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이 희망버스에서 배워야 할 것

노동사회

노동운동이 희망버스에서 배워야 할 것

admin 0 4,120 2013.04.19 02:50

1. 들어가며

지난 2011년 12월16일 영등포 산업선교회에서 <희망버스 승객들과 함께하는 상상토론회>가 열렸다. ‘희망버스와 문화예술운동’을 시작으로, ‘희망버스와 노동운동’, ‘희망버스 성과와 과제’, ‘희망토크 콘서트’까지 4부에 걸쳐 10시간 넘게 뜨거운 토론이 벌어졌다. 

시인, 작가, 미술가, 가수, 영화감독, 학생, 노조간부, 인권운동가 등 참가한 사람들도 다양했다. 6월11일 1차 희망버스를 시작으로 11월9일 김진숙 지도위원이 살아서 땅을 밟을 때까지, 만 5개월 동안 ‘기적의 대서사시’를 만들어냈던 승객들의 표정은 한없이 밝았다. 

이날 토론회는 행복했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앞으로 희망버스가 어디를 향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자리였다. ‘경기 희망 김장’, ‘쌍용차 희망텐트’, ‘청주 소금꽃’ 등 지역에서 새로운 희망버스들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었고, 희망버스의 진로에 대한 신나는 토론과 문화마당이 밤늦도록 이어졌다. 

하지만 제2부 ‘희망버스와 노동운동’ 토론회는 비판과 성토, 반성과 참회의 장이었다. 희망버스의 승객들은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를 날카롭게 비판하거나, 노동운동에 어떤 기대도 없다며 체념했다. 당사자인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간부들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고, 희망버스가 노동운동에 큰 자극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1996년 12월26일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 맞서 전체 민중들의 선두에서 싸웠던 노동운동이 15년이 흐른 2011년,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체념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35미터 창공에서 309일을 매달렸던 김진숙 지도위원은 금속노조 조합원이었지만 민주노총이 아니라 “희망버스 때문에” 목숨 줄을 놓지 않고 살아서 내려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추락한 노동운동의 안타까운 현실 앞에서 흘러간 라디오처럼 다시 노동운동의 희망을 얘기할 수는 없다. 지난 5개월 동안의 희망버스를 냉정하게 돌아보며,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이 무엇을 반성하고 어떻게 혁신해야 하는지를 차분하게 살펴봐야 한다. 

생산을 멈추고 산업을 마비시키고 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 노동운동이라는 위력적인 버스가 왜 희망버스처럼 달리지 못하는지, 어디가 망가졌고 어떻게 고장이 났는지, 어떻게 수리해서 달려야 하는지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2008년 촛불에서 반성하지 못한 노동운동이 2011년 희망버스에서조차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노동운동은 우리 사회의 천덕꾸러기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무너진 노동운동을 다시 일으켜 세워, 탐욕의 자본이 만들어놓은 야만의 시대에 맞서 싸우는 희망의 기관차로 달려야 한다. 

2. 희망버스가 만들어낸 기적

희망버스 기획단은 가장 낮은 곳에서 싸웠던 사람들

2011년 1월6일 한진중공업의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 민주노총 부산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이 35미터 높이의 85호 크레인에 올라 목숨을 걸고 절규했지만, 150일이 지나도록 자본과 정부, 가진 자들은 그녀를 처절하게 고립시켰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는 몇 차례 집회를 열고 또 다른 크레인에 올라 같이 싸웠지만, 세상은 그들에게 무관심했고 노동운동은 무기력했다. 

폭풍우에 휩쓸린 돛단배처럼, 강풍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2008년 기륭전자투쟁에서 만들어진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 회의에서 ‘희망의 버스’가 제안됐다. 6월11일 1차 희망버스를 출발하기로 결정하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8년 전 목을 매 자결했던 김주익 열사가 버틴 시간 129일. 다행히 김진숙 지도위원이 그 시간을 견뎌주었고, 트위터를 통해 소통하면서 85호 크레인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문화, 인권, 천주교, 쌍용차 해고자, 비정규직 활동가들이 가장 먼저 <희망버스 기획단>으로 달려왔다. 용산 철거민, 기륭전자 등 가장 낮은 곳에서 함께 싸웠던 사람들이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불씨가 되었고, 이들이 밑불이 되어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6월11일 첫 희망버스의 횃불이 타올랐다. 

