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노동운동의 지평

노동사회

새로운 노동운동의 지평

admin 0 4,650 2013.05.11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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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대전이 끝난 후 게릴라와 노동자들이 공장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

가톨릭과 조합주의

파 시즘 치하에서 이탈리아 노동운동은 지하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노동총동맹 역시 비합법(clandestina) 조직으로서 활동을 하게 되었고, 파시스트 노조들은 국가의 묵인아래 거의 유일한 합법 노조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시기에도 자발적이고 조직적인 투쟁과 파업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1931년에 발생한 곡물수확 일용직 여성노동자들의 파업부터 1935년 또리노 노동자들의 파업까지 매년 끈질긴 저항투쟁이 이어졌다. 그러나 투쟁은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전국에 걸친 대규모 연대파업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 원인은 투쟁조직의 비합법성 외에도 파시스트 노조의 방해, 그리고 가톨릭계 노조의 개입 때문이었다.

가 톨릭계 노조는 1918년 교황 레오 13세의 칙령을 근거로 성립된 ‘흰색동맹’을 말하는데, 흔히 좌파적인 적색노조와 대비하여 백색노조로 불렸다. 가톨릭이 무솔리니 정권에 호의를 갖기 시작한 것은 정권 초기 단행됐던 교육개혁이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교황과 무솔리니는 1929년 2월11일 라테란 조약을 체결함으로서 공식 협력관계를 맺었다. 라테란 조약은 파시즘과 가톨릭을 동등하고 독립적인 실체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조약으로 가톨릭은 초등학교에 이어 중등학교에서도 종교 교육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고 정신적으로 온 국민을 지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정치 영역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가톨릭 신도운동 조직이 파시즘으로부터 합법성을 인정받음으로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여전히 막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한편 무솔리니는 가톨릭과의 협력 관계를 맺음으로서 도덕적으로 정권의 정당성을 입증받을 수 있었고 정권유지를 위한 가장 커다란 국내 세력을 자신의 영향력 안에 놓음으로서 그토록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

지하로 숨어 들어간 노동총동맹을 비롯한 노조들이 파시즘 정권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는 동안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노조와 백색노조들을 동원하여 새로운 노조원리를 제시하였다. 흔히 ‘조합주의(corporatismo)’라고 부르는 이 원칙은 기존 노동운동의 원칙과 목표를 수정하여 노동운동을 새로운 전체주의 국가 건설의 목적에 부합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새로운 노조원리를 따르는 노동운동은 당시 노조기구의 법적 근거였던 노사협의체를 두지 않고 노조의 정치 목표나 경제 목표는 조합원들인 노동자들의 일반 이익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계급투쟁에 의한 혁명이나 국가의 전복이라는 공산주의적 목표를 노동운동의 목적에서 삭제하였다. 물론 이 원리 자체를 파시즘이 처음으로 고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파시즘이 초기의 조합주의 원리를 국가 통치의 기본 조류로 받아들이면서 조합주의 성격이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실제로 조합주의에 근거한 노동운동은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하고, 노동운동의 방향을 자본주의 체제와 질서에 부합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방향설정은 초기 파시즘의 노동정책에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체제 후반으로 갈수록 조합주의 성격의 노조는 파시즘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고 경제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파시즘의 몰락과 함께 이들 노조와 지하로 잠입했던 노동총동맹 지도부들이 전후 이탈리아 노동운동을 결정지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요인에 의해서였다.       
                    
전후 경제 재건과 노동조직의 통일

파 시즘에게 가톨릭과의 동거는 지지기반 확충이란 무형의 효과를 가져왔지만 궁극적으로 파시즘과 가톨릭은 양립하기 어려운 세력이었다. 사회주의나 자유주의에 반대한다는 사실, 계급이나 혁명을 부인한다는 점, 그리고 도시보다는 농촌을 지향하는 요소가 파시즘과 가톨릭이 갖는 공통 사상이었지만, 근본적으로 파시즘과 가톨릭은 서로 다른 사상과 이념이었다. 결국 국민적 합의를 끌어내는데 실패한 파시즘이 선택한 최후의 해결책은 군국주의와 전쟁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고 전쟁의 패배와 함께 파시즘은 몰락하였다.

