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노동조합 조직통합 동향

노동사회

세계 노동조합 조직통합 동향

admin 0 4,256 2013.05.11 09:47

1. 들어가면서

오 늘날 노동조합운동이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조직률의 정체 혹은 하락이다. 실제 각국 노동조합 조직규모는 절대 수에서나 임금노동자 수와 비교한 조직률에서나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독일의 경우, 1992년 1천3백만 명에서 5년 사이에 1천만 명 규모로 감소하였고, 조직률도 40%대에서 35%대로 낮아졌다. 영국은 과거 1천만 명에서 1990년대 중반에는 8백만 명 수준으로 낮아져 조직률은 50%대에서 30% 중반 수준까지 낮아졌다. 미국 역시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수준이었지만, 1980년대 중반 1천7백만 명에서 15년 동안 1백만이 줄어 조직률은 18%대에서 13% 수준으로 낮아졌다. 기업별노조 체계를 갖고 있는 일본도 1천2백만 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십 년 사이 40만이 줄고, 조직률은 1980년대 전반기 30%대에서 최근에는 20%대로 낮아졌다.

노조 조직률의 정체와 저하는 노동조합운동에 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 무엇보다 노동조합의 물질적 기반이 약화된다. 조합원 감소로 조합비가 줄어 활동에 제약을 주고, 위축된 노조 활동은 조합원의 불만을 낳을 뿐만 아니라, 비조합원들에게 노동조합에 대한 매력을 떨어뜨린다. 그 결과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대표성에 약점을 갖게 된다.

노 동조합 조직률 하락 원인은 여러 가지로 분석된다. 과거에는 그 원인을 경기변동과 고용구조변화 같은 사회경제적 요인에서 찾았던 데 비해, 최근에는 좌파 정당의 지배력 같은 정치 요인과 노사관계 제도처럼 제도적 요인에서도 규명하기도 한다.

노조 조직률 감소를 막기 위해 각국의 노동조합들은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직접적인 대책이 신규조직 확대인데, 이를 위해 조직활동가를 대량 양성하여 조직확대 사업에 나서기도 하고, 조합원 또는 노동자들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 조직 이탈을 막으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미국노총(AFL-CIO)의 경우, 존 스위니 위원장이 등장한 이후부터 조합원 확대에 총력을 기울여왔는데 1995년에 250만 달러였던 조직화 예산이 1997년에는 총예산의 1/3에 해당하는 3천만 달러로 증가하였다. 1989년에 설립된 조직화 연구소는 매년 조직활동가 양성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했으며 1999년 현재 1,400명이 참가하였다.

2. 노동조합 조직통합 흐름

조직감소에서 오는 문제점들을 해소하고 조직을 확대하기 위한 또 다른 방법은 조직통합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조직통합 추세는 세계 모든 나라의 공통 현상이지만 특히 독일, 영국, 미국, 호주에서 두드러졌다.

독일

독 일의 노조통합은 이미 1989년 초에 시작되었다. 이 해에 인쇄·종이노조는 독일 기자연합, 작가동맹과 다섯 개의 작은 직업동맹으로 구성된 예술노조와 함께 새로운 언론매체, 인쇄보도출판 및 예술노조(IG Medien)를 출범시켰다. 이러한 독일 노조통합의 움직임은 통일 후인 1993년부터 더욱 확산되었다. 상업은행보험노조, 숙박노조, 섬유피복노조, 나무인공원료노조, 언론매체노조 등에서 대규모 노조가 소규모 노조를 흡수하여 통합하는 방식이 아닌 대등한 조직통합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일노총 내에서는 조직재편과 관련한 논쟁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1996년 1월1일부터는 건설석재노조와 조경농림노조가 건설노조(IG BAU)로 통합함으로써 현실적인 조직통합의 첫 출발점을 이루었다. 이어 1998년 초에는 화학-제지-세라믹노조·광업-에너지노조·가죽노조가 화학노조(IG BCE)로 통합하여 100만이 넘는 거대조직으로 재출범하였고, 나무인조원료노조는 섬유피복노조와 마찬가지로 금속노조(IG Metall)로 통합하였다(『노동사회』, 2002년 2월호, 80∼82).

