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세 개의 진보정당

노동사회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세 개의 진보정당

admin 0 2,485 2013.05.11 12:35

이 땅의 언론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 진보와 개혁을 갈망하는 모든 노동자 동지들에게 진보정당이 민주노동당, 사회당, 민주사회당의 셋으로 갈라져 있는 현실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당부하고자 이 글을 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오늘날 진보정당이 세 개로 나누어져 있는 현실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돌리고 있는 경향에 이젠 쐐기를 박아야 한다고. 그래서 내년 총선에는 연합한 모습과 진용으로 대중 앞에 설 수 있도록 지금 당장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고.

노동자들에게 계급성이 있는가?

' 진보정당 3개'는 우리 스스로 꿰차고 있는 현실논리를 상징한다. 우리는 우리의 진보적 변화나 개혁 요구에 대한 친자본측과 친정부측의 상투적인 반응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바로 '현실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현실논리가 그것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꿰차고 있고 진보적 변화를 가로막는 현실 논리가 바로 '진보정당 3개'의 현실논리다. 이 나누어짐도 아직 때가 이르기 때문인가. 시간이 갈수록 더 찢어지는 가능성이 더 큰 게 아닌가. 나는 개인적으로 민주노동당 소속이나 나에겐 진보정당의 일원이라는 점이 훨씬 더 중요하며, 진보정당의 일원으로서의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점을 밝힌다. 한국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긴요성을 부인할 사람은 자본가뿐이다. 그 절실함에 비할 때 한국사회에서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지체되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역사적,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외적 요인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 자신의 안이한 자세도 큰 몫을 차지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는 자주 '1300만 노동자'를 내세우곤 한다. 나는 이 '1300만 노동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말을 읊조리면서 우리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묻고 싶을 때가 많다. 실제로 그 말은 흔해빠진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맑스주의의 참 명제는 한국사회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교육과정을 비롯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 일찍부터 자신의 사회경제적 처지를 배반하는 의식을 세뇌 받는다. 제도교육과정에서 노동자의 자기 인식에 대해 단 한시간이라도 배울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질서와 안보 이데올로기에 세뇌되고 노동자의 자기 인식 대신에 국가경쟁력을 위한 하수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갖는다. 자본과 정권에 봉사하는 의식을 갖는 것이다. 이처럼 노동자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은 보수-수구가 판치는 언론 현실 속에서 교정될 기회를 갖기 어렵다. 우리가 끝없이 지적하고 있듯이,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거나 부정하고 있고, 따라서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배반하는 정치적 선택을 하고 있다.

진보정당 사이의 분열상

이 런 상황에서 '깨난' 소수는 똑같이 '노동자 민중의 권익을 대변한다'면서 진보정당을 제각기 결성하고 있다. 목적은 같은데 서로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물론 그 누구도 자기의 장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선택이라거나 그 동안 맺은 인간관계에 따른 선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에 비할 때 작은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세 개의 진보정당 현실'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라고 주문한다.

국회에 아직 단 한사람의 대표도 갖지 못하고 삼성재벌의 '무노조 원칙'이 강력하게 관철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진보정당 사이의 차별성은 일상적으로 강조되고, '깨난' 소수가 아닌 노동자 대중에게 뻗어나가야 할 진보정당 세력의 역량은 내부에서 소진된다. 당 활동의 많은 부분이 다른 진보정당에 비해 자기 당의 진보성이나 선명성의 우위를 강조하는데 소진되고, 마침내 진보정당 사이의 분열상은 첨예한 대립상까지 낳는다. 진보정당들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대중성 획득은 '깨난' 소수의 오만한 말 잔치로 끝나기 쉽고 진보정당 사이의 원심력은 계속 구심력을 비웃는다. 그리하여, '소수가 혁명적인 것보다 다수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것이 훨씬 더 혁명적'이라는 그람시의 명제는 실종된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가.

작은 차이 때문에 분열하는 우리의 습속은 실상 가짜 보수들이 파놓은 함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랜 동안 이름만 보수일 뿐 실제로는 극우이며 수구인 사익추구집단이 한국사회 전 부문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해오면서 우리는 '다름의 관계'를 '서로 부정하는 관계'로 인식하는 습속을 갖게되었다. 공익 개념의 부재 아래 오래 지속된 독재권력은 우리를 부정하고 억압해왔고 우리도 당연히 그들을 부정해왔고 극복대상으로 인식해 왔다.

그런 기간이 길어지면서 모든 '다름의 관계'를 부정하는 관계로 설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이념을 서로 용인하면서 경쟁하는 관계 설정의 경험이 부족하여 기본적인 차이와 부차적 차이, 큰 차이와 작은 차이를 구분하지 않게 되었다. 한마디로 극복대상과 경쟁대상을 구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극복대상 앞에서 경쟁대상끼리는 서로 연합해야 하는 당위를 놓쳤다. 이런 상태에서 진보세력 안에서의 이념적 동질성에 대한 끝없는 확인과 검증 과정은 극복대상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경쟁대상끼리 서로 싸우는 양상을 낳게 된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우리의 일상 세계는 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세계관 세계의 축소판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세계관의 극복대상과 만나 부딪히는 경우는 점점 적어지고 있다. 독재권력 시기에 현실적 탄압이 우리 눈앞에 전개될 때엔 일상 속에서 극복대상과 만나고 부딪히기도 했지만 오늘의 사정은 달라졌다. 극복대상은 그들의 성채에 머물며 군림함으로써 우리는 그들과 만나거나 부딪히지 않는다. 극복대상은 저 멀리 있고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만나고 부딪히는 사람은 바로 또 다른 우리 자신들이다. 진보세력 사이에 원심력이 구심력을 이길 때, 작은 차이는 계속 증폭될 수 있고 감정의 동물인 인간의 한계에 따라 작은 앙금은 큰 균열을 일으킬 수 있다. '진보정당 세 개'의 현실은 우리들에게 이런 문제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얘기를 꺼내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들의 사회당과 녹색당은 공천 연합을 모색하기도 한다. 평소에는 정책과 이념에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격렬한 토론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대중과 만나는 선거 때엔 연합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연합정권의 경험을 갖고 있는 두 당의 이념상 차이는 우리 진보정당들 사이의 차이보다 분명히 크다. 대통령 선거나 하원의원 선거에 결선투표제를 갖고 있는 그들이 연합하는데, 그런 장치도 없는 우리는 각개 약진하고 있다. 그들은 녹색당을 포함한 진보정당이 연합하는데 우리는 진보정당들이 제각기 나가고 녹색평화당까지 따로 나오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우리는 오만한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것인가.

노동자 대중에겐 단결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면서 스스로 단합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어리석음을 이젠 끝장내야 한다. 설령 세 개의 진보정당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더라도 서로 부정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용인하면서 경쟁하는 관계임을 인식해야 한다. 또 설령 이념과 정책에 관련하여 격렬한 토론을 벌이더라도 부디 대중과 만나는 선거 때엔 뭉친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 첫 시험대가 될 내년 총선은 멀지 않고, 우리에겐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