파시즘이 몰락한 후, 새로운 이탈리아 재건을 두고 수많은 정파들과 세력들이 모여서 논의를 했다. 이중 가장 중요한 세력은 반파시즘 운동을 이끌었던 여러 정파들과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이었다. 무솔리니 정부가 무너진 뒤에도 연합군은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한동안(1943년~45년) 이탈리아 반도를 해방시키지 못했고, 그사이 반파시스트 저항운동이 북부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조직되었다. 노동운동 지도자들 역시 이들 저항운동을 지도하면서 예전의 노동조직을 재건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흩어진 노동조직을 새롭게 정비하는 일은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향후 방향을 마련하는 것뿐 아니라 전후 노동운동의 현실 측면에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이를 위해 각 정파들간의 모임과 회합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파시즘에 의해 약화된 노조의 재건을 위한 통합논의 필요성이 자주 거론되었다. 1944년 공산주의 계열의 대표 까네바리(Canevari)와 사회주의 계열의 대표 디 비또리오(Di Vittorio), 그리고 기독민주주의 계열의 대표 그란디(Grandi) 사이에 체결된 ‘로마협약(patto di Roma)’은 이러한 시도의 결정판이었다. 분열된 노동조직을 하나의 통일기구로 통합하고자 했던 이 협약은 이탈리아 노동운동 역사에 기념비와 같은 사건이었다. 노조의 통합논의가 처음 시작되었던 것은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부오찌(Buozzi)와 디 비또리오가 감옥에서 나눈 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기 가톨릭을 배제한 통합논의에서 가톨릭을 포함한 통합논의로 방향을 바꾸면서 이탈리아 노동운동사 최초로 통합노조 CGIL(Confederazione Generale Italiana del Lavoro)가 결성되었다.

최초의 통합노조였던 만큼 조직의 강령이나 구체적인 내용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44년 6월14일에 발표된 ‘로마협약’의 합의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내부민주주의의 보장으로 노조간부들과 지도부 선출에 있어 소수파에게도 비례에 따른 참여와 기회 보장, 둘째 정치적 입장과 종교적 신의에 대한 상호보장과 존중, 셋째 국가 이익과 노동자 대중의 자유와 이익을 보장하고 발전시키는 범위 내에서 정당과의 관계 설정이 가능하며, 원칙적으로 정당으로부터 독립적인 위치를 갖는다 등이 기본적 합의 내용이다. 성향이 다른 세 정파의 이념을 통일시키기 위한 원칙을 합의한 것이 아니라 조직 수준에서 기본원칙을 천명한 이와 같은 합의사항은 통합노조 건설이란 현실의 한계를 담고 있었다.

오랜 파시즘 지배 하에서 탄압받던 노동자들은 새로운 통합조직을 열렬히 지지하였다. 연합군이 점령한 지역과 북부 농장지대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세를 확장하던 CGIL은 1945년 1월 나폴리에서 개최된 제1차 전국대의원회의를 기점으로 100만이 넘는 회원 수를 확보하게 된다. 조합원 수는 이탈리아 전역이 해방된 이후 기하급수로 늘어났다(1945년 7월에는 약 300만에 달하게 된다). 이런 확대는 CGIL이 1948년에 분열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전쟁의 종결과 국토 해방은 CGIL에게 조직강화와 경제건설이라는 두 가지 임무를 함께 주었다.

