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식민지·종속국 노동운동의 전개

노동사회

20세기 초 식민지·종속국 노동운동의 전개

admin 0 5,531 2013.05.11 09:38

20세기 초에는 노동자들의 조직력과 단결력이 두드러진 발전을 보이는 시기였습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대중적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식민지.종속국가들에서도 노동자계급이 형성되어 꾸준히 발전하였죠. 더욱이 식민지.종속국가들에서 전개된 노동자 투쟁들은 민족해방을 위한 민중적 투쟁과 결합하여 혁명적 성격을 띠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노동운동

20세기 초 10년 동안 미국 독점자본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경쟁상대들을 밀쳐내고 주도권을 움켜쥐었습니다. 그 속에서 토착적인 민족자본주의의 발달은 극히 제한되었죠.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 라틴아메리카 공업의 물질적·기술적 기반은 극도로 취약했습니다. 가장 발달한 나라에서도 소기업의 비율이 압도적이었고, 대규모 생산에서도 주로 값싼 손노동이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공장, 항만, 도로, 시영 공익기업이 급속하게 건설되고 큰 규모의 근대적 산업이 출현했죠. 몇몇 나라들에서는 외국자본이 자동차 조립공장이나 철도차량 공장 등을 창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자신들의 군사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어요.

gskim_01_0.jpg농업 부문에서도 자본주의가 발달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라틴아메리카에서 지배적이었던 대지주의 토지소유와 전자본주의적 착취형태를 폐지시킨 것은 아니었죠. 자본주의적 농업은 전자본주의적 형태와 공존하면서 고용노동을 증대시켰습니다.

공업이 성장하고 농업 부문에 자본주의가 침투하면서 노동자계급도 점차 늘어났습니다. 20세기 초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노동자 총수는 약 150만 명 또는 200만 명 정도였는데, 1917년에는 300만 명 또는 400만 명에까지 이르렀지요. 유럽 대륙에서 흘러 들어온 이민자들이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노동자계급 증가의 중요한 원천이었습니다. 이런 이민은 특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등과 같은 나라들에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형성과 투쟁을 촉진시킨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때문에 자본가들이 노동자 그룹들 사이에서 민족적 불화나 반목을 조장시키려 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죠. 

민족자본주의의 미성숙함과 대지주의 여전한 지배 그리고 외국자본의 억압행위는 노동자들의 상태를 극히 열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흑인이나 인디안 주민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나 일부 국가에서는 전자본주의적 관계가 여전히 유지되었죠. 외국자본은 농업부문에서 다양한 강제노동을 사용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 있는 노동자들은 채무노예와 다름없는 처지였어요.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는 노동관계법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노동일의 기준도 없었고, 임금은 고용주의 의사대로 결정되었죠. 사회보험 또한 시행되지 않았고 노동조합은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이러한 정치적 무권리 상태와 정부의 노동 억압적 정책 그리고 지배세력 내부 끊임없는 아귀다툼의 틈바구니 속에서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노동자들의 투쟁도 활발해졌습니다. 노동조합 조직이 확대되었고, 사회주의 운동이 강화되었죠. 특히 1905∼1907년의 러시아 혁명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이었습니다. 이는 대중적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촉진했고,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형성과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을 강화했죠.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교육조직이나 학습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노동해방이 노동자의 계급적 임무라는 사실을 선전했고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수공업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권주의자들과 치열하게 투쟁하면서, 소비조합이나 생산협동조합을 결성했고 민주적 개혁을 요구하며 선거에 참여하기도 했죠. 한편, 사회주의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들에서는 부르주아 급진주의나 혁명적 민주주의 정당과 사상이 노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와 생디칼리즘도 라틴아메리카의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었죠.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멕시코 등의 항만노동자, 철도노동자, 선원들이 이 시기 라틴아메리카의 파업투쟁에서 가장 선두에 섰던 집단입니다. 1906∼1907년 무렵부터 파업이 점차 고양되기 시작되었는데, 이는 세계경제의 위기상황과 맞물려 있었어요. 파업은 점점 결연해지고 완강해졌습니다. 대중적 정치시위를 수반하는 경우도 늘어났고, 군대와 경찰을 상대로 본격적인 투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파업의 규모도 커지고 파업이 요구하는 것들도 많아졌죠. 특히 노동자의 정치의식과 조직성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높았던 아르헨티나에서는 총파업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파업투쟁들은 노동자의 개별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데서 비교적 광범한 사회·경제적 프로그램의 실시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점차 이행했습니다. 파업참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임금인상을 주장하던 데서 최저임금제를 설치하고 산재 노동자를 원조할 것을 요구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죠. 이들은 또 국가와 기업주 그리고 노동자 자신들이 부담하는 의무적 사회보험제도와 사회보장제도를 시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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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혁명의 여성 전사들, 1911년 ]


