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코뮌의 역사적 의미

노동사회

파리 코뮌의 역사적 의미

admin 0 9,363 2013.05.11 08:58

전쟁 중이었지만 3월26일 국민군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코뮌 평의원 선거가 시행되었습니다. 평의원은 구별로 2만 명당 1인, 1만 명을 초과하는 단수에는 1인을 할당하고 연기식(連記式)투표로 선출하도록 했죠. 유권자(20세 이상의 성년 남자) 48만5천 명 가운데 22만5천 명이 투표했어요. 당선자는 90명이었으나 중복 당선자가 5명이라 실제 당선자는 85명이었죠. 그 가운데 20명은 온건한 공화파였고, 나머지는 모두 사회주의 혁명파였습니다. 20구 중앙위원회가 추천한 후보가 당선자 총수의 절반 가까이 차지했고, 국민군 중앙위원회 추천 후보도 16명이 당선되었죠. 온건 공화파 당선자 20 명이 사퇴하고, 또 다른 이유로 4명이 사퇴해 4월16일 보궐선거가 실시되었는데, 혁명파만 당선되었어요. 이로써 코뮌이 성립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립한 코뮌이란 정확히는 '코뮌 평의회'로서 시의회를 가리킵니다. 코뮌, 즉 자치체는 보통 입법부의 '평의회' 외에 행정부의 시장·구장을 두고 있었으나, 이 코뮌 의원은 구행정을 담당하는 한편, 시행정은 물론 정부기능도 수행했죠. 파리 코뮌은 의회인 동시에 집단적인 정부이기도 했습니다.

'파리 코뮌'의 선언

3월28일 드디어 '파리 코뮌'이 선언되었어요. 국민군 병사와 일반시민 2만여 명이 시청 앞 광장에 모인 가운데 국민군 중앙위원회 위원장 랑비에(Ranvier)가 "인민의 이름으로 코뮌을 선언한다"고 외치자, "공화국 만세", "코뮌 만세"라는 함성이 군중 속에서 터져 나왔죠. 다음날인 3월29일 코뮌은 제1차 평의회를 열고 집행위원회를 비롯하여 재정, 군사, 사법, 안보, 식량공급, 노동·공업·교환, 외무, 교육, 공공사업 등 10개 위원회를 설치해 의원들이 분담하여 혁명정부로서 맡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코 뮌은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세력의 실질적인 권력기관이었어요. 코뮌 의원들 가운데 노동자계급에 속하는 사람은 25명 가량이었죠. 코뮌은 상비군제도와 경찰제도를 폐지하고, 무장한 국민군으로 대체했습니다. 또 코뮌은 교회와 국가권력을 분리하고, 교회의 재산을 국민의 재산으로 귀속한다고 포고했죠. 그리고 공직자의 선거제 원칙을 도입했으며, 모든 관리의 인민에 대한 책임제와 교대제를 확립했어요.

코뮌은 구체적인 입법과 정책, 그리고 사업들을 실행했습니다. 먼저 노동정책부터 살펴보면, 제빵공의 건강을 해치는 야간작업을 금지했고, 사업장 안에서 행해지던 사적인 재판관행을 폐지하도록 했으며, 자본가들이 징계 명목으로 임금을 공제·삭감하는 행위를 금지시켰죠. 한편, 기업주가 버리고 도망간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위원회를 설치하게 하고 노동자 조직으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이 밖에도 노동시간의 상한선 설정과 최저임금제 설정 계획, 전시 이득의 몰수조치 등이 검토되었으나 코뮌 기간 중에 실현되지는 못했어요.

사회 입법으로서 주택임대료에 대한 법률을 공포했고, 채무만기법을 폐지했으며, 빈곤자 구제는 정부 의무로 정했어요. 그리고 코뮌은 공창(公娼) 제도를 폐지했고, 도박 행위를 금지했어요. 교육 정책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 원칙에 따라 교육과 종교의 분리 원칙이 실행되었고, 완전한 무료의무교육 방침과 아울러 직업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었죠. 한편, 재정위원회는 국가의 종교예산을 폐지했고, 수도회의 자산을 몰수했습니다. 군사위원회는 징병제도를 폐지하고, 군복무 능력이 있는 남자의 경우 당시 진행 중이던 전쟁에 참가하도록 했어요.

