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사상의 발전

노동사회

사회주의 사상의 발전

admin 0 8,447 2013.05.08 11:47

1.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성숙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이르면, 유럽 각국에서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부르주아지가 정치 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발맞춰 유토피아 사회주의도 점차 그 틀과 내용을 잡아갑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영국의 로버트 오언과  프랑스의 푸리에와 생시몽을 들 수 있습니다.

로버트 오언

sooya_01_8.jpg유토피아 사회주의의 창안과 발전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지식인의 몫이었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인 로버트 오언(1771∼1858)은 수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이십대에 스코틀랜드 뉴라나크에 있는 종업원 2천명 규모의 큰 방적 공장 경영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1800∼1825년 사이에 노동시간을 단축했고, 생산이 정체되는 기간에도 임금을 지급했으며,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주거상태, 그리고 생활여건을 개선했습니다. 또 후생사업을 폭넓게 벌이고, 노동자 자녀를 위한 교육을 시행하는 한편, 주민 자치까지 포함하는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실행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일체의 사회적 유대를 상실하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 2천5백 명의 공장 노동자들을 모범적인 집단으로 바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고양된 노동윤리 덕택으로 적지 않은 이득을 얻을 수 있었죠.  

그는 또 1825년 미국으로 건너가 인디아나에 3만 에이커의 토지를 매입하고, 약 800명의 이주자를 모집해 '뉴하모니'(New Harmony)라는 협동촌락을 만들었습니다. 뉴하모니는 2년 동안 운영되다가 문 닫았는데, 그곳에 모여든 부랑인과 협잡꾼들의 불성실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거기에다 오언이 노동에 상응하는 보수체계를 모든 구성원에 대한 평등 보수 원칙으로 서둘러 바꾸려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시도는 산업 발전과 더불어 발생한 사회적 대립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는 일관되게 자기 목표를 추구함으로써 부르주아 박애주의자에서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의 길로 나아갔죠. 

오언은 영국의 정치경제학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노동자가 제공하는 노동이 기업가의 이윤을 창출하는 원천이라 생각했고, 이런 인식에서 기존 질서가 불공정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오언보다 수십 년 앞서 살았던 루소는 "자연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모든 인간에게 준비해 주었으나, 오직 소수의 사람들이 잉여를 누리기 때문에 가난이 생기게 되었다"고 말했으며, 동시대의 푸리에 역시 "문명시대에는 가난이 잉여 자체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언은 루소와 푸리에의 견해를 임금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로 발전시켰고, 그의 노력은 사회사상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오언은 인간을 동물적 충동, 정신적 능력, 도덕적 정서에 따라 복합적으로 지배되는 존재로 파악하고, 이 요소들이 개인마다 서로 다르게 결합되는 원인을 미지의 자연력에서 찾았습니다. 또 인간 소질의 발전과 사회 성격을 물질적·정신적 환경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여기에서 인간의 정서와 사상이 형성되며, 이를 토대로 한 인간의 경험이 인간의 의지를 규정하는 습관이 된다고 설명했죠. 오언은 계급 적대가 개인 사이의 증오나 복수심과 같이 감정의 비이성적 표현이며, 각 계급이 그 계급 자체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오언은 노동해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계급투쟁이 아니라 성격형성 원리에 대한 인식이라고 설명했죠.

오언은 자본주의 제도의 주요 속성들을 비판했는데, 사적 소유, 인간의 타고난 성품을 기형화시키는 분업, 탐욕과 이윤 추구, 경쟁과 과잉생산 공황 등이 그 대상이었어요. 특히 자본주의적 경쟁체제와 그에 따른 이윤 추구를 혐오했습니다. 그는 이윤 추구야말로 고용주에게 무분별한 착취 방법을 자극하고, 모든 사회관계를 비인간화하는 요인이라고 파악했죠. 또 자본주의적 분업, 나아가 근대적 기계를 도입하는 것도 비판했습니다. 이윤 추구는 노동자를 육체적·정신적 불구로 만들고, 근대적 기계 도입은 노동자들에게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다주기는커녕 노동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는 논거에서였습니다.

