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절규 그리고 복직

노동사회

눈물과 절규 그리고 복직

admin 0 3,395 2013.05.11 03:21

눈물과 절규로 얼룩졌던 2000년 2월. 대우차 부평 공장은 해고의 날벼락으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한국 노동사 초유의 대규모 정리해고 사건은 인천 바닥을 흔들고 전국을 강진으로 몰아넣었다. 게다가 조합원들이 의원퇴직(명예퇴직) 형식으로 5천에 달하는 사직서를 남긴 채 직장을 떠난 직후라 더욱 충격이 컸다. 투쟁 깃발을 올리고 싸움은 시작되었지만 밀어붙이는 자본과 정부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우린 무너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애초 해고 대상자 선정과정에 갈등의 씨앗이 있었다. 해고 대상자를 선정한 기준이 전혀 납득이 안됐다. 해고 대상자엔 적게는 8년에서 15년 가까이 한번도 연월차를 사용하지 않고 만근을 한 동지가 포함됐을 뿐만 아니라 근태 기준을 관리감독자 입맛대로 정한 후 해고대상자를 선정한 것도 문제였다.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253key_01_0.jpg복직

대 우차가 미국 지엠과 매각을 마무리하는 와중에 복직협상이 열렸다. 2002년 7월, 정리해고자 1,750명 가운데 우선 300명을 복직시킨 후 2004년까지 미복직 정리해고자를 공장 가동률에 따라 복직시킨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복직자 선정에서 노조와 사측이 각각 6대4의 비율로 추천한 후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복직 대상자 명단발표라는 사측의 전술로 노조와 정리해고특별위원회(이하, 정특위) 사이엔 많은 비판들이 오갔다.

해고 발생일부터 선봉에 서서 투쟁을 하다가 고용보험이 바닥이 나 어쩔 도리 없었던 생계 차원의 투쟁 미참가자와 아예 한번도 투쟁에 참석하지 않았던 사람 등이 복직자 명단에 함께 섞여 있었다. 계속 투쟁 자리에 있던 동지들이 복직자 명단에서 누락되면서 상처의 골은 깊어갔다. 정작 화살의 과녁은 정리해고 사태를 일으킨 사측과 정부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 조합원들의 상황이 그런 생각을 가질 겨를이 없게 만들었다.  

사 측은 재입사 구실로 복직자 300명에게 2주 동안 “희망! 새 출발”이라는 교육연수를 실시했다. 사측은 의도적으로 외부강사를 섭외해서 게임과 흥미위주로 교육을 진행시켰다. 많은 동지들이 왜 우리가 이런 것을 받아야 하느냐고 큰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재입사 교육은 종료되었다. 2002년 12월23일부로 정식 복직 발령이 났다. 그리고 새해 연초부터 근무하기로 예정되었다.

그런데 원직 복직이 아닌 형태로 변질될 조짐이 보였다. 사측은 복직 형식이 재입사라 복직자들의 해고 당시 호봉만을 인정해 줄 수 있으며 나머지 모든 것은 신입사원 조건이라고 했다. 강제로 해고당했건만 10년, 20년 근속이 모두 무시되어 “0”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판이었다. 

모두가 마음 속으로 울고 울었다. 그뿐 만이랴. 다시 공장에서 배치받은 부서는 다들 과거 자신이 근무하던 부서가 아니었다. 사측에서 복직자 대부분을 전혀 생소한 부서로 배치시켰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복직자들이 두 차례 임시총회를 열고 노조를 통하여 고충처리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첫 출근

첫 출근하기 하루 전날 밤. 아내는 내가 꼭 복직할 것을 믿으며 버리지 않고 2년 간 보관했던 때묻은 옛 작업복을 장롱 위 상자박스에서 꺼내었다. 순간 많은 생각과 지난날이 떠올랐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혼 초부터 본의 아니게 고생시킨 것 같아 말은 못했지만 미안한 마음이 늘 가슴속에 맴돌고 있었다. 나라가 부도 위기에 처하면서 신혼집에서 몇 달 못살고 나왔고, 다시금 해고를 겪으면서 생활은 거의 바닥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고통을 감내하면서 오히려 나에게 힘을 준 아내에게 내 스스로 항상 고개 숙인 가장이었다. 이제부터는 좋은 일만 생기겠지. 첫 월급타면 입맛 잃어버렸다며 먹고 싶었던 음식도 생활고 때문에 일부러 외면하곤 했던 당신을 위해 쏘리라…. 

얼마 만에 출근하는 거냐며 밤새 뒤척이다가 잠을 설쳤다. 드디어 첫 출근하는 날이다. 회사 출입문을 들어가는 도중에 낯익은 동료 얼굴들이 보였다. 반갑다며 고생했다며 악수를 청한다. “이제 우리 자주 보겠네. 소주나 한잔합시다.” 인사를 뒤로하고 같은 부서에 배치된 동지들과 공장 건물 안으로 갔다. 그렇지만 복직된 거의 대다수가 예전에 근무했던 곳이 아니고 같은 울타리 회사 안에서 타 공장으로 배정 받아 낯설고 생소했다. 설명하자면 해고 전 승용1담당이었던 동지는 승용2담당 또는 엔진구동으로, 승용2담당은 엔진구동이나 승용1담당으로, 엔진구동 소속은 승용1담당이나 2담당으로 발령이 났다. 어쨌거나 문제는 근무경력은 인정하면서 원직복직도 아니고 후생복지에 관련한 모든 것조차 신입사원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데 있었다. 또 다시 피고름 짜라는 사측의 태도였다.

넘어야할 산

숱 한 산고를 치르면서 대우자동차의 구조조정은 마무리 됐다. 대우자동차는 지엠 대우와 인천대우차라는 두 개의 회사로 나뉘었다. 부평 공장에서 한 솥밥 먹던 노동자들이 소속에 따라 신분이 나뉘어진 것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인천대우는 수년간 지엠에서 요구한 만큼 생산성을 향상시켜야만 한다. 또한 국내 노동법에서 보호하는 쟁의 관련 파업은 몇 시간 내를 넘으면 안 된다. 혹 제시한 사항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지엠 대우로 인수를 안 하겠다는 미국 지엠의 입장이 있었다.

그런데, 부평 공장, 즉 다시 말해 인천대우차가 생산성을 향상시키려면 지엠이 새로운 차종을 투입시켜줘야 하고 끊임없는 호흡을 시켜야 한다. 현장은 그런 것을 알고 있고 정리해고 사태의 여진이 아직 남아 서로가 일 외에는 노조와 관련 된 것엔 무심한 경우가 많아졌다. 아직도 복직해야 할 동지들이 많다. 정특위 동지들이다. 진정 회사가 정상화를 위해 걸음마를 준비하는 거라면 곧 일부 공장부터라도 2교대 물량으로 가동 예정에 맞추어 미복직자를 받아 들여야한다.

그러고 보니 복직한지 한 달이 넘었다. 정리해고를 당했던 그 2월이 다시 돌아 왔다. 밖에서 처절하게 투쟁하는 정특위 동지들이 모두 복직되어 2년 동안 볼 수 없었던 공장 뜰 목련화를 함께 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