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정당의 출현과 성장

노동사회

사회주의 정당의 출현과 성장

admin 0 5,654 2013.05.10 11:31

"노동운동은 자기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제도적 변혁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정치적 성숙에 이를 수 있다. 노동 대중 다수가 근본적 개혁이 바로 자신의 직접적 이익이라는 사실을 현실에서 깨닫지 않는다면, 노동운동은 본래 의미의 정치 운동으로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A. 스터름탈).

1875 년 이후 노동자계급의 대중투쟁이 고양된 것은 무엇보다 사회주의 운동이 확대된 데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 이론을 활동 지침으로 삼은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출현하고 성장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죠.

영국에서의 당 건설

영 국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강령으로 선언한 최초의 조직은 민주연맹(Democratic Federation)이었어요. 이 조직은 하인드만(H. M. Hyndman)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이 창립했고, 1884년에 사회민주연맹(Social Democratic Federation)으로 이름을 바꿨죠. 사회민주연맹을 설립한 이들 지식인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받아들여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을 예견하였고, 이에 따라 혁명이나 무장봉기를 주장했어요. 특히 사회민주연맹의 정치 강령이라 할 수 있는 선언서는 민주주의의 확립을 강조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완전한 성인 남녀의 보통 선거권, △ 의원에 대한 세비 지급, △ 1년 임기의 의회, △ 국민투표제의 도입, △ 부정부패의 처벌, △ 모든 전통 권위기구의 폐지.

사회민주연맹이 주장한 민주주의는 정치적 평등, 인민주권, 그리고 인민이 지배하는 정부를 의미했습니다. 이는 보통선거권과 대의제정부의 틀을 뛰어넘어 선거인이 피선거인을 통제하고 정책결정에 가능한 많은 인민의 직접 참여를 보장하는 정치 제도를 의미했죠.

1885년이래 사회민주연맹은 국회의원 총선거에 참여했으나, 노조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채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습니다. 사회민주연맹은 노동조합이 전체 노동자계급을 대표하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자본가계급과 타협 또는 동맹을 맺고 있다고 규정했죠. 노동자 출신이라 하더라도 사회주의자가 아닌 후보는 반대했고, 사회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모든 외부 조직과는 제휴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한 편, 사회민주연맹 내의 일부 그룹은 연맹의 정치방침에 회의적 태도를 나타내면서 '현실적 사회주의'를 모색합니다. '현실 사회주의자' 또는 '윤리적 사회주의자'들이 1893년 독립노동당(Independent Labour Party)을 만듭니다. 독립노동당은 스스로의 목적을 '생산, 분배, 교환에 관한 모든 수단의 집단적 소유'라는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이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기존 정치 제도를 이용함으로써 사적 소유의 무자비한 경쟁이 초래한 사회악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보았죠. 또 당명에 사회주의를 명기하지 않음으로써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하려 시도했으며, 방침이 노동자의 이해와 일치한다는 것을 과시하고자 했어요.

gskim_01.jpg독 립노동당의 중심인물은 케어 하디(J. Keir Hardie)였습니다. 스코틀랜드 광산마을의 가난한 노동자의 유복자로 태어난 하디는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하루 12시간 반 동안 일하는 빵 가게의 점원이 되었다가, 10살이 되었을 때 광부생활을 시작했어요. 아침 6시에 막장에 들어가 해 진 뒤에야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으므로 겨울에는 해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라야만 했죠. 12살에는 막장이 무너져 갱 안에 갇힌 상태에서 지쳐 잠들었다가 구출된 적도 있었습니다.

1895년 선거에 출마한 독립노동당 후보는 모두 낙선했고, 노동조합 또한 독립노동당과 협조하기를 거부했어요. 전술의 유연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황은 독립노동당에 불리했습니다.

이 런 상황에서 사회주의운동은 의회 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영역과 노동자계급의 대표 조직인 노동조합운동과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하는 과제에 부닥치게 됩니다. 사회주의 진영은 의회제도와 노동조합운동과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를 두고 여러 갈래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죠. 이런 대립의 중심에는 1900년 노동자대표위원회(Labour Representation Committee)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노동당(Labour Party)의 결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노동자당 창당은 1900년 영국노동조합회의(TUC)가 정치 참여와 정당 결성 방침을 결정한 가운데 시작되었어요. 자본의 공세, 정치·제도 개혁의 중요성에 대한 노동조합의 인식 고양, '신노조주의' 등의 상황 전개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정당 건설을 촉진했죠.

