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권력 파리 코뮌의 성립

노동사회

민중권력 파리 코뮌의 성립

admin 0 4,137 2013.05.11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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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뮌이 선언되는 날, 그것은 혁명적이고 애국적인 축제의 날, 평화롭고 상쾌한 축제의 날, 도취와 장엄함 그리고 위대함과 환희에 넘치는 축제의 날이다. 그것은 1792년 사람들이 우러러 본 나날에 필적하는 축제의 하루이며, 제정(帝政) 20년과 패전과 배반의 여섯 달을 위로해 준다…. 코뮌이 선언된다. 오늘이야말로 사상과 혁명이 결혼하는 축전이다. 시민 여러분, 내일은 어제 밤 환호로 맞아들여 결혼한 코뮌이 아기를 낳도록, 항상 자랑스럽게 자유를 지키면서 공장과 가게의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승리의 시는 끝나고, 노동의 산문이 시작된다. - 『민중의 외침』1871년 3월3일자 논설 「축제」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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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 년 2월 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을 주축으로 한 민중세력이 루이 필리프의 부르주아적 입헌군주제를 타도하고 프랑스 공화정을 성취했죠. 그러나 1851년 12월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쿠데타를 일으켜 왕당파를 일소하고 독재권력을 장악하고, 1852년 11월 국민투표로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나폴레옹 3세가 지배하는 제2제정이 '보나파르티즘'이라는 정치체제로 등장하게 된 것이죠.

보나파르트 국가의 출현과 몰락

제 2제정은 부르주아 국가인 동시에 전제국가라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지배계급인 부르주아가 권력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고, 겉으론 중립적인 관료들과 강력한 군대를 근간으로 하는 독재적인 황제가 그 대리인으로 군림했죠. 이런 정치체제를 황제의 이름을 따 보나파르티즘, 혹은 보나파르트 국가라고 부릅니다. 보나파르트 국가의 지배계급은 여전히 부르주아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적합한 정치형태인 의회주의가 노동자계급에게 이용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포기했죠. 대신 전제적인 국가권력의 질서 위에서 개인적인 영리 추구의 길을 택했습니다.

보나파르트 국가체제는 애초부터 위기 요소를 갖고 있었죠. 보나파르티즘의 우산 아래에서 억눌렸던 이해 대립은 다시 갈등하기 시작했고, 사회계급들은 다시 각자의 이익을 주장하게 되죠. 위기의 조짐은 의외로 빨리 닥쳐왔습니다. 1857년 입법원(하원) 선거에서 5명의 자유주의자가 당선되어 소수이기는 하지만 원내의 반정부파를 구성했어요. 1863년 선거에서는 반정부적인 '자유연합'(Union lib ral)이 대거 진출함으로써 정부를 위협했습니다. 이것은 1860년에 체결된 영국·프랑스 통상조약이 보호주의를 주장하는 산업자본가층의 불만을 사게 된 결과였어요. 1860년 프랑스 산업자본의 발전과 영국과의 우호관계 유지를 위해 체결한 자유무역 통상조약으로 프랑스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했습니다.

