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에 드리는 고언

노동사회

노동운동에 드리는 고언

admin 0 2,342 2013.05.11 09:11

 


1.
금년 11월은 전태일 열사 33주기이자, 다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재연되어서는 안 된다는 각오 아래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을 외치며 민주노총을 건설한 지 8년이 되는 달이었다. 그러나 금년 10월에도 노동자들의 죽음은 계속되었다. 더욱이 금년 10월의 죽음은 단위노조 지도부를 맡고 있는 핵심 간부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점에서 과거와 다른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혹자는 최근의 잇따른 죽음을 “우리 노동운동에서 전투적 대중투쟁의 정신과 기풍이 사라지고, 변혁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잃고 패배주의에 빠지고 개량주의에 물든 데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하고, “인간해방의 기치를 들고, 사회변혁을 향하여, 전투적 대중투쟁으로 전진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접하면서 왠지 공허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최근의 잇따른 죽음이 그 누구보다도 완강하게 전투적 대중투쟁을 전개했던 현장 지도부들의 죽음이고, ‘끝까지 살아서 싸워야 한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핵심간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비롯된 절망감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권력과 자본의 간악한 탄압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한다. 맞는 지적이다. 그와 함께 우리는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민주노총 등 상급단체는 이러한 극한 사태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 있는 현장 지도부를 엄호하고 때로는 퇴로를 열어주기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역할을 다 했는가? 모든 것을 단위노조의 현장투쟁으로 돌파하도록 방치한데서 비롯된 결과는 아닌가? 1400만 노동자의 희망으로 우뚝 서야 할 민주노총이, 핵심간부들에게 조차 희망을 주지 못 했기 때문은 아닌가? 민주노총 내부적으로 어떤 자기 성찰이 있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2. 

“전태일 열사의 염원이 인간해방”이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동의한다. 그러나 인간해방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는 사람마다 강조 점에 차이가 있다. 혹자는 사회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을 강조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설령 사회체제의 근본적 변혁이 이루어진다 해도 그것이 곧바로 인간해방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운동 내부에 언제부터인가, 별다른 차이도 아닌 것을 마치 대단한 차이라도 되는 양 침소봉대하고 반목하고 질시하는 종파주의적 풍토가 만연해 있고, 이러한 풍토 속에서는 설령 사회체제의 근본적 변혁이 이루어진다 해도 그것이 곧바로 인간해방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체제의 근본적 변혁이 어느 날 갑자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면, 긴 호흡을 가지고, 매개의 투쟁과 활동 속에서 인간해방의 기쁨을 맛 볼 수 있는, 그러한 투쟁과 활동을 전개해 나가야 한다. 매개의 투쟁과 활동 속에서 인간해방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믿고 신뢰하면서 함께 싸워 나가는 동지적 애정이 그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이러한 동지적 애정만 뒷받침된다면 외적인 억압이나 탄압은 그다지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운동은 언제부터인가 덧셈의 노동정치가 아닌 뺄셈의 노동정치에 익숙해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 식의 풍조가 만연되어 있고, 이러한 풍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하나하나 운동의 장을 떠나고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우리부터 먼저 변화해야 한다. 대중의 삶을 한 걸음이라도 진전시키고, 대중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한 투쟁과 활동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가는 한 걸음 한 걸음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싹을 일구어 나가야 한다.

3. 

민주노총은 출범 당시,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노총’이라는 슬로건 아래, 전체 노동자 계급과 국민 대중의 생활과 권리를 옹호할 것을 목적으로 사회개혁 투쟁을 주요 투쟁 과제로 정식화했다. 사회개혁 과제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조직 안팎의 동력과 시기별 상대적 중요성 등을 감안하여, 일차적으로 의료보험?국민연금 등 사회보장제도 개혁, 재벌개혁, 교육개혁, 언론개혁, 세제개혁 등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개혁 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민주노총은 조합원의 이익을 옹호하기에도 급급한 상황으로 내몰렸고, 사회개혁 투쟁은 실종되고 사회적 고립은 심화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 민주노총 내에서 ‘사회공공성 강화’ 투쟁이라는 이름 아래 다시 사회개혁 투쟁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뒤늦은 감이 있지만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개혁은 변혁운동을 대체하는 지향점이었고, 그 세부적인 내용은 다분히 자본주의 체제 내의 민주개혁, 사민주의적 개혁에 중심이 두어졌다. 그러나 사유화에 대적하는 사회공공성 강화 등은 초보적이나마 노동조합 방식으로 사회주의가 다루어지고 있음을 뜻한다”라 하여, ‘사회개혁 투쟁은 부정되어야 할 개량주의적인 것’으로 폄하하고, ‘사회공공성 강화 투쟁은 바람직한 사회주의적 맹아’인 양 평가하는 것을 접하면서, 과연 이러한 풍토 속에서 사회공공성 강화 투쟁이 힘있게 전개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필자는 사회개혁 투쟁과 사회공공성 강화 투쟁의 차이점을 알지 못한다. 더욱이 현재 우리 운동이 처해 있는 주객관적 조건을 감안할 때 자본주의 체제 내의 민주 개혁, 사민주의적 개혁은 마치 부정적인 것인 양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하기 어렵다. 만약 그렇다면 임금투쟁 역시 자본주의 체제 내의 개혁이기 때문에 부정되고 청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신자유주의 광풍이 휘몰아치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척박한 노동현실에서 이제 관념의 유희, 언어의 유희는 집어치우자. 지금보다 대중의 삶이 한 걸음이라도 진전될 수 있다면, 지금보다 대중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수 있다면, 그리고 이를 위한 투쟁과 활동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싹을 일구어 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눈물 흘리며 기뻐해야 하지 않겠는가?