오언은 부르주아적 결혼제도와 종교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사적 소유와 더불어 이 두 가지가 온 세상을 부와 권력을 둘러싼 투쟁의 무대로 만들어 버린 '3대 악'이라고 규정했죠. 이 '3대 악'에서 인간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자연이 부여한 인간의 선한 자질들을 어릴 적부터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죠. 

1829년∼1834년 시기에 오언은 노동운동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당시 노동조합은 1824년에 단행된 단결금지법 철폐로 활기차게 발전하고 있었죠. 그런 상황에서 오언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운동을 결합하려는 계획을 구상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자기 상태를 개선하고 자본주의를 종식시킬 의도로 오언의 협동조합 계획에 찬성하면서 조직화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 운동은 1834년 전국노동조합대연합(GNCTU)의 결성으로 최고조에 이르렀죠. 오언은 이 조직의 강령을 작성했으며, 대표로 선출되었어요. 오언은 협동조합망을 기초로 하여 자본주의적 기업들을 합병해 나갈 거대한 국가적 생산체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이 구상은 현실적 조건을 극복하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납니다. 그리하여 오언은 1834년 파업투쟁 실패 이후 노동조합운동과 결별하죠. 오언은 협동조합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을 지지했지만, 두 운동을 자신의 계몽주의 이념을 선전하고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영국 사회주의의 창설자'로 평가받는 오언은 영국 노동운동에 최초로 투쟁전략을 제시해준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노동운동이 오언의 이념을 통해서 사회주의 이념을 지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급 대립이 격화되던 시기에 사회를 평화적으로 개혁하려 했던 오언의 시도가 유토피아적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오언은 결국 노동자들을 따르지 않았고, 노동자들도 그를 따르지 않았죠. 선진 노동자들은 오언의 협동주의 사상과 부분적으로는 사회주의 사상을 무기로 삼았지만, 정치투쟁 포기에 대한 그의 호소는 거부했습니다. 

푸리에

sooya_02_8.jpg푸리에(1772∼1837)는 프랑스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비판적 경향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과학적 사회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푸리에는 부유한 직물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1791년 리옹에서 도매상인으로 자리 잡았으나, 1793년 혁명적인 사건들로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그는 전국을 여행하면서 투기행위의 실상을 목격했으며, 대다수 국민이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 결과 자본주의의 모순과 폐해를 확인하고, 그것을 부르주아 계몽사상의 이상과 관련지어 날카롭고 재치 있게 비판하게 됩니다. 

푸리에가 프랑스 유물론에 근거하여 자연과 사회를 움직이는 운동법칙이 있다고 주장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운동을 사회 운동, 동물 운동, 유기체 운동, 물질 운동 등 네 가지로 구분하고, 이 운동들은 모두 서로 긴밀한 연관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모든 운동을 보편적인 운동의 일부라고 파악했습니다. 푸리에의 이런 변증법적 사유는 그의 역사관을 규정했어요. 여기서 그는 사회구성체의 기계적이고 직선적인 연속이라는 전통적 역사철학의 모형을 거부하고, 나선모형을 제시했습니다. 또 푸리에는 "사회의 몰락은 사회 진보를 통해 이루어지며, 개개 사회구성체 내부에서 이미 그것을 극복할 수단이 마련된다고" 주장했어요. 푸리에의 역사관은 역사 과정의 모순성,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의 통일성, 진보적 변화와 퇴행적 변화의 통일성, 그리고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통일성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푸리에는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면서 세계의 물질적·도덕적 빈곤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문명 속의 빈곤은 풍요 그 자체에서 태어난다"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자본주의 사회는 거꾸로 된 사회라고 규정했죠. 그는 거꾸로 된, 즉 전도된 세계에 내재하는 이해 대립, 즉 개인과 사회집단 사이의 대립 및 이것과 사회 사이의 이해 대립, 그리고 여기에서 기인한 도덕 기준의 이중성과 그에 따른 모든 범죄와 악습을 비판했습니다. 

