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 주체의 민주화를 위해 다 함께 나설 때다

노동사회

민중 주체의 민주화를 위해 다 함께 나설 때다

admin 0 2,772 2013.04.14 11:39

새해를 맞으면서, 가슴 툭 터일 만한 시원한 일이 생기길 바라는 심정이다. 지난 한 해 동안 늘 답답하고 억울하고 화가 치미는 그런 정황 속에서 지내 그런지도 모르겠다.   

sooya_main.jpg새해를 맞으며, 다시 민주주의를 열망하며

이런 때일수록 다시 민주주의를 열망하게 된다. 민주주의야 말로 억압과 착취가 없는 ‘사람 세상’으로 가는 길목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그 민주주의는 단순히 절차만의 민주주의나 ‘자유’ 민주주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민중이 주체가 되는 그런 민주주의를 말한다.

더구나 이명박 정권이 시행하는 노동관련 정책에서 얼핏 얼핏 파시즘의 자락들을 대할 때면, 이대로 넘길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앞선다. 지난날 오랜 세월에 걸쳐 민주주의를 위해 겪은 수많은 고초와 희생을 떠올리면, 더 이상 우리는 물러설 땅을 찾을 수 없다. 지금이야 말로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민중세력이 다 함께 나서야 할 때이다.

먼저 민중 투쟁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할 것 같다. 1922년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의 파쇼 정권이 들어선 과정과 1936년 프랑스에서 ‘인민전선’ 정권의 성립 과정이 극히 대조적인 사례로 떠오른다.  

정치권력권 위기와 노동운동 패배가 야기한 이탈리아 ‘암흑의 해’ 

1919년 무솔리니는 새로운 운동, 곧 ‘전투 파쇼’라는 정치단체를 발족시켰다. 자본가들과 지주들로부터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받은 ‘파시스트 무장행동대’는 1921년부터 노동자 조직과 진보단체들에 대한 본격적인 국내전쟁을 시작했다. 파시스트의 공격에 대한 저항은 수동적이고 분산적이었다. 노동자 조직은 정치적으로나 투쟁 역량에서 반격의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으며, 노동자 투쟁은 애초부터 방위적 성격을 띠었다.

1921년 11월 전투 파쇼는 30만 명 이상을 포괄하는 ‘파시스트 국민당’을 창립했다. 이 당의 강령은 사회조직의 지배적 형태로서 ‘통일적 민족 이념’을 내걸고, 강력한 정권의 수립과 ‘위대한 이탈리아’를 창조할 수 있는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유기체’ 건설을 주창했다. 

파시스트는 1922년 10월 나폴리에서 당 대회를 개최했는데, 거기서 4만 명의 파시스트 행동대원들이 ‘로마 진군’을 요구했다. 1922년 10월28일 파시스트들은 드디어 로마 진군을 시작했고, 국왕은 파시스트 운동을 호의적으로 관망하던 군과 민족주의자들의 압력 때문에 반란군 진압을 거부한 채, 무솔리니에게 내각 구성을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쿠데타로 무솔리니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노동운동의 처지에서 볼 때, 무솔리니가 권력을 장악한 해인 1923년은 암흑의 해였다. 공산당뿐만 아니라 사회당, 민주주의파, 자유주의파, 가톨릭 교도들까지를 대상으로 한 테러가 저질러졌는데, 테러는 단순히 파시스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국가기관까지 합세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사실상 파업은 중지되었고 임금은 저하되었으며, 노동조합은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 형성 요인을 니코스 풀란차스는 정치권력권(power bloc) 내의 위기와 노동운동의 패배에서 찾는다. 노동운동의 패배는 노동자의 경제주의적 이데올로기 위기와 조직적 분열에 따른 변혁적 조직 위기의 귀결이라고 분석했다.

