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침략전쟁과 국제노동운동의 흐름

노동사회

이라크 침략전쟁과 국제노동운동의 흐름

admin 0 3,069 2013.05.11 09:27

이라크 침략전쟁이 미국과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미국과 영국은 승전국으로서의 지위를 뽐내며 전후 처리 과정을 주도하고 있다. 반면,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은 UN 주도의 다자간 처리(multilateral system)를 주장하면서 미국과 영국의 독주에 제동을 걸고 있다. 하지만, 이라크 침략전쟁의 결과, 2차 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근간을 이뤄온 UN 체제는 사실상 붕괴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일극(一極)체제의 완성이 분명해 지고 있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진 이래 미국은 자신의 정치군사적 목적과 경제적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 세계 전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확대해 왔다. 소비에트의 붕괴이래미국의 국제전략은 군사개입을 회피하고 정치공작을 중심으로 한 저강도 전략에서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강행하는 고강도 전략으로 선회하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그 출발점이었다.

국제노동계의 세 가지 입장

이라크 침략 전쟁에 대한 국제노동계의 입장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째는 전쟁지지 입장이다. 침략전쟁의 당사국인 미국의 노총(AFL-CIO)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UN의 틀 안에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하면서 조심스런 행보를 보이다가,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전쟁 지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미국노총은 조합원 중 선원, 관제사, 소방관, 경찰관 등 2만 명 가량이 예비군으로 전쟁에 소집되었다면서 “미국노동운동은 조합원들과 미군 뒤에 굳건하게 서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영국노총은 UN을 통한 다자간 해결을 모색하면서 전쟁을 마지막 수단으로 남겨놓자는 입장이었는데, 이 역시 궁극적인 수단으로 전쟁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미국노총의 입장과 다를 바 없다.

둘째는 국제자유노련(ICFTU)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 노동운동의 입장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일방적인 군사행동에 반대하면서 UN 안전보장이사회 틀을 중심으로 유럽연합(EU) 국가들을 포함하는 다자간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ICFTU는 전쟁 발발 시점인 3월20일 성명을 내고 “UN이 참여하지 않는 개별 나라의 군사분쟁은 받아들일 수 없고 정당하지도 않다”고 주장하면서 “UN과 다자간 틀을 통한 이라크 문제 해결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셋째는 이번 전쟁을 제국주의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고 반대하는 입장이다. 남아프리카, 브라질 등 제3세계 노조운동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남아프리카노총(COSATU)은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이라크 전쟁이 침략 전쟁이며, 이 침략에서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십 년이 넘는 경제제재에서 고통을 받아온 여자와 아이들”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이라크에 대한 야만적이고 비겁한 공격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남아프리카노총은 “미국과 영국이 지난 수세기 동안 군사, 경제, 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세계 도처에서 제국주의 활동을 자행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소련의 몰락 이후 등장한 미국 단일체제의 극단적인 결과를 온전하게 목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브라질노총(CUT)도 이라크 전쟁이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점에 입장을 같이하면서 “석유와 피를 바꿀 수 없다(No Exchange Blood for oil)”는 슬로건을 내놓았다.

1세계 노동운동과 3세계 노동운동의 차이

미 국 주도 전쟁이냐, UN 주도 전쟁이냐는 점에서 차이는 있지만,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노총과 영국노총의 입장에는 큰 차이가 없다. 서유럽 노동운동의 경우 마지막까지 UN을 통한 다자간 해결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미국노총과 영국노총의 입장과 차이가 있다. 독일노총(DGB)은 전쟁이 거의 끝난 시점인 4월11일자 성명에서 “사담 후세인의 독재체제가 해체됐다”하면서 “이라크의 재건과정에서 미국의 군사적 역할을 영구화하지 말고 UN이 적극적인 역할을 맡을 것”을 촉구했다. 스웨덴노총(LO)도 “조지 부시든 사담 후세인이든 간에 인권과 국제법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미국의 전쟁은 국제법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유럽 노동운동의 입장은 UN의 결의 없이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미국노총의 입장과는 다르지만, '독재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UN 주도의 경제제재와 전쟁행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점은 유럽과 미국의 노동운동이 이번 이라크 전쟁을 침략 전쟁(war of invasion)으로 규정하지 않는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미국의 일방주의(unilateralism)가 문제이지,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 프랑스, 독일, 중국이 자국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쫓아 전쟁을 승인했다면 이라크 침략 전쟁은 정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번 전쟁을 제국주의 침략 전쟁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남아프리카노총과 브라질노총을 중심으로 한 제3세계 노동조합운동의 입장은 1세계 노동운동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개별 국민국가의 정치 체제는 해당 국민 스스로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며, ‘국제법과 인권’을 이유로 한 외세의 부당한 지배와 개입은 안 된다는 입장이다. 특히 미국의 의도가 중동과 카스피해 지역의 방대한 석유 자원을 통제하려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이번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은 더욱 분명해 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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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노동운동과 전쟁반대