노 동자대표위원회가 창립되었을 때, 사회주의연맹과 독립노동당은 사회주의 진영을 대표해 위원회에 참가했습니다. 노동당이 건설된 지 일년 뒤 사회민주연맹이 탈퇴하는 것을 비롯해 갖가지 내부 갈등이 있었지만 노동당은 지속적으로 성장합니다. 1903년 섬유노조가 노동자대표위원회에 가입했고, 1909년에는 가장 큰 규모의 광산노조가 가입함으로써 '노동동맹 전술'은 결실을 거두었죠. 하디는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은 모든 노동조합, 협동조합단체와 제휴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1906년 총선거에서 의석 29개를 확보해 의회에 교두보를 확보합니다. 하디는 1906년 선거 결과를 두고 "노동당은 용기와 주도권, 그리고 사회주의적 확신을 가지고 나라의 운명이 이제 의회로 진출한 노동과 사회주의의 새로운 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이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에서는 자유당에 대한 노동당의 종속을 비난하면서 의회에서 확고한 사회주의 정책을 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독일에서의 당 건설

독일에서 사회주의 정당 건설은 1875년 전(全)독일노동자협회(ADAV)와 사회민주노동자당(SDAP)이 결합하여 사회주의노동자당(SAP)을 결성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출발합니다.

전 독일노동자협회(ADAV)의 라살레주의자들은 자유주의에 적대적이었고, 동시에 노동조합운동에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어요. 이들은 노동자의 생활조건 개선을 위해서는 국가권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는가 하면, 독일 민족주의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신봉자 베벨과 리프크네히트 등이 주도한 사회민주노동자당파(SDAP)는 급진적 민주주의자들과의 정치적 협력에 호의적이었고, 독자적 노조 조직을 통한 자주성과 국제주의를 강조했습니다.

이 두 조직이 통합해 결성된 사회주의노동당은 노조의 독자적 역할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노동운동은 정치투쟁을 경제투쟁보다 우위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죠. 이에 따라 당과 노조의 관계도 당 우위의 지도-추종의 관계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부분적·현실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데 반해, 정당은 노동자계급 해방이라는 전체적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논리에 바탕을 둔 것이었죠.

gskim_02.jpg비 스마르크 주도로 1878년부터 시행된 '사회주의자 단속법'은 "현존하는 국가제도와 사회제도의 전복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민주주의적·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인 의도를 갖는" 모든 단체의 활동을 금지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고 추방되었으며, 국외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죠. 그러나 사회주의자 단속법은 결코 사회주의 세력을 격멸할 수는 없었어요. 비스마르크의 억압 정책 아래서도 노동운동은 중앙집권화 되었고 정치투쟁을 강화했으며, 정당의 정치적 지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를 통해 사회민주당(SPD)은 어느 정도 허용된 선거 공간을 활용해 의회 안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사회민 주당은 1877년 선거에서 약 50만 표의 지지를 얻어 국회의원 13명을 의회로 진출시켰습니다. 사민당은 탄압 기간에 마르크스주의 당으로 전환했는데,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에서 계급투쟁의 원칙과 생산수단·교환·분배의 사회화를 통한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을 선언합니다. 동시에 법률 개정과 선거를 통한 독일 정치체제의 민주적 개혁을 추구하면서, 한편으로 점진적 수단으로 혁명적 목표의 달성을 내세웠죠.

1890년 제국의회 선거에서 사민당은 142만7천표, 전체투표의 19.7%를 획득하여 최다 득표를 한 정당으로 올라섰습니다. 같은 해 9월 비스마르크 정권은 물러나게 되었고, 사회주의자 단속법이 폐지됨에 따라 사민당은 다시 공개적인 활동을 벌이게 되었죠. 1890년대를 통해 사민당은 국제노동운동에서 가장 힘있는 부대로 나섰습니다. 이 정당의 지도 아래서 독일 노동자계급은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정치 투쟁을 적극 전개할 수 있었으며 노동·생활조건의 개선을 쟁취했어요.

프랑스에서의 당 건설

1789 년 대혁명 이후 프랑스의 정치 역정은 혁명과 봉기로 점철되었어요. 1830년, 1848년, 1871년의 혁명은 큰 불길과 같은 민중봉기의 형태를 띠었으나, 결국에는 보수파의 정권 장악으로 끝났습니다. 정치체제가 군주정과 공화정으로 번갈아 바뀌는 가운데, 프랑스 노동자는 1871년에 수립된 공화정을 자기들이 바라는 국가로 인식했죠.

gskim_03_0.jpg이 런 상황에서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은 1875년 이후 성장했으며, 노동자계급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어요. 1876년 이후 마르크스주의자 쥘 게드(Jules Guesde)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이 점점 확대되었죠. 프랑스 노동운동은 1879년 마르세유에서 열린 제3차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철폐와 집단적 소유를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집산주의적 사회주의를 채택하였습니다. 그리고 독자적인 노동자계급 정당 건설 방침을 결정했어요. 이런 방침에 따라 노동조합을 비롯하여 생산·소비협동조합과 여타 노동단체들이 참가하여 '프랑스사회주의노동자연맹'을 결성했죠.