강력한 대중투쟁과 연대로 극우세력 결집 막아낸 프랑스 인민전선운동 

프랑스의 인민전선 성립은 이탈리아의 경우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1934년 들어 ‘정치적 폭발’로 표현되는 극심한 위기의 징후들이 나타났다. 그해 1월에는 ‘프랑스 행동단’, ‘애국청년단’, ‘불의 십자가’ 등의 극우단체가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이다가, 2월6일에는 대규모적인 시위를 벌였다. 일종의 극우세력 폭동이었다. 경찰과 충돌을 빚어 시위에 참가한 사람 가운데 15명이 죽고, 1,435명이 부상을 입게 되었다.

이에 프랑스 노동총동맹(CGT)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2월12일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총파업에는 노동총동맹 말고도 통일노동총동맹(CGTU)과 사회당, 공산당까지 합류하여 전국적으로 450만 명이 참가했고 시위에는 100만 명이 참가했다. 이러한 총파업과 위력적인 시위는 파시즘의 위협을 격퇴시켰으며, 국내 극우세력의 결집을 막을 수 있었다. 1934년 ‘2월 행동’은 인민전선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인민전선 운동은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1934년 3월부터 5월까지 전국에 걸쳐 247개의 ‘반파쇼(투쟁)위원회’가 다양한 형태로 조직되었으며, 1934년 2월12일부터 1936년 5월5일까지 1,063건의 시위, 행진, 소요가 있었다.

인민전선 운동은 구체적인 실천계획에 따라 1934년 7월27일 사회당과 공산당이 ‘통일행동협정’을 체결했으며, 다음 해인 1935년 7월14일에는 급진당이 합류하게 되었고, 인민전선 형성이 선언되었다. 1936년 1월2일에는 인민전선 강령이 발표되었다. 1936년 6월에는 의회 선거를 거쳐 인민전선 정권이 대두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전개된 인민전선운동은 불과 4년 정도밖에 계속되지 않았으나 프랑스 정치 정세를 주도함으로써, 파시스트 독재체제를 수립하려 한 극우 반동세력의 기도를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중간층의 동맹을 성취하여 민주주의 제도를 지켜냈다. 또 부르주아제도에서도 인민전선 정부는 노동자계급과 인민대중의 노동?생활조건과 기본 권리의 개선?신장에서 큰 성과를 이룩했다.

지금 여기 짙어지는 파시즘의 그림자… 무엇을 할 것인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사례에 비추어, 지금 우리의 통치체제를 파시즘으로 규정하기에는 여러 가지 무리와 곤란이 따를 수 있다. 그러나 파시즘으로 다가갈 수 있는 가능성은 짙게 안고 있다. 그것은 틀림없는 위협이기 때문에  기필코 막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우선 사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부터 공유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보정치세력과 대중조직이 중심이 되어 반민주·반민족·반민중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통일전선 또는 민중전선을 공고하게 구축하는 일이다. 여기서는 하층 전선을 기본으로 하여 상층 전선을 융통성 있게 결합하는 일이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또 낮은 형태의 공동투쟁으로부터 차츰 높은 형태의 공동투쟁으로 발전시키고, 부분적인 연합으로부터 전면적인 연합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올바른 방식일 것이다. 전선에 참가하는 단체와 조직들의 자주성을 존중하면서 설득과 교양의 방법을 통해 그들이 스스로 전선운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전선 운동을 확대·강화하는 데서 노동운동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치교육, 정책?제도개혁 투쟁, 그리고 정치투쟁을 강화하고, 직장과 지역에서의 정치활동을 활발히 전개할 필요가 있다. 또 노동전선의 계급적 통일을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지역 차원에서 전선을 확대·강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노동자계급이 주축이 되어 파시즘의 위협을 막아내고 민중 주체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위기 극복과 고양을 위한 확고한 계기를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략 목표의 설정을 비롯하여 조직노선, 투쟁노선, 정치노선의 정립이 주요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이제 이런 과제의 해결을 위한 실천 방도는 노동운동 스스로가 강구해야만 한다. 그것은 민중 주체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한 출발이자 그 토대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