무엇보다 독일 노조통합 움직임의 최대 관심사는 공공서비스부문 노조들의 대통합이었고, 그 주인공은 2001년 3월19일∼21일 출범한 통일서비스산업노조연맹(Ver.di: Vereinigte Diensteleistungsgewerkschaft)이었다. 이 새로운 통합조직은 금융·보험·공무원·사무직·공공서비스·상업·우편·미디어 등 13개 업종을 망라하고 연방중앙조직·주조직·지구조직을 조직 골간으로 하여 320만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여 금속노조를 제치고 독일 최대의 산업별조직으로 부상하였다. 이 조직은 공무원·교통·운수노조(숿V), 소매·은행·보험노조(HBV), 독일사무직원노조(DAG), 우편노조(DPG), 미디어노조가 2000년 11월17∼19일까지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통합을 결의한 끝에 이루어졌다. 이 통합조직은 독일노총(DGB)의 산하조직만이 아니라 사무직노조처럼 다른 계열의 조직까지 포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베르디란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Verdi)와 디지털이 서로 만나 문화와 기술, 그리고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다는 느낌을 주는 동시에 ‘노동조합의 소리’를 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 일에서 조직통합이 급진전된 데에는 노동운동을 둘러싼 상황 변화와 이로부터 오는 위기감이 작용하고 있었다. 1990년대 들어 세계화의 진전과 기업의 경영합리화에 따른 노동자의 조합이탈현상이 두드러져 조합원이 급감하고 있었다. 독일노총(DGB)은 통독 당시인 1991년 1,180만 명에서 1998년에는 350만 명 감소한 831만 명으로 줄었고 특히 DAG는 8만명 감소한 41만 8천 명으로 줄었다. 베르디는 독일의 산업구조가 금속산업 등 제조업으로부터 서비스산업으로 비중을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한 노조 대응의 한 형태이며, DAG의 통합참가는 노조의 성향이 이념을 넘어 실리적 생존 논리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호주

미 국에서는 1995년부터 조직통합 움직임이 나타났다. 1995년 사양화, 영세화의 길을 걷고 있던 업계의 동향을 반영하듯 의류섬유합동노조(ACTU)와 여성봉제노조(LGW)가 통합하여 전미봉제의류노조(UNITE)를 결성하였고 같은 해에 국제기계공노조(IAM)가 제재관계노조를 흡수하고, 국제서비스노조는 소방사노조를 흡수하여 몸집을 불렸다. 이어 전미자동차노조(UAW, 77만명) 전미철강노조(USWA, 70만명), 국제기계공노조(IAM, 48만명)는 1999년 2월23일부터 3일간 각 조직 본부 및 지방 임원 3천 명이 참여한 가운데 노동운동의 기본정책과 2000년 대통합 추진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이 세 조직의 통합은 후에 통합을 추진해온 세 조직위원장이 은퇴하고 세 조직간 조직문화의 차이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호 주는 국가 발전차원에서 노동운동 혁신의 주요의제로 조직통합과 정비문제를 제기하였다. 1987년 호주노총(ACTU)과 무역발전위원회(TDC)는 스웨덴, 노르웨이, 오스트리아를 공동으로 방문하고 ‘재건호주’(Australia Restructed)라는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호주의 정치, 경제, 사회는 물론이고 노동조합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보고서는 노동운동을 재편할 개혁안 중 하나로, 300개가 넘는 노조를 2년 안에 20개로 통합해야 한다는 것을 담고 있었다. 이에 근거하여 호주노총은 ‘노동조합운동을 위한 미래전략’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에서 호주노총은 321개에 이르는 노조수가 너무 많다고 지적하고, 노동운동을 둘러싼 안팎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조통합을 서둘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호주노총은 이 제안을 1987년 총회에서 승인하고 1989년 총회에서는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채택하였다. 1990년 집행부는 노조통합, 즉 노조조직 합리화에 대한 분명한 전략을 수립하였다. 조합원 투표를 거쳐 통합을 추진한 결과, 1993년 총회에서 300개가 넘던 가맹조직수가 80개로 줄어들었다(한국노동사회연구소, 1999: 234∼236).

영국·일본

조직 통합은 영국에서도 나타났다. 영국의 보건서비스연맹(COHSE), 공무원노조(NALGO), 공공노조(NUPE)가 통합하여 1993년 출범한 Unison이 그것이다. 이 조직은 조합원 130만 명의 영국 최대의 조직으로 지방정부·대학·학교·전기·가스·상하수도·교통 등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 및 민간부문의 노동자들을 포괄하고 있으며 노조산하에 지방정부·보건·고등교육·에너지·상하수도·교통 등 6개의 업종그룹을 두고 있다. 또한 1999년 5월에는 UniFi라는 금융부문 단일노조가 결성되었다. 이 노조는 은행보험노조(BIFU)와 내셔널웨스트민스터은행 및 파크레즈은행 종업원협회가 합병한 것으로, 조직통합은 최근 10년 동안 금융부문에서 해고, 지점폐쇄, 임금근로조건 하락과 같은 불이익 처우를 받은데 대한 대응방식의 하나이었다.

한편 일본에서도 2002년 9월 젠센동맹·생활섬유노련·화학산업계열인 CSG연합이 UI젠센동맹으로 출범하기까지 계속해서 조직간 통합이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은 기업별노조의 특성과 이념적 모순으로 인해 오랫동안 분열과 통합이 되풀이되어 왔는데 최근에는 최대 전국중앙조직인 연합이 조직방침으로 조직통합을 추진하면서 분할되어 있던 산업별, 업종별 조직들이 통합, 정비되었다.