1880년대 들어 사회주의 진영은 크게 네 조류로 나눠지게 됩니다. 무정부주의 정파, 게드주의자(Guesdist)의 프랑스 노동당(POF), 프랑스 사회주의노동자연합(FTSF), 블랑키파의 중앙혁명위원회(CRC) 등이 그것이었죠. 1890년대에는 사회주의혁명노동자당(POSR)과 독립사회주의자(인본적 사회주의)로 분파가 늘어났습니다.

이런 사회주의 정파의 분열이 확대되는 한편, 사회주의 진영의 통일을 위한 움직임도 강화되어 1905년에는 통일사회당(SFIO)이 창설되었죠. 통일사회당은 마르크스주의적 혁명관과 단기적 개량주의, 그리고 선거참여론을 결합한 다양한 조류의 연합 성격을 띠었어요. 이를 두고 '혁명적 개혁주의', '혁명적 진화론' 등의 표현이 나오기도 했죠.

사회주의 정당이 창립되어 활동을 추진하는 데서, 프랑스 노동총동맹(CGT)은 정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독자성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정당이 노동조합운동을 지도해야 한다는 정당의 노선에 대한 반발임과 동시에 의회주의적 노선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었죠.

한편, 통일사회당은 1906년의 아미앙 헌장을 인정하면서 노동조합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노동총동맹과 관계 강화를 추구했어요. 통일사회당은 독일 사민당과는 달리 대중정당은 아니었지만, 1906년 선거에서 90만 표의 지지를 얻어 의회에서 52석을 확보했죠.

이탈리아와 미국에서의 당 건설

이 탈리아의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1870년대 후반 바쿠닌주의자들의 강력한 영향력에 힘입어 발전했어요. 그러나 1880년대 초에는 바쿠닌주의자들과 노선을 달리하는 사회주의단체들이 생겨났죠. 1881년에는 로마냐 혁명사회주의당(Partio socialista rivoluzionario di Romagna)이 창립되었고, 1882년에는 이탈리아 노동당(Patito Operaio)이 출범했어요. 이 두 사회주의 정당은 1892년 밀라노 사회주의연맹(1889년에 창립되었고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취함)과 합동으로 이탈리아 노동자당(Partito dei Lavoratori Italiani)을 발족시켰어요. 이 당은 3년 뒤 이탈리아 사회당(Partito Socialista Itaiano)으로 이름을 바꿨죠. 이 당의 강령은 노동조합의 정치투쟁 강화와 노동자계급의 정치권력 장악 등 마르크스주의 명제를 담고 있었고, 당은 노동조합과의 관계에서는 명확한 구분을 하지 않은 채 노동자 개인별 가입을 허용하지 않고 단체별 결합을 지향했습니다.

1894년 농민봉기와 광부 파업 등을 구실로 독일의 '사회주의자 단속법'과 유사한 법이 제정되어 사회주의 정당 활동을 탄압했어요. 이런 탄압은 당이 노동자의 전투적 전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가로막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획득을 위한 투쟁에 몰입하게 만들었죠. 이런 가운데서도 사회당과 노동조합이 북부지방에서 큰 규모의 파업을 주도했는데, 지올리티(Giolitti) 정부가 파업 진압에 군사력을 동원하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위력적이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은 1876년에 결성된 사회주의노동당(Socialist Labor Party)이었어요. 이 당은 여러 사회주의 그룹이 함께 만들었는데, 이 그룹은 인터내셔널 지부에 속해 있었죠. 이 당은 초기에는 대부분 독일계 이민들로 구성되었으나,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는 라살레파가 지도적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사회주의노동 당은 노동자층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을 쏟았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또 창립 당시부터 존재했던 분파주의 경향도 극복하지 못했죠. 그 결과 19세기 말에는 당원 수도 적었을 뿐 아니라 노동운동에 대한 영향력도 그다지 크지 못했습니다.

1897년에는 노동자의 새로운 정치조직인 사회민주당이 결성되었어요. 이 당의 강령은 사회주의적 목표를 선언했지만, 혁명적 노선을 거부하고 의회 활동에 결정적 의의를 설정했죠.

