부분 지급을 비롯한 10가지 합의 사항을 담고 있는 합의 내용은 죽음의 댓가로는 미흡할 수 있지만, 회사가 그동안 저질렀던 노동탄압이 잘못된 것임을 밝히고 새롭게 노사관계를 마련할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63일의 투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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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달호열사 전국노동자장에 참석한 조합원들이 열사의 '부활영정'을 앞세우고 두산중공업 창원공장 안에서 노제를 지내고 있다.   ▷ 출처:두산중공업지회 ]

분신의 배경

한 국중공업을 헐값에 인수한 두산 그룹은 2001년 이미 노사간에 명예퇴직에 대해 사전 합의하기로 단체협약이 체결되어 있었음에도 일방적인 협박과 위협으로 1,124명의 노동자를 강제로 명예퇴직 시켰다. 뿐만 아니라 회사의 적자를 이유로 임금삭감을 요구하였다. 더구나 단협에 노사합의하에 실시하기로 되어 있던 소사장제를 회사가 새로운 경영전략의 일환이라며 일방적으로 추진하려 하면서 노사관계는 파행을 치달았다.

2002년 2월26일 발전노조의 파업에 따른 민주노총 총파업 당시 두산 지회의 연대파업과 관련해 회사가 조합원 201여명을 징계하면서 두산 노사간의 대립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회사의 징계 방침은 지회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켰지만 회사는 정직과 출근 정지 그리고 파업에 참여한 평조합원들에게 일괄 견책, 경고(상여금 5% 감봉)를 감행하였다. 회사의 징계 방침은 노조원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한중 시절부터 지금까지 파업 참여로 평조합원까지 포함하는 징계를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노조의 눈치도 볼 것 없이 마음놓고 징계를 때렸던” 회사는 더욱 자신감을 얻었다. 지회 선전부장 김수용씨는 “회사의 노무관리는 노조 간부에 대한 방식과 평조합원 관리로 나누어져 있다. 특히, 노조의 체계상 대의원을 장악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대의원에게 악영향을 끼쳐 왔다.”며 회사의 철두철미한 노조무력화 작업을 비판했다.

두 산중공업지회는 2001년 타결됐던 잠정합의안에 따라 2002년 집단교섭에 응할 것을 사측에 요구했다. 그러나, 사측은 합당한 이유없이 거듭해서 교섭에 불참했고 5월22일 노조는 절차에 따라 파업에 들어갔다. 그러자 회사는 다음날로 기다렸다는 듯이 단협 일방해제를 통보하고 노조간부들을 고소고발하였다. 또한 파업 참여자에 대해 ‘법과 원칙’에 따라 고소고발 하겠다고 위협하고 50억 원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배달호 조합원도 이 파업으로 구속돼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3개월 정직, 재산과 임금을 가압류 당하게 됐다.

47일간의 투쟁이 노조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노지환 복지후생차장은 “한국중공업이 민간기업으로 바뀌자 노동탄압이 천지차이가 났다”며 “화장실을 가는 데도 어디가냐고 묻는 정도”였다고 했다.

2002 년 8월 이후 새롭게 두중 지회 지도부가 구성되었지만, 간부는 절반밖에 없었다. 대의원도 지난 10월 선거에서 74명중 45명만 당선되었다. 간부기피현상이 뚜렷이 드러났다. 당시 파업으로 징계가 89명, 해고 18명, 손배 62억, 그리고 조합비 가압류는 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충분했다. 노조 활동가를 탄압하는 부분은 그렇다하더라도 평조합원들의 급속한 활동력 저하는 무엇때문이었을까.

“파업 당시 회사는 파업 참여자들을 무단결근처리 하겠다고 했어요. 회사에 나오지 않더라도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확인되면 재택근무로 인정해 줬구요.”, “지난 파업으로 무단결근처리를 당한 사람이 1천3백 명이나 됩니다.”

