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대투쟁 25주년의 새 아침을 맞으며

노동사회

노동자대투쟁 25주년의 새 아침을 맞으며

admin 0 3,061 2013.04.19 02:55
새해 임진년이 밝았다. 단기 4345년, 불기 2556년, ‘흑룡의 해’다. 해마다 좋은 꿈과 희망을 바라온 것처럼 올해도 그렇게 소망한다. 한치 앞도 알기 어려운 숨 가쁜 변화 속에서, 우리 사회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도 함께 가져본다.

지난해에는 오래 쌓여왔던 문제들이 터져 나와, 무엇인가 큰 변화의 계기가 올 것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나라 안에서는 정치․사회 변화의 기운이 곳곳에서 차오르고, 지구촌 곳곳에서는 민주화의 요구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폐해에 분노한 저항의 몸짓들이 격렬하게 이어졌다. 또한 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사태의 비극 속에 드러난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이 세계적인 과제로 제기되었고, 연말에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서로 동북아와 한반도 정세에 중요한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무너진 ‘경제 살리기’ 신화와 낙담의 시대

지난해 실적에 대해 집권층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평창올림픽을 유치했고,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했으며, 한∙유럽-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세계에서 ‘경제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가 됐다고. 그러니 힘을 내서 열심히 해보자고.

그런데 이런 성과에 희망과 기대에 부푼 사람들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 표면의 성과보다 삶의 음지가 훨씬 깊고 짙은 탓이다. 전례 없는 물가 상승으로 실질 임금은 사정없이 깎여나가고, 높은 실질 실업률은 3%대 완전고용 상태의 통계치를 무색케 한다. 세계 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최고 수준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규모, 사교육비, 주거비, 근로소득 양극화, 장시간 노동, 산재사망자, 저출산, 자살률 등은 현 집권세력이 강조해 마지않는 ‘산업화-민주화-선진화’ 논리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집권층도 크게 어려워진 중산층이나 서민의 생활, 원하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젊은 층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토로한다. 고용의 질보다는 양을 충족시키는 데 정책의 중심을 두어 온 탓에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고백도 아울러 내놓는다.

아무튼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삶의 조건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나아질 수 없다면 지금 상태가 유지되기만 해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그러나 지난 몇 해는 어떤 측면을 들여다봐도 악전고투의 나날이었다. 길게 보면 세상살이는 나아진다는 얘기는 그냥 위로삼아 던지는 식자들의 상투어일 뿐이었다.

‘경제 살리기’에 성공했다고 호언하는 사이 노동 현장은 정리해고의 태풍이 몰아치고, 쌍용자동차에서처럼 졸지에 사지로 몰린 노동자와 그 가족들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다가 세상을 저버리는 일이 속출했다. 한진중공업에서는 해고 노동자들이 1년 가까운 크레인 농성 끝에 재취업의 기회를 간신히 확보했지만 그 과정은 참으로 참혹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노동정책기조

그럼에도 정부는 ‘고용 총량의 증대’를 국가고용전략으로 내세우고, ‘고용의 유연화 확대’를 일관되게 추진했다. 이울러 법과 원칙에 따른 ‘노사관계 선진화’를 밀어붙였다. 사용자에 의한 단체협약 해지에, 공공분야의 단체협약에 대한 시정명령이 줄을 이었다. 오랫동안 교섭을 통해 확보한 노동조합의 권리나 근로․복지조건들이 법령 위반이라는 이유로 휴지조각이 되고 노동조합 교섭력은 무력화했다.

제도상의 변화는 근로시간 면제제도, 복수노조와 교섭창구 단일화제도를 통해 노조 운영의 개혁을 강요했다. 이른바 ‘타임오프’라는 근로시간면제제도가 노조 전임간부 수의 급속한 감소와 노조활동의 위축을 강요했다고 노조들은 불만투성이다. 복수노조 허용으로 조직률이 올라갈 것이라는 노조의 기대와 사용자의 우려는 허상에 그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신규 조직은 늘어나지 않고 사용자의 지배․개입에 의한 분열과 분할이 성행하고 있다고 노조들은 아우성이다. 교섭창구 단일화는 복수노조 허용에 따른 현실적 필요성 강조에도,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의 제한이라는 근본적인 모순을 갖고 있는 데다가, 산별노조의 무력화 등을 노린 사용자의 입맛에 맞춘 제도라는 게 속속 드러나고 있다고 노동계는 지적한다. 하지만 정부는 노사관계제도 개혁이 안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노사 분쟁의 감소 추세 속에서 일부 사용자의 횡포로 날카로운 갈등이 이어지기도 했다. 방어적이어야 할 사용자의 직장폐쇄가 노조 파괴를 위한 공격적 무기로 둔갑하는가 하면, 파업 후 현장에 복귀한 조합원들에게 ‘항복문서 서명’이 강요되고, 홍익대 청소 경비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배운 자들의 행패가 세인의 거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비정규직노동 문제와 복지 문제가 정치․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르자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고용의 총량 확대와 고용의 유연화라는 정책기조는 조금도 변할 기색이 없다. 가끔 법원의 몇몇 판결이 노동자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는 있지만, 고용노동부의 행정 해석과 상충되는 부분들이 최종심으로 결판이 나기까지는, 오랜 시간 혼란을 겪어야 할 뿐만 아니라 법 개정을 위해서는 많은 난관을 거쳐야 한다.