푸리에는 인류가 지금까지 원시 상태에서 야만·미개·문명 상태라는 네 개의 발전단계를 거쳐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첫 번째를 자연발생적 원시공동체 단계로, 두 번째를 소단위 산업과 직접적 교환경제의 단계로, 세 번째를 중간단위 산업과 상업발전의 단계로, 네 번째를 대산업의 단계로 특징지었죠. 네 번째 단계는 부르주아 체제와 일치했습니다. 푸리에가 설정한 목표는 다섯째 발전 단계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다섯째 단계는 부자들이 더 이상 가난한 자들의 희생 위에 군림하지 않으며, 경제적 무정부 상태와 경쟁이 재화의 생산 및 분배의 '조합조직'으로 대체된다는 구상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 사회의 기본 단위로서 거대한 생산조합의 창설을 제안했습니다. 이것은 약 1천2백 헥타르 당 1천8백 정도의 인구를 단위로 한 노동·생활 공동체들이 중앙집권적인 관리구조를 통해 느슨하게 배열된 자기 완결적인 공동체 구상이었어요. 푸리에는 이런 공동체가 지닌 구심력과 노동에 대한 정열, 그리고 전위적 성격을 고려해 고대 마케도니아의 전투대형 이름을 따 팔랑주(phalange)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푸리에는 팔랑주 각각에 공동 거주, 경제, 문화를 위한 훌륭한 숙사인 팔랑스테르(phalanst re)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죠.

푸리에의 주장에 따르면, 팔랑스테르 안에서 수행되는 노동은 자본주의 생산조건 아래서 이루어지는 노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의 욕구이며, 인간에 내재한 능력의 자유로운 전개입니다. 인간을 단편적이고 일면적으로 만드는 한편, 단조롭고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제공하는 자본주의 노동조직을 극복함으로써 노동은 매력적인 것, 일종의 쾌락이 될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습니다. 계획적으로 조직된 집단 노동은 노동력과 노동수단을 합리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그것을 몇 배나 절약함은 물론, 그 외에도 높은 물질적·정신적 생활수준을 보장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푸리에는 여성해방을 강조했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열악한 지위를 비판하면서 여성들이 생산과정과 사회생활 일반에 남성과 동등하게 참여해야 한다는 견해를 폈습니다. 그는 사회의 진보와 변화는 여성의 점진적 해방과 병행한다고 설명했고, 또 자본주의 사회질서가 어린이들을 육체와 정신의 불구로 만든다고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든 어린이들이 신분과 성별에 관계없이 보편적이고 평등한 무상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푸리에가 행한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비판, 인간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 사회주의적 목표 설정, 즉 수준 높은 생산과 문화, 인간의 다양한 물질적·정신적·사회적 욕구 충족을 위한 제한 없는 가능성, 그리고 여기서 발생하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 분업, 교육 등에 걸친 고찰과 제안들은 1840년대 노동자계급 해방을 위한 사상을 풍부하게 만들었죠.

푸리에의 이상사회에 대한 구상은 현실에서 실현된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외피 뒷면 도처에서 번득이는 천재적인 착상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착상들은 개인과 사회에 유익한 '인간적 노동'이라는 이념을 지향했죠. 그의 사상은 자신이 살던 시대를 훨씬 뛰어넘었으며, 사회주의 사회가 실현됨으로써 비로소 현실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푸리에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의 탁월한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의 사상은 푸리에주의라는 형태로 여러 방향에서 계승됩니다. 

생시몽

sooya_03_8.jpg생시몽(1760∼1825)은 프랑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그의 신분에 걸맞게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는 프랑스 원정대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가했다가 부상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 프랑스로 돌아와 혁명에 적극 참여합니다. 

 생시몽은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부르주아 관계가 확립됨에 따라, 사회 현실의 모순 구조를 깊게 통찰했습니다. 이러면서 노동자계급의 대변인 역할을 맞게 되었죠. 1825년에 쓴 『사회조직에 대하여』에서 생시몽은 '가장 수가 많은 계급인 인민'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단순한 노동자들'이 기업가들보다 더 많은 통찰력과 행동력을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주장했던 것이죠. 이런 논거를 들어 생시몽은 통치활동, 즉 인간에 대한 지배가 사물에 대한 관리로 대체되는 방식으로 사회를 재편해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그는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사회 질서에 대한 중요한 착상들을 내놓았습니다. 과학과 생산의 결합, 계획경제, 성과원리 등이 그것이죠. 생시몽은 도덕적 행복과 물질적 복지를 목표로 하는 사회를 수립하기 위해 일반 이익과 개인 이익의 일치, 집단적 태도, 국민교육, 그리고 국민들 사이의 평화롭고 조화로운 공생이 필요하다고 보았어요. 