당 시 파업참여자와 비참여자 사이에 임금 차이가 큰 경우엔 7~8백만 원이 날 정도였다. 무단결근처리는 임금에 한정되지 않았다. 무단결근은 연·월차, 가산금, 상여금 그리고 회사가 징계를 가할 수 있어 평조합원 사이에 “나서면 죽는다”는 위기의식이 가득하였다. 더구나 파업참여자와 불참자 사이에는 깊은 불신이 형성되었다. “상조회도 같이 안합니다. 회식도 같이 안하고, 심지어는 통근버스도 같이 타지 않으려 해요”

현장 분위기는 급속도로 위축됐으며 사측은 기다렸다는 듯이 같은 해 11월 단협해지 통보를 노조에 보냈다. 결국 두산중공업지회는 현장 동력 부재와 무단협 사태 장기화에 따른 부담으로 집단교섭 삭제 등 회사안 대부분을 수용한 단협 잠정합의안이 12월6일 조합원 총회에서 가결됐다. “교섭형식만을 두고 싸웠던” 47일의 투쟁은 결국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분신과 대책위 활동

2003년 1월9일 오전 6시30분 무렵 단조공장 냉각탑 옆에 불에 타 검게 그을린 시체 한 구가 발견되었다. “잔인한 세상과 악랄한 두산”의 노동탄압에 대한 절규가 담긴 유서를 남기고 분신 자살한 고 배달호 조합원으로 촉발된 63일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1월10일 구성된 “노동열사 고 배달호동지 분신투쟁대책위”는 노조탄압중단 및 두산중공업 지회 현안문제 해결, 한중사유화 두산재벌 특혜의혹 규명을 위한 특검제 실시, 특별근로감독 실시 및 부당노동행위 처벌, 박용성회장 공개사과 및 대한상의회장 퇴진을 4대 목표로 설정했다. 금속노조는 지회장결의대회의 결정사항에 따라 1월16일 분신투쟁을 전국전선으로 확대하기 위한 4시간 파업을 전개한다. 금속노조의 집계에 따르면, 총파업 52개 지회, 간부파업 35 군데, 총회(교육) 5개 실시로 집회참석은 6천여 명이었다.

분 신을 전후로 1월말, 설전까지를 전국대책위 차원의 투쟁 역량이 가장 집중된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다. 초기 시신의 이전을 놓고 대책위와 경찰간의 대치가 긴장을 불러왔으나, 우여곡절 끝에 시신을 사수함으로써 투쟁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으며 이번 투쟁의 특징 중 하나인 전국적 이슈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

열사투쟁과 산재투쟁과정이 유족의 도움이 가장 큰 고리임을 감안한다면, 이번 투쟁에서도 배달호 조합원의 부인이었던 황길영씨가 싸움이 끝나는 순간까지 대책위와 함께 함으로써 도덕적, 법적 정당성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금속노조 경남지부 박유호 조직부장은 “달호형 장례식 날, 우리 모두 형수를 동지라 불렀다. 그만큼 그 역할이 컸다”고 술회했다.