혼란과 불능의 조직노동운동

시간이 갈수록 부자 중심 정책은 많은 도전에 직면했고, 저항의 강도도 높아졌다. 하지만 당초의 정책기조는 변함없이 강행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노동자와 노동운동의 어려움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노동조합은 많은 힘을 들여 변화를 일궈내려 했다. 종래와 같이 ‘총파업투쟁’,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 ‘세상을 바꾸는 총파업투쟁’ 등이 단행되지는 않았지만, 결연한 투쟁과 규탄의 의지는 각종 집회와 회의에서 거듭 천명되었다. 그리고 힘을 키우고 집중하기 위한 조직적 노력도 시도되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노동운동 최대의 과제로 제기된 산별노조 건설운동은 숫자상으로는 80% 전환을 나타내고 있지만, 제대로 힘을 못 쓰는 형편이다. 금속노조의 산별교섭은 여전히 중소기업 단위에 머물고 있고, 보건의료노조는 사용자단체의 해체라는 난관에 부닥쳐 특성별 교섭으로 전환했다. 공무원노조는 정권의 비토로 설립신고증조차 못 받고, 교원노조는 오랫동안 교섭이 막혀있다. 공공운수노조는 산별교섭에 한 걸음도 나서지 못했다.

향후 노동운동의 사활이 걸렸다고 할 정도로 높은 비중을 두었던 노동법 재개정투쟁은 한국노총의 조직적 이해와 정부의 강공에 밀렸고, 민주노총이 ‘국민임단협투쟁’라는 이름으로 추진했던 최저임금 대폭 인상 투쟁도 약간의 마찰만을 겪으면서 마무리되었다. 그런 한편에 정치활동은 두 갈래로 나뉘어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한국노총은 한나라당과의 정책연대를 파기하고 야당인 민주당과 통합을 이루었다. 민주노총은 진보진영 대통합을 정력적으로 추진했고 통합진보당 탄생이라는 결과를 안게 되었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추이에 대해 노동조합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지적이 있다. “된 것도 없고 안 된 것도 없다”는 냉소적인 평가가 있는가 하면, “양대 노총은 뉴스메이커 축에도 못 끼었다”는 한탄이 지면에 나타나기도 한다. 사회적 약자인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를 끌어안지 못한 채 대기업 정규직 자기들만의 리그에 자족하고 있다는 여론의 따가운 비판도 여전했다.

그런 한편에 ‘희망버스’와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노동운동을 다한 것처럼 언론을 메웠다. 노동조합이 노동문제 해결의 전면에 선 것이 아니라 한 시인이 기획하고 시민들이 주역을 맡은 희망버스가 노동자들을 위해 앞장서서 싸우는 새로운 상황이 조성되었다. 희망버스 투쟁은 국회 청문회를 거쳐 새로운 노사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더욱 힘을 받는 모습이었다.

‘정치의 계절’, 반전은 시작 되는가

올해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부터 25년, 1997년 총파업으로부터 15년을 맞는 해이다. 1987년 여름, 6월 민주대항쟁의 연장선에서 전국 전 산업의 노동대중은 밑으로부터 스스로 떨쳐 일어나, 노동운동-노사관계-노동정치 전환의 일대 분수령을 이루어냈다. 1996~97년 겨울 날치기 노동법 개악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전면적인 총파업투쟁을 통하여 사상 처음으로 정권을 굴복시킴으로써 노동운동의 위력을 과시했다.

이후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몰려 악전고투를 거듭하면서 현장 민주화, 이념의 정립, 산별노조 건설, 노동자 정치세력화, 노조 운영의 혁신 등등 노동운동의 개혁을 추진했지만, 바라는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거대한 권력구조 변화의 바람이 예상되는 ‘정치의 계절’에 노동운동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미 작년 10․26 서울시장 보선 승리를 계기로, 야권통합 또는 연대전선의 형성을 통한 정권 교체의 낙관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가고 있다. 정권 연장의 위기를 절감한 집권 여당도 이명박 정부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면서 서둘러 내부 개혁과 위기 봉합에 나서고 있다.

정치 변화를 통해 노동환경을 유리하게 조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노동운동의 재활성화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되지는 않는다. 노동운동의 힘을 구성하는 제 요소들은 노동조합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고, 변화와 희망의 청사진을 세상에 내보여야 한다. 노동운동의 전략 목표는 어떤 것이고, 현장 동력과 현장 조직은 어떻게 활성화하며,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조직의 지도역량을 확대 강화하는 방안은 무엇인가. 차분한 진단과 성찰을 통해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기를 기대해본다.

아울러 정세 변화에 편승한 정치꾼들의 준동과 경제 살리기 논리에 사로잡혀 민주적 발전을 왜곡시키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면서, 과감한 결단과 실천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6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