4.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광풍이 휘몰아치면서 한국의 노동시장은 수량적 유연성과 임금소득 불평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선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에 노동조건 격차는 갈수록 확대되고 있으며, 노동자 계급 내부적으로 연대의 기반이 허물어지고 노동운동의 사회적 고립 또한 심화되고 있다. 금년 현대자동차의 임단협 타결 직후 일부 언론의 왜곡보도가 노동자 계급과 중소영세상인들 사이에서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임금격차, 소득격차 확대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고, 여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면 노동운동 역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시장의 수량적 유연성과 임금소득 불평등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높고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있는 것은, 10%대의 낮은 노조 조직률과 단체협약 적용률로 상징되는 극도로 분권화된 노사관계 제도와, 시장의 횡포를 제어할 수 있는 노동시장 제도를 갖고 있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현 단계 한국 노동운동의 최우선적 과제는 극도로 분권화된 노사관계 제도를 집중화(중층화)하고, 시장의 횡포를 제어할 수 있는 노동시장 제도를 확보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지난 5년 동안 이러한 제도 개선을 논의하고 협상할 수 있는 장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미 제도화된 노사정 3자 교섭의 틀인 노사정위원회는 거부하면서 별도의 노사교섭?노정교섭을 요구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설득력을 갖기 어려웠고, 설령 별도의 노사교섭?노정교섭이 성사된다 하더라도 거기서 논의할 수 있는 제도개선이란 극히 제한적이고, 논의내지 합의 수준 역시 낮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은 지난 5년 동안 집회 등 거리투쟁을 통해 제도개선을 요구해 왔고,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을 반복적으로 결의해 왔다. 그러나 투쟁동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총파업 선언의 반복은 단위노조 지도부에게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해 왔고, 노동자 대중을 비롯한 전체 국민의 삶은 시장의 횡포에 내맡겨져 왔다.

혹자는 “노사정 3자 교섭에서 수적인 불리함”을 얘기하면서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내지 의회 진출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요구가 정당한 것이라면 수적인 유불리를 떠나 당당하게 요구하고 설득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요구가 정당한 것임에도 협상을 통해 관철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대중투쟁으로 돌파해야 하지 않겠는가? 설령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내지 의회 진출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앞으로도 상당 기간 소수파 정당임에는 변함이 없지 않겠는가? 민주노총은 지금 당장 시급히 요구되는 제도개선 사항이 산적해 있음에 유념하여, 실질적으로 제도개선을 논의하고 협상할 수 있는 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관한 자기 계획부터 수립해야 할 것이다.

5. 

최근 임금소득 불평등도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면서 노동운동은 적극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실천적 대응을 요구받고 있다. 더 이상 머뭇거리게 되면 노동자 계급 내부적으로 연대의 기반이 상실되고 사회적으로 고립을 면키 어려울 것이며, 노동운동의 진보성과 도덕성 또한 위협받게 될 것이다.

금년 현대자동차는 임단협을 타결하면서 조합원은 9만8천 원, 사내하청은 7만8천 원 기본급을 인상했다. 이것은 노동운동 내부적으로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노동조건 개선에 관심을 갖고 개입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 전체적으로는 이러한 노력만으로 노동운동이 스스로의 책무를 다 했다고 얘기할 수 없다. 또한 임금격차를 축소하려면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임금이 더 올라야 하는데 하후상박 원칙에도 맞지 않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민주노총은 2004년 임금정책을 수립하면서 지금까지 관성에 따라 단순히 임금수준 인상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임금격차 해소, 임금소득 불평등 해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기업단위 노조에서 당장 실천 가능한 방안으로는 ‘정규직은 8만원, 비정규직은 12만원’ 식으로 차등 인상을 요구하고, 타결 시점에서도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이밖에 비정규직의 임금수준 최저선을 정하고 그 이하로는 사용할 수 없게 한다든지, 임금협약 적용대상을 비정규직에게 확대한다든지, 사내근로복지기금 적용대상을 비정규직 또는 하청업체 노동자에게 확대한다든지 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민주노총이나 산별노조 차원에서는 4조원 가량 쌓여 있는 사내근로복지기금을 임금격차 해소재원으로 전용하는 방안을 강구한다든지, 산업별 직업훈련 시스템과 연계하여 숙련급, 직무급 체계 형성을 추진한다든지 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계급 내부의 통일 단결과 연대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당장 실천 가능한 방안부터 강구하는 것이며, 사회변혁을 얘기하기에 앞서 계급적 연대, 사회적 연대의 기반부터 재구축 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이러한 전제만 성립된다면 현 단계 노동운동의 이념은 사회적 노동운동으로 표현해도 좋고, 계급적 노동운동으로 표현해도 좋고, 전략적 노동운동으로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지 어떠한 용어를 사용하느냐가 아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