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를 본 건 3월 말, 극장에 걸리기 직전의 일반 시사회를 통해서였다. 영화를 즐겨 소비하는 세대에게는 낯선 '할머니와 꼬마'라는 구성. 남북을 가른 휴전선보다 더 넓은 세대차. 그 넓은 간격조차 뛰어넘는 할머니의 '무대뽀' 사랑. 여기에 바탕한 재치와 감동, 웃음.
'시대착오적인' 기획이라 걱정이 태산같았을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완제품으로 나온 영화의 탄탄한 구성은 반가웠을 게다. 하여튼 영화 마케팅에는 입 소문이 제격임을 입증한 영화. 게을러터진 내 손까지 표가 들어올 정도로, 그들이 내건 '국민 시사회'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고, 그 덕택에 나는 제작사의 의도대로 <집으로…>의 열렬 지지자로 변모한 채 극장 문을 나섰다.
지금 이 영화는 자생적인 지지자들과 언론은 물론 청와대까지 동참한 일치단결 캠페인에 힘입어 관객 3백만의 고지를 가볍게 넘어섰고, 개봉 두 달이 돼가지만 극장에서 순항하고 있다. 관객 1백만을 넘어서고 대종상 신인 여우상에 주연 김 을분 할머니가 후보로 오를 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 사회가 그렇게 파렴치하지는 않구나 싶어 내심 흐뭇했다. 급행열차처럼 치달은 개발의 속도전 뒤로 인생을 바친 '어머니'와 '고향'과 '할머니'를 가진 한국인들에게 이 영화가 남달르게 느껴졌던 건 틀림없다.
제2의 영자?
그런데 '청와대'에서 이 영화의 특별 시사가 열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문화방송 '느낌표!'의 '책을 읽자' 코너에 소개된 『괭이부릿말 아이들』, 『봉순이 언니』를 비롯한 일련의 책들을 일말의 반문 없이 대형 서점들의 베스트셀러 전관왕으로 만들어 준 '국민적 저력'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과도 맥을 같이하는 회의가 든 것도 이 즈음이다. 빈곤과 그 세월을 이길 힘이 되어주었던 정서적 연대의 기억조차 이제는 일시적인 소비의 대상이 되가는 건 아닌가 싶어 말이다. 산골 소녀 영자를 서울로 끌어내고 아비 없는 천애고아로 만들어 버린 것도 대중의 위력이고, 매체의 힘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의 마을이 철도청의 관광 열차가 들를 코스로 거론되고, 급기야는 할머니가 호두 농사 지으며 수십 년 살아 온 고향 마을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영화에 전폭 지지를 보냈던 관객의 한 사람으로, 이 뉴스를 접하며 들었던 생각은 두 가지였다.
우선은 영화 자체에 대한 것으로, 영화 속 할머니가 말 못 하는 '벙어리'로 설정되지 않았어도 이 영화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이다. 말 못 하고, 그저 가슴에 원을 그리는 동작 하나로 미안함과 애틋함의 정서를 표현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었던들, 십 년만에 나타나 짐 부리듯 아이를 맡기고 가는 괘씸한 딸년이나, 사사건건 제멋 대로인 버릇없는 외손주에게 할머니가 할 말은 무진장 많았을 것이다. 언어를 빼앗긴 존재라는 전제부터가 할머니의 끝없는 사랑을 보여주려 자의로 설정된 게 아니었나 싶다.
애초 영화가 보여주려 한 것은, 자식을 세상에 내보내고 나서도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끊어지지 않는 탯줄처럼 이어지는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었다. 무척이나 비상업적이고 용감하다고 여겨졌던 이 영화의 기획 의도가 상업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지점도 이 대목이다.
