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법률주의 VS 완전포괄주의

노동사회

조세법률주의 VS 완전포괄주의

admin 0 4,104 2013.05.11 09:09

"역설적으로 우리나라 상속증여세법 발전의 최대 공헌자는 재벌이다." 어떤 학자가 과거 재벌의 변칙증여 앞에 무기력했던 정부를 비꼬아 한 말이다. 동기야 어쨌든 상속증여세법은 몇 년 전에 비해 많이 변했다. 문제는 땜질식으로 법을 개정하다 보니 지금의 상속증여세법은 거의 누더기 수준이라는 점이다.

1996년부터 재벌들의 변칙증여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자, 재경부는 1996년 말에 부랴부랴 전환사채와 특정법인에 대한 증여의제 규정 등을 신설하였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질 만큼 벌어진 후였으며, 재벌들은 신주인수권과 같은 새로운 상품을 이용하여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갈 방법을 미리 마련하고 있었다. 이처럼 1996년 말의 법개정은 '뒷북'과 '허술함'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상속증여세법은 짬뽕세법

열 거주의 하에서 재벌의 변칙증여를 제대로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재경부는 1998년 말에 법 제42조를 개정하여 제한적 포괄주의를 도입하였다. 제한적 포괄주의는 일부 증여의제 대상을 시행령에서 열거할 수 있도록 한 점과 증여의제 유형이 제3자를 통하여 우회된 경우에도 과세할 수 있도록 한 점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1999년 2월말,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남 이재용 씨와 그 가족이 삼성SDS 주식을 주당 7,150원에 인수할 수 있는 신주인수권 320여만 주를 구입한 사실이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삼성SDS 주식이 당시 장외시장에서 55,000∼58,500원에 다량으로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들은 55,000원 이상을 주어야 살 수 있는 주식을 단돈 7,150원에 인수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재벌 총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준 부당 거래가 아니냐는 비판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이재용 씨 등은 2001년 4월에 수백 억의 증여세를 부과당하였는데, 그 법적 근거가 제한적 포괄주의로 개정된 상속증여세법 제42조 관련 시행령이었다. 나름대로 '한 건' 올린 것이다. 그러나, 제한적 포괄주의가 갖는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재경부는 6개의 유형에 대하여 유형별 포괄주의를 도입하였다.

이로써, 현행 상속증여세법은 열거주의, 제한적 포괄주의, 유형별 포괄주의가 서로 뒤섞인 '누더기세법', '짬뽕세법'이 되었다. 나름대로 세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필자 역시 상속증여세법만 펼치면 눈이 어지럽고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다. 그러니 일반인들이 보기에 상속증여세법은 거의 암호 수준이다. 가끔은 '상속증여세법을 만든 당사자는 제대로 알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비만에 걸린 중년 신사는 힘도 제대로 못쓰면서 덩치만 크다. 그리고 온갖 성인병에 시달릴 위험이 농후하다. 재벌의 변칙증여에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하면서 복잡하고 두껍기만 한 현행 상속증여세법은 마치 비만에 걸린 중년 신사와 같다. 이대로 두었다간 세법의 생명이 끝나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보기 좋고 힘있는 '청년' 세법으로 거듭날까? 대충 손봐서는 안 된다. 완전포괄주의로 대수술을 해야 한다.

포괄주의는 선진국형 세법 체계

상 속증여세법을 완전포괄주의로 대수술을 하자고 하니 여러 가지 반론들이 제기되고 있다. 가장 많이 제기되는 반론은 완전포괄주의는 과세 요건과 범위를 법에 명확히 규정하지 않음으로써 조세법률주의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조세법률주의에 위배된다는 것은 위헌을 의미하므로 완전포괄주의가 상속증여세법에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으니 신중하라는 충고도 곁들여진다. 한편, 완전포괄주의를 도입하면 조세행정의 남용을 초래하여 국민의 재산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일부에서는 기업 활동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주장도 제기한다. 이러한 주장들이 과연 옳은 것인지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필자가 알기로 조세법의 체계는 크게 열거주의와 포괄주의로 나뉘어져 있다. 포괄주의 도입을 조세법률주의 위배로 보는 시각은 '조세법률주의 = 열거주의'의 등식을 가정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한가지 궁금한 게 있다. '순자산 증가설'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우리나라 법인세법은 사실상 포괄주의이다. 그렇다면, 법인세법은 조세법률주의에 위배되어 위헌판결을 받아야 하는가? 완전포괄주의의 도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먼저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거래형태는 무수히 많으며 매우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모든 과세 요건을 법에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세법의 기능을 무력화시킬 위험성이 있다. 복잡한 거래형태를 모두 법에 명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실질적인 조세 정의의 확립을 위해 형식적 조세법률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히 포괄주의를 도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보수적인 학자와 재계 인사들은 포괄주의를 '해괴망측한 도구'로 폄하하고 있다. 포괄주의는 오히려 선진국형 세법체계이다. 포괄주의를 해괴망측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형식적 조세법률주의를 지고지순의 가치로 여기는 경향을 갖고 있다.

조세법률주의에 대한 가치관이 변화돼야

중 세의 세금은 왕과 관료가 백성을 수탈하는 수단에 불과하였으며, 왕과 관료의 가혹한 세금에 제동을 걸고 백성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조세법률주의다. 즉, 조세법률주의는 '세금 = 착취'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세금은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약속이다. 구성원 모두가 '번 만큼, 가진 만큼' 평등하게 세금을 내고, 이 세금으로 강하고 살기 좋은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약속하며 공동체 구성원이 된 것이다. 만약 누군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무임승차'한다면 그는 다른 구성원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조세법률주의를 단순히 '권력자로부터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막'으로 보는 것은 중세 시대의 가치관에 불과하다.

