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노사·노정 관계를 돌아본다

노동사회

2003년 노사·노정 관계를 돌아본다

admin 0 3,684 2013.05.11 08:55

 


11월15일, 파업 116일만에 한진중공업 노사가 합의를 이뤄냈다. 합의 내용을 살펴보면 노조측의 요구가 대부분 수용됐음을 알 수 있다. 사측은 5년간 무분규 선언 등 노조가 완강하게 거부했던 부분을 철회하고, 노조가 부당노동행위의 책임자로 꼽은 전무 두 명을 해임했다. 또한 1989년과 1991년 노조 활동으로 해고·해직된 15명에 대해서도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 복직시키기로 했다. 기본급 10만원 인상, 김주익 지회장이 사망한 10월17일부터를 애도기간으로 설정해 유급화, 사측은 일간지를 통해 공개사과, 파업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은 일절 묻지 않을 것, 내년부터 근로조건 저하 없는 주5일제 실시 등을 합의했다. 특히 사회적으로 큰 문제로 떠오른 손배·가압류를 즉시 철회하고 이후 노조활동을 이유로 손배·가압류를 하지 않기로 했다. 가히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는 한진중공업의 노사 합의를 두고 "아흔 아홉번 패배할 지라도 단 한번 승리"라는 민중가요가 떠오른다고 했다. 말의 뜻인즉 한진중공업 노사합의는 '노동계의 승리'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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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파업을 위해 6월 28일 연세대에 모인 철도노조원    - 출처:철도노조 ]

"퍼줄 것 다 퍼줬다"

올 한해를 뒤돌아보면, 노동계가 아흔 아홉 번의 쓰디쓴 패배를 맛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다. 올 초만 하더라도 노동계가 '참여정부'에 대한 기대가 어느 정도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2월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방문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 갈 때만 하더라도 올해 이렇듯 많은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세상을 떠날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2003년 1월9일 '국민의 정부'에서 '참여 정부'로 정권이 이양될 무렵, 두산 중공업 배달호 조합원이 노동탄압 중지를 외치며 분신했다. 참여정부는 권기홍 노동부 장관을 중재자로 내세워 분신 63일만인 3월12일 개인 손배·가압류 소급 취하, 조합비 가압류 40% 적용(60%해제), 해고자 5명 복직, 2002년 47일간 파업 무단결근 처리 50%보존 등 쟁점사항에 대해 합의를 이끌어 냈다. 당시 권기홍 노동부 장관은 창원 두산중공업 현장에 머물며 직접 중재를 해 노동계로부터 후한 점수를 받았다.

노동계는 두산중공업 문제를 계기로 작업장 감시 등 전근대적인 노무관리와 부당노동행위 근절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점에서 큰 의미를 두었다. 특히 분신의 직접적 원인이기도 했으며, '국민의 정부' 시절 정권과 사측이 신종 노동탄압의 한 방법으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해 오던 손배·가압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한달 뒤, 철도노조는 파업을 앞둔 시점에서 이른바 4·20 합의를 이끌어냈고 화물연대는 "(정부가 화물연대에) 퍼줄 것을 다 퍼줬다"는 보수언론의 호들갑 속에서 5월15일 노정합의를 통해 요구사항을 관철시켜 나갔다. 

민주노총에서는 노사정위원회 참여까지 거론하는 상황도 도래했다. 1999년 탈퇴한 이후 한번도 검토한 적이 없는 노사정위 참여를 검토했다는 것은 그만큼 노무현 정권을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라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민주노총 내에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분위기와는 달리 참여정부는 조금씩 노동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는 등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전교조가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문제를 들고 5월28일 연가투쟁을 예고하며 첨예하게 대립했던 5월 중순, 노무현 대통령은 광주 망월동 한총련 학생들의 시위로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자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는 '깜짝 발언'을 했다. 또한 "남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는데 보람을 느끼지 못했을 때, 그 사람이 고마워하지 않고 또 다른 트집을 잡으면서 배신했을 때 그걸 어떻게 이겨나가는지 궁금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쏟은 정성이 배신으로 돌아올 때 어떻게 하는지 모두에게 질문으로 던져보고 싶다"고 말해 스스로 심한 배신을 당했다는 표현도 했다.

5월26일 교육인적자원부는 전교조가 제기한 인권침해 소지 3개 조항을 NEIS 핵심영역에서 제외했고, 전교조도 이틀 뒤 연가투쟁 백지화로 화답했다. 그리고 또 한달, 공권력 투입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조흥은행 파업도 6월23일 '대화'를 통해 해결됐다. 