이 런 형세를 만회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는 외교·군사 면에서 여러 가지 정책을 폈으나 실패합니다. 1860년부터는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권위 제국'에서 '자유 제국'으로 전환을 시도하는 한편, 노동자계급에 대해 온정주의와 탄압이라는 이중의 정책을 폈죠. 여러 계급의 이해관계를 통제·조정해 오던 보나파르트 국가는 1869년 위기를 맞게 됩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69 년 선거에서 정부파의 관선 후보가 크게 패배하고 반정부파가 두 배의 표를 얻어 의회의 292석 가운데 116석을 차지했습니다. 반정부파의 대부분은 보수적인 자유파였죠. 이런 정세 하에서 나폴레옹 3세는 1869년 7월 국무대신 루에르를 물러나게 하였고, 다음해 1월에는 반정부파 가운데서도 가장 보수적이었던 에밀 올리비에(Olivier, Emile)에게 조각(組閣)을 명했습니다. 그리고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는데, 내각은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고 황제는 국민투표로 국민들에게 책임을 진다는 황제와 의회의 이중체제가 형성되었어요. 이런 헌법정신에 따라 '1860년 이래의 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는데, 공화파의 기권 또는 반대투표 권고에도 불구하고 찬성 735만표, 반대 157만표로 나폴레옹 3세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 지만, 보나파르트 국가는 점점 위기로 치달았습니다. 1858∼1867년에 걸친 인도차이나 파병과 1861∼1867년의 멕시코 출병 실패 등에서 나타난 외교정책의 파탄, 반정부적 정치세력의 득세, 그리고 갈수록 증대하는 국민의 불만과 저항이 보나파르티즘을 궁지로 몰아넣었던 것이죠. 당시 반정부파는 반동적인 부르봉 왕조파를 별개로 친다면, 입헌군주제를 지지한 오를레앙파, 보수적인 부르주아 '자유파', 급진적인 부르주아 '공화파' 등 셋으로 크게 나눌 수 있고, 1860년대에 들어 공화파는 분열하여 '급진파', '신자코뱅파', '블랑키파'가 등장하죠.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은 1870년 7월19일 에스파냐 왕위 계승문제를 두고 발단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몰락의 길로 들어섭니다. 보나파르트 정부는 독일 서부 영토를 차지하여 제1제정 시기에 상실한 영토를 되찾아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역량을 확대함과 동시에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불만을 전쟁을 통해서 독일 쪽으로 돌리려 획책했어요.

한편, 프로이센의 부르주아지는 북부 독일의 작은 국가들을 통일한 데 이어, 남부 독일까지를 포함한 통일을 완성하고, 아울러 자신의 영향력을 프랑스로 넓히려고 전쟁을 준비해 왔죠. 말하자면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지배층은 나름대로 승리를 확신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가 스페인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독일과 이해관계 상충을 구실로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했어요. 그러나 프랑스의 군사력은 독일의 그것에 비해 형편없이 취약했습니다. 독일 군대는 프랑스에 비해 훈련과 장비, 그리고 기동성에서뿐만 아니라 병력과 작전 면에서도 월등했죠. 1870년 9월2일 벨기에 국경 부근의 프랑스 도시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와 함께 장군 39명, 장교 2천7백 명, 사병 8만4천 명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민중혁명의 발발과 그 성격

프랑스군의 참패는 보나파르트 국가의 몰락을 가져왔어요. 9월4일 파리의 노동자들과 민중세력은 총을 들고 일어나 보나파르트 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혁명운동이 일어난 겁니다. 노동자를 주축으로 공화국을 선언하고, '국민방위정부'를 출범시켰습니다. 노동자와 민중이 승리한 것이죠.

9월4일 혁명의 성격을 칼 마르크스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스당에서 찬탈자의 투항으로 그 자리가 비었기 때문에 공화국을 다시 설치한 것만은 아니었으며, 그 혁명이 자신의 적이 행한 지휘 아래 싸운 것이기는 하지만, 파리의 기나긴 저항으로 외국 침략자로부터 그 공화국을 전취한 것만은 아니었다―이 혁명은 노동자계급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아갔다. 공화국은 이제 과거의 어떤 사물에 대한 이름이기를 그쳤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잉태하고 있었다."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승리의 과실을 손에 거머쥔 것은 오를레앙 왕조파 군주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우익 공화파였어요. 인터내셔널 파리 지부와 노동조합연합회의의 지도자들은 9월4일 밤 강베타를 만나 정부 지지 의사를 표명하면서 파리 노동자들의 요구를 제출했죠. 그것은 시의회 선거 시행, 국민군의 빠른 무장, 경찰의 폐지와 자치체로 기능 이양, 출판·집회를 규제하는 특별법의 폐지, 정치범의 석방이 주된 내용이었죠.

그럼 1870년 가을에 벌어진 '혁명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일본 역사학자 시바타 미찌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첫째, 보나파르트 국가의 붕괴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패배라는 형태를 띠었죠. 따라서 민중운동의 분출은 사회적 요구에서가 아니라, 조국방어라는 애국주의로 고무되어 발생했습니다. 둘째, 제정에서 공화제로 이행한 것은 공화파 의원들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진행된 것이 아니라, 의회 밖 민중운동의 고양과 압력으로 추진되었죠. 그래서 9월4일 혁명은 혁명과 더불어 성립된 정부와, 혁명의 원동력이었던 민중운동이 긴장관계를 내포하면서 갈등을 빚은 2월 혁명과 매우 비슷한 상황을 조성했죠.