현대의 가치관에서 볼 때 조세법률주의는 '공동체 구성원간에 적절한 약속을 만들고, 이 약속을 이행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조세법률주의는 세법의 또 다른 대원칙인 '조세 부담의 형평성'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세금은 누군가 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 만큼 더 내야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조세 부담의 형평성이 유난히 강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세법률주의를 형식적으로 지나치게 엄격히 해석한다면 세법이 탈세(여기서 탈세는 광의의 의미로서 내야할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앞에 무기력해질 수 있다. 이 경우 조세법률주의가 '권력으로부터의 재산권 보호'에서는 기능을 다 할지 모르지만, '소수 비양심적 구성원에 의한 다수 양심적 구성원의 재산권 침해'를 조장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즉, 형식적 조세법률주의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또 다른 재산권 침해를 낳게 된다. 중세 개념의 조세법률주의에서 한 발짝 벗어난다면 선진국이 왜 포괄주의를 도입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포괄주의가 더 이상 '해괴망측'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

완전포 괄주의를 도입하면 조세 행정의 남용을 초래하여 국민의 재산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 중 상속증여세를 한푼이라도 내는 사람은 1%에 불과하다. 상속증여세는 아무나 내는 것이 아니다. 1%에 속하는 부유층만이 낼 수 있는 세금이다. 또한 완전포괄주의 도입은 상속증여세법에서도 증여의제규정에 영향을 줄 뿐이다. 증여의제규정을 걱정할 정도의 부자는 1% 중에서 또 일부에 불과하다. 결국 완전포괄주의 도입으로 인해 재산권 침해를 걱정할 사람은 대다수의 국민이 아니라, 재벌을 비롯한 극소수의 최고 부자들뿐이다. 이들은 막강한 자금력으로 유능한 전문가들을 고용하고 세법의 허점을 이용하여 부를 몇 대째 대물림하고 있다. 그런데 조세행정의 남용으로 이들의 재산권이 침해된다니? 필자는 오히려 반대의 걱정을 하고 있다. 이들의 막강한 인맥과 로비가 오히려 당연히 내야 될 세금을 안내도 되게 만드는 것 아닌가. 그러니 걱정해야 할 것은 조세행정의 남용이 아니라 조세행정의 무력함이다.

완전포괄주의 도입으로 인한 조세 행정의 남용 우려를 인정한다고 해도, 조세행정의 문제는 행정을 규제하는 법규나 제도로 해결해야지 세법의 체계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행정남용의 우려 때문에 세법 체계를 못 바꾸겠다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과 같다. 과거 독재 정권 시절의 독재자들은 혼란이 두려워 자유를 못 주겠다고 했다. 너무도 비슷한 논리다.

기업이 아닌 부의 세습 규제가 목적

완전포괄주의를 도입하면 기업 활동이 위축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는데 필자로서는 어째서 이러한 논리가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다. 상속증여세법은 재벌일가의 부당한 부의 세습을 규제하는 것이지 기업활동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재벌일가 = 기업' 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야 그러한 논리가 나올 수 있다. 3% 미만의 지분을 가진 재벌일가가 전체 기업과 동일한 실체라니 도대체 어느 시대의 논리인가? 필자는 완전포괄주의가 도입되어 재벌일가의 대기업을 이용한 변칙증여가 없어진다면 오히려 기업의 가치가 높아질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현재 증권가에는 'Korea Discount'란 용어가 있다고 한다. 기업내용이 똑같은 기업은 주가도 같아야 이치에 맞다. 그러나 똑같은 내용의 기업이라도 한국기업의 경우에는 미국기업에 비하여 30% 정도 주가가 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국 재벌기업의 불투명성 때문이다. 우리나라 재벌기업은 3% 미만의 지분을 가진 재벌일가가 황제에 버금가는 막강한 경영권을 갖고 있으며 이를 대대로 세습하고 있다. 게다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기업을 이용하여 온갖 부당한 거래를 일삼고 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재벌기업이 불안할 수밖에 없고 그 불안감이 주가로 표현되는 것이다. 만약 완전포괄주의 및 관련제도가 정착되어 부와 경영권의 부당한 세습이 불가능하게 되고, 원칙에 맞는 투명한 경영이 가능해진다면 30%의 Discount는 회복된다. 재벌일가 개인에게는 손해일지 몰라도 대다수 투자자에게는 이익이다.

떳떳한 부자가 돼라

미 국의 어느 TV 방송국은 부자들이 실제 어떻게 소비를 하는지 직접 따라다니며 취재하고 이를 그대로 방영해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위화감을 조성한다 어쩐다 하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방송국은 그 부자가 얼마만큼 벌어서 얼마만큼 세금을 내고 나머지로 자신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취지로 방송을 하기에 그다지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자랑할만한 일이다. 다만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의무를 다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부유층일수록 세금 안 내고 군대 안 간다'는 인식이 매우 깊다. 그래서, 부유층이 존경받지 못하고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한 것이다. 미국 부시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상속세 폐지를 내세웠고 점차 폐지할 것으로 알려지자, 빌 게이츠와 조지 소로스 같은 '진짜 부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개인적으로는 세금을 많이 냄으로써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뺐지 말라는 것이고, 상속세 폐지는 부익부 빈익빈을 가중시킨다는 이유이다. 오로지 자기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나라 재벌들과 너무 대비된다. 그런데도 재벌들은 미국은 상속세를 완화하는데 왜 우리만 강화하려고 하느냐고 따진다. 따지기 전에 먼저 자신들의 모습부터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완전포괄주의 논쟁의 원인을 누가 제공하였는가? 재벌들은 국민의 기본적 의무를 다 이행하였는가? 그래서 국민들 앞에 떳떳이 나설 수 있는가?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