"밀어보니까 밀리더라" 

이때까지만 해도 노동계 내부에서는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해 기대를 품었던 인사들이 있었고, 정부는 정부대로 불만이 있긴 했지만 극한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철도노조 2차 파업이 있기 직전인 6월21일, 전교조가 정부가 5월에 약속한 NEIS 합의를 번복하자 이에 반발해 연가투쟁을 강행했고, 이후 6월25일 민주노총은 경제특구 저지, 비정규직 기본권 보장, NEIS 철회를 요구하며 4시간 시한부 파업에 돌입하며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노정 사이에 대치 상황이 본격화되었고, 노무현 정권은 민주노총을 향해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경고를 보냈다. 일종의 최후 통첩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부를 길들이려는 파업을 하는 노조에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6월23일 지방노동관서 근로감독관 특강), "노조 특혜는 해소돼야 한다"(6월27일 포브스 편집장과의 대담) 등 강경 발언을 잇달아 내놓았다.

6월28일, 철도노조는 4·20 노정 합의를 정부가 지키지 않고 국회가 졸속으로 철도구조개혁법을 본회의에 상정했다며 2차 총파업에 돌입했다. 『한겨레21』에 철도노조 2차 총파업에 관해 눈여겨볼 내용이 실렸다.

"지난 6월 조흥은행노조 및 철도노조 파업 이후 민주노총과 노무현 정부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더 정확하게는 철도노조 파업이 고비였다. 당시 청와대는 철도 민영화 유보라는 4·20 노정 합의가 이뤄진 만큼 파업에 들어가면 안 된다며 만약 파업에 들어가면 보기 좋게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 대통령도 철도노조가 파업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막상 철도노조와 상급단체인 민주노총이 파업을 강행하자 노 대통령은 민주노총이 약속을 깬 것으로 받아들였고, 이때부터 민주노총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오히려 정부가 민주노총한테 보기 좋게 배반당했다는 것이다."

정부의 노동정책은 확실히 이전과는 달랐다. 철도노조가 2차 총파업을 선언하자 노무현 정권은 총파업 선언 3시간만에 서울의 연세대 등 전국의 농성장 5곳에 공권력을 전격 투입해 조합원들을 해산시켰다. 

물론 단순한 배신감 때문에 노동계에 대한 강공책을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른바 '법과 원칙'에 따라 노동문제를 해결했을 때가 오히려 낫다는 판단이 섰을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강공책에 밀려 철도노조는 파업 나흘째 백기를 들어야 했다. 

결국 철도노조와의 힘 겨루기에서 승리를 거둔 정부는 노동계에 대해 공세적 대응으로 일관하게 됐다. 한마디로 "밀어보니까 밀리더라"는 것이다. 8월21일 화물연대의 2차 파업에서도 정부는 엄정 대처를 외쳤고, 이에 화물연대는 파업 16일만에 상처뿐인 파업을 접고 업무복귀를 선언해야 했다.

정권 출범 1년에 노동자 4명 자살 

정부의 공세적 대응에 밀린 노동계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정부는 나흘 동안 진행된 철도노조의 파업에 대해 97억5천85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철도청은 파업 징계 대상자 8,648명 가운데 적극 가담한 지부장급 조합원 180명을 파면·해임 등 중징계 하겠다고 밝혔다. 중징계위 회부대상은 기관사가 3,836명, 차량직원 2,608명, 운수담당 1,279명, 정비창 직원 790명, 시설담당 125명, 전기담당 10명 등이며, 이는 파업에 따른 철도노조 징계규모로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

또한 교육인적자원부는 전교조 연가투쟁으로 인한 징계 대상은 최대 6,100여명이며, 이들 중 견책 등 실질 징계대상은 356명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급기야 7월18일 전교조는 현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는 공식 기자회견을 갖기도 했으나, 정부의 강경책을 변화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화물연대 또한 조직력이 감소됐다. 한때 3만명이 넘던 조합원 수가 2차 화물연대 파업으로 인해 2만여명으로 급격히 감소했으며, 구속수배자 40여명, 손배가압류 35억원이 부메랑처럼 날아왔다. 민주노총 김태연 정책실장은 "시기 집중이 이뤄지지 못하고 사안별로 대응을 하다보니 각개격파 당했던 측면이 있다"며 "민주노총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시기집중 파업 등이 논의됐지만 가결되지 않은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전교조의 NEIS 투쟁, 궤도 3사 파업, 철도 파업, 화물연대 파업을 비롯해 주5일제 개악안 저지, 경제특구법 저지 등 다양한 사안을 하나로 묶어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일 뿐이었다. 10월17일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 자결, 10월23일 세원테크 이해남 지회장 분신과 이현중 조합원 사망(8월26일), 10월26일 근로복지공단비정규노조 광주전남지역 이용석 본부장 분신, 10월30일 한진중공업 곽재규 조합원의 투신이 이어졌다. 