셋째, 2월 혁명과는 달리 이 혁명은 제정의 군사적 패배라는 부채를 물려받았어요. 그래서 국방정부와 민중운동 사이의 관계는 정부가 국방 임무를 잘 수행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었죠. 넷째, 혁명파 여러 그룹과 민중운동 사이에는 큰 거리감이 존재했어요. 자코뱅파는 원래 민중운동과 별로 접촉이 없었고, 블랑키파는 비밀결사에 지나지 않았죠. 그리고 인터내셔널파는 탄압과 전쟁에 따른 생산저하로 활동 기반인 노동자 조직들의 힘이 약해지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들 그룹에게는 애국주의로 고무된 민중운동과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가 큰 과제로 떠올랐죠.

국민방위정부의 한계

이 무렵 프로이센 군대는 파리를 뺀 프랑스 전역을 점령했고, 1870년 9월18일에는 파리마저 완전히 포위 당했습니다. 프로이센 병력은 15∼20만 명이었는데 비해 프랑스는 45∼50만 명으로 수에서는 훨씬 우세한 편이었으나, 프랑스의 경우 정규군은 6만 명에 지나지 않았고 나머지는 일종의 의용군인 국민군이었습니다. 이들 국민군은 프랑스 방어와 혁명정부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국민방위정부는 프로이센의 침략을 막기 위해 노동자와 민중들을 무장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가 장악한 국민방위정부는 공화제 방위에 필요한 파리 민중의 무장을 극도로 두려워했어요. 국민방위정부 안의 부르주아들은 겉으로는 방어를 부르짖으면서도 속으로는 프로이센에 대한 항복을 서둘렀습니다. 실제로 국민방위정부는 프로이센군의 파리 공격이 시작된 9월19일부터 열흘에 걸쳐 프로이센과 화평을 모색했으나 프로이센이 내놓은 조건이 너무 가혹해서 휴전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죠.
 
화 평 조정 시도 사실이 알려지자 민중들 사이에서는 정부의 항복 의사에 대한 불신이 높아졌고, 10월 들어 국민군의 총무장·총출격, 코뮌 선거에 대한 요구가 커졌습니다. 10월 한 달 동안 전황은 부진했고, 결국 10월 말에는 프랑스의 처지가 더욱 어려워졌죠. 이런 상황에서 10월31일 파리 민중들은 봉기를 결행했어요.

이날 아침부터 각 지구에는 '공화국 감시위원회'가 소집되었고, 정부에 사건의 해명을 요구하는 군중이 아침부터 시청 앞으로 계속 모여들었어요. 공화국 감시위원회는 새 정부 수립 다음날인 9월5일, 제1인터내셔널 파리지부의 발의로 활동가 500여 명이 모여 각 지구마다 공공집회를 열어 구(區)의 행정에 개입하여 공화제 요구 실행을 위해 조직된 기구였습니다. 9월5일부터 10일에 걸쳐 20개 구에서 감시위원회가 결성되었고, 9월11일에는 각구 대표 4인 총 80명으로 구성된 중앙대표기관 '파리 20구 공화주의 중앙위원회'(20구 중앙위원회)가 발족했죠.

오후 들어 시위 군중들은 크게 불어났고, 20구 중앙위원회는 국민방위정부 대신 48시간 안에 코뮌 선거를 실행할 임시위원회 설치를 제안했어요. 오후 4시 무렵 시청은 시위대에 점령당했고, 청사에는 적기가 휘날렸죠.

정 부는 다음날 시위 군중들에게 코뮌 선거와 정부 요인 선거, 그리고 시위대에 대한 면책 등을 밝힘으로써 시위는 진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민중들과 한 약속을 교묘히 어겼어요. 코뮌 선거는 파리 구장·부구장 선거로 탈바꿈하고, 정부 요인 선거는 주민투표로 대신 행해졌어요. "파리 시민은 국민방위정부의 권력을 지지하는가? 않는가?"를 물은 11월3일 주민투표 결과 찬성 56만, 반대 5만3천으로 나타났죠. 정부의 예상대로 신임을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5일부터 8일까지 구장·부구장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정부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어요. 당선자 가운데는 10월31일 봉기를 주도한 사람도 있었고, 급진파도 여럿 당선되었기 때문이죠.

