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7월12일부터 14일까지 국제노동자교육협회(IFWEA)가 영국 맨체스터에서 '세계화와 노동교육'이라는 주제로 개최한 국제 세미나에 다녀왔다. 국제노동자교육협회는 세계적으로 1백 개가 넘는 노동교육단체를 회원으로 거느린 국제 조직이며, 우리 연구소는 1997년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영국, 미국, 남아공, 브라질, 한국을 비롯해 세계 22개 나라에서 59명이 참가한 이번 세미나는 맨체스터 주택가에 자리잡은 GMB학교에서 열렸는데, GMB는 노조원80만을 거느린 영국의 대표적인 일반노조로 영국 노동운동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노조다.
[ 유럽 노동운동의 세계화 교육은 우리보다 앞서 있었다. 사진은 세미나 모습 ]
노조 국제기금의 99%는 정부돈
사실 세계화(globalization)는 한국의 노조활동가들에게 낯선 주제다. 물론 IMF 경제 위기 이후 많이 친숙해졌지만, 아직 노동운동진영의 세계화 대응 전략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노동조합에서 진행하는 교육 주제들을 보아도 세계화에 관한 것은 드물다.
유럽 노동운동의 세계화 교육은 우리보다 앞서 있었다. 세미나에서 다뤄진 주제들을 살펴보면, 우리나라로 치자면 단위노조 대의원 격인 현장위원(shop steward)에게 세계화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에서 멀티미디어 기술을 노동자 교육에 활용하는 방법, 이를 위한 강사 양성과 교육자료 개발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다양했다.
'세계화에 대한 노동교육의 접근법'을 다룬 첫날 세미나에서 나는 '기금 마련 전략' 분과에 참가했다. 앞에서 말한 주제들과는 사뭇 다른 영역이지만, 현장위원을 교육하고, 멀티미디어 기술을 노동교육에 응용하고, 강사를 양성하고 교육자료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만큼 사실 세계화에 대한 노동교육과 기금 마련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기금 마련' 분과에서는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 서구 노조가 국제연대를 위해 지원하는 돈의 99%는 직간접으로 정부 돈이며, 이런 점에서 기금 마련은 정부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 기금들은 주로 50∼70년대 제3세계의 반공 캠페인을 지원할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1990년대 이후 제3세계 개발과 빈곤퇴치가 재정 지원의 중요 이슈로 떠올랐다고 했다. 하여튼 신자유주의 물결이 거세짐에 따라 서유럽 정부들이 제3세계 지원금을 삭감하는 추세라서 노동조합에 대한 지원금 역시 줄어들고 있었다. 재정 부족 문제는 선진국 노조에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국제노동운동에서 자금 지원은 선진국 노조→ 국제산별노련 → 3세계 노조의 흐름을 갖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3세계 노조의 선진국 노조에 대한 재정 의존도가 커져왔다. 서구 각국의 예산 삭감에 따른 기금 부족이라는 이유에서만 아니라, 3세계 노조의 자주성 측면에서도 현재의 자금 지원 흐름은 건강하지 못하며, 이 틀을 깨야 한다는 데 참가자들은 의견을 같이 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러한 틀을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이뤄지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산별이나 노총 차원에서 해외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연구나 교육 사업을 벌이는 경우가 있는데, 과연 우리나라 노조가 돈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노조가 가진 자원은 충분한데, 이것이 비효율적으로 배분·운영되다 보니 상급단체가 (비록 얼마 되지 않지만) 남의 나라 돈을 받아써야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 GMB학교 곳곳에서 1백년이 넘는 노조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사진은 로비에 걸린 역대 GMB지부 깃발들 ]
세계화를 둘러싼 논란들
둘째 날은 '비공식부문 조직화'와 '여성노동자와 세계화', '초국적기업 조직화'를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나는 '초국적기업 조직화' 분과에 참가했다. 미국노총(AFL-CIO)의 교육기관인 조지미니센터 활동가 두 명이 다국적기업에서의 캠페인 조직화 단계에 대해 발표했는데, 그 내용이 흥미로웠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캠페인 조직화를 위해서는 다음 11개 단계가 필요한데 ① 노조 내부의 의사소통 체계 구축, ② 노조의 약점 파악, ③ 캠페인 목표 설정, ④ 자신과 상대방, 즉 노사 양측의 강점과 약점 분석, ⑤ 캠페인 주제 설정, ⑥ 타격 대상 및 연대세력 설정, ⑦ 캠페인 전략 개발, ⑧ 전략에 맞는 전술 개발, ⑨ 캠페인 시간표 작성, ⑩ 전략 평가, ⑪ 새 전략에 맞는 새 전술 개발이다. 이들은 11단계에 맞춰 캠페인을 진행한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모든 사례가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경험을 통해 자신들의 전략과 전술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보완해가고 있었다. 발표를 들으면서 우리나라 노동운동도 저러한 사업 계획·집행·평가의 체계화가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날 세미나는 '국제연대 및 조직화 강화', '노동자권리 지원', '국제금융기구와 구조조정프로그램'을 주제로 진행되었고, 나는 마지막 분과에 참가했다. 여기서는 IMF나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에 대해 노동조합은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가가 논의되었다. 브라질에서 온 발표자는 국제금융기구들이 노동조합과 NGO와의 대화를 이야기하는데, 과연 이를 통해 국제금융기구의 개혁이 실제 가능한지를 따져보아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여기에 영국 등 유럽쪽 참가자들은 국제금융기구의 개혁이 가능하며, 이를 위해서는 노동조합운동의 국제연대가 절실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브라질 발표자는 2차대전 직후 IMF나 세계은행을 출현시킨 역사적 배경이 오늘날의 상황과 너무나 다르며, 또한 현실적으로 이들 기구가 내놓은 처방이 빈부격차의 심화, 실업률 상승, 빈곤 심화를 초래하면서 실패했기 때문에 현재의 국제금융기구들이 여전히 필요한 지는 따져봐야 한다고 응수했다.
