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 정당명부비례대표제로

노동사회

정치개혁, 정당명부비례대표제로

admin 0 3,742 2013.05.11 09:11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로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면서 민주노동당은 물론 민주당과 한나라당을 비롯한 모든 정치세력들이 정치개혁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당 내부에 정치개혁특위를 구성하고 활동해 왔으며, 민주노동당은 정책위원회 산하에 정치개혁 태스크 포스를 설치해 활동하다가 정치개혁특위를 발족시킨 상태다. 그리고 지금은 시민단체들의 제안으로 정치세력들이 결집하여 정치개혁범국민협의회를 발족했다.

현재 정치개혁은 주로 제도개혁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 이유는 제도가 현실 정치에서 갖는 중요성 때문인데, 제도란 정치 주체들의 행위 규범은 물론 전략과 전술에 영향을 끼치는 '게임의 법칙'이다. 정치개혁은 게임의 법칙인 제도를 바꿈으로써 실질적 효과를 가진다. 일단 게임의 법칙이 정해지면 게임을 하는 행위자들은 그 법칙에 따라 움직이게 될 뿐만 아니라 결과물도 게임의 법칙의 구조적 작용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정치개혁의 출발은 선거제도개혁

정 치제도개혁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사안이 지역주의 정당정치 체제를 타파하고 이념과 정책 중심의 정당정치 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한 선거제도 개혁일 것이다. 그동안 지역주의 정당정치 체제는 한국의 정당정치를 시민사회의 계급·계층 균열과 갈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도록 불구화시켰으며, 한국 민주주의를 사회경제적 권리를 보장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로 발전시키는데 가장 커다란 장애였기 때문이다. 한편 선거제도 개혁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당정치 체제가 선거 제도를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다른 정치개혁 사안인 정당운영 방식이나 정치자금 및 권력구조 형성도 결국은 선거를 통해 확보한 대표성의 정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선거제도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선거구의 크기이고 다른 하나는 선거방식이다. 선거구의 크기란 한 선거구에서 몇 명을 선출할 것인가에 따라 소-중-대 선거구제로 나누어지며, 일반적으로 소선거구제는 1명, 중선거구제는 2∼5명, 대선거구제는 5명 이상을 선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거방식은 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로 나눠지는데, 다수대표제는 현재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것과 같이 한 선거구에서 득표를 가장 많이 얻은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며, 비례대표제는 정당의 득표수에 비례하여 대표를 선출하는 것이다.

선 거제도 개혁과 관련하여 노무현 정권은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선거구 크기에 초점을 맞추어 중대선거구제의 도입을 검토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주의 정당정치체제가 타파되기 위해서는 호남 지역에 기반한 민주당이 영남지역에서, 영남지역에 기반하는 한나라당이 호남지역에서 당선되는 '교차당선'이 실현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소선거구제를 폐지하고 2명 이상을 선출하는 중대선거구제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대선거구제로 지역주의 극복 불가능

이 런 제도에서 민주당은 영남 지역에 호남 출신 유권자가 '상당수' 거주하기 때문에 일정한 의석을 확보할 수 있지만, 한나라당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중대선거구제의 실현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를 작위적으로 조정하기 위하여 각 지역에서 각 정당이 차지할 수 있는 당선자수를 한정시켜도 문제가 발생한다. 가령 호남지역의 한 선거구에서 3명을 선출한다고 가정하고 한 당이 차지할 수 있는 의석을 두 석으로 제한하면, 민주당 2명 당선은 분명하지만 한나라당이 3등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선거구 크기 조정을 위한 협상 자체가 타결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된다 하더라도 문제는 발생한다. 1, 2등에 비해 3등 후보가 얻은 득표율은 매우 낮을 것이고 이럴 경우 낮은 득표가 과잉 대표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현 재의 소선거구제가 갖는 사표의 과잉발생 문제 때문에 민주노동당 일각에서도 당 게시판과 기관지를 통해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주장하는 등 선거구 크기를 중심으로 한 논의가 이루어진 적이 있다. 하지만 이는 선거제도의 다른 한 축인 선거방식을 간과한 주장이다.

