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통합노조 운동의 중심 CGIL

노동사회

이탈리아 통합노조 운동의 중심 CGIL

admin 0 4,405 2013.05.11 09:23

파시즘이 물러간 뒤, 새로운 이탈리아를 두고 수많은 정파들과 세력들이 참가하여 논의를 벌였다. 오랫동안 반파시즘 투쟁을 주도했던 노동조합 역시 그 주요한 세력이었다. 이 와중에 특히, 보다 강력한 노조의 필요성이 공감을 받으면서 제기된 것이 통일노조의 건설문제였다. 1944년 공산주의 계열의 대표 까네바리(Canevari)와 사회주의 계열의 대표 디 비또리오(Di Vittorio) 그리고 기독민주주의 계열의 대표 그란디(Grandi) 사이에 체결된 ‘로마협약(patto di Roma)’은 이러한 시도의 결정판이었다. 분열된 노동조직을 하나의 통일된 기구로 통합하고자 했던 이 협약은 이탈리아 노동운동 역사에 기념비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노조의 통합논의는 프랑스 망명 중이던 부오찌(Buozzi)와 디 비또리오가 감옥에서 나눈 대화에서 처음으로 비롯되었다. 카톨릭을 배제했던 초기 통합논의는 곧 카톨릭을 포함한 통합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노동운동사 최초의 통합노조 CGIL(Confederazione Generale Italiana del Lavoro)이 결성되었다. 

CGIL의 탄생과 분열

jbkim_02.jpg최초의 통합노조였던 만큼 조직의 강령이나 구체적인 내용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44년 6월14일에 발표된 ‘로마협약’의 합의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내부민주주의의 보장으로 노조간부들과 지도부 선출에 있어 소수파에게도 비례적인 참여와 기회를 보장한다. 둘째, 정치적 입장과 종교적 신의에 대해서 상호보장하고 존중한다. 셋째, 국가의 이익과 노동자 대중의 자유와 이익을 보장하고 발전시키는 범위 내에서 정당과 관계를 설정한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정당으로부터 독립적인 위치를 갖는다 등 이 세 가지가 기본적 합의 내용이다. 이와 같은 합의사항은 성향이 다른 세 정파의 이념을 통일시키기 위해서 원칙을 합의한 것이 아니라 조직적 수준에서의 기본원칙을 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통합노조라는 현실적인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당시 CGIL의 당면목표는 종전 이후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실질소득 보장과 경제적 지위향상이었다. CGIL은 이를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당시 CGIL의 조직과는 별도로 북부 이탈리아의 산업지대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던 공장 내부의 경영평의회(Consigli di Gestione)에 대한 것이다. 공장평의회는 파시즘 정권기에 형식적으로 설치된 것이었다. 그런데, 1945년 국가해방위원회의 행정명령에 따라 경영자와 노동자가 동수로 참가하는 노사합동 공장경영위원회로 성격이 바뀐다. 이는 반파시즘 운동을 통해 노동자들이 경영권 참여를 획득하면서 기업내부의 발전계획이나 노동자들의 임금이나 복지까지 관여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적 장치였다. 

이 경영평의회의 역할과 위상을 두고 CGIL과 당시 정치적 실권을 쥐고 있던 3당(공산당, 사회당, 기민당)이 대립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CGIL의 입장에서는 이 경영평의회를 활용하여 조직강화와 세력확장을 도모하려 했고, 3당은 경영평의회가 CGIL의 지배 하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경영평의회는 노동운동의 측면에서 가장 바람직한 형태의 노사협의체였지만, 결국 서서히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여 50년대에는 명목상의 기구로 전락하였다. 

CGIL은 노동자들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임금연동제(Scale Mobile)를 시행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임금연동제는 높은 인플레와 실질임금의 하락을 보전하기 위하여 1947년 입법화됨으로써 1950년대의 경제성장기에 노동자들의 소득증대에 커다란 기여를 했던 제도이다. 

