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노사관계는 철도, 가스, 전력 등 공공 3사 노조의 파업을 둘러싼 격돌로 막을 열었다. 38일간의 장기파업과 파업 철회, 민주노총의 혼미,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국가와 자본의 노동자 탄압이 강도 높게 진행되었다. 호전된 경제 상황 속에서 노동자의 임금인상 열기는 뜨거웠으며, 금융노조의 주5일제 합의 등 산업별 교섭에서 진전이 있었다. 한편 노사정위원회의 주5일제와 공무원노조 법개정 논의는 불발로 그치면서, 그나마 껍데기만 남았다고 비판받던 노사정위원회의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런 와중에 6.13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8%이상의 지지를 얻어 제3당의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정당투표제(1인2표제)의 위력을 확인한 동시에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큰 계기를 맞았다.
[ 올해의 노동쟁의는 노동의 공세보다 자본의 공세 측면이 강하다. ▷ 출처:민주노총 ]
국가·자본의 공세 강화
올해 상반기의 노동쟁의건수는 1997년 경제위기 이후 가장 많았다. 6월말 현재 쟁의건수는 215건으로 1998년 129건, 1999년 198건 등 한해 전체건수보다 많으며, 2000년 250건, 2001년 235건에 비해서도 높은 편이다(6월말 대비 2000년 138건, 2001년 119건). 올 상반기에 쟁의가 크게 증가한 것은, 경기 호전으로 조합원의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요구가 높아진데 비해, 사용자의 대응은 예년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금인상률은 경기 호전으로 작년보다 높아지고 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6월말 현재 협약인상률은 2001년 5.7%인데 비해 올해는 6.7%(총액기준)로 1% 높은 상황이다. 민주노총의 경우, 7월18일 현재 총액기준 9.0%의 인상률을 보이고 있다. 6월말 현재 타결률은 38.9%로 2001년 34.6%에 비해서는 높지만, 2000년 47.6%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다. 양대 노총의 집계에 따르면, 상반기 타결률은 한국노총 19.2%, 민주노총은 32.84%로 많이 낮다.
올해도 노조간부에 대한 체포영장과 구속이 남발되었으며, 손해배상 소송 및 가압류 등 법제도의 허점을 악용한 노동자 탄압이 드셌다. 상반기에만 발전노조 15명, 철도노조 10명, 공무원노조 5명, 대우조선노조 5명 등 모두 63명이 구속되었으며, 수배된 노동자도 보건의료노조 16명, 두산중공업 22명 등 85명에 달한다. 여기에 고소·고발되거나 소환장이 발부된 노동자가 1,113명에 이르며, 39개 사업장에서 모두 1,265억 원에 달하는 손해배상청구와 가압류가 이뤄졌다.
올해의 노동쟁의는 노동의 공세보다 국가와 자본의 공세 측면이 강하다. 직권중재 등 노동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업무방해 등 각종 형사범으로 노동운동을 공안 탄압의 대상으로 삼는 현실은 크게 달라지 않았다.
국가의 노동 탄압에 대한 국제 노동계의 항의는 어느 해보다 뜨거웠다. 국제자유노련(ICFTU), 국제노동기구(ILO), 경제개발협력기구-노동조합자문회의(OECD-TUAC)를 비롯한 국제노동조합진영에서 한국 정부의 노동운동 탄압 중지를 촉구하는 시위와 항의성명서 발표가 상반기 내내 이어졌다.
상반기에 쟁의건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쟁의참가자수가 예년에 비해 크게 많지 않은데, 이는 장기파업 사업장이 많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파업사태가 두 달을 훌쩍 넘긴 3개 가톨릭병원, 경희대의료원과 얼마 전 장기파업을 마무리한 인천 택시노조가 대표적이다. 노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용자의 전근대적인 노동관이 직권중재제도 등 노동악법 조항과 정부의 책임 방기 속에서 파업을 장기화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4·2 노정합의'와 민주노총의 혼란
상반기 노사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철도, 발전, 가스 등 공공3사 파업, 특히 전력노조의 파업이었다. 2월25일 공동파업을 시작한 이래 가스와 철도노조의 투쟁은 노사 합의로 마무리되었지만, 발전노조의 경우 정부의 강경책 고수로 협상이 이뤄지지 못해, 공공부문에서는 보기 드문 38일간의 장기파업으로 이어졌다.