환경변화에 대응하는 노동조합 조직통합은 국가 단위만이 아니라 국제조직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국제조직의 통폐합은 이미 1955년에 국제식품노련(IUF)과 국제담배노조의 통합, 1961년 국제식품노조와 호텔식당노조의 통합이 있었지만 1990년대부터 광범하고 급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우선 국제식품노련(IUF)이 1994년 1월 국제농원농업관련노련(IFPAAW)과 통합하였고, 1993년 1월에는 IFFTU(국제자유교원노조연맹, 조합원 750만)과 WCOTP(세계교직원단체총연맹, 조합원 1,250만명)이 통합하여 EI(교육인터내셔널 Education International)를 결성하였다. 이어 1996년 1월에는 ICEF(국제화학·에너지일반노련)와 국제탄광광산노동자연맹(MIF)이 합병하여 국제화학·에너지·광산노련(ICEM)이 출범하였다.

국제산별노련

국 제조직의 통합 흐름은 21세기 들어 더욱 거대해졌는데, 2000년 1월1일 출범한 UNI(Union Network International)가 대표적인 조직이다. 이 국제산별조직은 국제상업·사무·전문직·기술노련(FIET; 1998년 현재 136개국, 435노조, 약990만명), 국제커뮤니케이션노련(CI, 국제우편전신전화노조PTTI; 1997년 현재 120개국, 259노조, 409만명), 국제제판인쇄노련(IGF; 1994년 현재 66국, 96노조, 102만명), 국제예술·매스컴·예능·영화·방송노련(MEI; 1997년 현재 65국, 148노조, 30만명)이 통합한 것으로 세계 140개국에 1,000개가 넘는 노조와 1,500만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국제조직 통합의 배경에는 경제구조와 산업구조 및 기술구조의 변화와 노동시장 변화가 작용하고 있다. 실제 기술과 업종분야의 융합으로 과거의 산업별 한계가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다양한 업종의 다국적기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업종의 테두리를 넘어서 유연하고 다양하게 대응할 필요가 생겨났다. 또한 기업의 합병이 점점 급진전하고 있는 가운데 국제경제는 글로벌한 노동조합을 필요로 하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세계의 산업경제가 국경을 초월한 다국적시대로 확대하는 상황에서 노조운동이 종전의 산업별체제와 그 범위를 유지하면서 다국적 기업대책을 모색하고 국제수준의 교섭활동을 전개하기란 사실상 힘든 일이다. 그리고 ILO와 OECD, WTO, 세계은행 등 거대한 국제기관을 상대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과거의 국제산별운동은 유럽중심이었지만 향후 보편적 미래주의에 바탕을 두고 특히 아시아 태평양지역을 비롯한 세계 모든 지역의 노동운동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도 조직통합의 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인 터넷 시대의 세계적인 조합으로서 복합산별화의 경향을 나타내는 조직통합은 과거 이념을 중심으로 분열과 통합, 흡수를 되풀이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즉, 20세기 중반까지 세계노련(WFTU)과 국제자유노련(ICFTU)을 축으로 서로 이념 대결을 하던 것에서 이제는 조직의 생존과 실리적 관점에서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3. 일본 노동운동-분열과 통일의 역사

노동운동 생성과 이념 대립의 기원


일 본의 노동운동은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130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동안 일본 노동조합은 수차례의 통합, 분열, 재통합을 겪었다. 일본의 노동운동은 광산, 탄광, 제사 등 자본주의 근대산업의 발전과 함께 등장한 노동자계급의 자연발생적이고 반항적인 투쟁을 거쳐 형성하였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19세기 후반 활판인쇄공, 철공을 중심으로 한 노조결성으로 이어지고, 1897년 근대 노동운동의 씨앗인 노동조합기성회 출범으로 조직화의 결실을 맺는다. 이후 노동조합이 증가하고 노동쟁의가 거세지면서 노동운동은 빠르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국가권력의 탄압으로 20세기초 10여 년의 ‘겨울의 시대’를 맞고 다시 1912년 우애회 결성을 기점으로 재기의 기회를 잡는다. 우애회는 자본주의 성장과 더불어 조직을 확대하고 1922년에는 직업별 횡단조직으로서 일본노동총동맹(총동맹)으로 발전하였다. 근대 노동조합의 최초 전국 단일조직 출현이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사건 직후 노동운동의 방향전환을 둘러싸고 총동맹은 좌우로 분열하고, 좌파가 1925년 일본노동조합평의회를 결성함으로써 일본 노동운동은 좌우대립과 갈등의 역사에 들어섰다. 국가권력은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 공포하여 급진적인 노동운동을 탄압하였고 1930년 세계대공황과 만주침략을 거쳐 군국주의로 치달으면서 노사협조적 노동운동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군국주의 정권은 1938년 노동조합을 산업보국회 조직으로 대신하고 1940년에는 총동맹마저 해산하고 말았다.