한편, 이런 노동자계급의 투쟁들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과 필연적으로 결합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죠. 노동자들의 경제투쟁까지도 어차피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어요. 특히 1906년 6월, 미국 자본이 소유하고 있었던 카나네아 구리 광산에서 멕시코 광산노동자 1만 명이 벌인 대규모 파업은 라틴아메리카 반제투쟁의 역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파업은 사용주측이 이주노동자에게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고 멕시코 노동자들에게 차별대우를 한데서 비롯되었고, 사실상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띠었지요. 

gskim_03_1.jpg20세기 초 라틴아메리카 반제국주의 운동의 최대 사건은 1910∼1917년 멕시코 혁명이었어요. 이 혁명은 제국주의, 특히 미국과 결합된 대지주, 대은행, 대상공업 부르주아지의 과두독재체제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당시 멕시코 노동자들의 행동은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지만, 농민과 소부르주아지 투쟁과 결합되면서 혁명적 정세가 무르익도록 만들었습니다. 혁명과정에서 노동자 무장부대는 독재정권과 그 배후에 있었던 제국주의에 대항해 군사행동을 결행하기도 했죠.

1905∼1917년 시기에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노동운동이 고양되면서, 노동자계급과 계급의식이 형성되었고, 많은 노동조합과 정당이 창설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노동자계급이 반제국주의적 민주주의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인 시기였고, 그와 더불어 국제적 연대도 강화되었죠. 반제투쟁의 진전은 노동자와 중간층, 진보적 지식인, 농민 등을 결합시키고 단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20세기 초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 일어난 반제 투쟁의 주요 특징은 반군국주의였어요. 군국주의가 함축하고 있는 폭압과 전제 때문이었죠. 이와 같은 1905∼1917년에 걸친 경제적·정치적 투쟁의 경험들은 이후 라틴아메리카의 노동운동 발전에서 새로운 단계의 초석이 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아시아에서 민족해방운동과 노동자계급

세계자본주의는 아시아 지역 국가들을 종속국가로 전락시켜 국제적 자본주의 경제궤도 안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민중세력의 저항운동도 성장했죠. 제국주의와 봉건적 군주제에 대항하는 투쟁의 주축세력은 주로 새로운 사회계급과 사회계층, 즉 민족부르주아지와 노동자계급, 도시 소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적 지식인층 등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지도적 역할을 한 것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민족부르주아지였어요.

gskim_04_0.jpg시아 지역에서도 공업이 완만하게나마 발전되는 가운데 임금노동자군, 특히 프롤레타리아트가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시 비교적 발달한 나라들의 민족부르주아지가 이미 계급으로서 형성되어 있었던 것에 비해, 노동자계급 형성과정은 19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910년 즈음에 이르러서도 끝나지 않았죠. 아시아 국가들의 노동자계급의 형성과정은 장기에 걸쳐 복잡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식민지제도, 봉건적 관계의 지배, 그리고 수많은 구속적 전통 때문이었죠.

1900∼1920년 사이 인도,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대도시에서 노동자계급의 중핵이 차츰 형성되었습니다. 아시아의 노동자들은 민족운동에 활발하게 참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열악한 노동·생활조건의 개선을 위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벌이는 등 독자적 계급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식민지·종속국가들에서 행해지는 잔혹한 자본주의적 착취와 수탈, 방대한 노동예비군의 존재가 노동자들의 투쟁을 촉진시킨 것이죠.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면서 아시아 국가들의 노동자 상태는 더한층 악화되었습니다. 

이 시기 식민지·종속국가의 민족들은 제국주의 열강의 비대화된 군대를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식민주의자들은 전략자원과 군사목적에 사용되는 물자들을 싼값에 강제로 수탈해 갔죠. 또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자들이 부족해지고, 투기행위가 성행하면서 물가가 폭등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몰락한 농촌주민들이 도시로 유입되었고, 이는 실업예비군의 엄청난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명목임금의 인상도 거의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죠. 이러한 조건을 그대로 반영하여 이 시기 아시아에서는 부르주아혁명과 민족해방운동이 고양되었고,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파업의 외형은 주로 경제적 요구에 집중되었으나, 실제로는 반봉건·반군주제와 반제국주의적 투쟁 성격을 함축했어요. 그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조직이 주도한 정치행동에 노동자들이 직접 참가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 노동운동이 보인 새로운 특징이었습니다. 

gskim_05.jpg중국의 노동자들은 혁명이 고양하는 시기에 중국혁명동맹회와 그 산하 여러 조직들이 주도한 민족적 반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 많은 노동자계급 조직들이 만주왕조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면서, 공화국·자유·평등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어요. 1905년 4월에는 상해에 위치한 외국자본계의 방적공장 두 군데에서 노동자투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상해와 광주에서는 미국 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미국 본토에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받은 박해와 모욕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죠. 1906년에는 여러 지방에서 광부들이 농민, 수공업자, 병사들과 더불어 반왕조 투쟁을 일으켰습니다. 중국 노동자들은 1911년 혁명운동에도 참여했어요. 