분신 당일 날 금속노조 위원장이 바로 두산 지회로 내려오고, 경남지역 소속 금속노조원의 대응이 재빠르게 진행되면서, 경남지역 각 사회운동단체들의 연대투쟁도 광범위하고 힘차게 이루어졌다. 분신 당일 날부터 각 단체별로 두산 현장에 참여했던 단체들이 1월15일 ‘두산재벌 노조 탄압 규탄 노동열사 고 배달호 동지 분신사망 경남대책위원회’ 결성을 위해 모였으며 참가단체는 30여 개에 달했다. 지금까지 경남지역 연대투쟁단체 규모로는 최대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경남지역 대책위의 역할은 주로 지역 선전 활동과 두산제품불매운동 선전과 1인 시위에 집중되었다. 이와 함께 두산재벌에 대한 이미지 타격으로 두산불매운동이 설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다. 1월21일 두산타워 앞 두산제품 불매운동 발대식을 시작으로 각 지역의 KFC 매장 앞에서의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두산불매운동은 전국대책위 차원에서 시작되었으나, 경남지역대책위의 불매운동, 사이버 상에서의 불매운동 등 다양한 주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투쟁의 전국화는 전국에서 집회가 발생했다는 것을 넘어서 투쟁의 이슈가 전국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초기 손해배상과 가압류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인터넷 매체와 TV 방송국, 각 신문사들이 손배와 가압류로 노동조합과 조합원이 겪는 문제점들을 다각도로 집중 조명하였고 이를 계기로 이 문제가 두산중공업만이 아닌 전체 노동자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민주노총 차원의 손배가압류 사업장들은 인수위 앞 1인 시위를 진행하였고, 1월23일 참여연대를 비롯한 50여개 시민단체가 손배·가압류 해결과 법개정, 두산의 한중인수 특혜의혹규명 특검제 도입 등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손배·가압류에 대한 압박이 가해졌다.

위기돌파, 부당노동행위 폭로

대책위 초기, 시신을 두고 한 차례의 고비가 있었다면 설을 전후로 해서 다시 한번 위기가 발생했다. 설연휴로 인해 조합원과 전국 동력이 소강상태에 들어갈 뿐 아니라, 투쟁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부담감이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위기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돌파구를 열게 되었다. 두산중공업 조합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물증이 없었을 뿐인 두산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증거자료가 입수됨으로써 다시 한번 새롭게 투쟁 국면이 열린 것이다.

블랙리스트, 선무활동 지침, 근태 현황, 현장 중간간부 수첩 메모의 내용이 공개되면서 두산중공업이 어떻게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려 노력했고, 조합원들을 감시해 왔는지 낱낱이 폭로된 것이다. 특히, 회사는 노조 간부나 노동조합에 적극적인 사람은 철저한 근태관리 등 불이익 조치와 징계를 하고, 선무활동 효과가 없을 경우 재배치 등으로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전략을 짜놓았다. 두산중공업의 노무관리는 2월12일 분신대책위의 기자회견 자리에서 더욱 주도면밀했음이 밝혀졌다. 두산중공업은 2001년 민영화 직후부터 노조파괴 계획을 세웠다. 연도별로 조합활동가 밀착관리(2002년) → 조합원과 비조합원의 차등관리(2003년) → 우호 합리적 집행부를 결성(2004년) 하는 것이었다.

2 월19일 국회 환노위 회의에서 두산중공업의 노조말살정책과 부당노동행위가 밝혀졌고, 노동부장관이 2002년 파업에 대해 합법성을 인정하였다. 이어 2월5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된 노동부 특별조사결과는 두산의 부당노동행위를 인정하고 사법처리방침을 밝혔으나 그 결과는 노조의 요구에 매우 미흡한 수준이었다. 국회 환노위가 노사양측에 타협안을 제시하고 노동부가 중재에 들어갔으나, 노조 교섭대표였던 김창근 금속노조 위원장을 수배자라는 이유로 중재협상에서 배제하고, 크게 미흡한 중재안을 제시함으로써 노조가 조건부 거부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공세적 분위기는 2월25일 두산중공업 정문 앞 폭력사태를 기점으로 새로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았다. 2월25일 폭력사태 이후, 팽팽한 긴장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금속노조는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해 3월12~14일 금속산업연맹 1천 결사대 현장투쟁을 결의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시 3월20일 전후로 총파업투쟁 일정을 잡는 등 강력한 대응을 준비했다.

노조의 강력한 대응에 회사도 1천 결사대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만일의 경우 휴업등 특단의 조치를 하겠다며 맞섰다. 3월12일부터 시작되는 금속연맹 1천 결사대 투쟁과 13일 경남지부 지역파업, 같은 날 노무현 대통령의 진해 방문으로 새정부는 많은 부담을 느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노동부장관이 직접중재협상에 나서게 된다. 60일이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노사간의 자율협상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인지라 정부의 중재에 대해 거부할 입장이 아니었다.

