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397만명’을 찾아라

노동사회

숨어있는 ‘397만명’을 찾아라

admin 0 2,928 2013.05.11 09:49

이 글은 쉽게 말하면 ‘숨은 그림 찾기’쯤 된다.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 있는 것인데도 언뜻 봐서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는 숨겨놓은, 그 무엇을 찾는 재미있는 모험 같은 것이다. 하지만 숨은 그림 찾기가 그렇듯이, 교묘하게 그 그림을 감추기 위해 포장되는 다른 그림들이 많기 때문에 찬찬히 뜯어보아야 한다.

비정규직 규모에 관한 얘기이다. 혹자는 “지겹다”는 반응을 미리부터 보일 수 있다. 하기야 이 논란이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니까 “또?”하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숫자놀음 식의 장난말고, 그 ‘숨은 그림’의 당사자인 노동자들의 실태를 있는 그대로 살피면서 통계의 오류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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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23일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비정규직노조 결의대회 참가자들이 '비정규직 차별 철폐, 노동기본권 보장' 등을 요구하고 있다.  ▷ 출처:워킹보이스 ]

장기적으로 임시적인 일을 하는 자 = 정규직?

동 일한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2002년 8월)를 분석했는데 비정규직 규모에 대해 한국노동사회연구소나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등은 772만명(56.6%)이라고 분석한 반면 노동부 등은 375만명(27.5%)라는 2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결과치를 내놓았다.

출발지점은 바로 여기다. “차이가 나는 397만 명은 도대체 누구냐?”

노 동부 등은 고용계약기간을 설정한 한시적 근로, 시간제 근로, 근로제공방식에 따른 비전형근로 가운데 서로 중복되는 부분을 제외한 규모를 비정규직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노동부는 임시·일용직이면서 계속근무를 기대할 수 있는 경우와 계속근무를 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사유가 자발적인 경우에는 한시적 근로자가 아니라고 보고 비정규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상시위탁집배원 L씨는 집배업무를 한 지 3년 6개월째다. 하루 기본 12시간에 많으면 15시간동안 일을 하지만 임금은 같은 경력의 정규직보다 50∼60만원 적은 140만원 가량. 업무조건이 워낙 나쁜데다 임금은 낮으니까 동료 상시위탁집배원들의 이직률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란다. 그러니까 싼 임금에 경력 많은 L씨를 우체국이 싫어할 이유는 없다.

“아마 제가 먼저 나가겠다고 하기 전까지 저보고 나가라고 하지 않을 꺼예요. 일도 능숙하고 임금은 정규직보다 덜 줘도 되는데, 저 짜르면 우체국이 손해죠.”

은 행에서 임시직으로 텔레마케터(out-bound, 전화를 걸어 상품을 판매하는 부서) 일을 하던 K씨는 ‘알아서’ 회사를 그만뒀다. 하루종일 전화를 붙잡고 상품을 권유하는 일이 힘들기도 했지만, 동료들간에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물론 ‘실적 하위 10% 미만자 재계약 탈락’이라는 으름장이 너무도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생활 오래해도 정규직 될 가능성도 없으니 별 미련은 없단다.

상시위탁집배원 L씨와 텔레마케터 K씨는 엄연히 노동부 기준에 따르면, ‘비정규직이 아닌’, 그러니까 정규직으로 분류될 사람들이다. 과연 그런가?

L 씨는 자신이 나간다고 하기 전까지 회사가 자신을 해고하지 않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건 바로 3년 6개월이나 계속 이 생활을 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맡고 있는 업무가 우체국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상시적으로 필요한 일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L씨는 상시업무에 쓰는 정규직이 아니고 임시업무에 쓰는 임시직이다. 그러니까 L씨 같은 사람을 부르는 이상한 호칭까지도 생겨난다. ‘장기임시근로자’. 장기적으로 임시업무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말한다.

그러나 L씨는 자신을 내쫓기 위해서는 정규직의 경우처럼 근로기준법인가에 나오는 해고사유가 필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우체국에 밉보이기라도 하면, 또는 노조를 만들 시도라도 하면 3년 6개월 동안, 아니 앞으로도 5, 6년 동안 탈없이 반복 갱신될 수 있을 자신이 계약기간 만료를 이유로 해고될 수 있다는 것을.

K씨의 경우도 그렇다. 비록 자기 발로 그 직장에서 걸어나왔지만 K씨를 ‘스스로 원해서 일자리를 그만두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정규직이라고 분류할 수는 없다. 오히려 비자발적인 선택으로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경우에 해당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결국 임시직으로 몇 년간 근무하다가 저임금이나 열악한 근로조건을 도저히 참지 못하고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직장을 떠난 것 아닌가.