발전노조 파업은 국가기간산업 민영화를 반대하는 국민 여론의 지지를 받으면서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뒤흔들었다. 발전노조 투쟁은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의 지원 속에서 한달 넘게 지속되었는데, 파업에서 보여진 폭넓은 사회적 연대는 전력산업이 갖는 국가기간산업으로서의 특수성을 반영한 것으로 기존 공기업 민영화 저지투쟁과 비교해서도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단전 사태, 부실경영의 대명사가 된 엔론 사태, 한국 전력시장을 넘보던 미국 에너지기업의 부정·불법 관행은 전력노조 투쟁의 역사적 정당성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전력노조 투쟁은 4월2일 민주노총의 '노정 합의'로 좌초하고 말았다. 파업 철회, 합의안 파기, 민주노총 임원진 사퇴로 이어진 일련의 사태는 발전노조는 물론, 민주노총의 조직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합의안은 내용을 볼 때 정부에 일방적으로 항복한 것으로 노동조합의 교섭과 투쟁 원칙을 위배한 것이었다. 합의 절차와 과정에서 노조 민주주의는 실종되었고, 합의 과정에서 드러난 교섭지도부의 분파적 행위는 민주노총의 지도력과 민주노조운동의 권위를 총체적 위기로 몰고 갔다. 발전노조 역시 파업 철회에 따른 내부 분란으로 조직적 혼란을 겪었으며, 이런 와중에 이뤄진 현장 복귀는 노조간부와 조합원의 대량징계와 해고로 이어져 노조의 현장동력을 급격히 무너뜨렸고, 임금에 대한 가압류는 조합원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
4·2 사태를 두고 투쟁 우선의 원칙을 위배하고 실리주의에 물들어 가는 민주노조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지도부의 의지나 투쟁력 문제로 그 원인을 돌리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다. IMF 경제위기 이후 민주노총 지도부는 일년에 수 차례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제대로 조직된 총파업은 한번도 없었다. 투쟁을 우선한다는 원칙을 내세운 지도부가 연속 당선되고, 민주노총의 사업 기조가 투쟁 우선이었으며, 실제 민주노총 차원에서 총파업을 계속 조직하려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4·2 사태의 원인을 지도부의 투쟁 의지 부족이나 투쟁력 문제에서 찾는 것은 문제가 있다.
4·2 사태는 개인적인 문제보다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며, 이런 점에서 운동 전반을 반성하고 그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 이것은 기업별 노조체계에 발목잡힌 노동조합운동, 분파의 틀에 갇힌 중앙 지도력, 국가와 자본의 공세에 대한 단조로운 전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투쟁에 대한 편협한 시야, 사회적 차원의 교섭과 투쟁에 대한 원칙 부재 등 민주노조운동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물 건너간 주5일 법제화
경제위기 이후 노동계의 적극적인 공세로 사회 쟁점이 되었던 주5일제가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지난 7월22일 노사정위원회의 주5일제 최종 논의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결국 주5일제는 그 공이 정부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협상이 결렬된 최종 이유는 임금보전 문제였다. 노사 양측은 임금보전 원칙에는 합의했으나, 한국노총은 임금보전 방식을 법 부칙이나 노사정 합의문에 구체적으로 명기할 것을 주장한 반면, 사용자 측은 세부 내용은 개별 사업장이 자율로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집했다. 정부는 공익위원 안을 중심으로 8월 중 법안을 마련해 9월 정기국회에 제출할 예정이지만, 한나라당이 노사정 합의 없는 주5일제 도입에 반대하기 때문에, 법개정은 사실상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주5일제 논의 과정을 살펴보면, 세계 최장 노동시간을 줄여 노동자의 삶의 질을 높인다는 원래 취지는 실종되고, 이 문제가 노사 양측의 힘 겨루기를 통해 조직노동자의 기득권을 뺏느냐 지키느냐의 문제로 전락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표적인 것인 연차휴가와 임금보전 문제다. 노사 양측은 논의 과정에서 비정규직이나 단기근속자의 연차휴가를 줄이는 대신 장기근속자의 연차휴가를 늘리는 모습을 보였다. 또 연장근로 상한과 할증율을 늘리는 등 임금보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노동시간 단축과 삶의 질 개선이라는 취지에서 점차 벗어났다. 특히 상공회의소 회장은 최근 정부의 단독입법 추진 움직임에 대해서 "노는 제도를 국제 기준에 맞추겠다면 국경일이나 경조휴가 등의 제도도 국제기준에 맞추라"는 공개서한을 보내는 등 세계 최장 노동시간을 단축할 의지가 없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로써 1997년부터 추진된 주5일제 법개정은 사실상 무산되고, 주5일제는 기업별·산업별 노사 협상에 맡겨지게 되었다.