1905∼1908년 시기 전개된, 식민지주의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정치투쟁은 인도의 민족운동에서 이전에는 거의 찾을 수 없었던 특징적인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대중적 정치투쟁은 인도 국민회의의 온건파 지도부 의지에 반하는 것이었죠. 1909년 고조되었던 인도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은 1910년과 1911년에는 대중적 파업 건수가 감소하는 등 잠시 쇠퇴했습니다. 하지만 1912년 들어서는 다시 고양되었죠. 특히 광산노동자들이 투쟁을 선도했습니다. 인도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도 확대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서 파업 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필리핀에서는 1914∼1917년 사이 연 평균 22건의 파업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1909∼1913년에 비해서 두 배에 해당하는 건수였습니다. 

1905∼1917년 사이에 아시아 국가들에서 일어난 파업은 대부분 임금인상과 노동일의 단축을 요구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파업투쟁의 특징은 노동자상태의 개선을 위한 경제투쟁의 경우에도 매우 전투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노동자들은 단결력을 과시했고 강한 연대를 보였습니다. 이전까지는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던 노동자계급의 뒤쳐진 계층, 즉 농업노동자, 마차부, 쿨리, 가로 청소부 등도 이 시기에는 파업에 참가한 데서도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지요. 식민주의자들과 종속 정부는 이러한 파업투쟁에 잔혹한 탄압으로 대응했습니다. 파업을 깨뜨리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기도 하고, 파업 주도자들에게 사형이라는 극형을 집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둔 투쟁 사례는 점점 늘어났죠.

이 시기 아시아 노동자들의 투쟁은 대부분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으나, 이를 통해 노동자 조직화는 현저하게 진전했습니다. 파업이 증대하는 가운데 노동조합에 가까운 형태의 조직이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조직의 창설을 이끈 것은 민족운동을 주도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었어요. 어쨌건 19세기 말에 나타나기 시작한 노동자 조직의 맹아형태는 20세기 들어 드디어 노동조합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북아프리카 노동자계급의 투쟁

gskim_06.jpg제국주의 국가들의 자본침입은 북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진행된 경제발전의 규정적 요인이었습니다. 이런 자본침입은 임금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켰죠. 그리고 유럽 사람들에 의한 토지 수탈과 공동체 농업의 해체 그리고 가혹한 조세 부담 등은 임금 노동자 형성을 촉진시킨 요인이었습니다. 한편,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북아프리카 지역의 직접 생산자들은 제국주의자들의 경제수탈로 인해 광범하게 몰락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은 노동자의 빈곤화로 이어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 빈민층과 실업자들을 양산했습니다. 

1911∼1918년 시기 북아프리카의 총 노동자수는 대략 150만 명 정도였고, 그 절반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초기 노동자 그룹은 대부분 유럽에서 온 이민들이었어요. 1910년 즈음에는 알제리와 튀니지에서만 11만 6천 명의 노동자들이 존재했습니다. 이민 노동자들은 프랑스인 말고도 이탈리아인, 에스파냐인, 몰타인 등 다양했죠. 한편, 아랍인 노동자들의 상태는 열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계절노동자들에게는 대게 주거 시설이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노숙을 해야만 했어요. 차마 견디기 어려운 노동조건 때문에 아랍인 노동자들 중에는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토착 농민들 대부분은 절망과 아사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침탈자의 농장이나 광산 또는 운수부문에서 일하지 않을 수 없었죠. 게다가 기업주들이 노동자들을 통제하는데 활용한 벌금제도나 공제제도, 그리고 고리대금 때문에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채무노예의 처지에 놓여있었습니다. 