그는 노동자계급이 문화적·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지배자들의 사고방식을 거부하면서, 노동자들도 동등한 능력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사회의 모든 기능에 동등한 성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이야말로 사회의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착취의 근원을 소유관계보다 사회의 잘못된 조직원리에서 찾았어요. 물론 생시몽은 노동의 권리를 옹호하였으며, 부르주아지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의무론을 펴기도 했습니다. 그는 각자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성과에 따라 욕구가 충족되기를 바랐으며, 이기적인 이윤추구와 임금 착취에 대립하는 사회주의 성과주의 원리를 설파했습니다. 

다른 한편, 생시몽은 무산자 대중의 계급투쟁은 파괴적인 것이라 하여 거부했습니다. 그는 모든 '생산자들'간의 연합을 확보하는 데는 사회적 생산을 계획을 통해 보편 이익에 맞도록 하고, 모든 특권을 동등한 교육기회와 업적에 바탕을 둔 등급서열로 대체하며, 자연적 도덕원리에 따른 보편 교육을 수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생시몽은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게으른 자'에 대한 투쟁과 '산업가'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으며, 과학과 기술에 대한 지나친 평가, 그리고 은행가와 산업 경영인 및 기술자를 포함한 '생산자'가 사회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권리를 박탈당한 채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을 위한 실질적인 방도를 제시할 수 없었지만, 그가 세운 세계의 실천적 변혁에 대한 주장은 압제와 착취에 신음하던 사람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귀족 출신이었던 그는 계급적 편견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었죠. 그리고 그가 살던 시대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적 사회관계가 충분하게 성숙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사상은 많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인류 사상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는 자신의 계급적 한계를 크게 뛰어넘었고, '노동자를 계몽하기 위한 가치 있는 자료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유토피아 사회주의와 노동운동

19세기 전반에 들어와 사회주의 사상은 로버트 오언, 푸리에, 생시몽의 기여로 더욱 성숙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이들의 사상을 바탕으로 이뤄진 몇몇 실험들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사회주의의 내용을 풍부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유토피아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이는 유토피아 사회주의 사상이 창안자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노동자들의 열망과 지향을 반영했기 때문이었죠. 

19세기 전반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역사적인 자발성과 고유한 정치운동을 인정하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가장 고통받는 계급인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생각했죠. 그들에게 노동자계급, 즉 프롤레타리아트란 가장 고통받는 계급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유토피아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실천 투쟁과 역사 발전의 참 모습을 완전히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오언, 푸리에, 생시몽 등 유토피아 사회주의 거장들이 제시한 점 가운데 뛰어난 측면은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혁명에 대한 구조적 비판이었고, 이는 사회공동체 이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유토피아 사회주의가 내세운 매혹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이런 계획들은 노동자 대중의 넓은 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환경이 인간의 모든 미덕과 악덕을 결정한다고 보았으며, 인간의 행복을 제약하는 무지는 계몽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점에서 그들은 18세기 계몽사상의 역사적 낙관주의를 공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들면서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은, 당시 유럽의 가장 발달한 국가들에서 계급적 형성을 끝낸 노동자계급을 대표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이 바랐던 것은 혁명적 계급투쟁이 아니라 계급 평화였으며, 설득과 개량주의 활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을 통해 노동자 계몽과 교육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이상사회를 위한 계획에서 노동의 해방에 중요한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그들은 노동의 해방을 인간의 성품과 재능 발달의 기초이자, 도덕적 완성의 원천으로, 그리고 생명 활동의 주요한 자극으로 보았습니다. 

유토피아 사회주의 이론가들은 자본주의가 가진 많은 모순들, 즉 사회와 개인의 적대적 모순, 노동자의 빈곤화,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폭로했습니다. 명확한 형태로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사적 소유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죠. 유토피아 사회주의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낙관주의를 갖게 하고, 나아가 자신의 계급적 힘을 확신시키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마르크스주의의 대두