다 수대표제에서 선거구 크기를 늘리면 사표는 줄어들지 모르나 표의 비례성은 높아지지 않는다. 선거제도와 정당제 연구분야에서 권위 있는 연구자인 레이파트의 연구에 따르면, 다수대표제에서 선거구 크기를 늘리면 늘릴수록 거대정당(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지역패권정당)이 절대 유리해져 오히려 표의 비례성은 떨어지고 표의 독점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유권자들이 자기 지역에 기반한 정당 후보에게 투표할 가능성이 더 높아질 뿐이다.

호남지역에서 약소 정당인 한나라당은 중선거구제에서 당선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더 낮아진다. 선거구 크기를 통해 표의 비례성을 높이기 위한 시도는 오직 선거방식을 비례대표제로 할 때 효력을 가질 수 있으며, 전국단위 정당명부비례대표제를 실시하면 가장 커다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중대선거구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우선 선거운동 지역이 넓어지는 만큼 돈선거를 더욱 부추기게 되며 같은 당 후보끼리도 경쟁을 해야하는 상황이 되어 파벌정치를 심화시킨다. 이것은 일본의 자민당 우위체제의 정당정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던 현상이다. 한국의 정당정치가 이념 및 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결사체가 아닌 보스중심의 파벌정치였던 실정을 감안할 때 유사한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독일식 비례대표제로 가야

경 실련을 비롯한 시민사회운동진영 일각에서 일본식 비례대표제 도입을 주장한 적이 있다. 일본식 비례대표제는 독일식과 달리 정당 득표를 기준으로 각 당의 전체 의석수를 결정하지 않고, 정당 득표를 우리나라처럼 미리 정해진 비례대표에게만 적용시킨다. 전체 의석수 500석인 일본은 지역구와 비례대표 비율을 3:2로 하고 정당득표를 비례대표에 해당하는 200명의 의석배분에만 적용시키고 있다. 그리고 독일식은 각 정당이 획득한 전국 득표율에 비례하여 연방의 주 단위로 의석을 배분하는 것에 비해, 일본식은 권역별 득표율에 따라 권역별로 의석을 배분한다.

일본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측은 무엇보다 제도 도입의 현실성에 주목한다. 각 정당의 의석수를 정당에 대한 지지율로 할 경우 특정 지역에 편중된 지지 기반을 갖고 있는 기성 정당은 기득권 유지가 어려워지므로 독일식 비례대표제 도입에는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전체 의석수를 정당 지지에 따라 배분하면, 인물 중심 정당으로 운영되는 기성정당에게 득 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진보정당을 비롯한 신생정당 세력의 의회 진입을 크게 촉진시켜 자기들이 누려온 독점 이익이 감소하기 때문에 독일식 선거제도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비율 문제에서도 지역구와 비례대표 간 비율이 1:1인 독일식보다 3:2인 일본식이 기성 정당에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제도가 정치세력들 사이의 투쟁과 협상에 따라서 그 내용과 형식이 규정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섣부른 양보이며, 스스로 낮은 목표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어떤 제도가 수용 가능할 것인가와 같은 현실 문제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닌데도 미리 그 현실성을 재단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일본식 비례대표제의 문제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도 지적될 수 있다. 권역별 득표율에 따라 권역별로 의석을 배당하는 일본식 비례대표제를 한국에 적용하면 지역주의 정당정치체제를 온존시켜 개혁효과를 얻을 수 없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중대선거구제와 유사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권역 자체가 광주·호남, 부산·울산·경남으로 나뉘어질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권역별 득표에 따른 권역별 의석 배분은 영호남을 축으로 하는 지역주의 구도의 재판에 불과하다. 게다가 비례대표가 지역구에서 선출됨으로써 국회의원의 국민적 대표성을 전국 차원에서 보장하는 헌법상 취지에도 맞지 않는다.