파시즘 정권기의 경제상황은 당시 유럽의 여러 국가들에 비하여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산업발전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토대와 사회 안정을 추구하면서 군수산업 위주의 경제질서 개편에 힘을 쏟아 전체 국민경제는 그다지 개선되지 못하였다. 이는 지나친 관료주의와 함께 정권유지를 위한 재정정책, 그리고 세계경제와의 동반발전이 아닌 자급자족적 경제성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로 1922년부터 1938년 사이 일인당 국민소득은 매년 1%의 성장에 불과한 16.1%를 기록했고, 이에 반해 실질임금은 오히려 19%나 하락하는 등의 뚜렷한 경기침체와 역행의 결과들이 나타났다. 따라서 통일노조의 시급한 과제는 노동자들에게 경제 번영과 안정을 통한 실질임금을 보장하고 이전의 높은 실업율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그 러나 종전은 높은 인플레를 가져왔고 실질임금의 하락과 높은 실업율을 가져왔다. CGIL의 당면목표 역시 노동자들의 실질소득 보장과 경제적 지위향상이었기에 이의 해소를 위해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당시 CGIL의 조직과는 별도로 북부 이탈리아의 산업지대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던 공장 내부의 경영평의회(Consigli di Gestione)이다. 공장평의회는 파시즘 정권기에 형식적으로 설치된 것이었는데, 1945년 국가해방위원회의 행정명령에 따라 경영자와 노동자가 동수로 참가하는 노사합동 공장경영위원회로 성격이 바뀐다. 이 위원회는 반파시즘 운동을 통해 경영권 참여를 획득한 노동자들이 기업내부의 발전계획이나 노동자들의 임금과 복지까지 관여할 수 있었던 제도적 장치였다.

그런데 이 경영평의회의 역할과 위상을 두고 CGIL과 당시 정치 실권을 쥐고 있던 3당(공산당, 사회당, 기민당)이 대립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CGIL의 입장에서는 이 경영평의회를 활용하여 조직강화와 세력확장을 도모하려 했고, 3당 역시 경영평의회가 CGIL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결국 경영평의회는 노동운동에게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노사협의체였음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1950년대에는 이름뿐인 기구로 전락하였다. 한편 CGIL은 노동자들의 사회적·경제적 보장을 위한 실질 대책이라 할 수 있는 연동 임금제(Scale Mobile)를 시행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연동 임금제는 높은 인플레와 실질임금의 하락을 보전하기 위하여 1947년 입법화됨으로써 1950년대의 경제성장기에 노동자들의 소득증대에 커다란 기여를 했던 제도이다.

CGIL의 현실적이고 실효성 있는 정책들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통합노조의 운명은 그리 오래 갈 수 없었다. 동상이몽을 꿈꾸는 세 개의 다른 정파가 한 지붕 아래 오래 동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CGIL의 분열은 전후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이 가장 커다란 요인이었다. 국내적으로는 기민당과 공산당 그리고 사회당이 연합하여 정권인수 활동을 하고 있었고, 미국 주도의 연합국 입장에서는 공산당이나 사회당의 정권 참여를 탐탁하게 생각했을 리 만무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CGIL의 역사적 성과는 또 다시 재편과 분열이라는 수순을 밟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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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전 후 노동자·농민들의 집회. 소득세를 폐지하라는 팻말이 있다. ]

통일노조의 약화와 분열

파 시즘에 동조하던 자본주의 계급은 파시즘의 몰락과 함께 사회적으로 커다란 위기에 처하였다. 새로운 정치 질서와 경제 부흥의 임무는 반파시스트 운동을 주도하던 정파들에게 주어졌다. 공산당과 사회당, 그리고 기독교민주당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종전이 되면서 새로운 이탈리아를 건설할 주체가 되었고, 이에 연합군정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에서 정치 지형이 짜여질 수 있도록 직간접으로 개입하게 된다. 당시 연합군정은 공산당 세력의 강력함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공산당이 집권세력이 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정치적으로 다양한 개입정책을 수립하여 실행하였다.

연합군정의 입장에서 보면, 이탈리아 반도의 경제 이익을 실현시키고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건설에 적당한 세력은 가톨릭과 자본가들이었다. 종전 후 연합군정은 소수였던 가톨릭에게 많은 경제 지원을 했고 이탈리아 정치세력을 대표할 수 있는 정파가 될 수 있게 지원하였다. 여기에는 미국 자본주의의 개입이 가장 두드러졌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가톨릭 교권과 미국의 자유주의 노조들을 이용해 개입하였다. 또한 정치적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가입추진 역시 이와 같은 책략의 일환이었다.