3월10일부터 시작해 3월12일 새벽 6시까지 밀고당기는 협상이 계속되었다. 마지막까지 타결의 기미가 없는 가운데 새벽 무렵 극적 타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노동부장관의 중재에 따라 10개의 합의내용에 서명을 한 후 63일간의 투쟁은 형식상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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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6일 종묘공원을 가득 메운 전국노동자대회 참가인파   ▷ 출처:두산중공업지회 ]

성과와 과제

이번 투쟁은 두산과 정부의 노동탄압에 대한 대응을 한 축으로 하고, 다른 한편은 두산중공업 지회의 현장조직력 복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 동안 노동조합운동의 무력화와 탄압의 무기로 활용되어왔던 손배가압류 문제를 사회적으로 부각시켜 손배가압류 금지법 제정을 추진시킨 것이 이번 투쟁의 성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번 투쟁을 통해 개별 사업장에서 손배가압류를 철회시킴으로써 수많은 사업장의 손배가압류가 실제로 무력화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한편, “악랄한 두산도 문제지만, 정부도 책임이 있다. 징계, 가압류 등 민·형사상 근거를 노동부가 제공하거나 부추겼다. 이번 투쟁에서 이 부분이 부각되지 못한 것은 아쉽다.”는 금속노조 김창근 위원장의 말마따나 이번 투쟁의 방향이 두산 재벌의 문제로 한정되어 불법 파업, 단협위반, 무단결근처리,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은 과제로 남아 있다.

또 하나의 성과는 산별노조의 조직력과 집중력이 이번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번 투쟁을 계기로 인적 물적 집중력, 지속성 그리고 조직력에 있어서 산별노조의 위력이 발휘되었다. 특히 이번 투쟁으로 산별노조가 중요한 교섭의 당사자라는 것이 확인되었으나, 협상의 당사자로서 회사와 직접교섭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은 성과를 반감시켰다.

박방주 지회장은 “작년 투쟁으로 조합원들이 산별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이었는데 이번 투쟁을 계기로 산별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뀐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나 부정적이었을까. “다른 대기업노조는 산별에 안 들어갔는데 왜 들어가서 맨날 손해만 보냐는 얘기가 나돌았다.”, “47파업 이후 심지어 문 닫자는 얘기도 나왔다.”

이런 성과들 못지 않게 이번 투쟁은 지회의 현장조직력 복원이란 과제를 남겼다. 두산 지회의 현장조직력에 대해서는 분신 초기 집회에 모인 인원을 보면 알 수 있다. “지역대책위가 천 대오가 모이는 데 투쟁 주체인 지회에서는 이삼백 대오 밖에 안 모이니 차츰 외부에서 지회에게 불만의 소리가 나오게 되었죠.” 이런 현장 분위기에 대해 박방주 지회장은 “많은 사람들이 지회 조합원들의 참여가 저조했다고 하는데, 우리 지회의 상황을 잘 모르고 하는 말 같아요.”라며, 평균 47세의 조합원 연령, 공기업 당시의 노사관계, 47 투쟁으로 당한 조합원 개개인의 피해를 일일이 설명하였다. 이중에서 공기업 노사관계를 현장조직력에 연결시키는 것에는 다른 의견이 있지만, 2002년 파업을 원인으로 지목하는데는 공통되었다.

그 러나 이것을 산별체계에서 발생한 한계로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현장 조직력 저하는 두산의 노무관리로부터 비롯된 측면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투쟁은 적지 않은 성과를 낳았지만, 두산중공업으로 대표되는 자본의 노무관리전략에 대해 단위사업장뿐 아니라 상급단체 아울러 총노동세력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고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