6월11일 서울시청 재능교육 농성장에서 출발한 11대의 버스를 포함해, 평택, 수원, 전주, 광주, 순천 등 전국에서 17대의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까지 1천 명이 촛불을 들고 한진중공업으로 행진했고, 공장 담벼락을 넘어 용역 깡패들을 몰아내고 밤을 꼬박 새웠다. 경찰은 배우 김여진 씨를 비롯해 6명을 연행하고 모두를 체포하겠다고 협박했지만, 연행자를 석방하지 않으면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의해 모두가 풀려나고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민주노총은 1차 희망버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지만, 가장 낮은 곳에서 투쟁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희망버스의 주인공으로 참여했다. 기륭전자 조합원들은 희망버스 기획단으로 함께 했고,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박정훈 전 지회장은 순천에서 희망버스 승객들을 모아 부산으로 왔다.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2010년 25일간의 공장 점거파업을 벌였던 현대차 울산, 아산, 전주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15만 볼트가 흐르는 송전탑에서 88일 싸우고 무사히 내려온 대우조선 비정규직 해고자 강병재, 64일간 공장 아치에서 동상을 견뎌가며 싸웠던 지엠대우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장 담장을 넘고 용역 깡패를 몰아내며 김진숙과 연대했다. 

희망버스는 시작부터 끝까지 완전히 새로운 실험

희망버스는 시작부터 끝까지 전 과정이 완전히 새로운 실험이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인터넷 카페를 통해 참가자를 모집했고, 참가비를 받았다. 부산까지의 긴 여정은 연대를 나누는 만남의 시간이었다. 

희망버스의 무대는 정치인이나 노조 위원장 등 소위 ‘높으신 분’들이 아니라 자발적인 참가자들의 소통의 마당이었고, 희망버스의 지도부(?)는 버스마다 한 명씩 뽑힌 사람들인 ‘깔깔깔’이었다. 회의는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대형 걸개그림 만들기, 사진 찍기, 캐리커처 그리기, 자발적인 공연 등 희망버스의 모든 순서와 일정, 행사는 승객들이 직접 마련하고 참가하고 노래하는 자리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평가와 다짐의 시간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한진중공업까지 갈 때에도, 공장 담벼락을 넘을 때에도, 책임자를 처벌하겠다고 협박할 때에도, 희망버스는 경찰과 어떤 타협이나 뒷거래도 하지 않았고, 참가자들의 분노와 열정을 최선을 다해 보여주었다. 

연대의 기쁨 맛보는 치유의 여행이 만들어낸 기적

눈물과 웃음이 뒤범벅된 감동 가득한 1차 희망버스의 감격은 2차 희망버스로 이어졌다. 

희망버스 기획단은 1차 희망버스에 ‘깔깔깔’로 참가한 사람들을 모아 ‘전국 기획회의’를 열어, 7월9일 2차 희망버스 185대, 1만 명 참가를 목표로 잡았다. 1차의 두 배도 아니고 10배를 목표로 한다는 게 가능하겠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 35미터 하늘 위에 위태롭게 매달려있는 185일을 기억하고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살려야한다는 마음을 모았다. 관성과 패배감을 넘어 자신감을 갖고 싸우자고 했다. 

쌍용차 해고자들은 “소금꽃 찾아 천릿길”이라는 이름으로 평택에서 부산까지 온 몸을 던지며 걸어서 연대했고,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울산에서 부산까지 ‘희망자전거’를 타고 달려왔다. 장애인, 성소수자, 철거민 등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이 희망버스에 올랐다. 

2차 희망버스 신청이 쇄도하고 있던 6월27일, 한진중공업 노사는 정리해고를 인정하고 파업을 철회하는 ‘노사합의서’를 체결했다. 정부와 보수언론이 당사자 간 합의를 내세우며 희망버스 중단을 촉구했지만, 김진숙 지도위원과 희망버스는 잘못된 합의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7월9일 194대 1만 명의 승객들이 부산에 모여 한진중공업으로 달렸고, 폭포처럼 쏟아졌던 최루액에 맞섰다. 