노동운동의 전진과 조직재편의 전개과정

1945 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극도의 생활궁핍에 처한 일본 노동자들은 미군정의 민주화조치를 배경으로 폭풍과 같은 기세로 투쟁을 시작하였다. 노동쟁의는 폭발하고, 전무상태이던 노동조합을 기업별형태로 빠르게 결성하였다. 1945년 12월 무렵 일본에는 509개 조합, 조합원 38만여 명이 조직되었고, 1949년에는 34,688개 조합, 조합원 6,655,483만 명, 조직률 55.89%라는 사상 최고의 경이적인 수준까지 이르렀다. 지역에서도 조직들이 속속 등장하였고 산업별로도 전일본해원조합(1945.10), 국철노조총연합회(1946.2), 전일본교통운수노조동맹(日交同盟, 1946.4), 전일본철강산업노조(全鐵勞, 1946.4), 전섬동맹(全纖, 1946.5), 전체신종업원조합(全遞, 1946.5), 전국공공단체직원노조연합회(全公連, 1946.6), 교직원조합전국연맹(敎全連, 1946.7), 전일본전선관련산업노조연합회(全電線, 1946.7)가 결성되었으며 화학산업계통의 노조들도 업종별로 결합하고 있었다. 또한 1946년 8월에는 전국 중앙조직이 형성되는데 일본노동총동맹(총동맹)과 전일본산업별노동조합회의(산별회의)가 그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총동맹을 주도한 우파 지도자들이 1946년 8월1일 결성한 총동맹은 당시 1,669개 조합, 조합원 85만 5천명으로 조직노동자의 22%를 포괄하고 있었고, 1946년 8월19일 결성한 산별회의에는 21개 조합, 163만여 명, 조직 노동자의 43%가 참가하였다. 이들 두 개의 전국중앙조직은 총동맹-사회당, 산별회의-공산당이라는 노조-정당 관계를 형성하였고 이후 노조의 지도이념과 맥을 같이 하면서 노동전선의 재편이나 통일논의 속에서 항상 초점을 이루게 되었다.

패전 후 일본 노동운동은 산별회의가 주도하였으며, 1947년 2월1일 총파업투쟁 선언은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이 투쟁은 국가권력과 정면대결을 시도한 것으로, 민간과 공공부문을 망라한 400만 조합원이 참가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그 전날 총파업 금지명령을 내려 좌절되었고 반공정책을 앞세운 미군정의 억압과 자본의 반격이 거세지면서 노동운동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되었다. 노동운동 세력은 산별회의 주도 아래 조직 노동자의 84%인 전국의 460만 노동자를 결집한 사상 최초의 전국통일조직으로서 전국노동조합연락협의회(전노련)를 결성하고 격렬한 저항투쟁을 전개하였지만 미군정과 자본측의 반격은 더욱 강해졌다. 1948년의 전국적인 ‘3월 총파업 투쟁’의 금지명령, 공무원의 단체교섭권·파업권을 박탈하는 ‘정령201호’의 공포, 1949년 경제부흥계획 채택과 노동조합법 개악,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벌어진 레드 퍼지의 강행 등이 그것이었다.

2·1총파업의 좌절과 총자본의 공격 속에서 총동맹과 산별회의 안에서는 공산당의 노동운동지배를 배제하려는 이른바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산별회의에서 1948년 2월 ‘민주화동맹’, ‘민주동우회’ 등이 조직되면서 노동운동의 분열과 이탈이 시작되었다. 산별회의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고 미군정의 지원 아래 민주화동맹 세력과 총동맹은 1950년 7월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總評)를 결성한다. 총평은 반공노동조합주의 국제자유노련 가입을 내걸었다. 그러나 1951년 9월 총평은 결성 당시의 운동 기조를 버리고 평화4원칙(전면강화·중립견지·군사기지반대·재군비반대)과 계급투쟁노선을 선언하며 이른바 “닭에서 오리로”의 전환을 단행하였다.

1952년 4월28일 미일강화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은 미군정에서 벗어났다. 이 무렵 총평은 ‘임금강령초안’을 통해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결’을 내걸고 체제변혁을 운동기조로 선언하였다. 또한 총평은 노동법 개정투쟁과 탄광, 전력부문에서 장기파업투쟁을 강행하였다. 이에 대해 총평 내 우파인 해원노조, 전섬동맹, 전영연(全映演), 일방노(日放勞)는 총평의 지도노선을 비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53년 7월에는 총평을 탈퇴하여 총동맹과 함께 1954년 4월 ‘전노회의’(全勞會議)를 결성하였고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는 그 외 조직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의 노동운동은 총평과 전노회의(1964년에 도메이로 개편), 중립노련(1956년), 신산별회의(1949년)라는 노동4단체 체제가 구축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의 노동조합은 패전 후 급속하게 증가하였지만 이념 대립으로 통합과 분열을 거듭하였다. 통합과 분열의 움직임은 전국중앙조직뿐만이 아니라 산업, 지역 그리고 사업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조직에 해당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총평은 결성을 전후하여 산별조직의 재편성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종업원조합을 산업별로 정리, 통합하여 단 하나의 산업별 조합으로 다시 짜고 전국적 산업별 투쟁과 대중투쟁을 전개하여 총평을 강화한다는 구상이었다. 이를 통해 총평은 과거 산별회의나 총동맹 산하조직을 산업 또는 업종별로 조직했으며 산업별 조직재편성의 기준으로는 중산별 원칙을 택하였다(總評40年史編纂委員會, 1993: 134).