반파시스트 세력중심이었던 이전의 정치적 세력관계가 다시 자본가들과 가톨릭에게 기울면서 노동운동의 세력 판도도 변하게 되었다. CGIL의 출범 당시 모든 정파가 동등한 지분과 정치적 위상을 가졌었지만, 1947년 6월 피렌체에서 열린 전국대의원대회에서는 CGIL 내의 세력분포가 완전히 변하였음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총 570만 명에 달하는 전체 조합원 중에서 약 80%에 해당하는 480여만 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공산주의 계열이 유효표의 57.8%을, 사회주의 계열은 22.6%을, 기독민주계가 13.4%, 사회민주계가 2.2% 그리고 공화계가 2.0%의 득표율을 차지하였다. 공산당이 반파시즘 운동의 주역으로서 파시즘 정권 하에서 노동총동맹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이와 같은 세력 변화는 출범 초부터 결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초기의 정파별 균등분할이라는 원칙이 세력분포에 따른 비례원칙으로 바뀜으로써 각 정파별 이해관계와 정책들은 첨예하게 충돌하게 되었고, 결국 이는 정책과 정치 노선의 분열이라는 극단적 결과까지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와 같은 노동운동의 지형 변화를 수반했던 결정적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탈리아 국내외의 정치적 상황변동이었다. 이미 기술했듯이 전쟁이 종료된 후 반파시즘 운동의 주도 역할을 했던 3당의 연정과 연합군정의 정치적 개입은 1950년대 이탈리아 노동운동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공산당(PCI)과 사회당(PSI) 및 기민당(DC)은 초기 반파시스트 저항정신에 합당한 개혁정책들을 입안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정은 공산당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유일한 권력 파트너로 기민당을 선택하게 되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기민당을 지원하면서 미국이 중심이 된 연합군정은 냉전 논리를 들어 공산당과 소련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공산당을 국가권력의 영역에서 고립시키려고 하였다. 결국 연합군정은 나토 가입과 마샬 플랜에 의한 경제 원조 등의 정책을 통하여 일반국민들의 호의를 이끌어 내고, 행정관료 부문과 산업경제 부문에서는 이전에 파시즘에 동조하였던 세력들을 중용하면서 공산당과 비우호적인 사회당 세력들을 약화시켜 나갔다.

1948 년이 되자 이와 같은 정황에서 CGIL의 분열은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초기 소수파였던 기민당은 데 가스페리(De Gasperi)를 정점으로 미국의 절대적 지원과 가톨릭이라는 교권을 바탕으로 자본가 계급의 옹호 속에서 분리의 구실만을 찾고 있었다. 결국 1948년 7월14일에 발생한 똘리아띠 암살 기도사건으로 발생한 총파업 요청을 구실로 일방적으로 탈퇴결정을 하는 동시에, CGIL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탈퇴함으로써 한 지붕 세 가족의 동거는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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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CGIL 주최의 노동절 집회 ]
     
노동조합조직의 정비와 새로운 출발

기 독민주계의 탈퇴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것은 ACLI(Associazioni Cristiane di Lavoratori Italiani)라는 가톨릭계 노동단체와 ‘가톨릭 행동단체’ 및 미국의 AFL-CIO 등이었다. CGIL에서 탈퇴한 뒤 가톨릭 노조단체들은 7월22일에 ‘자유이탈리아 노동총동맹(LCGIL)’이라는 노조를 결성한다. 1949년 또 다시 CGIL내에 남아 있던 사회민주계와 공화계가 사회당에서 탈당한 일부 지도자들과 함께 탈퇴하고, 이들 중 소수가 뜻을 같이하는 가톨릭 계와 함께 1950년 4월 CISL(Confederazione Italiana dei Sindacati Lavoratori; 이탈리아 노동조합동맹)을 결성하였다. 이어서 지나친 기독민주계의 세력확장을 우려한 나머지 다수 그룹들은 UIL(Unione Italiana dei Lavoratori; 이탈리아 노동자연맹)라는 새로운 노조를 결성함으로써 통합노조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이후 노동조직의 ‘3국 시대’가 새롭게 시작된다.