역 사적으로 국제노동운동은 출발부터 전쟁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 성장기에 있던 19세기 내내 구미의 노동조합운동은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촉구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은 20세기 초반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흔들리게 된다. 20세기 들어 식민지 경영과 자원 쟁탈을 둘러싸고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에 전쟁 기운이 확산되자,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등 구미 국가의 노동운동은 전쟁 반대를 외치면서 자국 정부의 군국주의화에 제동을 걸었다. 독일의 사회민주당, 프랑스의 사회당 등 유럽의 노동자정당을 중심으로 한 제2인터내셔널은 노동자계급끼리 총부리를 겨눌 수는 없다면서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하 지만, 1914년 전쟁이 발발하자 구미 각국은 민족주의(nationanlism)와 애국주의 열풍에 휩쓸렸고, 각국의 노동운동도 국내 분위기에 굴복해 전쟁 반대의 깃발을 내팽개치고 전쟁 대열에 합류했다. 여기에 반발한 세력은 볼세비키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노동운동을 비롯해 일부에 불과했고,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주요 나라의 노총과 노동자정당은 자국 정부의 총력전 체제에 적극 협력했다. 그 결과 노동자 국제주의를 지향했던 제2인터내셔널이 붕괴하고, 레닌의 러시아 공산당이 주도하는 제3인터내셔널이 1919년 출범했다. 이를 계기로 국제노동운동에서 국제주의와 반전평화를 주장하는 전통은 약화되었고, 파시즘과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자본주의권 노동운동과 공산주의권 노동운동간의 대립과 경쟁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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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노동운동 개입 여지 별로 없어

전 쟁이 사실상 끝난 지금 시점에서 서로의 입장에 미묘한 차이가 없지는 않지만, 서유럽 노동운동은 미국의 군사적 점령을 단기간에 끝내고, 이라크 재건 과정에서 UN이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ICFTU는 4월17일자 성명에서 “이라크에서 법의 지배에 기초한 민주주의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UN을 중심으로 다자간 논의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UN만이 이라크에서 민주주의를 재건할 정통성과 신뢰성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라크 재건 과정에서 이라크 노동자의 권리가 충분히 보장받아야 하며, 이를 위해 UN 산하기관인 국제노동기구(ILO)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라크 재건 과정이 다국적기업의 각축장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이라크로 몰려들 다국적기업이 ‘ILO 핵심노동기준’과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을 준수토록 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사실 이러한 주장들은 뜻은 좋지만, 현실성이 별로 없다고 볼 수 있다. 이라크 재건 과정에서 UN이 설 자리는 별로 없고, 설사 그럴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이라크로 몰려들 석유자본과 건설자본들이 국제노동기준을 준수할 지는 의문이다. 특히, 전후 이라크로 몰려들 다국적기업들이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 노동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ICFTU의 성명은 성명 자체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 향후 이라크 문제가 미국의 정치군사적 영향력 하에서 처리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ILO나 기타 UN기구를 중심으로 국제노동운동, 특히 서유럽 노동운동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한국노동운동의 역할

국 제노동계가 이라크 침략전쟁에 일치 단결하여 대응하지는 못했지만, 의미 있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나라 노동자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와 집회에 참여했으며,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노동자 수백만 명이 참가한 반전집회가 이탈리아 전역에서 열리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 노동자들은 이탈리아의 미군기지에서 이라크로 이동하는 군사물자의 수송을 거부했다. 스웨덴의 노동자들은 버스와 지하철을 멈추고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1분 침묵’에 참여했다. 빠르지는 않지만, 반전평화를 염원하는 움직임이 국제노동운동 안에서 확산되고 있다.

비록 1세계 국가가 가지는 한계는 있지만, 서유럽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미국 주도의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전후 이라크 복구과정에서 ILO가 참여하고 국제노동운동이 개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맞서 힘겨운 투쟁을 벌여온 국제노동운동 앞에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전쟁에 맞서 반전평화를 실현해야 하는 지난한 과제가 놓여져 있다.

사실 이라크 침략전쟁은 끝났지 않았다. 만만치 않은 이라크 민중의 반발은 미국을 새로운 단계의 전쟁으로 몰아갈 것이다. 미국의 전쟁 책동이 점점 거세지는 한반도 상황을 고려할 때도 이라크 침략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미제국주의가 주도하는 세계전쟁, 즉 4차 대전은 끝난 게 아니라 시작되었다. 이런 시점에 국제노동운동계 안에서 1세계 노동운동과 3세계 노동운동의 연결점에 서 있는 한국노동운동의 적극적인 역할이 절실하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