총평 결성 당시 산별조합은 국철노조, 일교조, 해원조합, 전산, 사철총련 정도였고 제조업 가운데 금속과 화학산업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었다. 따라서 총평의 산별조직 재편성작업은 금속과 화학산업에 집중되었다. 총평이 노력한 결과 금속산업은 총동맹 산하 금속동맹의 구성조직과 산별회의에서 이탈한 조직 및 중립노조들을 묶어 일본철강산업노동조합연합회(철강노련), 전국조선노동조합총연합회(조선총련), 전국금속노동조합(전금), 전일본전기기기노동조합연합회(전기노련)가 출범하였다. 또한 화학산업은 합화노련과 전화동맹으로 정비되었고, 섬유는 전섬동맹과 전국잠사노동조합연합회(전잠사)가 통합하였다가 전섬동맹이 1952년 탈퇴하고 전잠사를 주축으로 재편한 섬유노련이 남게 되었다.

그 러나 총평의 산업별 조직의 재편성은 조직정비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지만 일부 분야에서는 총평 가맹과 관련한 이념 차이 때문에 조직 사이의 분열과 대립을 낳기도 하였다. 전국조선노동조합(전조선)이 조선총련의 결성에 반대하여 대항 조직으로 남은 사례, 전기노련이 총평가입을 거부한 사례, 전섬동맹이 총평을 탈퇴하면서 전잠노와 분열한 사례, 총동맹 산하에 존속을 주장하여 총평 가맹을 거부한 전국금속노동조합동맹(전금동맹) 사례가 그 예들이다. 조직분열은 뒤에 동맹의 결성이나 신산별, 중립노련을 비롯한 전국중앙조직의 분열 정립의 기초를 이룬다. 결국 총평의 산별 재편성을 통한 노동조합 전선통일은 실패로 끝난 것이다. 이렇게 하여 1960년대 이후 일본의 노동조합운동 체제는 총평·동맹·중립노련·신산별이라는 4자체제에서 총평이 주도하였으나 점차 동맹이 세력을 확장하여 총평의 조직세를 위협하였다. 양 조직은 운동이념과 투쟁방식에서 서로 대립하였고 이 속에서 많은 산별조직과 지역조직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였다. 그런 가운데 1964년 5월 노동4단체의 범위를 넘어서 자동차, 조선, 철강 등 금속관련 노조들이 국제금속노련 일본협의회(IMF-JC, 현재는 금속노협)를 결성하여 노동운동전선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노동운동 통일과 산업별 정비

1970 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경제가 안정성장기조로 돌아서자 1950년대 후반부터 해온 ‘춘투’에 의한 임금인상 중심의 운동방식이 그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리고 종합적인 노동조건 개선이라는 관점에서 정책 제도개선 투쟁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변화로 사상이나 노선상의 차이를 넘어서서 조직을 통일하고 조직역량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한 1969년 총선거에서 사회당의 참패와 야당의 다당화 경향이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노동전선의 재편 통일문제가 부상하였다.

1970 년 11월 민간기업노조로 이루어진 산별조직들은 전국민간노조간담회(전민간)를 결성하였고 11월에는 ‘노동전선통일세화인회’를 발족하였다. 그리고 1972년 3월에는 노동 4단체의 인정 하에 22개 산별조직이 참가하는 ‘노동전선통일민간단산연락회의’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1972년 12월 총선에서 사회당이 입지를 회복하고 공산당은 약진한 반면, 공명당과 민사당이 참패하자, 총평이 노선문제에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여 1973년 7월 22개 단산회의는 해산하고 말았다. 다만 철강노련, 합화노련, 전섬동맹, 전노련 등 10개 단산과 전국민노협은 정책추진의 모체로서 민간행동회의를 구성하고 새로운 활동에 나섰다.

노동전선 통일을 위한 움직임은 1970년대 후반 춘투가 계속 실패하고 노동운동에 대한 위기감이 높아지면서 다시 부상하였다. 특히 총평의 위세가 약화하고 민간노조의 발언권이 강화하면서 민간이 주도하는 80년대 전선통일계획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1979년 3월 중립노련과 신산별이 ‘총연합’을 결성하고 9월에는 노동4단체와 주요민간 단산 간부들 사이에서 ‘노동전선통일추진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이에 대해 공산당계 노조가 조직한 ‘통일노조간’이 강하게 반발하며 기존 전국중앙조직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 때문에 총평과 공산당-’통일노조간’ 사이의 대립관계는 더욱 깊어지고 총평은 1980년 대회에서 ‘통일노조간’ 해체를 결의하였다.

1979 년 9월 결성된 ‘노동전선통일추진위원회’는 통합준비를 거쳐 1982년 12월14일 41개 산업별조직, 425만 명을 포괄하는 전민노협(전일본민간노조협의회)을 결성하였다. 전민노협의 이념인 ‘기본구상’은 ‘힘과 정책’을 분명히 주장하고 노동조합주의, 국제자유노련 지향, 통일노조간에 대한 의연한 태도를 내용으로 하였다. 이에 대해 동맹은 일찍이 동의를 표명하였고 총평은 주류와 비주류가 대립한데다 주류파 안에서도 의견대립이 표면화 하는 등 혼란이 일어났다.