마르크스주의의 출현


sooya_04_6.jpg마르크스주의는 칼 마르크스(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가 창시한 철학, 경제학, 정치학의 통일된 이론 체계를 말합니다. 노동운동의 이론과 강령 구실을 하는 '과학적 사회주의'로 불리기도 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세계 문명 발전의 대도(大道) 바깥에서' 생겨난 게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의 주요 원천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의 철학, 경제학, 사회주의 사상이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철학의 거장인 칸트, 헤겔, 포이에르바하의 성과를 종합해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세웠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의 '살아 있는 혼'으로서 이론과 방법론의 토대를 이룹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세계를 해석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 세계를 정신적·실천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결론적으로 유물론적 세계관은 자연과 사회, 이론과 실천을 전반적으로 포괄합니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더불어 마르크스주의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입니다. 그것은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이론을 토대로 한 영국의 고전적 정치경제학의 성과를 계승한 것이면서, 자본주의의 경제적 운동법칙 분석에 유물론적 역사관을 적용하여 만들어진 것이죠. 여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적대적 계급 사회의 최후 형태며, 그 안에 있는 법칙성에 따라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전환할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더 나아가 노동자계급만이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존재 조건으로 인해 계급투쟁을 수행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함으로써 이런 역사적 필연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sooya_05_5.jpg'과학적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또 하나의 구성요소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위대한 유토피안', 즉 로버트 오언, 푸리에, 생 시몽이 이룩한 성과들을 종합하고 계승했으며, 이를 창의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이 지닌 역사적 사명을 실천하는 데 요구되는 법칙, 말하자면 사회주의 혁명을 준비하고 실행하며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노동계급 투쟁의 전략과 전술을 그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죠. 과학적 사회주의는 이론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경제학에 바탕을 둔 것이며, 이를 기초로 국제노동운동의 실천적 경험들을 충실히 수용하고자 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구성요소는 서로 제약하고, 전제하며, 또 교류하는 가운데 통일성을 갖추게 됩니다. 이런 구성 요소의 통일,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일관성, 그리고 실천운동의 무기로서 그것이 지닌 기능은 유물론적 변증법을 통해 서로 연결됩니다. 유물론적 변증법은 유물사관을 정립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계급투쟁에도 적용되어 실천적 유물론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변혁 이데올로기의 형성을 반대해 왔던 부르주아 이론 또는 소부르주아 이론과 투쟁하면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냅니다. 마르크스주의 창시자들은 자신들의 표현에 따르자면, 혁명적 민주주의자에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자로, 그리고 철학적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나아가는 일정한 과정을 거친 뒤에 마르크스주의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경제학-철학 초고』(1844), 『신성가족』(1844), 『독일 이데올로기』(1845), 『철학의 빈곤』(1847) 등의 저술을 통해 관념론을 비판하면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정립했습니다.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세계의 보편적인 운동법칙과 발전법칙을 탐구하되 객관적인 실재(實在)를 목적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그 결과를 사회적 실천에 적용할 때 그 법칙들이 어떤 인식론적·방법론적 의의를 갖는지를 해명하는 철학 원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의 물질적 통일성을 설명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유물론적 변증법의 원리와 범주들은 객관적 실재와 그것이 의식에 반영되는 보편적 관련성을 변화와 진보의 관점에서 해명하려 했죠. 유물론적 변증법의 핵심 원리로는 본질과 현상, 인과성과 상호작용, 양과 질, 가능성과 현실성, 우연과 필연,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등이 있습니다. 

유물론적 변증법에 기초한 역사적 유물론은 인간의 실제적인 삶의 과정, 실천적인 삶의 활동에서 시작하는데, 역사적 유물론이 중시하는 삶의 활동은 물질적 생산과정과 재생산과정, 그리고 그것의 구체적인 형태로부터 생겨나는 계급투쟁이었습니다. 마르크스 자신은 역사적 유물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활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기 의지로부터 독립된 일정한 필연적 관계들, 즉 자신의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에 들어선다. 이런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정치적 상부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실재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이 사회적·정치적·정신적 생활과정 일반을 조건짓는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그 발전의 특정단계에서, 지금까지 그것들이 그 내부에서 운동해 왔던 기존의 생산관계들 혹은 이 생산관계들의 법률적 표현일 뿐인 소유관계들과의 모순에 빠진다. 이런 관계들은 생산력의 발전형태로부터 그것의 족쇄로 변전한다. 그때에 사회혁명의 시대가 도래한다. 경제적 기초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서서히 혹은 급속히 변혁된다."