주5일제는 외자기업이나 대기업, 제약회사 등에서 일부 시행되다가, 지난 5월 금융노조와 은행장들의 합의를 계기로 제2금융권이나 대기업에 확산되고 있다. 특히 은행권이 노사합의에 따라 7월1일부터 주5일제를 시행한 것은 노동운동의 입장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은행권을 비롯한 사무관리직은 휴가 선호도가 높아 연월차를 대체하고 임금을 일부 보전하는 형태로 주5일제를 도입하고 있다. 이에 반해 생산직은 임금 선호도가 높기 때문에 임금 및 근로조건의 저하 없는 주40시간제를 요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법개정이 무산됨에 따라 개별 교섭을 통한 주5일제 근무는 지불 능력이 있고 노조 투쟁력이 강한 대기업을 중심으로 시행될 것이며, 이로 인한 대기업 노동자와 비정규·영세중소기업 노동자의 격차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지지부진한 공무원노조 합법화
주5일제 협상과 마찬가지로 공무원 노동기본권 역시 1998년 2월 단계별 도입을 노사정이 합의한 사안이며, 김대중 정권이 수 차례 입법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정부가 '공무원조합'이라는 명칭을 고집하고, 노동조합이라는 명칭 사용을 부정함으로써 7월5일 열린 노사정위 상무위원회에서 합의에 실패하고 말았다. 노사정위원회에서 명칭은 '공무원조합'으로 하고 허용시기는 법제정 1년 후로 하되 단체협약 체결권까지 보장하는 1안과, 명칭은 '공무원노동조합'으로 하고 허용시기는 법제정 2년 후에다 단체교섭 협의권만 부여하는 2안을 갖고 막바지 협상에 임하였으나, 노정간에 입장 변화가 없어 교섭은 결렬되고 말았다.
평가한다면, 1998년 노사정 합의에서도 '노동조합 허용'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데다 이미 양대 공무원 노동조합이 법외노조로 출범한 상태에서 공무원조합이라는 명칭을 주장하는 정부의 고집은 과연 노동기본권을 인정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문을 갖게 만든다. 더구나 수년 동안 직장협의회 형태로 공무원 노조가 활동해온 현실에도 불구하고, 굳이 유예기간을 설정한 것은 노동조합 기본권을 부인하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아울러 공무원 노동기본권 문제는 이미 교원노조라는 시금석이 존재한다. 교원노조의 경우 해고자 1,500명이라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합법화되었으며, 교원노조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더구나 협약 체결권이 인정되었다는 점을 볼 때 정부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 우리나라 헌법이 노동3권을 포괄적으로 인정하는 법 체계임을 고려하더라도 협약 체결권 없는 교섭권이란 위헌 소지도 있다.
결국 공무원 노동기본권 관련 법안 역시 행자부가 단독 입법안을 마련하여 9월 정기국회에 상정할 것으로 보여 노동기본권 쟁취를 요구하는 공무원노조들과의 격돌이 예상된다. 정치권이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는데도 법개정에 나설 지는 의문이다. 현재 공무원노조는 민주노총 참관 예정인 전국공무원노조(전공노)와 한국노총에 교섭권을 위임한 공노련(대한민국공무원노조총연합회)이 있으며, 조합원수는 각각 7만 및 2만으로 얘기된다. 두 조직은 공무원직장협의회를 토대로 합법적으로 활동해오다, 노조 전환 후 정부의 불인정으로 반(半)합법 상태로 활동하고 있다. 전공노는 하반기 공무원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해 '총파업에 준하는 총력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으며, 공노련 역시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여 정부 방침에 대응할 계획이다.