이후 전민노협은 착실히 참가조직을 확대하고 정책제도 개선과제, 임금을 비롯한 노동조건의 유지, 향상처럼 활동영역을 확장함으로써 사실상 전국중앙조직의 위상을 세웠다. 그리고 이 활동을 기반으로 1987년 11월 민간부문의 전국중앙조직으로서 55단산, 약 539만 명을 포함하는 ‘전일본민간노동조합연합회’(연합)를 결성하였다. 이에 따라 동맹과 중립노련은 곧바로 해산하였고 다음해에는 신산별도 해산하여 전후 30여년이나 지속되어온 노동 4단체 체제가 끝이 났다.

이렇게 연합이 출범하자 공공분야 노조를 장악하고 있던 총평은 주도권 회복을 위한 방침을 세우고 연합과 대화에 나섰다. 또한 민간이 앞서는 통일에 소극적이었던 일교조와 자치노도 통일에 적극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89년 11월21일 78단산 약 800만 명이 참가한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연합)가 결성되었고 총평은 그날로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전선의 천하통일에 대해 통일노조간을 비롯한 좌파그룹은 ‘노동전선의 우익적 재편’이라고 비판하고 새로운 결집을 추진하였다. 공산당계인 통일노조간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연합이 출범한 날 140만을 구성원으로 하여 ‘전국노동조합총연합’(전노련)을 결성하였고, 12월9일에는 사회당 좌파계의 노연센터를 중심으로 ‘전국노동조합연락협의회’(전노협, 약 50만명)가 결성되어 연합에 대항하였다.

이러한 노동전선 재편, 통일의 움직임은 산업별 조직의 재편과 통일을 촉진하였는데 석유노련, 지파연합, 금속기계, 인쇄노련 등의 통일 조직이 생긴 반면, 전국일반, 정노협, 자치노, 일교조 등에서는 조직이 분열되기도 하였다.

연 합은 ‘힘과 정책’을 운동기조로 내세웠다. 여기서 ‘힘’이란 양과 질을 모두 갖춘 조직력을 말한다. 이에 따라 연합은 결성대회에서 ‘1000만 연합의 실현’, ‘조직률 30% 회복’을 목표로 내걸었고, 1990년 11월에는 ‘1000만 연합의 실현을 위한 조직화 방침’을 채택한데 이어 1992년 11월에는 전국중앙조직, 산업별조직, 지방연합, 기업별조합 등 각급 조직의 기능과 역할 강화를 명확히 한 ‘조직방침’을 결정하였다.

이와 함께 연합은 활발히 산업별조직을 재편성하고 정비하였다. 1992년 11월 식품노련, 전식품동맹, 전담배가 식품연합을 결성하였고 12월에는 전화동맹, 화학연이 전화연합을 결성하였다. 이어 호텔노련, 관광노련이 레저·서비스연합을 결성(1993.10), 고무노련의 재편으로 고무연합 출범(1993.10), 전화동맹·합화노련 등이 화학연합 결성(1994. 10), 비철금속노련·자원노련·미쓰이금속노련이 비철연합 결성(1996.8), 전력총련·전전력이 전력총련 결성(1996.9), 전화동맹·일반동맹이 통합한 CSG연합 출범(1996.10) 등이 나타났다. 그리고 1998년 10월에는 합화노련과 전국화학이 ‘화학리그21’(일본화학산업노동조합연맹)을 결성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화학리그21과 전일도(全日塗)가 합하여 화학리그21연합이 출범하였다.

또한 젠킨연합과 금속기계가 통합한 JAM이 1999년 9월 출범하였고, 항공동맹과 전일공그룹노조연락회도 항공연합으로 통합하였다. 또한 식품연합과 식품노협이 2000년 12월 식품연맹을 조직하고, 상업노련과 체인노협이 통합하여 서비스·유통연합(2001.7)이 되었으며, 국공총련과 국세노조 등이 합한 국공연합 결성(2001.10)이 이어졌다. 이밖에 2002년에는 젠센동맹, CSG연합, 섬유생활노련이 통합하였고, 철강노련, 조선중기, 비철연합 등의 금속 3조직과 사철총련, 운수노련, 교통노련, 전자교노련 등 교통 4단체 등도 통합준비에 나서고 있다.