정부군의 공세

파 리 코뮌이 성립된 격동의 3월이 지나고 4월이 시작되면서, 티에르 정부는 지방의 저항 움직임을 진압한 가운데 정규군 6만5천 명을 베르사유로 집결시킬 수 있었습니다. 한편, 티에르는 비스마르크와 교섭을 벌여 독일에 포로로 잡혀있는 프랑스군 40만 명을 귀환시켜 파리 탈환작전에 투입할 계획까지 짜놓고 있었죠. 이 무렵 코뮌 측은 현역 국민군 8만 명, 주둔 국민군 11만4천 명, 여기에 벨기에 사람 7백 명, 폴란드 사람 4백 명 등을 모두 합쳐 20만 명 가량의 병력을 확보했어요. 그러나 복역 기피나 군대 편성의 부실 때문에 실제 세력은 6만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죠.

티에르는 4월1일 베르사유 의회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프랑스의 가장 훌륭한 군대조직이 베르사유에서 완성되었다. 이제 선량한 시민들은 고통스럽기는 하나, 그 전투에 종지부 찍기를 바라고 있다". 이 선언은 파리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었죠.

코뮌은 티에르의 전투 재개 선언에 대해 5일 이내에 베르사유로 진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티에르 정부는 코뮌보다 훨씬 민첩하게 작전을 펴 4월2일 선제공격을 감행했죠. 4월3일에는 코뮌이 베르사유에 반격을 결행했지만, 전투에서 참패했어요.
4월말부터 베르사유 정부군의 공격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코뮌의 병사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그들은 훈련이 부실했고 지휘계통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어요. 여기에 극심한 내부 분열이 겹쳐 군사적 패배를 초래하게 됩니다.

1871 년 5월21일 일요일 '피의 주간'이 시작되었죠. 이날 파리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습니다. 제4지구 구청에서는 여성노동자들이 모인 가운데, 오후 1시부터 '파리 방위·부상자 간호를 위한 여성동맹 중앙위원회' 주최로 여성노동조합연합 결성대회가 열렸어요. 같은 시간에 파리 시민들이 드나들게 된 튈르리 궁전 정원에서는 코뮌 전사자 가족 구제를 위한 큰 규모의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죠. 이틈을 타 오후 3시 무렵 정부군의 정찰대가 서쪽 샹크루 문을 통해 시내로 들어왔고, 뒤이어 전투부대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침입을 개시했습니다. 밤이 되자, 베르사유 본대 소속 병사 2만 명이 시내로 들이닥칩니다. 정부군은 코뮌 전사들을 닥치는 대로 총살하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코뮌군을 추격했지요.

5월22일 새벽, 정부군 7만 명이 무너진 성벽을 넘어 시내에 돌입해서 국민군 1천5백 명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이 날 파리의 서부 일대는 정부군 수중에 떨어졌고, 몽마르트르도 위협을 받았습니다. 기묘하게도 몽마르트르에 배치되었던 대포진지는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 날 저녁 티에르는 "정의, 질서, 휴머니티, 문명의 정신이 승리하였다.… 파리에 돌입한 장군들은 위대한 전사들이다.… 죄에 대한 보상은 철저할 것인즉, 그것은 법의 이름으로, 법에 의하여, 법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질 것이다"고 베르사유 의회에 보고했어요.

코뮌군의 패배

5 월23일에는 정부군이 몽마르트르 고지를 점령했으며, 18구를 비롯한 중앙지구로 진격했습니다. 점령 지구에서는 코뮌군과 일반시민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어요. 몽마르트르 바리케이드를 사수했던 코뮌 전사들 가운데는 여성이 1백 명 정도 있었는데, 거의 다 총살당했습니다. 이 날 파리 시내 주요 건물들이 불타면서 거센 불길이 치솟았죠. 코뮌 군이 베르사유 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건물에 불을 질렀던 거죠.