일본식 비례대표제는 일본에서도 정치개혁론자들에게 비판받는 제도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자민당 일당우위체제의 정당정치를 가져 온 중선거구제에 대한 대안으로 도입한 (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의 의석 배분을 분리시키는) 일본의 다수대표제와 비례대표제 병립제는 그다지 커다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련의 파동을 겪은 후 다시금 일본 정당정치는 자민당이 중의원에서 과반수가 넘는 의석을 차지하는 등 자민당 일당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중선거구제가 폐지되고 소선거구제가 도입되었지만 비례대표제가 권역별로 실시되면서 여전히 건재한 각 지역의 후원회 조직망을 통해 자민당이 비례대표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 본식 비례대표제는 사회적 소수와 약자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이념과 정책중심의 정당 지지를 통해 대표성의 다원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비례대표제의 취지에 부합하는 데 실패했다. 일본식 비례대표제는 여전히 기존의 유력 정당에게 유리한 제도로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의 권익을 대변하고자 하는 신생(혹은 약소) 정당의 진출을 보장해 이념과 정책중심으로 정당정치를 재편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 한국 정치개혁의 길라잡이

한국 정당정치에 이념과 정책 중심의 정당정치 체제가 형성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이념과 정책 중심의 새로운 정당정치세력의 제도 진입이다. 왜냐하면 신진 세력의 외부 압력 없이는 기성 정당들이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정치개혁이 화두가 되고 있는 최근 정국에서조차 기성 정당들이 주로 당내의 입지를 둘러싸고 정당내부 개혁에 치중하고 있는 상황만을 봐도 알 수 있다. 기성 정당들은 정책 정당화를 외치고 있지만 이념과 정책 중심의 정당정치는 단지 정책을 강화시킨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 정당정치의 구조를 이념과 정책을 갖고 경쟁할 수 있도록 바꿔내야 한다.
그간 민주노동당은 줄곧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의 도입을 주장해왔다. 물론 독일식을 그대로 도입, 적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책위원회가 발간한 「정책팜플렛-정당명부비례대표제 도입의 필요성」(2003년 2월)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독일식에 '근간하는' 민주노동당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는 의미이다.

민주노동당이 독일식에 바탕하는 정당명부비례대표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이유는 이 제도가 지역주의 정당정치체제를 타파하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신생 약소 정당의 진입을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대표성의 다원주의를 확보하는 가운데, 이념과 정책 중심의 정당정치체제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은 중대선거구제나 일본식 정당명부제의 폐해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급·계층에 기반한 정당 절실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정당명부비례대표제의 핵심적 특징은 각 정당의 의석수를 각 정당이 획득한 전국 득표율에 따라 배분하며, 지역구와 비례대표 간 비율을 1:1로 하고, 유권자 1인이 지역구 후보와 정당에 각각 투표하는 1인 2표제를 채택하는 것이다. 이때 각 정당의 명부는 전국단위로 작성한다.

이외에도 민주노동당이 제안하는 정당명부비례대표제는 진입장벽 또는 봉쇄조항을 두어 지역구에서 1인 이상 당선되거나 전국 유효 득표율이 2% 이상인 정당으로 의석배분 자격을 제한한다. 다수대표제에서 소선거구제 자체가 일종의 진입장벽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별도의 봉쇄조항을 둘 필요는 없지만, '해방정국' 아래에서 볼 수 있듯 무수한 이익집단들의 난립을 고려하여 최소한의 봉쇄조항을 마련해 둔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제안하는 정당명부비례대표제는 독일식과는 다르게 신진 정치인의 진입과 당내 민주적 경쟁과 활력을 위해 이중입후보(지역후보와 비례대표 후보) 방식은 금지한다. 끝으로 보궐선거는 없고, 비례대표명부 순으로 의원직을 승계하며, 비례대표후보는 당원이 직접 선출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민주노동당이 제안하는 정당명부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표의 등가성이 높아져 사표 발생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대변되지 못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이해를 포함할 수 있으며 다양한 여론을 반영하는 이념과 정책 중심 정당의 정치적 진출을 보장하여 기존 보수 정당의 경쟁력을 제고시켜 정책 위주의 정당정치를 가져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역주의 정당정치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왜냐하면 지역기반이 약한 반면, 계급·계층에 기반하고 이념과 정책 실현을 지향하는 정당들의 출현과 성장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