이처럼 아랍인 노동자들은 혹독한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공장노동자층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일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미성숙했기 때문에 아랍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지 못 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파업투쟁을 전개하거나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한 것은 오히려 유럽인 노동자들이었어요. 1905년 이후 알제리, 튀니지, 이집트 등에서 유럽인 노동자들의 파업은 일상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아랍인 노동자들도 점차 파업에 참여했죠. 북아프리카 노동자들이 내건 것들은 주로 경제적 요구, 즉 노동조건 개선, 임금인상, 노동일의 단축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경제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투쟁이라 할지라도 정치적 성격을 짙게 띠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식민지 권력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금지와 탄압으로 일관했습니다. 튀니지에서는 1905년에 노동조합과 시위를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됐고, 1906년 알제리 시에서 거행된 메이데이 행사에서는 시위 참가자를 위협하기 위해 군대가 동원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권력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의 기세는 점점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노동조합의 성장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죠. 1905년에 이집트에서 항만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1906년에는 담배노동자와 은행종사자의 노동조합이 조직되었습니다. 1911년에는 튀니지에서 프랑스노동총연맹의 지부가 출현했습니다. 이러한 노동조합 조직들은 파업을 이끌었고 많은 부수는 아니었지만 신문을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초기 노동조합들은 대개 유럽인 노동자들만을 포용하는 것이었어요.

gskim_07.jpg토착 노동자들은 독자적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1909년 이집트에서 결성된 수공업 노동조합이 북아프리카에서 아랍인 노동자만을 가입 대상으로 한 최초의 노동조합이었죠. 이 노조는 알렉산드리아, 이스마이리아, 포트 사이트에 지부를 설치했습니다. 또, 튀니지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아랍인 철도 노동자들이 그들의 상호부조 금고를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랍인 노동조합들의 성장함에 따라 민족적 억압을 받았던 광범한 주민대중을 투쟁대열에 끌어들일 수 있었죠. 그리고 아랍인 노동조합은 반제 민족해방투쟁을 지향하는 아랍인 노동자계급과 유럽인 노동자 사이의 연대의 기반 노릇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북아프리카에서 전개된 노동운동은 민족해방투쟁과 더불어 발전했습니다. 이집트에서 민족해방과 독립을 지향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당인, 와타니 당(Watani Party)이 결성된 것도 이 무렵이었죠. 튀니지와 알제리에서는 청년 튀니지 당과 청년 알제리 당이 창설되었습니다. 이 정당들은 아랍인과 프랑스인의 평등, 원주민의 교육·훈련 확대, 근대적 농업방법 동원을 위한 국가원조 등 부르주아 민족주의운동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북아프리카 지역의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심한 탄압을 받게 됩니다. 이집트와 튀니지에서는 수많은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들이 검거 당하거나 국외로 추방되었고, 타국으로 망명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또 모로코와 리비아에서는 정복자들에 의해 계엄체제가 선포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민족해방운동의 후퇴는 제국주의자들의 일시적 승리였을 뿐이었어요. 제1차 세계대전은 북아프리카 식민지에 존재했던 사회적 모순의 첨예화를 가져왔죠. 이것이 결국 그 이후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전개를 위한 기반이 됩니다. 

남아프리카 노동자계급과 노동운동

gskim_08.jpg남아프리카 지역의 노동자계급 형성 토대 역시 외국자본의 진출이었어요. 1918년께 식민주의자의 기업들에서 종사한 노동자수는 106만 명 정도였습니다. 아랍인과 인도인 그리고 유색인 노동자 35만 명이 공업부문에서 일했고, 45만 명 정도는 농업부문에서 일했습니다. 이후 금이나 다이아몬드 광산과 관련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이 부문에서 일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집에서 떠나온 노동자들이었죠. 

남아프리카 연방에는 아프리카 인 외에도 공업과 철도운수 부문의 대체로 숙련을 요하는 작업에서 일하는 약 26만 명의 유럽인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 연방 식민지경제의 기초를 떠받쳤던 것은 아프리카인 미숙련 노동자들이었죠. 20세기 들어서는 유럽인들이 도맡았던 작업에 토착민들도 참여하기 시작했으나 대부분 아프리카인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은 비인간적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히 농장에서 일하는 아프리카인 노동자들은 더욱 비참한 상태였어요. 