UI젠센동맹의 출범과 그 배경

일 본의 노동조합운동이 상황변화에 대한 여러 가지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 9월19일 젠센동맹과 CSG연합 그리고 섬유생활노련이 통합하였다. UI젠센동맹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한 이 조직은 조합원이 약 80만 명에 달하여 연합 산하조직 가운데 자치노 다음으로 큰 산업별 조직으로 등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50여년에 걸친 이들 산업별 조직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일반노조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젠센동맹은 1946년 5월28일 전국 섬유관련 30개사, 40개 공장의 노조대표들이 모여 섬유관계의 산별조직을 결성하자는데 합의하고 그 해 7월31일 117개 조합, 94,000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는 ‘전국섬유산업노동조합동맹’(전섬동맹)을 결성하였다. 전섬동맹은 결성 후 1947년에 방적부회(후에 면방부회), 6월에 화섬부회, 10월에 양모부회(후에 양모마자재부회)를 설치하였고, 1948년 1월에는 마(麻)부회, 1950년에는 지방섬유부회(후에 지방산업부회, 일부는 의류·도매상부회), 1964년에는 생사부회를 설치하여 조직을 확대하였고, 1948년 2월에는 조합원이 50만 명을 넘어섰다. 그후에도 전섬동맹은 계속하여 조직을 확대하였고, 1954년에는 근강견사(近江絹絲)에서 장기간에 걸친 인권쟁의를 감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장과정에서 전섬동맹은 1950년대 초반 총평이 ‘총노동과 총자본의 대결’이라는 계급투쟁의 경향을 표방하고 장기간의 파업을 강행하자, 이 방침에 반대하여 1952년 12월 해원노조 등 세 조직과 함께 총평의 지도방침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53년 7월에는 총평대회에서 용공적인 운동기조를 선택하자, 그 해 가을 총평을 탈퇴하였다. 이후 전섬동맹은 총동맹과 함께 ‘전노회의’를 결성하여 총평과 맞섰으며 1980년대에는 노동운동전선 통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전통 섬유산업이 쇠퇴하자 전섬동맹은 복합산별조직을 지향하여 섬유산업만이 아니라 유통, 도소매상 등 제3차 산업 노동자의 조직화에도 착수하였다. 그 결과로 1970년 2월에 유통부회를 설치하여 조직확대에 적극 나서고 1974년 9월에는 이름을 젠센동맹으로 바꾸었다. 이후 젠센동맹의 조직구성은 섬유관련부문보다 유통부문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업종은 매우 다양해졌다. 젠센동맹은 1994년 부회를 재편하여 총합섬유부회, 총합화학·섬유부회, 의료산업부회, 유통·서비스부회, 식료·서비스부회, 전문점부회, 지방산업부회 등 7개를 설치하였다. 또한 고령화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 복지산업의 조직화를 목표로 2000년 1월 전후 최초로 본격적인 직능별조합인 ‘일본개호(介護)크라프트유니온’을 결성하였다.

젠센동맹은 본부 지부에 약 90명의 조직활동가를 두고 신규조직 확대에 심혈을 쏟았으며, 지역에는 지부를 두어 주로 중소조합의 활동지원과 정치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임금 및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서는 부회별 교섭과 통일투쟁을 기본방침으로 하여 분산되기 쉬운 기업별노조의 약점을 중앙집중으로 보강하고 있다. 젠센동맹은 그밖에 연대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는데 특히 국제활동에 매우 적극적이다. 국제가맹조직이 국제섬유피복피혁노련(ITGLWF), 국제화학·에너지·광산노련(ICEM), UNI, 국제식품노련(IUF), 국제건설노련(IFBWW) 등 7개 조직인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한편 CSG연합(일본화학·서비스·일반노동조합연합)이 UI젠센동맹으로 통합되기 이전에는 화학산업 분야의 전국조직은 CSG연합, 일본화학산업노동조합연맹(화학리그21연합), 전국화학노동조합총연합(화학총연)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것은 화학산업의 범위가 다른 산업보다 광범하고 다양한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념과 역사 배경을 달리한데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만큼 화학산업노조의 역사는 젠센동맹에 비해 훨씬 복잡하다.

원래 일본의 화학산업 계열의 노조들은 다른 노조들과 마찬가지로 기업별노조를 결성하였고 점차 업종별로 조직화가 이루어졌다. 1946년 5월∼9월 사이에 비료부문 3∼4개의 업종노조들이 연이어 결성되었고, 그밖에 전일본노동조합(全日化), 전국화학산업노동조합(全國化學) 등이 발족하였으나 이들 사이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합성화학, 요업, 일반화학산업 분야의 노조들이 통합을 추진하여 1950년 12월 비료부문을 중심으로 ‘합성화학산업노동조합연합’(合化勞連)이 결성되었다. 합화노연은 총평에 가맹하고 급속하게 조직을 확대하여 1966년에는 약13만 명 규모로 커졌다. 이런 한편에 1951년 6월 전국화학의 일부와 고무노련이 ‘화학산업노동조합동맹’(化學同盟)을 결성하여 총평에 가입하였다. 두 조직은 총평 안에서 화학산업의 통일을 시도하여 1977년 ‘합화노연·화학동맹·일반총연합’이라는 협의체를 결성하였고 1979년에는 이를 합성화학산업노동조합연합(합화노연)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1986년 비주류파 5개 조합이 합화노연을 탈퇴하여 전국화학노동조합협의회(전국화학)를 결성하였다. 그 후 합화노연과 전국화학은 연합의 출범에 반대하는 조직들이 이탈하면서 관계를 개선하고 1998년 10월 ‘일본화학산업노동조합연맹’(화학리그21연합)으로 통합하였다.