통계청 임시·일용직 29.1%, 정규직으로 분류

노동부의 오분류는 이 뿐이 아니다. 노동부는 통계청의 종사상 지위 분류인 상용·임시·일용직 분류마저도 인정하고 있지 않다.
통 계청의 이 분류는 ‘직업의 안정성’을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고용계약기간이 없거나 1년 이상인 정규직원을 원칙적인 판단기준으로 적용하되 그 적용이 곤란한 경우 △ 회사의 채용절차에 의해 입사한 사람으로 인사관리 규정을 적용 받는 자, △ 근속기간이 1년 이상인 자로 퇴직금 및 상여금 등 각종 수당 수혜자를 상용직으로 분류한다. 여기에서 △ 소정 채용절차를 거쳐 입사했더라도 일정사업 완료의 필요기간동안 또는 1년 미만의 계약기간을 정한 자, △ 몇 년을 동일사업체에서 계속 근무했다 하더라도 계약이 임시·일용인 경우를 제외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부는 이렇게 분류된 임시·일용 가운데 29.1%(397만명)을 비정규직 규모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부소장은 “노동부는 부가조사에서 질문한 7개 고용형태(계약근로, 파트타임, 파견근로, 용역근로, 가내근로, 호출근로, 특수고용형태) 가운데 어느 하나에 속하는 사람만 비정규직이라며, 납득할만한 해명 없이 통계청 통계를 사실상 폐기 처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 부소장은 이 7개 고용형태 이외에도 계절근로나 사내하청, 사내용역은 정규직으로 분류할 것이냐고 반문한다.

실제 S업체 소속이면서 H자동차에 가서 일을 하는 사내하청 노동자 S씨의 경우를 보자. S씨는 출근에서부터 퇴근까지 H자동차에서 일을 하며 H공장 정규직과 함께 생산공정에 배치돼 있다. 물론 근태관리나 작업지시, 잔업명령 등은 모두 정규직 관리자 몫이다. 하지만 S씨는 S업체를 통해서 임금을 받고, 그 임금은 H공장 정규직들의 50∼60% 수준이며 정규직들이 하기 꺼려하는 어렵고 힘든 일에 배치되고 있다. S업체와 H자동차는 ‘도급’계약을 맺었다고 하지만 이는 실질적인 불법파견이다. 하지만 S씨는 ‘파견근로자’가 아니라 ‘불법파견근로자’이다. 따라서 7개 분류기준에 없는 고용형태라는 이유로 노동부 분류에서는 정규직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송용한 정보통신부장은 “노동부가 비정규직이라고 ‘인정’하는 7개 고용형태 가운데 ‘용역근로’라는 항목이 있지만 조사지침에서 제시하고 있는 예가 ‘청소용역, 경비용역업체 등에 근무하는 자’로 돼 있어 특정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응답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지적한다.

포항제철공단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는 P씨. 그는 비정규직의 대명사로 유명한 대한민국 128만 건설업 노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포항은 공단 지역이라 대부분 건설노동자들이 플랜트 설비 쪽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일용직들과 조금 다르긴 하지만 공사예정일만큼 계약을 체결하는, 쉽게 말하면 공사계약직 노동자이다. P씨의 동료들도 대부분 처지는 같다. 건설현장에서 정규직이라고 한다면 건설업체에서 파견된 현장소장과 관리자 몇몇 뿐이다. 어느 회사에 소속돼 공치는 날 없이 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설노동자는 거의 없다. 하지만 노동부 분류상으로 건설업 노동자 가운데 2명 중 1명 꼴(52.5%)만 비정규직이다. 도대체 나머지 1명인 정규직 건설업 노동자는 어디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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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4월 레미콘 운송기사들로 조직된 건설운송노조(위원장 장문기) 의 파업현장  ▷ 출처:워킹보이스 ]

도대체 분류 안 되는 사람들, 영세업체 정규직?

노 동부는 자신이 정한 비정규직의 범주에 들지 않은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은 아니지만 대부분 근로조건이 좋지 않은 영세사업체 근로자들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앞서 사례로 들었던 L씨와 K씨의 경우 모두 영세사업체 정규직 노동자란 말인가?

또 한 학습지 교사와 보험모집인, 레미콘운송기사 등과 같이 개개인이 사업자등록증을 갖고 형식적인 ‘사업자’가 돼 있는 노동자들은 아예 ‘비임금근로자’로 포함돼 경활 부가조사에서 원천적으로 제외돼 있다는 점도 문제다. 흔히 특수고용노동자로 불리는 이들은 대부분 정규직이었다가 회사 방침에 의해 ‘사업자 등록증’을 소지했을 뿐 실제 사업자로서의 사업의 독창성, 자율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레미콘운송기사의 경우, 생산수단인 레미콘차량을 소유했다는 것 이외에 사업자임을 입증할 근거는 없다. 작업지시, 징계, 근태관리 등을 모두 회사를 통해 받는다.

송용한 부장은 “노동부의 이 같은 분류결과는 현재의 부가조사 설문항목으로는 문제가 되는 임시·일용직이 더 이상 분류될 수 없음을 확인시켜줄 뿐”이라며 “설문항목을 개선, 추가하고 ‘한시적 근로’에 대한 좀더 면밀한 개념을 설정해 임시·일용직을 정규직으로 분류하는 오류를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존의 이론과 관행은 정규직의 개념을 우선 정의하고 그 요건에 충족되지 않는 경우를 비정규직으로 정의하는 것이었다. 정규직을 개념화하는 기준은 3가지로 요약된다. 고용계약기간의 정함이 없는 자, 전일제 근로를 하는 자, 사용자가 단일한 자.
따라서 고용계약기간의 정함이 있거나(수년간 반복 갱신됐더라도 계약해지 위협은 상존하는 자 포함), 단시간 근로를 하거나, 사용자가 2인 이상인 경우를 비정규직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덧붙여 임금노동자 분류에 잡히지 않는 특수고용노동자까지 포함해서.

자, 다들 숨은 그림들은 다 찾으셨나?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