우익의 테러와 보수언론의 이데올로기 공격, 여름휴가라는 장벽을 넘어선 7월30일 3차 희망버스는 산복도로를 가로질러 85호 크레인이 보이는 곳에서 뜨거운 연대의 밤을 보냈다. 8월27일 4차 희망버스는 “이명박이 해결하라”며 서울로 올라와, 청계광장과 서대문, 인왕산에서 시민들의 분노를 밝혔고, 10월8일 5차 희망버스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넘어 아름다운 연대를 전 세계로 알렸다.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던 재벌 총수는 청문회에 끌려나와 노동자와 국민 앞에 머리를 숙여야 했다. 부도덕한 재벌의 탐욕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며, 마침내 85호 크레인의 김진숙 지도위원이 309일 만에 살아서 우리 곁으로 돌아오게 됐다. 

희망버스가 달려온 5개월은 고립과 절망을 걷어낸 연대와 희망의 시간이었고, 관성과 패배를 넘어선 열정과 승리의 순간이었다. 희망버스는 “연대의 기쁨 맛보는 치유의 여행”(김규항)이었고, 우리 안에 꿈틀거리던 연대와 희망의 불을 피워 올린 축제였다. 

연대와 희망의 불꽃은 한진중공업과 희망버스만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타올랐다. 올 봄, 고용보장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홍익대 늙은 청소노동자들의 절규에, 대학생, 시민, ‘날라리 외부세력들’이 기꺼이 달려가 그녀들을 지켜냈으며, 연대의 횃불은 서울 곳곳의 대학으로 번져나갔다. 제주 강정마을에는 전국에서 ‘평화비행기’가 날아와 연대의 활주로를 달렸고, 홍대 앞 두리반, 명동 마리에서도 매일 밤 연대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2008년 촛불이 남긴 저항의 경험과 2008년 기륭전자, 2009년 용산과 쌍용차, 2010년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했던 연대의 기억이 자본의 끝없는 탐욕이 만들어낸 서민들의 고단한 노동의 삶과 만났고, 2011년 아름다운 연대의 노둣돌인 희망의 버스로 이어진 것이다. 희망의 버스는 자본의 탐욕에 쓰러진 이들을 일으켜 세웠고, 잃어버린 꿈을 찾게 했으며, 가난한 이들의 희망의 노래가 되었다. 

3. 희망버스가 노동운동에 준 교훈

무기력과 패배주의 속에 사라진 진정성과 열정

1987년 노동자대투쟁, 1990년 지역 총파업, 1997년 노동법 총파업까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노동운동은 1998년 IMF 구제금융 이후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6년 비정규악법에 맞선 민주노총 파업과 대의원 현장발의로 만들어진 2007년 6월 한미 FTA 저지 금속노조 파업 이후, 노동운동은 공장 담벼락과 패배주의에 갇혀 무기력했다. 

2008년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사를 넘나드는 94일 단식, 2009년 쌍용차 노동자들의 77일 파업, 2010년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25일 점거파업 등 주체들이 역사적인 투쟁을 만들었지만,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는 산업 생산을 멈추는 파업은커녕 위력적인 연대투쟁조차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런 노동운동을 향해 쌍용차 자본은 “민노총도 당신들을 버렸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내걸며 조롱하기까지 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위원장이 목숨을 걸고 100일 가까이 단식을 하고, 70미터 굴뚝에 오르고, 점거농성을 같이 했다면 결과는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2010년 기륭전자 1,895일만의 승리와 동희오토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전원 복직, 2011년 지엠대우 비정규직 고공농성 64일 만의 복직,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잇단 승리의 소식들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2011년 1월6일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2003년 한진중공업 김주익 전 지회장이 85호 크레인 위에서 버틴 시간이 129일이었다. 그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지만, 오랜 관성에 찌든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은 몇 번의 집회를 여는 것이 전부였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에서 희망버스를 제안하고 사람들을 모았지만 민주노총과 노동운동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고, 1차 희망버스가 대대적인 사회적 관심을 모으자 뒤늦게 2차 희망버스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의 파업이었다. 금속노조 사업장에서 임금교섭이 진행되고 있었고, 정리해고로 상징되는 한진중공업과, 주간 연속 2교대제로 인해 공권력에 침탈된 유성기업 조합원들이 싸우고 있었다. 임단협 기간이 아니어도 김진숙 지도위원을 살리자고 조합원들에게 호소하며 연대파업을 벌였어야 했다. 임단협 투쟁 기간이었기 때문에 조합원들을 설득해 한진중공업과 유성기업에 연대하기 위해 임단협을 타결하지 않고 연대투쟁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금속노조는 7월6일 부분파업과 지역별 집회를 한 차례 열고, 7월13일 중앙교섭을 타결했다. 9월 말로 끝나는 선거와 조합원 현장 정서가 이유였다. 1~2차 희망버스에 자극받은 민주노총은 김영훈 위원장의 23일 간의 단식과 ‘8․20 희망시국대회’가 있었지만 정권과 자본을 긴장하게 만드는 목숨을 거는 진정성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희망버스를 통해 연대를 만든 책임으로 송경동 시인과 진보신당 정진우 비정규실장이 감옥에 갇혀있지만,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위원장을 비롯해 단 한 사람도 구속되지 않았다. 김진숙 지도위원과 희망버스가 보여준 진정성과 헌신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현재의 패배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독한 관성과 타성, 높은 관료주의의 벽