여전히 찬밥인 비정규직 문제
한편 노사정위원회 비정규특위는 지난 5월 비정규 노동자의 범위와 통계 개선, 근로감독 강화, 비정규 노동자의 사회보험 확대적용 및 복지 확충 등에 대해 1차 합의를 이뤄냈다. 그러나 내용은 그 동안 사회 문제로 제기되어온 비정규직의 열악한 처지와 현실을 고려할 때 너무나 사소한 내용으로 1년 넘게 논의한 내용이라고 하기에는 창피한 수준이었다.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방도를 내놓기보다는 문제의 초점을 비정규직 규모를 둘러싼 통계 문제로 돌림으로써 노사정위가 비정규직 문제를 개선하려는 뜻이 있는지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보험 적용 확대를 성과로 내세우지만, 이것 역시 일용직 고용보험 적용이나 국민연금의 단계적 확대 등 정부가 추진해온 정책들을 다시 한번 확인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전체 노동자의 60%에 육박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락하는 노사정위원회
노사정위원회는 그동안 김대중 정권의 중요한 치적의 하나로 부각되어 왔다. 그러나 집권 마지막 해인 올해 들어 그동안 쟁점이 되어오던 주5일 근무제, 공무원 노동기본권 문제, 비정규직 보호 방안에 대한 합의를 끌어내는데 실패함으로써 그 위상과 역할에 큰 타격을 입었다. 더구나 핵심 당사자인 민주노총은 참여조차 하지 않아 합의 당사자의 대표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노사정위원회의 추락은 근본적으로 기업별노조체계로 인해 노사관계의 분산성이 심하고, 이런 조건이 거시적 수준의 노사 교섭과 합의를 취약하게 만든 데서 연유한다. 정부 역시 부처별 조정력이 크게 떨어져 핵심 쟁점에서 일관된 입장을 유지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노사정위원회를 노동조합의 실질적인 참여 통로로 보지 않고 구색 맞추기와 면피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정부의 편협한 시각은 노사정위원회를 파행으로 몰고 간 핵심 원인이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강력한 입법추진 의지를 갖고 추진할 사항도 노사정 논의를 핑계로 미뤄지게 되었다. 노사정위원회에 불참하고 있는 민주노총도 사회적 교섭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으므로 지금부터라도 노사정 3자는 사회적 교섭 틀을 어떻게 개편할 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산별노조 건설에서 산별 교섭으로
기업별 노조체계를 산별노조로 전환하는 문제는 한국 노동운동의 가장 큰 과제다. 현재 민주노총의 경우 전체 조합원의 41.1%인 247,458명이 24개 업종 및 산별 노조에 소속되어 있으며, 한국노총도 금융, 한교조, 택시 등 약 15만 명의 조합원이 산별노조에 속해 있다. 아울러 양대 노총 산하 연맹 대부분이 산별노조 전환을 추진하고 있어, 이제 산별노조는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로 떠올랐다. 특히 올해는 산별노조 건설을 넘어 산별노조의 교섭이 주요 과제로 제기되었다.
금융노조의 경우, 그동안 집단교섭의 관행(시중은행과 국책은행이 집단교섭을 진행해왔음), 유사한 노동조건, 노조와의 대립을 기피하는 사용자의 관행, 노조의 의지 등이 작용하여 2000년 통일단협을 체결하고, 올해 주5일제 협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증권사노조도 2001년 업종별협약을 체결하고 올해는 증권업종 차원에서 경총과 교섭을 진행하고 있다. 이에 비해 금속노조와 보건의료노조의 산별교섭은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천차만별인 조합원의 노동조건, 산별교섭 경험의 부재, 교섭대상으로서의 사용자단체의 부재가 주된 원인이다.
더구나 두산중공업의 산별교섭 이탈, 경희의료원과 가톨릭대학병원들의 파업 장기화로 두 조직의 산별교섭 추진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편 전교조는 공립학교의 경우 교육부와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기획예산처의 반대로 합의 사항이 이행되지 않고 있으며, 사립학교의 경우 사용자단체 구성이 법으로 의무화되어 있지만 사용자측의 회피로 교섭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제 산별노조는 시대적 추세가 되었고, 노동조합은 산별교섭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산별교섭은 노동조합의 경험과 역량 부족, 정부와 사용자의 우려와 거부감, 사회적 관행과 경제적 여건의 미숙함으로 출발부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점에서 산별교섭으로의 전환은 보다 많은 창조적 노력과 경험 축적이 요구된다.