입장이 다른 세 정파가 하나의 깃발아래 모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1948년이 되면서 CGIL의 분열은 시간문제로 여겨졌다. CGIL과 정당과의 관계 및 군정을 통해서 미국이 개입하는 당시 상황 때문이었다. 초기 소수파였던 기민당은 데 가스페리(De Gasperi)를 정점으로 미국의 절대적 지원과 카톨릭이라는 교권을 바탕으로 자본가계급의 옹호 속에서 분리 구실만을 찾고 있었다. 이들은 1948년 7월14일에 발생한 똘리아띠 암살 기도사건으로 발생한 총파업 요청을 구실 삼아 일방적으로 탈퇴결정을 했다. 그리고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탈퇴함으로써 한 지붕 세 가족의 동거는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기독민주계의 탈퇴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것은 ACLI(Associazioni Cristiane di Lavoratori Italiani)라는 카톨릭계 노동단체와 ‘카톨릭 행동단체’ 및 미국의 반공적 노조단체 AFL-CIO 등이었다. CGIL에서 탈퇴한 뒤 카톨릭 노조단체들은 7월22일에 ‘자유이탈리아 노동총동맹(LCGIL)’이라는 노조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1949년 또 다시 사회민주계와 공화계가 사회당에서 탈당한 일부 지도자들과 함께 CGIL에서 탈퇴했다. 이들 중 소수가 뜻을 같이하는 카톨릭계와 함께 1950년 4월 CISL(Confederazione Italiana dei Sindacati Lavoratori; 이탈리아 노동조합동맹)을 결성하였다. 이어서 기독민주계가 지나치게 세력을 확장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다수 그룹들이 UIL(Unione Italiana dei Lavoratori; 이탈리아 노동자연맹)이라는 새로운 노조를 결성하였다. 이로써 통합노조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노동조직의 3국 시대가 새로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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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뜨거운 가을'의 이탈리아 노동자들 ]

‘뜨거운 가을’과 노조의 재통합

일부 세력이 이탈했지만, CGIL의 위상은 적어도 노동운동 내부에서만큼은 그다지 커다란 타격을 입지 않았다. 탈퇴한 새로운 두 단체가 기본적으로 표방했던 반공이라는 이념은 노동운동 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부적 환경변화에 의한 세력축소는 별로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내부적인 모순과 침체에 의한 위상저하가 CISL과 UIL이 상대적으로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CGIL은 직종과 이해가 다른 전체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다보니 지나치게 중앙집중적인 조직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공장 단위나 하부의 기층노조원들의 의사반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여, 노조원들과 지도부가 따로따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또한 수많은 직종과 분야의 노동자들을 대변하면서,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은 너무나 복잡하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생산직노동자뿐만이 아니라 사무직과 전문직노동자들까지 포괄하는 CGIL의 구조 속에서는 이해관계가 다른, 때로는 반대적이기까지 한 이들의 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어려움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더라도 CGIL의 기본적인 정책방향은 분열된 노동운동 세력을 다시 한번 결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사회가 수용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미쳐 그에 따른 개혁을 이루고, 사회의 전반적 방향이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조성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임금노동자들의 실질적인 노동조건의 개선과 임금인상을 통한 생활기반의 상승이라는 전술적 목표를 성취하고자 했다. 또, 장기적으로는 사회주의적 색채의 경제정책을 통하여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을 최대전략으로 삼았다. 

이와 같이 분할된 상황에서도 50년대와 60년대의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CGIL은 아래로부터의 통합요구와 68운동이 가져온 영향이 거세지면서 노동조합 조직의 재통합을 모색하게 되었다. 69년 ‘뜨거운 가을’을 거치면서 오랜 통합의 열망은 구체화되었고, 1970년 가을 피렌체에서 개최된 CGIL, CISL, UIL 세 조직간 공동회의는 이를 확인한 사건이었다. 69년 ‘뜨거운 가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세 연맹의 금속노조(FIOM, FIM, UILM)가 구체적인 통합논의를 거쳐 실제적인 조직의 통합을 주도하였다. 결국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1972년 통합연맹(Federazione unitaria)이 결성될 수 있었다. 

노동운동의 약화와 베를루스꼬니의 등장

jbkim_04.jpg이후 70년대와 80년대 초는 강력한 정치적 노조운동이 전개되었다. 통합노조 운동은 각 정당과 연계된 정치적 노조로서 성격을 분명히 하고,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노조 중심적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70년대와 80년대의 경제 침체와 산업적 갈등은 통합노조 운동이 더 이상 전진하기 힘들도록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 시기 노동운동이 이룩한 성과도 적지 않았다. ‘노동자 권리헌장’, ‘물가 임금연동제’, ‘임금보조기금’, ‘균등주의’ 등이 이 시기의 특징들이다. 그 속에서 CGIL은 통합의 열망과 운동의 목표를 적절히 유지하면서 80년대 초반까지 이탈리아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70년대 자율노조들의 등장과 중견간부들이 중심이 된 ‘꽈드리(Quadri)' 조합의 전투성, 노사정 협의체제의 새로운 등장 등 새롭게 전개된 상황 변화는 통합노조 운동뿐만이 아니라 CGIL의 활동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노동자 대표성의 새로운 형태인 협동조합의 조직과 활동 역시 기존 노동조직들의 위상과 활동을 위축하는 새로운 요소로서 작용하였다. 결국 노동운동은 세력이 위축되고 조직적 균열을 경험하게 되었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타격을 가한 것이 89년의 베를린 장벽붕괴로 상징되는 공산주의 세력의 몰락이다. 이탈리아에서도 그 여파는 거세, 전통적 야당이었던 공산당(PCI)이 좌익민주당(DS)으로 당명을 개정할 정도로 이념적으로 약화되었고 노선이 온건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민당 중심의 기존 지배계급의 몰락을 초래한 ‘마니 뿔리떼(Mani Pulite)'는 이탈리아 사회 전체의 정치개혁과 사회변혁을 요구하였다. 노동운동 조직 역시 변화하는 환경에 적합한 조직강화와 방향정립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1993년 선거제도의 개혁으로 인해 탄생한 신흥자본가 베를루스꼬니 연합정부는 노조의 입장이나 노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를 기조로 정부의 효율성과 경쟁력 강화라는 정책목표를 추진했던 베를루스꼬니의 연정은 결국 연금법 문제를 계기로 7개월만에 끝나버렸다. 