CGIL

일부 세력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노동운동 내부에서만큼은 CGIL의 위상은 그다지 커다란 타격을 입지 않았다. 더군다나 탈퇴한 새로운 두 단체가 기본적으로 표방한 반공 이념은 노동운동 내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외부환경의 변화에 따른 세력축소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내부 모순과 침체에 따른 위상저하로 CGIL은 CISL과 UIL의 상대적 역량강화의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CGIL 은 직종과 이해가 다른 전체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다보니 지나치게 중앙집중적인 조직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는 공장 단위나 하부의 기층노조원들의 의사반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노조원들과 지도부가 따로 따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수많은 개별 직종과 분야의 노동자들을 대변하고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여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임금노동자뿐만이 아니라 사무직과 전문직노동자들까지 포괄하는 구조로서는 이해관계가 다른, 때로는 반대적이기까지 한 이들의 관계를 조정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러나 CGIL의 기본 정책방향은 분열된 노동운동 세력을 다시 한 번 결집하고, 사회 세력관계를 기반으로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사회가 수용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미쳐 개혁과 사회의 전반적 방향이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조성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CGIL은 임금노동자들의 실질적인 노동조건의 개선과 임금인상을 통한 생활기반의 상승이라는 전술 목표를 세웠다. 또한 장기적으로는 사회주의 색채의 경제정책을 통하여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을 최대전략으로 삼았다.

CGIL의 이와 같은 기본방침은 이후 여러 번의 전국대의원대회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가시화 되었지만, 기민당 연합정부에 의해 좌절되거나 변경되었다. 좌절과 변경은 노동운동 세력의 분열 이후 경제성장이라는 국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것은 경제 지표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전후 이탈리아 경제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매년 평균 9%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이에 반해 임금 인상률은 1948년에서 1954년 사이 1%미만을 기록하였고, 실질 임금 인상률 역시 평균 2%에 그치게 된다. 따라서 국가는 고도의 경제성장 발판을 마련했지만 실질적 의미에서 선진산업 형태를 갖거나 노동자를 위한 복지사회 건설은 여전히 요원한 것이었다.       
     
따라서 여전히 CGIL은 이념과 종교를 달리하는 여러 직종과 계층의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노동운동의 구심점으로서 1950년대와 1960년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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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피아트 공장 "500b"라인의 노동자 ]

CISL

초 기 CISL의 반공적 입장을 버리고 노조 본연의 자세를 취하게 된 것은 CGIL에 반대하는 투쟁만으로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현실요인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직 지도부의 구성원들이 여전히 기민당의 당직을 유지하거나 간부를 겸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게다가 계속 지원을 받아온 미국의 대표적 반공노조인 AFL-CIO의 이념과 원칙에 동조하는 경향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폭도 이와 같은 입장 안에서 결정되었고, 이는 조직 확장의 한계 요인으로 작용했다.

CISL은 노동원칙에 의한 노동조직이라기보다는 종교와 정치적인 입장에서 노동운동을 지배하는 우익 노조로 보는 것이 합당한 단체였다. 국가경영의 원칙에 맞추어 순응적이고 종속적인 성격을 갖으며, 다소 배타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도 CISL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1950년대의 노조운동 약화기를 거치면서 세력확장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경제부흥 기간에는 현상유지적 원칙이 노동자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CGIL에 이어 제2의 노동조직으로 발전하게 된다.     

UIL

CGIL 이나 CISL에 비하여 조직의 규모가 비교적 작았던 UIL은 초기 CISL보다 보수적 입장을 견지했다. 이들의 기본 입장은 ‘민주적 사회주의자’라는 표어로 집약될 수 있을 만큼 중도적 사회주의를 표방하였다. 1960년대 이후 이탈리아 중도-좌파 연정이 성립하던 시기가 이들의 모토에 걸맞은 성장 시기일 것이다. 초기 반(反)CGIL 투쟁 방식에서 탈피하면서 이들 노조가 세력확장의 정책 기조로 삼은 것은 현장 노동자들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와 같은 투쟁방향은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하여 CISL보다도 강경한 임금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기회주의 성격을 띠기도 했는데, 이는 사안에 따라 연대와 협력의 대상을 결정하는 원칙이 없는 행동강령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들은 사회문제나 국가의 민감한 정치 문제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입장을 표명하여 조직 내의 진보 성향의 조직원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사태가 종종 벌어지기도 하였다. 주로 CISL과 경쟁적 관계를 가졌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 선별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하였고, 1960년대 중도-좌파 정부의 수립으로 세력 확장의 일대 전기를 맞이함으로써 제3의 노동단체로 성장하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