5월24일, 정부군은 프랑스은행, 증권거래소, 루블 박물관을 장악했으며, 코뮌군은 후퇴하면서 정부군을 저지하기 위해 시청을 비롯하여 시내 주요 건물에 불을 질렀습니다. 파리 시내 곳곳에서 정부군은 마치 사냥을 하듯 코뮌 군을 색출하여 처형했죠. 한편, 국민중앙위원회는 국민의회와 코뮌을 동시에 해산시키고 대도시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임시정부로서 '헌법제정의회' 선거 실시 등을 골자로 하는 화평 제안을 발표했으나, 베르사이유에 자리잡은 정부가 받아들일 리 없었습니다.

5월25일, 파리시 서부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게 된 베르사유군은 세를 몰아 코뮌군의 저항선을 세느강 오른쪽의 동북지구로 축소시켰습니다. 이 날은 베르사유군에게는 승리의 날이었죠. 이날부터 베르사유군은 약식재판으로 포로들을 처형했습니다. 베르사유군의 공격을 막아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코뮌군은 라로케트 감옥에 갇혀 있던 베르사유 왕당파 인질들을 모조리 총살했죠. 이것은 베르사유군의 잔악 행위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어요.

5월26일 베르사유군의 소탕전이 벌어졌습니다. 프로이센군이 코뮌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1만 명을 동원했어요. 코뮌군은 퇴로를 차단 당했고, 싸우다 죽는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립니다. 코뮌 전사들은 쇼몽 언덕과 페르라셰즈 공동묘지 등으로 쫓기며 최후의 총격전을 벌였죠.

5월27일, 코뮌군과 베르사유군은 비가 내리는 페르라셰즈 묘지에서 비석을 사이에 두고 처참한 백병전을 벌입니다. 코뮌군은 사력을 다했으나, 훗날 '전사들의 벽'이 된 페르라셰즈 담장 앞에서 떼죽음을 당합니다.

파리 코뮌의 붕괴

5 월28일 일요일 오후 2시 코뮌군의 총성이 멎었고, 시가전은 끝났습니다. 이날 저녁 베르사유군 사령관 막마옹은 파리 시민들에게 선언했습니다. "파리 시민 여러분, 프랑스 군대는 여러분들을 구하러 왔습니다.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오늘 전쟁은 끝났습니다. 질서, 노동, 안전이 회복될 것입니다".

노동자계급의 정부라 불린 파리 코뮌은 성립된지 72일 만에 붕괴되었습니다. 전투는 끝났으나 탄압과 학살은 계속되었어요. 약식 군사재판으로 집단처형이 행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거나 국외로 추방되어 유형생활을 하게 되었죠.

공표된 통계자료에 따르면, 파리시는 총살된 1만7천 명에 대해 매장비용을 지불했고, 체포된 코뮌 군은 4만에 이르렀습니다. 그 가운데 1만 명이 군법회의에서 징역 또는 금고형을 선고받았거나 유형조치를 당했어요. 베르사유군의 손실에 관한 공식발표로는 사망한 사관이 83명, 병사가 794명이었고, 부상당한 사관은 430명, 병사가 6,024명이었으며, 행방불명자는 183명이었죠. '피의 주간'에 희생당한 코뮌군의 수는 3만에 이르며, 투옥된 사람은 43,522명에 이르렀어요.

1875년 군부가 의회에 보고한 통계에 따르면, 투옥된 사람은 43,522 명이었고, 이 가운데 7,213명이 예비심에서 석방되었으며 나머지 36,309명이 기소되었습니다. 기소된 사람들 가운데 기소무효가 23,727명, 무죄판결이 2,445명이었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10,137명이었어요.

코뮌의 붕괴를 보면서 칼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노동자들의 파리는 코뮌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의 영광된 선구자로 영원히 칭송될 것이다. 그 순교자들은 노동자계급의 위대한 가슴 속에 들어가 있다. 역사는 코뮌을 근절시킨 자들을 지금 벌써 처형대에 못박아 놓았으며, 성직자들의 어떤 기도도 그들을 처형대에서 구제하기에는 무기력 할 것이다."

