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7월27일, 우리에게는 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기념일들이 있지만 이날은 쉽게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다. 이날은 바로 한반도에서 전쟁을 멈추고 정전협정을 맺은 날이다. 전쟁의 참극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날의 의미가 더없이 크다는 것 또한 알고도 남음이다. 그러나 정전협정은 전쟁의 일시 중지를 뜻할 뿐이며, 완전한 평화 상태라고 할 수 없다. 우리 정부도 ‘남북기본합의서 해설’을 통해 이를 지적하고 있다.
“평화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적대 행위가 일시적으로 정지되어도 그 상태는 전쟁상태이며 평화상태가 아니다. 따라서 1953년 7월27일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현재 ‘평화에 관한 합의’가 쌍방 간에 채택되지 아니하여 아직 남북한은 전쟁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통일원, 1992).
그로부터 49년이 지난 오늘에도 이 정전 체제는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전쟁 상태를 완전히 마감하지 못하고 정전 상태를 오십 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는 특이한 현실은 인류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7월27일 정전협정과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여전히 전쟁의 위험 속에 있는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체제를 모색하는 길은 통일로 가는 중요한 과정임을 깊이 생각해볼 때이다.
가장 오래된 정전협정
"적대 쌍방은 1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그 선으로부터 각기 2킬로미터씩 후퇴함으로써 적대 군대간에 1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
'유엔군 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코리아의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이라는 정식 명칭 하에 한반도를 파괴와 죽음의 참극으로 몰아넣었던 3년 전쟁을 멈추는 정전 협정이 1953년 7월27일 체결되었다.
한반도에서의 정전이란, '전투행위의 일시적 중지'를 뜻할 뿐으로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또한 전투 행위의 계속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정전협정 체결이후 미국은 '정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한 후 3개월 내에 한반도에서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다룰 정치회의를 소집한다'는 정전협정 제60항의 약속에 따라 제네바에서 정치협상을 열었다. 그러나 '3개월 안에 결론이 나지 않으면 협상을 포기한다'는 애초의 공언대로 단 3개월만에 협상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써 평화를 향한 노력 대신 대결을 위한 태세가 더욱 강화되었다.
북쪽을 도왔던 중국은 자기나라로 돌아갔으나, 남쪽의 미군은 주둔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은 '외국으로부터의 신무기 도입금지' 조항인 정전협정 제13조를 외면하고, 남쪽의 군대를 꾸준히 증가시켰다. 한반도의 허리를 가르는 비무장지대를 따라 미군과 남한군, 그리고 북한군은 1백만이 넘는 군대를 배치하고 있다. 이 땅 휴전선보다 군사력 집중이 더 많은 국경선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것이다.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단의 기능도 사실상 그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여기에다 1996년 4월5일 북한의 비무장지대 불인정 선언이 덧붙여짐으로써 완충지대인 비무장지대의 유지도 정전체제 하에서는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더구나 정전협정에 표시된 군사분계선의 경우, 육상분계선은 분명하나 해상분계선은 모호한 상태다. 따라서 북한의 비무장지대 불인정 선언으로 모호하게나마 지켜져 왔던 해상분계선이 군사분계선으로의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간 한반도에서 정전체제를 유지해온 분계선과 감독기구, 완충지대, 협정 등은 사실상 전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으며, 평화체제로의 대체가 시급한 시점이다.
[ 한반도에서 정전체제를 유지해온 분계선과 감독기구, 완충지대, 협정 등은 사실상 전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할 수 있으며, 평화체제로의 대체가 시급한 시점이다. ]
평화체제의 의미
한반도의 기형적인 정전체제는 평화협정 체결을 통한 평화체제 구축으로 종식될 수 있다. 평화체제란 평화협정이 법률적으로 담보하는 체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지금까지 쉽게 풀리지 않았던 것은 정전체제 형성과정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이 남북한간의 민족적 성격뿐 아니라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당사자' 문제이다. 이는 정전체제의 장기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로 매우 미묘하고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어버렸다.
즉, 정전협정의 법적 당사자는 3자로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 유엔군 총사령관 미합중국 육군대장 마크 클라크로 되어 있고, 협정문 서명식에 참석하여 조인한 당사자는 2자로서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 수석대표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과 유엔군 대표단 수석대표 미합중국 육군중장 윌리엄 해리슨 2세로 되어 있다. 당시 남한은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남한의 당사자 자격 유무에 대한 논란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것이다.
논란의 요지는 이렇다. 한국은 참전국가이며, 한국 대표가 군사정전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왔고, 한국군이 전선을 지켜왔기 때문에 한국은 분명 정전협정의 당사자라는 입장과 한국은 미국에 작전지휘권을 이양했고, 정전협정을 체결할 권한 역시 작전지휘권에 포함하여 이양하였으며, 군사정전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된 한국 군인은 유엔군 사령관이 임명한 것으로 한국군이 전선을 지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정전협정의 당사자라는 법적 지위와 상관없다는 입장이 제기되어 왔다.
따라서 평화협정 체결 당자자에 관한 의견들도 다양하다. 남한 당국은 이른바 '당사자 해결 원칙'을 내세우면서 남북 양 당국이 평화 문제에 관련한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북한은 남한을 배제하고 북·미 당사자를 주장하고 있다. 이외도 남·북·미가 당사자가 되는 3자회담과 남·북·미·중의 4자회담 등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당사자 문제는 정전협정과 평화협정의 당사자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실질적으로 누가 한반도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가 라는 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미국은 한국전쟁 참전, 휴전의 당사자, 주한미군 등 한반도 내에서의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명백한 당사자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다만 중국의 자격 문제이다. 중국은 1957년 이미 북한에서 중국인민군을 철수시켰고, 그 이후에 한반도에서 군사적 대치의 직접적 당사자에 위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이 당사자로 참가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논란이 되었던 남한의 당사자 자격 역시 남한은 북한과 직접 대치하고 있으며, 남북한 기본합의서에서도 불가침과 군축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남한 정부의 역할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평화체제는 평화협정의 당사자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군비경쟁의 중단과 상호군축, 불가침 보장과 평화보장 장치, 비무장지대 관리를 위한 기구 수립 등 법적 근거들을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다.
평화 질서를 수립하는 길
앞에서도 보았듯이 한반도에서 공고한 평화 질서를 수립하는 길은 '현 정전 상태'를 극복·청산하고, 항구적인 평화 질서를 보장하는 국제법적 구속력을 가지는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이며, 그것을 이행하는 과업과 현재의 무력 대치 상태를 극복하고 실질적으로 군비를 축소하는 과업, 이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남북 사이에는 이미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발효시켰고, 그 안에 남북 불가침에 관한 조항이 들어가 있으므로, 이 조항을 확대·발전시켜 남북 사이의 평화·군축에 관한 더욱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새로운 규범을 '남북 평화·군축 합의서'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국가 대 국가의 평화 조약은 그것이 체결된 뒤에 우호·선린 관계로 개선되지만, 민족 내부의 특수 관계인 남북의 평화에 관한 합의는 실질적이고 공고한 평화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상호 군축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6월 월드컵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 바로 6·29 서해교전 소식이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전시 상황으로까지 보도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발생해 왔다. 가까운 예로 1996년 동해 잠수함 침투사건, 1999년 연평해전 등이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다. 이는 한반도가 전쟁가능성을 늘 지니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들은,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은 전쟁임을 증명하고 있으며, 정전상태의 장기 지속으로 인해서 전쟁도 평화도 아닌 '이중' 상태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것과 군축의 문제는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당면과제로 강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