이후 CGIL은 다시 한번 이탈리아 노동운동의 중추로서 조직의 확장과 발전에 전력을 다했고, 꼬페라띠(Cofferati)라는 걸출한 노동운동가를 통해 재도약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CGIL의 조직과 구조

이탈리아 주요 3개의 노조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갖고 있는 CGIL은 지역별로 주연합과 지구연합의 수평적 구조와 산업별로 전국본부와 주지부, 지국지부, 사업장 단위 분조의 수직적 구조를 함께 갖고 있다. 또한 내부적으로 의결기구의 성격을 가진 연맹 대의원회의와 지도위원회가 있으며, 집행기구로 사무국이 있다. 그리고 강령 개발과 수립기구로서 기초 강령위원회가 조직되어 있고, 행정 통제기구들로서 감사 소위원회와 감찰부가 설치되어 있다. 내부규율감독기구로는 보장위원회가 있으며, 정관 및 규약보장기구로서 규약 소위원회와 검증 소위원회가 있다. 

조합원 총회나 Spi동맹(Lega Spi; 연금생활자 조직) 총회에서는 대의원들의 대표성을 확인하고 조직의 임원을 선출하며, 정관변경 사항에 대해 승인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확정한다. 첫째, 이탈리아노동총동맹 조합원 위원회 혹은 Spi 동맹의 지도부를 선출한다. 이 경우 조합원들의 대표성이 확인된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의사전달 기구인 전국지도위원회에서 이들의 임무, 기능, 역할 등을 확정하여 마련한 방식에 따라 선출한다. 둘째, 상급 청원에 대한 대의원회의에 파견 할 대리인을 선출한다.

jbkim_01.gif이에 따라 구체적으로 역할을 하도록 설치하는 하부조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고용직 조합원들의 각종 위원회, 이들 소속의 동맹들과 사업장과 연계된 소위원회들, 퇴직자 동맹, 고용위원회, 유사 고용직과 임시직 노동자들의 대표기구 등이 있다. 둘째, 산별 지역노조들이나 연맹들을 포함하는 지역이나 도시의 노동회의소, 산별 지역노조들이나 연맹들을 포함하는 주(州)별 이탈리아노동총동맹, 산별 전국노조들이나 연맹들, 이탈리아노동총동맹의 지도위원회로부터 구성된 대표 조직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조직과 함께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이민자 노동조합의 분파를 설치하고 있다. 이 경우 이탈리아노동총동맹 주지부가 해당지역에 있는 이민자들이 필요로 하는 적절한 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임무를 위임받는다. 이 조직들은 명확하게 규정된 권한, 역할, 기능들을 갖는다. 자율성을 보호하면서 최대한의 참여를 보장하려는 정책적 목적 때문이다. 또 연금생활자 노조가 설립되어 있다. Spi(연금생활 노조의 약자)는 연금생활자와 노인들의 총노조로서 이탈리아노동총동맹 소속 모든 영역에서의 전(前) 노동자인 퇴직자들과 각종 연금관련 생활상태에 있는 이들, 유족 연금생활자 및 사회보장형 연금생활자들 모두를 보호하고 조직한다. 

사회보장, 보건, 사회안전 등과 관련된 조직의 교섭에서 Spi는 연맹차원의 협상을 위임받아 수행한다. 이는 조직노동자를 평생노동자라는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조직을 공고하게 한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목표를 단순히 임금투쟁이나 노동자 이익증진이라는 미시적 목적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와 복지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으로 확장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표1]은 구체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산별노조의 명칭과 분야 및 각각의 조합원 수를 나타낸 것이다. 이 표에서 보면 CGIL은 산별조직이 총 18개로 업종별 15개와 기타, 실업자 및 연금생활자 노조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속부문과 공공부문 조합원들이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조합원 수에서 가장 많은 조직은 연금생활자 조직인 Spi이다. 이는 조직이 지나치게 노후화 되어있고, 새로운 조직 확장에 한계를 보이고 있는 점을 나타내는데, 향후 CGIL의 조직구조의 효율성 면에서나 조직확장 면에서 재고되어야 할 점이다.