파리 코뮌의 실체

72 일 동안 권력을 행사했던 파리 코뮌을 두고, '노동자 정부', '사회주의 혁명', '프롤레타리아 독재', '최초의 민중혁명'라는 평가들이 이뤄져왔습니다. 파리 코뮌의 역동적인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코뮌의 진행과 성립 그리고 붕괴의 과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코뮌의 구성과 조직, 민중의 요구, 혁명 권력의 성격, 정치조직과 사회주의 등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파리 코뮌은 한마디로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들이 일으킨 민중혁명이었어요. 코뮌 선언 다음날 페릭스 피아는 「코뮌」지에 실린 논설에서 코뮌의 성격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했습니다.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전례 없는 혁명을 이루었다. 3월18일 여러분이 일으킨 혁명은 다른 어느 혁명과도 구별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위대함은 극히 민중적이고, 집단적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익명으로 만장일치를 통해 이루어진, 관리인이 없는 최초의 혁명이었다."

'익명의 혁명'을 수행한 '무명'의 전사들은 '코뮤나' 또는 '코뮤느'로 불리었어요. 이들 대부분은 노동자들이었는데 전통적인 직인이었고, 장인이나 소상인과 연대감을 갖고 있었죠. 코뮌이 붕괴된 뒤 재판을 받은 약 3만6천 명의 직업을 보면, 노동자가 70% 이상을 차지했고 소상인 약 13%였으며 자유업이 5% 가량 되었어요.

코뮌을 이끈 조직은 매우 다양했고 복합적인 양상을 보였습니다. 우선 노동자 조직을 보면, 보나파르트 2세 말기에는 파리에 100여 개의 노동자 조직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20여 개가 인터내셔널에 속해 있었고, 60여 개가 인터내셔널의 영향을 받았던 '노동자조직연합희의'에 속해 있었죠. 그러나 1870년에 시작된 탄압과 뒤이은 파리 공방전에 따른 생산 저하로 노동자 조직은 20개 정도로 크게 감소했어요. 1871년 4월부터 노동자 조직이 확대되었으나, 민중세력 전체에서 노동자 조직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크지 못했죠. 따라서 파리 코뮌은 노동자 조직이 주도하지는 못했고, 지구를 단위로 하는 시민조직 또는 민중조직을 주된 기반으로 했습니다.

이런 조직에는 세 가지 갈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20구 중앙위원회를 들 수 있어요. 이것은 1870년 9월4일 이후 각구에서 결성된 '감시위원회'의 중앙연합기관을 말합니다. 이 조직은 적극적인 활동가 조직으로, 위원들 가운데는 코뮌 위원으로 당선됨으로써 그 뒤로는 중앙위의 활동이 현저하게 약화되었죠. 그러나 감시위원회는 각구 활동의 중심이었고, 많은 구에서는 그 행정을 장악하기도 했어요.

둘 째는 국민군 중앙위원회로, 이 조직은 애국주의 또는 공화주의로 결집된 대중조직이었죠. 국민군 중앙위원회는 코뮌 선거로 20구 중앙위원회에 주도권을 양도했으나, 코뮌 성립 이후에는 군사 지도의 권한을 둘러싸고 코뮌 의회와 갈등을 빚었어요.
셋째는 각 지구에서 생긴 민중클럽이었어요. 이 조직은 말 그대로 코뮌의 운명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 민중 조직이었죠. 처음에는 각 지구에서 열렸던 공공집회 형식을 취했으나, 학교나 공회당 또는 카페 등에서 상시 조직으로 자리잡게 되었죠. 클럽은 어떤 의미에서는 거리의 입법·행정기관이기도 했어요.

민중의 요구

이런 조직들을 통해 표출된 민중의 요구 내용은 어떤 것이었던가를 살펴보겠습니다. 클럽 등을 통해 코뮌 의회에 제출된 요구들을 집약하면 대략 이렇습니다. 정치면에서는 상비군의 폐지와 경찰청의 쇄신, 관리의 책임제, 재판의 민주화, 교육의 무상화 의무화 보편화 등이었고, 사회면에서는 물가통제, 식량징발, 누진과세, 평등분배 등이었죠. 이와 더불어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노동자 조직화 요구도 노동조직에서 제기했습니다.