결국 논의는 세계화에 대한 규제가 가능한지를 둘러싼 논란으로 번졌다. 선진국 노조는 국제금융기구에의 개입과 참여를 통해 세계화의 폐해를 규제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고, 3세계 노조는 세계화의 폐해를 규제할 수 없으며 국제금융기구의 개혁도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선진국 노조가 세계화의 수혜자고 3세계 노조가 세계화의 피해자인 한 이러한 간극을 메울 여지는 없어 보였다.
한국 노조는 어떤 입장에 서있을까? 노동운동 내부에 세계화를 반대하는 논의가 많지만, 국제적으로 한국은 세계화의 수혜자로 여겨진다. 한국 노조운동의 주력부대인 대기업노조들이 기반한 재벌들은 세계적 다국적기업으로 명성을 떨친 지 오래다. 자동차, 전자, 반도체, 철강 등 한국의 주력 생산품들은 세계시장을 겨냥한 것들이다. 물질적인 면에서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지는 오래다. 이 모두가 세계화의 산물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 한국 노조운동이 서있다. 한국 노조운동의 입장은 어떠해야 하는가? 발표를 들으면서 이러 저런 고민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노동계급의 자존심
세미나 내용만큼이나 흥미를 끈 것은 세미나가 열린 GMB학교였다.
이곳은 멋진 정원을 가진 고풍스런 대건물로 회의장, 강의실, 복도 곳곳에서 GMB노조의 역사를 만날 수 있었다. 1백년도 넘은 노조 깃발이 벽에 걸려 있었고, 신규 노조원을 40명 조직한 활동가에게 수여된 상장도 볼 수 있었다. 나무 상자에 새겨진 역대 지도부 명단도 눈길을 끌었다. 40년 전 노조가 주최한 조합원 미술대회의 입상작들도 복도 한쪽을 장식하고 있었다. 19, 20, 21세기, 노조가 걸어온 삼 세기에 걸친 세월이 GMB학교 곳곳에 묻어 있었다. 자존심은 지나온 과거와 서있는 현재를 긍정할 때 생긴다. GMB학교에서의 짧은 생활에서 옛것을 소중히 여기고, 전통을 기릴 줄 아는 영국 노동계급의 자존심을 느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무슨 돈으로 GMB학교를 세웠는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영국 노동자들의 쌈짓돈이 큰 몫을 차지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세미나를 마치고 GMB학교를 떠나면서 생각해보았다. 왜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이런 건물하나 갖고 있지 못할까? 1백년도 더 전에 덴마크 노조운동은 금주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고 한다. 그리고 주머니 돈을 털어 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지금 덴마크 노조가 갖고 있는 교육시설은 대부분 그 기원이 지지난 세기, 즉 19세기에 노동자들의 돈을 거둬 구입한 건물을 토대로 한 것이라고 한다. 술 덜 마시고, 담배 덜 피고, 아끼고 아껴 학교를 만들고 노조를 살찌웠던 것이다. 이런 헌신이 덴마크는 물론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이 가진 사회교육 시설의 뼈대가 되었다고 한다.
세계화 문제가 나오면 으레 이런 구호가 외쳐진다. 'Think Globally, Act Locally', 생각은 국제적으로 하고, 행동은 자기가 활동하는 곳에서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다. 이번 세미나에서도 세계화에 노동운동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지, 그 해답을 얻을 수 없었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실마리를 풀기 위해 고민하는 여러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기 것을 소중히 여겨 보존하고, 자기가 가진 것을 아껴 큰 뜻을 위해 바치며, 소박하면서도 꿋꿋하게 나아가는 노동운동의 역사를 짧게나마 체험한 것은 세계화 시대에 노동운동가들의 자세가 어떠해야할 지를 돌아보게 된 좋은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