할말은 하는 할머니를 기다리며
극장에선 틀지 않았지만, 시사회 자리에서 영화에 이어 상영되었던, 제작 과정을 담은 '메이킹 필름'을 보면 실제의 김을분 할머니는 허리가 휘기는커녕 잰 발걸음으로 농사일을 하고, 자기 의사를 밝히는 것에 주저함이 없고, 감독을 상대로도 당당하게 대거리할 수 있는 자신감 있고 당당한 여성이다. 다양한 표정과 당찬 목소리에 힘찬 동작, 꼬마 배우를 다독거리며 '상우야, 한 방에 가자'라고, 감독이 들을세라 조용히 속삭이는 할머니의 모습은 영화 속 고목 같고 벽 같은 할머니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할머니가 생전 처음 하는 '연기'를 프로 배우보다 더 그럴싸하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근성과 '총기(聰氣)' 덕택이리라. 그러나 감독과 관객이 원했던 것은 자신의 의지를 가진 할머니가 아니다. 풍경화 속 나무처럼 늘 그 자리에 뿌리내리고 서서, 그늘이 필요할 땐 그늘을 주고, 주린 배에는 과실을 베풀어주는 그런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는 할머니 사랑의 진수였던 것이고, 이 영화는 그 지점을 정확하게 꿰뚫었다고 보인다.
박제된 채 앨범에 꽂힌 빛 바랜 흑백 사진에 자리 잡은 할머니 모습처럼, 우리의 부채의식을 자극하는 기법은 사실 우리의 실제 삶과는 거리가 있다. 살아있는 존재로 자신의 이해와 요구를 가진 할머니가 집에 계신 이라면 한번쯤 극장에서 흘리는 눈물의 실체를 의심해 봐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고, 이 영화가 좀더 용감하게 희노애락을 가진 할머니의 육성을 들려줄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점에서 70대 노인의 섹스 문제를 다뤄 화제가 된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에서 보여지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더 신선하게 다가오는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런 게 진짜 삶이기 때문이다.
소비가 존재 가치인 사회의 불행
이 영화가 던진 두 번째 생각은 주로 이 영화가 '소비'되는 행태와 관련되어 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모든 이의 마음 속에 마르지 않는 샘처럼 잠복한 기억이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원초적 체험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본 이들이 할머니가 사는 마을에 떼지어 몰려가고, 할머니에게 광고모델 요청이 빗발치는 걸 보면, '생태계의 보고'라며 살려놓은 동강에 넘쳐나는 게 관광객이요 오물이라는 소식과 겹치면서 착잡한 생각이 드는 걸 피할할 수 없다.
물질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지 오래인 한국 사회가 무엇이든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익숙한 일이지만, 이 영화가 상영되고 나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가 느낌과 감동조차도 상업주의적 소비와 연관짓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와 있다는 적신호를 보여준다.
이란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나 <천국의 아이들> 속에 나타나는 순박함과 빈곤의 기억들이 '복고 취향의 동화'로 생각되듯이, 게걸스러운 소비자들은 모든 곳, 모든 것을 상업화시킨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감정 이입이 일어나 눈물 흘리고 웃음 짖지만, 그것을 더 센 강도로 소비하고자 하는 것, 마치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이국적인 풍경을 대하듯 '아직도 저런 할머니가 있었네', '어머, 전기는 그래도 들어와 있나 봐' 식의 유람을 마다하지 않는 우리 모습을 보면서 그 집단적인 후안무치(厚顔無恥)에 화가 치민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소비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한다. 맑스가 『자본론』에서 말한 물신주의(物神主義)가 이런 게 아니었을까. 근대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데 있어 인간적이고 고상한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국인은 슬픈 존재들이다.
느끼기, 감동하기, 기뻐하기, 슬퍼하기. 이런 감정조차 상품화하고 그 행위를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대중문화가 양분으로 삼고 있는 토양이라면 <집으로…>의 흥행과 그에 이은 '파장'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집으로…>의 제목에 들어있는 말줄임표가 원래 뜻했던 바는, 집이라는 단어가 한국 사람한테 갖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단순히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종결형 어미가 아니라 몇 살이 되어도 계속 이어지는 진행형의 '그리움'말이다.
이 영화를 보며 외할머니가 떠올라 우는 것도 좋은 일이고, 그 감동의 여파로 고향집 노모에게 전화라도 한 통 걸었다면 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제발, 그런 감정에서조차 마치 숨은그림 찾기 하듯 상업화의 가능성을 발견해 내는 '대중문화'의 집요한 영특함은 사라졌으면 좋겠다. 영화를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에게 바치고 싶다'던 감독의 착한 의도가 외할머니조차 상품화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지 않으려면 말이다.
감독: 이정향 각본: 이정향 배우: 유승호, 김을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