다음으로 파리 코뮌이라는 권력의 성격을 살펴보겠습니다. 파리 코뮌의 혁명 권력을 바쿠닌은 무정부주의적 관점에서 '국가의 부정에 기초한 연합주의'로 보았어요.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규정했고요. 대체로 '혁명적 코뮌론'이 유력한 편입니다. 파리 코뮌은 군사 지도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군사 독재를 낳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인민 주권이라는 가장 급진적인 직접 민주제가 독재를 가져온다는 것은 모순인 것 같지만, 이는 혁명 권력의 아류로서의 군사독재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실 제로 코뮌 의회는 지도성을 발휘하여 민중의 요망을 따르고 군사독재를 방지한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면서도, 다수파는 중앙집권적인 독재체제를 수립하여 '공포정치'를 실시하려 했습니다. 이에 반해 소수파는 직접민주제의 본래 의미를 실현함으로써 혁명의 에너지를 흡수하려 했죠.

파리 코뮌의 평가를 둘러싸고 제기되는 또 하나의 논의는 사회주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논점이 제시될 수 있어요. 하나는 파리 코뮌 내부에서 제1인터내셔널이 소수파였고 정책에서 사회주의적인 내용도 미약했다는 입장입니다. 파리 코뮌이란 원래 패전이라는 비상사태 속에서 노동자계급이 미성숙했던 상태에서 발생한 민중운동이었으며, 사회주의 운동과는 무관했다는 해석이죠. 다른 하나는 노동자계급은 각 지구의 민중운동으로 편성되었고, 인터내셔널의 활동가 역시 지구에서 활약했다는 점을 중시하는 입장입니다. 이에 따르면, 코뮌이 1860년대의 사회주의 운동과 단절은 있지만 거기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파리 코뮌이 사회주의를 공식적으로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민중의 요구나 입법 정책 등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목표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파리 코뮌은 여러모로 사회주의 혁명의 요소를 갖고 있었던 것이죠.

파리 코뮌의 의의

파 리 코뮌은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민중 혁명의 정부였습니다. 13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파리 코뮌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는 견해가 여러 가지로 갈립니다. 여기서는 노동운동사에서 갖는 의의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마르크 스는 파리 코뮌을 "노동자계급이 사회적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으로 공공연하게 인정된 최초의 혁명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파리 코뮌의 구성과 활동에서 보듯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세력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운명의 주인공, 권력의 주체로 인식하게 만들었던 것이죠. 소외된 노동을 진실한 인간적 노동으로 바꾸는 것이 코뮌의 지향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파리 코뮌의 경험을 통하여 민중혁명운동과 코뮌과 같은 정치 권력의 획득이 지배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더욱이 소유관계를 변화시키는 일회적 행위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죠. 혁명 후에도 지배계급은 잔존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들을 근본적으로 변혁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새로운 사회 건설의 필수조건임을 논증했던 것이죠. 제1인터내셔널은 1870년 9월 총평의회를 열고 "사회혁명의 승리, 그 최종목적인 계급 폐지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프롤레타리아 정당으로 조직할 필요가 있음"을 권고하는 결의를 채택한 바 있습니다.

또 파리 코뮌의 성립과 붕괴는 민중세력과 군대 사이의 상호관계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무장한 민중세력, 상비군과 혁명적 노동자계급 상호관계가 전세를 결정하는 요인이었고, 파리 코뮌이 상비군의 폐지와 시민의 무장을 계속 주장한 것도 정부의 상비군이 노동자 투쟁을 가로막는 결정적 힘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어요.

파리 코뮌은 노동자계급의 동맹자 문제에 대해서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파리 코뮌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최초 경험이었음과 동시에 중요한 국민적 과제―완전히 부패한 제정이 초래한 결과들의 일소, 나라의 자유와 독립―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이점에서도 노동자계급의 이익은 당시 프랑스 중간계급의 이익과 합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편, 파리 코뮌은 노동자계급 투쟁이 갖는 국제주의 성격을 크게 부각시켰어요. 파리 코뮌은 '노동 해방'이라는 세계 노동자의 공통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다른 나라 노동운동과 국제노동운동 발전에서 중요한 계기로 자리잡게 됩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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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 : 제 7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