가장 먼저 희망버스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민주노총, 산별노조의 주요 간부들이 아니라 비정규직, 정리해고,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었다. 기륭전자분회와 쌍용차지부는 희망버스 기획단에 조합원을 파견했고, 재능교육, 지엠대우 비정규직, 콜트콜텍,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현대차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희망버스에 참여했다.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노동자들이 김진숙 위원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던지면서 함께했다. 

그런데 민주노총과 당사자인 금속노조의 상집 간부들 중에서는 희망버스를 한 번도 타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희망버스 파견 요청은 석 달이 지나서야 받아들여졌고, 희망버스의 제안에 대해 절차와 과정을 이유로 대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에 금속노조가 언제 가입했느냐?”, “희망버스가 민주노총 위에 있는 기구냐?”, “미조직비정규사업실이 희망버스 사업까지 하느냐?” 등등. 관료주의에 찌든 간부들이 회의에서 한 얘기들이었고, 절차와 형식 때문에 몇몇 간부들은 ‘비공식’으로 희망버스 기획단에 참여해야 할 정도였다. 

희망버스 기획단에 참여한 활동가들은 민주노총, 산별노조와 어떤 사업을 하는 것에 대해 진저리를 치기까지 한다. “가서 이야기해 보겠다.”, “절차를 밟아야 한다.”, “전례가 없다.” 등등의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지독한 관료주의의 모습은 희망버스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노동운동은 희망버스의 들러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2차 희망버스 때의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최루액을 맞고 싸우고 있을 때 무대 뒤편에서는 이미 술판이 벌어졌고, 적지 않은 노조 간부들은 가까운 모텔로 갔다. 밤 12시가 지나자 금속노조 대기업지부를 포함해 여러 노동조합 버스들이 조합원들을 싣고 돌아갔다. 그동안 민주노총에서 보여준, ‘적당히 싸우는 척하고 돌아가는’ 오랜 관성에 찌든 모습 그대로였다. 

7월30일 3차 희망버스는 “여름휴가 때 무슨 투쟁이 되느냐”는 타성에 젖은 노동운동 관료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여름휴가를 부산에서 보내자는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제안은 1만 명이 훨씬 넘는 참가자들을 만들어냈다. 

희망버스는 연설, 공연, 전시, 식사 등 모든 공간이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집회는 정치인을 비롯해 유명 인사들이 연설을 도맡는다. 집회가 어떻게 시작되고 누가 연설하고, 누가 공연하고 어떻게 끝날지 다 안다. 그래서 참가자들도, 지도부들도, 경찰들도 아무도 긴장하지 않는다. 재미가 없다. 그래서 조합원들은 빨리 집에 가자고 조른다. 참가비도, 식사도, 심지어 술도 제공하지만, 열기도, 열정도, 분노도 없다.

민주노총 이정호 비정규실장은 희망버스 토론회에서 “민주노총 상근자 중에서 노조원은 12명, 노조 결성 경험을 가진 사람은 8~9명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은 정파로 민주노총에 취직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과 주요 산별노조의 상근자들이 변혁적 노동운동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사라지고, 주민등록등본이나 발급해주는 동사무소 직원들처럼 변해버리고 있다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다. 

희망버스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기운을 받은 노동자들과 지역의 활동가들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열정으로 무장한 조합원들과 활동가들이 노동운동을 새롭게 만들어내야 한다. 