파리코뮌의 성격

10월31일 민중봉기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된 '코뮌'은 어떤 내용을 함축할까요. 코뮌이란 원래 자치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파리는 수도라는 특수성 때문에 제2제정 하에서는 자치권이 부여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파리 코뮌'이란 말은 다른 코뮌과 달리 특수한 뉘앙스를 띠고 있죠. 멀리 중세 말기의 파리 시장 에띠엔느 마르세르에 의해 주도된 파리 시민의 왕권에 대한 반란은 접어두고라도, 프랑스 혁명기의 파리 코뮌은 전국혁명운동의 선두에 서 있는 존재였어요. 이 말은 단순한 자치체 이상의, 어떤 특수한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죠. 1870년의 상황에서는 파리의 방어, 나아가 조국의 방어를 정부에 기대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자 파리 시민 스스로가 자치권의 이름으로 정부와 맞서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모리나리는 한 시민의 질문에 응답하는 형식을 빌어 "코뮌 그것은 민중의 권리이고, 평등한 식량배급이며, 총동원령이자 배반자를 처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코뮌은 말뜻 그대로 코뮌인 것이다"고 말했어요. 또 20구 중앙위원회는 9월22일의 「선언」에서 코뮌을 '인민 자신에 의한 직접 민주 정부'라고 규정했지요.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의 내전』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것은 사회를 통제하고 제압하는 대신에 사회 자신의 살아있는 힘으로 사회가 국가 권력을 다시 흡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억압의 조직된 힘 대신에 자기 자신들의 힘을 형성하는 인민대중 자신이 국가권력을 다시 흡수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민대중의 적이 인민대중을 억압하기 위하여 휘둘러 온 사회의 인위적 힘(인민대중의 억압자들이 전유하고 있는, 인민대중에 대립되고 반대하여 조직된 인민대중 자신의 힘)을 대신할 인민대중의 사회적 해방의 정치적 형태이다. 이러한 형태는 모든 위대한 사물이 다 그러하듯이 단순하였다. 이전의 혁명―모든 역사적 발전에는 때가 필요한데, 과거에는 모든 혁명에서 때를 놓쳤고, 인민이 개가를 올린 바로 그 날 승리에 빛나는 무기를 양도할 때마다 그 무기가 인민을 향했다―에 반발하여, 코뮌은 제일 먼저 군대를 국민방위대로 대체하였다."
당시 민중세력의 코뮌 요구는 민중의 총무장과 혁명적 방위대책 실시와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휴전조약 체결

11 월이 되면서 파리는 겨울로 접어들었죠. 식량과 연료가 부족해지면서 시민들의 생활은 나날이 궁핍해졌어요. 국민군과 시민들은 프로이센 군대의 포위망을 뚫기 위한 출격전을 정부에 촉구했고, 11월29일 드디어 출격전이 감행되었죠. 그러나 200만 시민의 간절한 소망은 사흘 뒤 무산되었어요. 출격전은 장병 1만2천을 잃으면서 대패했죠. 게다가 12월5일에는 오를레앙이 다시 프로이센 군대에 장악되고 말았죠. 파리는 절망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고, 전쟁은 언제 끝날지 암담할 뿐이었어요.

1871년 새해가 밝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월5일 프로이센 군대는 파리에 포격을 개시했어요. 세느 강 왼편의 시내에도 포탄이 날아들었고, 전황은 매우 어렵게 되었죠. 이런 상황에서 20구 중앙위원회는 '20구 공화주의 대표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그 유명한 '제2호 붉은 포스트'를 붙였습니다. '대표단'이란 문자 그대로 지난 해 12월 각구의 감시위원회가 코뮌 결성을 목적으로 선출한 대표자들이었죠. 따라서 이 포스트에 서명한 140명은 정부가 실시하는 선거를 지지하지도, 또 그것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들이었어요. 이들은 프랑스대혁명 당시 왕정을 전복시켰던 1792년 '반란의 코뮌'과 같은 봉기 방식으로 코뮌을 구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어요.