CGIL의 기본이념과 노선

jbkim_05.jpg정관에 규정된 기본이념에 따르면 CGIL은 남녀평등에 입각하여 다인종주의, 민주주의, 통합주의의 성격을 갖는 노동조직으로 명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다민족국가 이탈리아에 존재하는 국적이 다른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CGIL은 현장노동자 중심에서 벗어나 모든 분야에서 노동자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고, 협동조합이나 자영업자, 실업자, 연금 생활자, 노인들의 자주적 단결 및 연대를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표방하고 있다.  

국제적 수준에서 평화에 대한 지지표명은 제국주의적 전쟁에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CGIL은 이를 위한 국제적 연대를 천명하고 있다. 아울러 국가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선진국과 제3세계 및 저개발국 사이의 동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강조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경제적·생태적·문화적 질서를 창출하며, 세계의 다양한 분야들에서 균형적 발전과 성장을 전개하면서 적절한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유럽연합에 대한 지지표명 역시 주요한 이념적 좌표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 CGIL은 유럽의 노조운동 방향과 관련하여, 특히 유럽노조총동맹(CES)과 관계맺음으로써 유럽노조운동의 통일 강화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CGIL은 그에 걸맞은 정책들을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해 상위 국가적 노조의 계약, 유럽의 사회적 입법규정들, 그리고 유럽통합과 관련한 국가별 특별규정에 대한 부칙 및 세부 사항들 등을 고려하여 행동강령들의 규정을 명시하고 있다.  

90년대 이후의 CGIL

그러나 이와 같은 기본적 이념과 노선에도 불구하고 실제 정치적, 경제적 활동에서는 수많은 부침을 겪었다. 1991년 6월의 노사정 삼자협상은 83년 스꼬띠 협약이후 8년 만에 재개된 것이었다. 이는 국가의 제도 안에서 노동계가 하나의 축을 지탱하는 주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동시에 보수적 개혁으로 노선을 전환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있다. CGIL 내에서 이와 같은 입장전환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반대파가 베르띠노띠(Bertinotti)가 주도하는 ‘ESSERE SINDACATO(노조 근본주의 분파)’였다.  

이후 CGIL의 기본 노선은 노동자들의 현장에서 이익과 입장을 보호하는 논리나 원칙보다는 당대 정부의 경제적 논리를 수세적으로 방어하며 진행되었다. 1992년 임금연동제의 폐지와 기업협상의 중단이 이어졌다. 이는 일반조합원들의 입장이 반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CGIL 지도부의 무능력과 판단오류 또한 당대 CGIL의 노선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노선전환은 1989년 ‘베를린 장벽’ 사건의 여파가 이탈리아 사회당(PCI)의 당명개정으로까지 발전되는 사태에서 더욱 명확해졌다. CGIL의 입장은 PCI와 정치적으로 깊은 연관이 있었다. PCI의 당명개정은 이후 뜨렌띤Trentin이 CGIL 내부의 공산당 계열을 해체하고 CGIL 내부의 강령에 따라 정파를 재편하고자 했던 시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CGIL 내부의 주요 분파들은 3개로 정리될 수 있다. 공산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중심이 된 주류와 ‘노조 근본주의 분파’가 주축이 된 급진 공산주의계 그리고 전 의장이었던 삔지나또Pinzzinato가 지도하는 소수파 등이었다. 결국 92년 CGIL의 위상은 정치적으로 약화되었다.  
   
노동세력의 국가제도화는 어쩔 수 없는 대세였다. 1993년 7월 협약이 이를 완성하는 듯했다. 협약 이후 CGIL을 비롯한 노동조합전국조직들은 국가의 협의 체제(보통 코포라티즘이라고 하는 체제) 안에서 통일을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그러나 1995년 노동자 대표성의 문제를 결정하는 국민투표에서 CGIL은 기득권 수호에 급급해 하다가 결국 패배했다. 이를 기점으로 변화된 정치적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정책적 변화와 새로운 노선 정립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96년 총선으로 좌익연정이 탄생했을 때, CGIL은 초기에는 이를 지지하였다. EU통합 문제들에 대해서도 전향적으로 협조하는 등 정부정책에 적극적 공조는 아니더라도 암묵적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EU가입의 절대적 조건이 달성되자 CGIL는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상하라는 요구를 제기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정부는 수상을 바꾸는 고육지책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1년 총선으로 베를루스꼬니가 재등장했다. 노동계의 분열도 일정 정도 책임이 있었다.  

이후 CGIL은 꼬페라띠(Cofferati)를 비롯한 지도부가 노동법 개정저지 투쟁에서 현명하게 대처하면서 다시 한번 전기를 맞이했다.(다음호에 계속)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