김대중 정권 5년 동안 배달호 조합원을 포함해 노동자 3명이 노동탄압에 항거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에 비해 노무현 정권 1년이 채 안된 시점에서 노동자 4명이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민주노총은 11월6일과 16일 총파업을 비롯해 대규모 대중집회를 통해 정부를 압박하려고 했지만, 한번 강공책의 단맛을 본 정부의 정책은 바뀌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는 오히려 11월9일 노동자대회에서 등장한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이유로 단병호 위원장 등 민주노총 지도부 6명에 대해 출석을 요구하며, 체포영장 발부의 수순에 들어갔다.

화물연대 2차 파업이 끝난 직후 김종인 위원장은 "애초 11월을 파업돌입 시기로 잡았으나 조합원들의 요구가 너무 강했다. 이를 지도부가 적적히 조절하지 못했다."고 실토해 전술상의 오류가 있음을 인정했다. 철도노조의 2차 총파업 역시 "내부 동력이 취약해 실제로 파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란 추측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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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9일 노동자대회 시청 앞 광장에 운집한 노동자들   - 출처: 오마이뉴스 ]

아흔 아홉번 패배와 한번의 승리?
 
시기를 조절하고 내부 조직을 다지면서 대응을 해도 어려운 판국에 성급히 파업에 돌입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러나 혹자는 "그렇다고 파업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정부가 알아서 해줬겠는가"라며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음을 강조했다.

철도와 화물연대의 2차 총파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정작 중요한 건 노동계가 사활을 걸고 막겠다던 주5일제 개악안과 경제특구법 저지 투쟁도 힘 한번 제대로 못써보고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김태연 정책실장은 "주5일 근무제의 경우 정부가 이전부터 통과시키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6월과 7월 정세에서 충분히 대비할 시간이 있었지만, 노동계에서 진전된 안으로 묶어 내질 못했던 측면이 있고 제조업 부분에서 임단협으로 주5일 근무가 확정돼 투쟁할 수 있는 동력이 부족해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비정규직에게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갈 주5일제 법안에 대해 현실적인 조건상 정규직 노동자가 투쟁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다는 말이다. 

특히 주5일 근무제의 경우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공동보조를 취했음에도 개악안의 국회통과를 막지 못한 것은 현시기 노동운동의 '실력'을 고스란히 드러낸 일이었다. 

철도노조가 2차 총파업에 돌입하기 하루 전인 6월27일 최저임금위원회는 올 9월부터 내년 8월31일까지 적용될 최저임금을 한달 56만7,260원으로 심의·의결했다. 지난해에 비해 10.3% 인상된 수치지만, 노동계가 요구한 70만600원과 격차가 컸다. 이 역시도 최저임금 결정에 대한 규탄집회는 몇 번 있었지만 사회적 의제로 이끌어내진 못했다. 

노무현 정권 1년을 지나면서 노동조합운동은 여전히 어려운 상태에 있다. 상반기에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었다. 그 성과도 노동조합운동의 실력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2003년 노동조합의 투쟁을 이끌었던 철도노조, 전교조, 화물연대의 현재 상황은 그리 좋지 못하다. 노동조합의 지도력과 현장 장악력은 약해졌고, 조합원수도 줄었다. 여기에 현장의 일선간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이어졌다. 

IMF 이후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2003년 역시 노동조합운동은 주체적 역량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고, 객관적 조건을 면밀하게 분석하지도 못했다. 그 결과 2003년 하반기는 노동조합운동에게 전례 없는 시련과 고민을 안겨주었다. 지금의 관성과 무기력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노동조합운동에게 내년도 희망은 멀다. "아흔 아홉 번 패배할지라도 단 한번 승리"로 만족할 수는 없지 않은가. 

 

  • 제작년도 :
  • 통권 : 제 8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