이들이 내건 포스트의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만약 시청에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일말의 애국심을 갖고 있다면, 그들의 의무는 온 힘을 기울여 파리 민중들이 해방에 참여하도록 전력투구하는 것이다. 시 정부든 코뮌이든 이름이야 어쨌든 간에 이들만이 민중의 유일한 안전, 죽음을 면하게 하는 유일한 구세주다."

포스트는 현존 체제를 '제정의 계승'으로 규정하고, 임시정부를 교체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인민에게 길을 양보하라", "코뮌에 길을 양보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정부는 포스트에 서명한 사람들을 '무장봉기를 선동한 자'로 규정하여 체포에 나섰고, "파리 총독은 결코 적에게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는 강경한 성명을 발표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1월19일 뷔장바르 방면으로 갑자기 출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출격은 전략적으로 부적절했는데, 새로이 편성된 국민군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작전은 사상자 4천 명을 내고 패배로 끝났어요. 이 출격을 두고 "국민군의 노동자 대대를 무력화하고 사기를 저하시키려는 공격"이자 "항복을 준비하려는 출혈작전"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뷔장바르 출격의 무참한 패배와 프로이센에 대한 항복이 임박했다는 소문은 파리 시민들을 격분시켰죠.

1월22일 파리 시민들은 봉기를 일으켰어요. 이 봉기에는 국민군도 상당수 참가했는데, '휴전 반대', '철저 항전을', '코뮌 만세' 등의 구호를 외쳤죠. 이 봉기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사전에 시 청사를 점거하고 있던 정부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사상자 60여 명을 남기고 시위대는 흩어졌습니다.

정부는 다음날 아침 모든 클럽의 폐쇄 조치를 내리고, 17개 신문의 발매를 금지했으며 1백여 명을 구속했어요. 정부가 1월28일 프로이센과 체결한 휴전협정은 1월22일 봉기에 대한 탄압에 이어 이루어졌죠. 국민방위정부는 그 동안 끊임없이 비밀협상을 통해 항복 의사를 표시해 오다가 25일부터 28일까지 진행된 교섭 결과로 비로소 휴전협상이 타결되었습니다.

휴전조약의 주요 내용은 이러했어요. 21일 동안의 휴전, 휴전기간 중 강화(講和) 여부를 결정할 '국민의회' 선거 실시, 쌍방 점령지점에서 행하는 전투행위의 정지, 파리 성벽의 무장해제, 파리 요새에 대한 프로이센군 장악, 정규군 1개 사단과 국민군을 제외한 파리 주둔 군대의 항복, 전시과세(戰時課稅) 2억 프랑을 프로이센 군대에 지불할 것 등이었죠. 사실상 항복 선언이었던 셈입니다.

휴전은 대다수 파리 시민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안겨 주었습니다. 휴전 이후 파리 시민들 가운데 지방으로 이주한 수는 약 15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대부분 부유층이었죠. 무장을 해제 당한 다수의 군대가 휴전기간을 파리에서 보내기 위해 요새에서 시내로 철수했습니다. 한편, 국민군은 무장을 풀지 않은 채, 휴전을 이용해 새로이 무기를 입수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어요. 일자리 찾기가 어려운 처지에서 국민군이 지급 받는 수당은 중요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국민군 중앙위원회의 결성

휴전조약이 체결된 지 열흘 정도 지난 2월8일 전쟁을 계속할 것인가와 강화를 할 것인가를 공식 결정할 국민의회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파리에서는 혁명파가 승리를 거두었으나, 농촌을 비롯한 지방에서는 왕당파가 대거 당선되었어요. 총의석 768석 가운데 정통 왕정파, 오를레앙파, 제정파 등 왕당파가 4백 석을 차지했고, 항전파는 겨우 25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871년 2월12일 '반란의 수도'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 보르도에서 '시골 신사들의 의회'로 불린 국민의회가 정식으로 개회되었습니다. 의회는 굴욕적인 강화를 위한 예비조건을 승인하고 오를레앙파의 티에르(Thiers, Louis Adolphe)를 정부 수반인 행정장관에 선출했어요. 티에르는 곧바로 베르사유에서 비스마르크와 강화교섭을 진행하여 2월26일 강화 가조약을 체결했어요. 그 내용은 알자스 지방 전체와 로렌 지방 1/3을 프로이센에 할양하고, 50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되 완전히 지불할 때까지 프로이센 군대의 프랑스 주둔을 허락하며, 그리고 프로이센 승리의 상징으로 프로이센군이 이틀 동안 파리 진주한다는 것이었죠. 국민의회는 2월28일 이런 내용의 가조약을 찬성 546, 반대 107, 기권 23으로 인준했습니다.