적당한 타협과 뒷거래

6월11일 전국에서 출발한 17대의 버스가 부산으로 향하자, 경찰은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에게 책임자가 누구인지를 물어왔다. 촛불 행진을 불허하고 전원 연행하겠다는 얘기도 전해졌다. 인도를 통해 행진하는 건 어떠냐는 타협안도 들렸다.

하지만 경찰과 타협할 권한을 가진 ‘책임자’는 아무도 없었다. 1천 명에 달하는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사전에 언론을 통해 알려졌고, 버스 안에서 받아본 프로그램 일정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참가자들을 위협하고, 전원 연행을 협박했지만, 희망버스 승객들은 예정대로 한진중공업까지 촛불을 들고 도로로 행진했다.

경찰과 용역경비가 정문을 가로막았고, 경찰은 정문 담벼락에서 문화제를 할 것을 권유했다. 역시 타협안을 결정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었다. 무엇보다 참가자들은 김진숙 위원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모든 소중한 약속을 다 팽개치고 달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녀를 먼발치에서 쳐다보고 애태우다가 술이나 ‘퍼 먹고’ 돌아가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용기 있는 한 젊은이가 담벼락을 넘기 시작했고, 참가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모두 담장에 올랐다. 공장 안에서 사다리가 내려오자 너도 나도 공장 안으로 들어왔다.

뒷거래와 적당한 타협은 없다는 1차 희망버스의 경험은 5차까지 이어졌다. 2차 희망버스에서 경찰은 20여 명의 대표를 선출해 공장 안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날 수 있게 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희망버스는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우리 모두가 만나러 가야 한다고 했고, 최루액에 맞서 용기 있게 싸웠다. 버스를 타고, 걸어서, 산복도로를 넘어 85호 크레인이 보이는 수변공원에서 열린 3차 희망버스, 서울 도심을 뒤흔들고 청와대 인왕산에 올라 “정리해고 철회”를 외쳤던 4차 희망버스, 영도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타협 없이 싸웠던 5차 희망버스까지, 희망버스는 참가자들의 ‘분노’를 최선을 다해 보여주었다.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까지 모이는 민주노총의 집회는 계획된 일정에 따라, 경찰과 협의한 대로 진행된다. 경찰이 행진을 불허하면, 협의와 타협을 통해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된다. 

희망버스의 자극을 받은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집회가 새로워지고 있다. 하지만 형식을 바꾸고 새로운 가수를 부른다고 내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지난 11월14일 민주노총 전국노동자대회는 지겹도록 연설만 듣는 집회였다. 노동자들의 분노와 절규가 무엇인지 최선을 다해 보여주어야 하는데, 여전히 노동운동은 변하지 못하고 있다. 

4. 2012년, 노동운동이 가야할 길

여러 언론과 단체에서 2011년 올해의 인물로 김진숙, 희망버스, 송경동을 뽑았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등 노동운동은 십 수 년 동안 올해의 인물 후보에도 끼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영향력이 축소되고, 점점 무기력해지고 있다. 

2011년 희망버스는 몰락하는 노동운동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계기와 기회를 마련해주었고, 관료적 노동운동을 극복하고 변혁적 노동운동으로 변화한다면 우리 사회의 희망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산업을 멈추고 생산을 중단시키는 일이다. 노동운동은 분명히 그 힘을 가지고 있다. 노동운동의 중앙은 관성화, 관료화되어 있지만, 지역의 간부들과 활동가들은 여전히 열정과 헌신으로 싸우고 있다. 

2008년 촛불투쟁에서 화물연대와 임단협 파업을 촛불파업에 연계했던 금속노조에 쏟아진 기대와 환호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노동운동과 시민사회의 연대가 무엇인지,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준 2011년 희망버스는 노동운동에게 가장 든든한 힘이다. 

희망버스는 쌍용차 희망텐트로 진화했고, 재능교육 1,500일 투쟁으로 모아지고 있으며, 비정규직 정리해고 없는 세상을 위한 거대한 사회적 투쟁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미 이명박 정권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민주노총은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창출, 한미 FTA 폐기와 공공성 강화를 내걸고 2012년 총파업 투쟁을 만들어내야 한다. 총선과 대선에서 ‘표 찍는 기계’가 아니라 85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노’를 사회적 투쟁으로 끌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희망버스가 노동운동에 준 교훈을 뼛속 깊이 되새겨야 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6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