위 에서 본 바와 같이, 주요 국가들에서 진행된 노동자계급 정당의 생성 과정은 여러 가지 특성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과정은 노동운동의 일반적 법칙성과 객관적 요구를 반영했습니다. 노동자계급은 다양한 형태의 투쟁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정치 조직을 추구했어요. 이 조직은 당면한 일상적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지도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체제의 변혁을 목표로 하는 투쟁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죠. 사회주의 정당의 출현은 노동자계급에 주어진 역사적 책무를 해결하기 위한 큰 전진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gskim_04.jpg사회주의 정당의 강령과 조직 원칙

여 러 나라에서 창립된 사회주의 정당의 강령은 사회주의의 중요 원칙을 승인하면서, 운동의 일반 원칙과 목표를 제시했으며 아울러 당면 요구들을 포함하고 있었어요.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의 폭넓은 보급과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 활동의 결과였죠. 강령은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제도 철폐 사명을 걸머진 중심 세력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정치투쟁 참가를 강조했고, 정치권력의 획득과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폐지를 기본 목표로 설정했지요. 또 강령은 노동운동의 국제적 성격과 국제 연대의 중요성을 담았죠.

이와 함께 사회주의 정당의 강령은 민주적 자유의 확립 또는 확대를 비롯하여 보통선거제 시행, 출판·결사·단결·집회의 자유, 정치와 종교의 분리, 학교와 교회의 분리, 국가·지방자치체가 부담하는 기초교육 의무제, 상비군(常備軍) 폐지, 재판관 선거제도 도입, 법률 소송의 무료화와 법률 지원 등을 담았습니다.

한편, 사회주의 정당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요구를 내세웠습니다. 이는 의회제도가 도입된 나라에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완결되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 부르주아가 자신들이 내걸었던 민주주의 요구들을 철저하게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죠. 때문에 사회주의 정당은 일반 대중이 절실히 바랬던 민주적 개혁을 당면 목표로 선언했으며, 이는 민중 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강령 속에서 특별한 영역을 차지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직접적인 이해를 반영한 것들이었죠. 8시간 노동일의 법적 확립, 아동노동의 금지와 여성노동의 제한, 일요휴무제 의무화, 국가부담 또는 국가통제 방식의 사회보험제 시행, 공장감독제의 실시와 확대, 산업재해에 대한 기업 책임제 등이 그것이었어요.

사회주의 정당의 강령 내용은 동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령은 각국에서의 자본주의 전개의 특수성, 노동운동 발전 과정, 당원의 사상과 정치적 수준을 반영했어요. 1870년대 후반에서 1880년대에 걸쳐 미국 사회주의 노동당(1876∼1877년), 최초의 폴란드 사회주의 정당이었던 '프롤레타리아트'(1882년), 이탈리아 사회주의 단체 '로마냐 혁명사회주의당(1881년), 이탈리아 노동당(1885년) 등은 사회주의 기본 명제를 담은 강령을 채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강령들은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온건하고 개량적인 내용을 드러내기도 했죠.

사회주의 정당 강령 가운데 1891년 에르푸르트 대회에서 채택된 독일 사회민주당의 신강령은 마르크스주의 원리에 가장 충실한 편이었죠. 이 강령은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의 타협 불가능성을 강조하면서 계급투쟁 격화의 불가피성과 사회주의 승리의 필연성을 역설했습니다. 또 강령은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와 국제주의 원칙을 명확히 했죠. 그리고 강령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요구들을 포괄했어요. 에르푸르트 강령은 다른 나라 사회주의 정당의 강령 작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죠.

강령이 담은 목표의 실현은 정치권력의 획득을 전제한 것이었죠. 그래서 강령을 실천하기 위해 공고한 조직의 확립과 당원 전체의 행동통일을 위한 당 규율의 준수가 반드시 필요했죠. 사회주의 정당이라면 모름지기 당 기구와 기능, 지도기관과 지방조직의 권한, 그리고 그 기관과 기구들 사이의 상호관계, 당원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당 규약을 채택할 필요를 알고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당의 최고기관은 3년 또는 5년마다 열리는 당대회였죠. 대회가 열리지 않는 기간을 지도하는 중앙기관은 중앙위원회, 중앙집행위원회, 중앙평의회, 전국평의회 등으로서 그 구성도 3인에서 15명 또는 20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의회의원단이 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정당의 지방조직 구성을 위한 기초가 된 것은 지역 원칙이었어요. 국제노동자협회의 지방조직도 동일했습니다. 또 정당 창립 때부터 적극적인 의회투쟁을 임무로 설정했던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선거구별로 조직을 편성하기도 했죠.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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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권 : 제 7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