1월28일 휴전조약 체결이래 파리의 분위기는 점점 과격해졌습니다. 2월15일에는 무장한 파리 국민군 3천 명이 강화 반대와 파리 국민군 연합체 구성을 결의했습니다. 이날 임시 중앙위원회가 결성되었고, 프로이센군이 파리를 점령할 경우 무력으로 대항할 것을 결의했죠. 3월10일 연합 규약이 최종 결정되었고, 3월15일 파리에 주재한 260개 대대 중 215개 대대의 대표가 모인 총회에서 국민군 중앙위원회가 정식 결성되었습니다. 국민군 중앙위원회는 국방을 위한 무기의 소지, 압제의 도구였던 상비군의 폐지, 민중의 민주적 정치참여 등을 강령으로 내걸었죠.

정부기관과 군대의 철수

'1848 년의 2월 혁명'을 기념하는 2월24일에는 국민군이 프로이센군의 파리 진군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위는 연일 계속되어 2월26일에는 시민 30만 명이 시위에 합류했죠. 이날 국민군은 파리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대포 170문을 몽마르트 언덕 위로 옮겨 버립니다. 이는 3월1일 프로이센군이 파리에 들어오더라도 대포를 빼앗기지 않고 저항을 계속하기 위해서였죠. 이 때문에 국민군의 무장 해제를 약속한 정부로서는 항복 조건을 지키기 어렵게 되었죠. 실제 이 대포들은 파리가 포위 당했을 때 시민들의 모금으로 제조된 것으로 정부 것이 아니라 파리 시민과 국민군 것이라 할 수 있죠.

정부는 국민군에게 대포를 반환하라고 명령했지만, 국민군은 응하지 않았어요. 정부는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국민군을 진압하려 했고, 3월8일에는 정규군이 대포탈환 작전을 실행했지만 국민군의 힘에 밀려 실패했습니다.

그 로부터 열흘이 지난 3월18일 정부는 대포를 기어코 탈환하려 또 한번의 군사작전을 감행했어요. 대포 탈환을 위해 야밤에 대포진지를 기습 탈환하고, 주력은 몽마르트르와 베르사유로 보낸다는 계획을 세웠죠. 그 안에는 경찰이 국민군 중앙위원회와 20구 대표단, 그리고 인터내셔널 지부 간부를 일제히 체포하고 조직을 와해시킨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습니다.

이 작전의 기술적인 어려움은 방비가 허술한 진지를 습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습격에서 빼앗은 대포들을 어떻게 파리 시민들 몰래 언덕 아래까지 운반하는가에 있었습니다. 마침내 3월18일 새벽 2시 2만 명의 병력은 밤 안개가 낀 도시를 지나 예정된 지점을 향했고, 오전 4시께 몽마르트르를 점령하고 대포를 끌어내리려 했습니다. 이 때 국민군과 시민들이 정부의 기습작전을 알아차렸고, 정부군이 점령한 대포 진지들은 순식간에 국민군과 시민들에게 포위당하게 됩니다. 그 때가 아침 7시 50분이었어요. 3월18일 파리에서 파노라마처럼 일어난 이 극적인 사건들은 결코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고, 정부의 도전에 대한 방어적이며 자연발생적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포 탈환을 위한 두 번째 작전이 실패로 끝나자, 정부는 군대를 베르사유로 철수시켰습니다. 국민의회도 베르사유에서 3월20일 속개한다고 결의했을 뿐만 아니라 파리에 자리잡았던 정부기관들도 사실상 베르사유로 옮겨갔습니다. 이로써 파리는 사실상 권력 공백 상태가 되었어요. 이에 따라 민중세력의 지도부였던 국민군 중앙위원회는 시청을 접수하고 행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다 음날인 3월19일 국민국 중앙위원회는 정부가 방기한 관청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각 기관에 대표들을 파견하고, 뒤이어 '국민의회는 더 이상 민중을 대표하지 못한다'고 밝히면서 '민중의 직접통치를 실현하기 위해 코뮌 선거를 실시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코뮌의회가 구성되면 일체의 권력을 코뮌에 이양하겠다고 약속합니다.