다음으로 화학총연은 합화노연에 반발한 세력들이 이탈한데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합화노연에 가입한 대기업노조들은 좌익사상·투쟁 중시의 운동기조를 반대하여 1952년부터 합화노연을 탈퇴한 채 중립 상태에 있었고 화학산업노조들은 총평, 동맹, 신산별, 중립노련으로 분산되어 있었다. 이 와중에 중 1971년 탈이념적 운동을 지향하는 노조들이 모여 만든 전국석유화학노동조합회의(全石化)와 1972년에 결성된 화학약장노조연구협의회(化勞硏)가 연대활동을 모색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1973년 화학산업노동조합연락회의(화학노협)가 결성되었다. 화학노협은 1977년 일본화학·에너지노동조합협의회로 발전하고, 1978년에는 총합화학, 석유화학 분야의 새로운 산별조직으로서 ‘전국화학노동조합총연합’을 결성하였다.

마지막으로 CSG연합은 1946년 8월에 결성된 총동맹 소속조직이 그 기원이다. 총동맹에 결집해 있던 화학산업 노동조합들은 총동맹이 1950년 좌우대립으로 해체되고 우파는 1951년 6월에 총동맹을 재건하였지만, 대부분의 노조들이 총평에 가입해서 화학산업의 전국조직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파세력들은 조직재건을 추진하여 1951년 11월 전국화학일반노동조합동맹(全化同盟)을 결성하였다. 한편 1964년 결성된 동퇓은 조직확대를 위해서 산별조직으로 정리하기 어려운 분야의 노동자들을 지방의 일반노조로 결성하고 이들의 전국조직으로서 ‘전국일반노동조합동맹(일반동맹)을 1966년 2월 결성하였다. 그 후 전화동맹은 연합의 조직통합방침에 따라 화학약장노조연구협의회와 통합하여 ‘전화연합’(全化連合)을 결성하고, 1996년에는 일반동맹과 통합하여 ‘일본화학·서비스·일반노동조합연합회’(CSG연합)를 출범시켰다.

4. 결론

일 본의 노동운동은 국가권력과 자본의 억압에 저항하면서 성장·발전해왔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 조직은 통일과 분열을 거듭하였고, 1950년대 이후에는 총평·동맹·중립노련·신산별이라는 이른바 노동 4단체 체제를 형성하여 대립하고 경쟁해 왔다. 그러다가 1989년에 이르러 4단체가 통합해 ‘연합’을 출범시킴으로써 일본 노동운동은 천하통일의 숙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렇다 고 해서 ‘연합’이 일본 노동조합의 유일한 총본산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연합으로의 통일을 노동운동의 우익적 재편이라고 반대하는 전노련과 전노협이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이념 지향을 달리하면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 조직노동자의 2/3 이상을 포함하는 연합이 커다란 정치·사회 영향력을 가지고 노동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와 같은 조직의 통일과 분열의 흐름 속에는 사상과 이념의 차이가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이것은 정당·노조간의 관계로 표출되어 운동을 규정하였다. 곧 제국주의 시대의 노동운동은 좌파성향의 ‘평의회’와 우파성향의 ‘총동맹’이라는 두 세력으로 나누어졌고, 제2차대전 후에도 이 세력판도는 산별회의와 총동맹으로 연결되어 산별회의-공산당, 총동맹-사회당이라는 구도를 형성하였다. 이후 이 체제는 미군정의 지원하에 총평으로 통합되지만 총평이 계급투쟁주의로 경도한데 반발한 일부세력이 총평을 이탈하여 동맹을 결성하였고, 그밖에 중립노련, 신산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 조직은 각기 정당과의 관계를 구축하게 되는데 총평-사회당, 동맹-민사당이 그 대표적인 형태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일본경제가 고도성장에서 안정성장시대로 접어들고, 노동운동이 자본의 공세에 한계를 드러내면서 노동운동에 위기감이 감돌게 된다. 특히 ‘춘투’를 통한 임금인상 중심의 운동방식이 제약을 받아 생활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정책 제도개선 투쟁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고, 이는 다시 노동운동의 역량강화를 위한 전선통일로 집약되었다. 이러한 상황변화를 배경으로 노동운동의 전선통일문제는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하였고, 이를 둘러싸고 특히 총평 산하조직에서는 공산당의 통합반대운동의 영향까지 결합되어 치열한 분쟁이 전개되다가, 결국 ‘연합’결성으로 노동4단체가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연 합이 결성된 후 이념 차이가 완전히 정리되거나 사라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념 분쟁이나 갈등은 과거에 비해 크게 약화되었으며, 조직통합에 이념보다는 조직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실리주의 선택이 우세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젠센동맹과 CSG연합 섬유생활노련의 통합도 그 하나의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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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________, 『平成13年版 勞動運動白書』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