프롤테타리아 독재 사상의 형성

1848년 1월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동맹'의 위탁을 받아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을 저술합니다. '선언'은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옛 유럽의 모든 세력들이 이 유령의 성스러운 사냥을 위해 동맹했다. 교황과 짜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의 급진파와 독일의 경찰들이"로 시작하여,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로 끝을 맺는 역사적 고전입니다. 『공산당 선언』의 제1장과 제2장은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원리 해설을, 제3장은 사회주의의 다양한 경향에 대한 비판을, 그리고 결론에 해당하는 제4장은 각국 노동자계급이 보인 투쟁의 독특한 특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공산당 선언』에서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들,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회주의가 도래함에 따라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해체된다는 것과 이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이 혁명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을 강조했으며,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 전망을 과학적으로 밝히려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선언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출생 신고서이며, 세계 노동운동의 중요한 강령이라 할 수 있죠.

1848년과 1849년 유럽 혁명과 그 이후에 걸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자계급이 벌이는 투쟁의 전술 문제를 다루었고, 이를 통해 유물론적 역사관과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이론이 제시됩니다. 이 무렵에 나온 중요한 저술은 『1848년에서 1850년 사이의 프랑스 계급투쟁』(1850), 『독일 농민전쟁』(1850),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1851∼1852) 등입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서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혁명이 역사 진보의 동력이고 가속 장치라는 것을 뜻합니다. 

『자본론』과 마르크스주의의 성장 

마르크스는 경제이론을 발전시키는 일에 힘을 쏟았고, 그 결과 『정치경제학 비판』(1859)과 『자본론』(1868)을 내놓게 됩니다. 『자본론』은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본질, 자본의 유통과정, 자본의 총과정,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이데올로기 비판, 인간상(像), 잉여가치와 그 역사 등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과 화폐가 갖는 물신성(物神性)을 폭로했습니다. 또 사회구성체의 구조를 탐구하고,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를 분석하면서 유물론적 변증법을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적대관계가 '수탈자를 수탈함'으로써 필연적으로 파괴된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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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구성체란?
영어로는 social formation. 인간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고, 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해야 한다. 이것을 사회적 생산이라 하며, 이것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나타나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데 이용되는 자연물과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생산력이라 하고, 생산과정에서의 인간상호간의 관계를 생산관계라 하며, 이 생산관계의 상태는 누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지배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물질적 생산력은 변화·발전하며, 이에 상응하여 생산관계도 변화한다. 이 같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해 구성되는 것을 생산양식이라 하고, 이를 토대(하부구조)라 하며, 이에 부응하여 형성되는 정치·경제·이데올로기적인 구조 등을 상부구조라 한다. 
사회구성체란 이 같은 토대와 상부구조의 총체를 일컫는 개념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사회구성체는 원시공산제, 고대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분류되며, 근대 시민적·부르주아적·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사회적 생산과정의 최후의 적대적 형태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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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폭넓은 주제를 다뤘습니다. 그들은 제1인터내셔널과 국제노동운동의 발전에서 생겨난 문제들을 검토하기도 하죠. 이 무렵 『프랑스에서의 내전』(1871)이 출간되었습니다. 이 저술에서 마르크스는 파리 코뮌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국가 기관을 넘겨받을 수 없고, 오히려 사회주의 혁명 과정에서 이것을 파괴하고 프롤레타리아 고유의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견해를 폈습니다.

한편, 엥겔스는 『오이겐 뒤링씨의 과학변혁』(1885)에서 뒤링의 '사이비' 사회주의와 대결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통일된 체계를 제시했습니다. 그는 또 『자연변증법』(1875),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 등의 저술을 통해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발전시키죠. 『가족, 사유 재산 및 국가의 기원』(1884),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1845),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1880) 등 많은 저작을 쓴 엥겔스는 1883년 마르크스가 죽은 다음 『자본론』제2권과 제3권을 완성하여 출판했으며, 이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키고 노동운동과 과학적 사회주의를 결합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이후 노동운동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은 빠르게 확산되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뒤를 이어 많은 이론가들이 등장합니다. 이들 이론가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키고 완성하는데 데 많은 기여를 합니다. 칼 카우츠키, 아우구스트 베벨, 프란쯔 메링,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가 대표적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