파리 코뮌의 성립과 그 정책

국 민군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3월26일 코뮌 평의원 선거가 시행되었습니다. 평의원은 각 구별로 2만 명당 1인, 1만 명을 초과하는 단수에는 1인을 할당하고, 연기식(連記式)투표로 선출하도록 했습니다. 유권자(20세 이상의 성년 남자) 485,566명 가운데 225,000 명이 투표에 참가했죠. 당선자는 90명이었으나 중복 당선자가 5명이었기 때문에 실제 당선자는 85명이었어요. 온건 공화파 20명 말고는 모두 사회주의 혁명파였죠. 20구 중앙위원회가 추천한 후보가 당선자 총수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고, 국민군 중앙위원회 추천 후보도 16명이나 당선되었어요. 온건 공화파 당선자 20 명이 사퇴하고 또 다른 이유로 4명이 사퇴해 4월16일 보궐 선거가 실시되었고, 혁명파만 당선되었죠. 이로써 코뮌이 성립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립한 코뮌이란 정확히는 '코뮌 평의회'로서 시의회를 가리킵니다. 일종의 지자체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이전의 코뮌은 입법부 기능의 평의회 이외에 행정부 기능의 시장·구장을 두었으나, 파리 코뮌 의원은 구행정을 담당하는 한편, 시행정은 물론 정부기능도 수행했어요. 파리 코뮌은 의회인 동시에 집단적인 정부였어요.

3월28일 드디어 '파리 코뮌'이 선언되었습니다. 국민군 병사와 일반시민 2만 명이 시청 앞 광장에 모인 가운데 국민군 중앙위원회 위원장 랑비에(Ranvier)가 "인민의 이름으로 코뮌을 선언한다"고 외치자, "공화국 만세", "코뮌 만세"라는 함성이 군중 속에서 터져 나왔죠. 다음날인 3월29일 코뮌은 제1차 평의회를 열고 집행위원회를 비롯하여 재정, 군사, 사법, 안보, 식량공급, 노동·공업·교환, 외무, 교육, 공공사업 등 10개 위원회를 설치해 의원들이 분담하여 혁명정부로서 맡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코뮌은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세력의 실질적인 권력기관이었죠. 코뮌 의원들 가운데 노동자계급에 속하는 사람은 25명 가량이었어요. 코뮌은 상비군과 경찰 제도를 폐지하고, 이를 무장한 국민군으로 대체했습니다. 또 교회와 국가권력을 분리하고 교회의 재산을 국민의 재산으로 귀속한다고 포고했죠. 그리고 공직자의 선거제 원칙을 도입했으며, 모든 관료의 인민에 대한 책임제와 교대제를 확립했어요.

코뮌은 구체적인 입법과 정책, 그리고 사업들을 실행했습니다. 먼저 노동정책을 살펴보면, 제빵공의 건강을 해치는 야간작업을 금지했고, 사업장 안에서 행해지던 사적인 재판관행을 폐지하도록 했으며, 자본가들이 징계 명목으로 임금을 공제 삭감하는 행위를 금지시켰어요. 한편, 기업주가 버리고 도망간 공장을 가동시키기 위해 위원회를 설치하게 하고, 이를 노동자 조직으로 하여금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이 밖에도 노동시간의 상한선 설정과 최저임금제 계획, 전시 이득의 몰수조치 등이 검토되었으나 코뮌 기간 중에 실현되진 못했죠.

사회입법으 로서 주택임대료에 대한 법률을 공포했고, 채무만기법을 폐지했으며, 빈곤자 구제는 정부 의무로 정했어요. 그리고 코뮌은 공창 제도를 폐지했고, 도박 행위를 금지했어요. 교육정책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 원칙에 따라 교육과 종교의 분리가 실행되었고, 완전한 무료의무교육 방침과 아울러 직업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한편, 재정위원회는 국가의 종교예산을 폐지했고, 수도회의 자산을 몰수했죠. 군사위원회는 징병제도를 폐지하고 군대 복무의 능력이 있는 남자의 경우 현재 진행중인 전쟁에 참가하도록 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