20세기 초 남아프리카의 노동운동은 수십 년 동안에 걸쳐 고양되었습니다. 파업의 형태와 방법뿐만 아니라 제기된 요구의 성격까지도 그러했죠. 유럽인 노동자들이 광산에서 대규모 저항투쟁을 벌인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1907년 5월 란드 광산에서는 발파공 조합의 주도로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아프리카인이 조작하는 굴삭기계를 제어하는 유럽인 직장의 임금을 15% 삭감하고 동시에 작업을 증대하는 것에 대한 항의에서 비롯되었는데, 갱내 유럽인 노동자의 반 수 이상이 참여했어요. 유럽인 노동자의 투쟁은 아프리카인 노동자들의 투쟁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아프리카인 노동자 투쟁은 초기 조세반대 투쟁이나 고용주로부터 도주하는 형태의 소극적 저항에서 노동자 조직을 적극적으로 결성하고 파업을 일으키는 것으로 진전했죠. 1910년 이후 파업은 토착 노동자 투쟁의 중요한 형태가 되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남아프리카에서 전개된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를 선전·보급한 그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이 아니라 소부르주아 급진파였죠. 1902년 케이프타운에서 사회민주연맹(SDF)이 창설되었습니다. 사회민주연맹은 인민을 위한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목표로 설정했고 인종적 편견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민족적 억압에 대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지 않았죠. 게다가 연맹이 내건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식민주의자의 억압에서 원주민이 해방되는 것을 지향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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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주의자들에게 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가 진압된 사람들의 모습 ]

열대아프리카 노동자의 저항

20세기 초 외국자본이 활발하게 진출하면서 열대아프리카 경제는 질적으로 크게 변화하게 됩니다. 초기 몇 년 동안 주로 삼림자원과 상아를 약탈했던 제국주의 열강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즈음에는 원료생산 분야를 표적으로 삼았죠. 이에 따라 남로디지아, 니아살란드, 탕가니카, 케냐와 콩고 등에서 농원경영이 확장됐고 황금해안, 나이지리아, 콩고, 남로디지아 등에서는 광산업이 발전했습니다. 원주민들을 이러한 분야에 끌어들이기 위해 세금을 자본주의적 노동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화폐로 내도록 하는 제도가 이용되었습니다. 이러한 화폐 과세제도는 세계대전이 개시될 때쯤에는 열대 아프리카 거의 모든 곳에 보급되었죠. 그리고 노동계급이 점차 형성되던 이 시기 노동자들 거의 대부분은 심한 착취와 억압을 행해지는 대규모농장(Plantation)에서 일하고 있었죠. 

20세기 초 열대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사회의 계급분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노동자계급이 농민층에서 미처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노동운동은 초기 발전단계에 머물러 있었어요. 노동자들의 전형적인 투쟁형태는 작업장으로부터 집단도주를 하는 행위, 징모인에게 제재를 가하는 행위, 납세를 거부하는 행위 등 소극적인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저항의 새로운 형태, 즉 파업도 제기되기 시작했죠. 이 시기 열대 아프리카의 파업투쟁은 계급의식의 초기단계를 반영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식민지 착취체제 그것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착취 형태와 방법을 거부했을 뿐이었죠. 이 시기 아프리카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종족적 공통성의 틀 속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때문에 서아프리카의 많은 도시에 존재했던 종족적 상호부조 조직, 문화 계몽조직, 종교조직 등이 노동운동에게 규정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열대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인 최초의 노동조합은 서아프리카의 영국령 식민지에서 결성되었습니다. 노동조합의 형성은 파업이 승리한 결과였습니다. 1912년 남나이지리아에서 결성된 철도노동조합도 그러했지요. 그러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시기 열대아프리카 지역의 노동자들 행동과 조직은 미성숙한 채 맹아적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20세기 초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식민지·종속 국가들의 노동운동은 사회적·정치적으로 각각 다양한 발전 단계를 거쳤습니다. 

20세기 초반 10여 년 동안 라틴아메리카 노동자들의 운동은 정치적으로 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투쟁은 한층 더 조직적으로 되었으며, 노동자 계층과 그룹 사이의 계급적 연대도 성장했습니다. 총파업이 자주 일어났고, 노동조합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이 폭넓게 전개되었죠.

이 시기 아시아 피억압국가 노동자들의 투쟁은 아직은 민족해방운동의 한 부분으로 머무르고 있었으며, 자연발생적 성격을 짙게 내포했습니다. 그러나 투쟁은 점점 완강하져 갔고 때로 부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전화했습니다. 흔히 시위와 집회를 수반했죠. 노동자들의 단결이 강화되었고, 노동자 투쟁이 민족해방을 목표로 한 정치투쟁으로까지 고양되는 경우도 많았어요.

자연발생적 반란이나 식민주의자들이 운영하는 기업으로부터 행하는 집단적 탈주 등 소극적인 양상을 보였던 아프리카에서는 이시기 노동계급이 점차 형성되어 가면서 파업투쟁이 발생하기 시작했죠. 

노동자의 투쟁수준과 투쟁방법은 각각 식민지·종속국가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매우 상이한 양상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노동자 투쟁은 어디서든 민족해방운동의 큰 줄기를 이루었죠.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의 젊은 노동자계급은 국제노동운동에 점점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진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다음호에 계속)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