민주노동당의 약진
6·13 지방선거는 48.9%라는 역대 최저 투표율에 한나라당의 압승과 민주당의 참패로 끝났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처음 실시된 정당투표에서 133만 표, 8.1% 득표로 자민련을 제끼고 제3당에 올라서는 성과를 거뒀다. 1998년 49명이 출마해 22명이 당선된 데 비해 이번 선거에는 출마자가 219명에 이르렀으며, 비록 울산시장선거에서 패했지만 기초단체장 2명을 포함해 44명이 당선되었다. 특히 민주노총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조합원의 72.2%가 정당명부제 투표에서 민주노동당에 투표하고, 지지정당에서도 55.1%가 민주노동당으로 답변하는 등 계급투표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측면에서 의미 있는 진전이 이뤄졌음을 뜻한다. 한편 한국노총에서도 79명이 출마하여 기초단체장 3명을 포함해 39명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한나라당, 민주당 등 보수정당 후보였다는 점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측면에서 한계가 많다고 지적된다.
혼미를 거듭하는 양대 노총
연례적으로 하반기는 정기국회를 겨냥한 법제도 개선 요구가 분출하는 시기다. 그러나 올해는 정권 말기에다 12월 대통령 선거까지 겹쳐 있기 때문에 법개정이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노사정위원회에서 주5일제 등 법제도 개선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상황에서 정부의 단독 입법이 국회를 통과할지 미지수다. 하지만, 공무원노조가 '총파업에 준하는 총력투쟁'을 공언하는 등 공무원 노동기본권은 하반기에 중요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아울러 정부가 연내 발전회사 1개 매각을 천명하고 가스 민영화 관련법 국회 통과가 예상되는 만큼 민영화 반대투쟁도 11월 노동자대회를 고비로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대 노총은 상당 기간 조직적 혼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민주노총은 8월27일 지도부 보선이 예정되어 있으나, 지도력 공백을 메우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사무금융연맹, 전교조, 보건의료노조 등 대규모 산별연맹의 위원장 선거가 하반기에 예정되어 민주노총 차원에서 투쟁력과 조직력을 집중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한편 한국노총은 비리 의혹이 폭로되고 일부 조직들이 이탈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조직의 통합과 발전을 위해 개혁 특위를 조직했다. 하지만, 선언에 그친 채 실천되지 않는 개혁안을 또 만드냐는 조직 내부의 비판이 만만치 않으며, 제대로 된 개혁안이 제시되고 실천될 수 있을 지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민주노총의 경우 보궐선거에서 기존의 운동기조와 방식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더불어 통합 지도력 형성이 조직적 과제로 떠올랐고, 한국노총의 경우 개혁을 제대로 실천할 지도력이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반기는 '정치의 계절'
12월 대선을 앞두고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법제도 개선 요구(비정규직 제도 개선, 주5일제 근무, 노동기본권 등)를 사회 쟁점으로 만들고, 각당 후보의 공약으로 만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과 연대하여 범진보진영 후보를 추진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노총은 독자정당이냐 정책연합이냐를 두고 논란이 본격화될 것이다. 민주노총 조합원 여론조사에서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를 찍겠다는 응답은 36.1%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1×【?민주노총은 이번 대선에서 조합원의 동의를 모아내고 참여를 확대하는 방안을 집중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노총은 이전의 정책연합이 노동자의 지위 향상과 제도개선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냉철히 C평가해야 할 것이며, 그 속에서 정치 방침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한편 노동운동 일각에서는 '비제도적 정치투쟁' 운운하며, 노동자 대중의 선거 매몰에 경각심을 표하고 있다. 선험적인 관념과 편협한 이념에 근거한 선거거부 전술은 선거가 전부라는 '선거 만능주의'와 동전의 양면이다. 이런 자세로는 대중의 정치 의식을 조금도 높일 수 없으며, 부패와 무능이 판치는 한국의 정치 현실을 바꿀 수 없다. 민주노동당이라는 노동자 정당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노동자의 적극적인 선거 참여는 지배층이 두려워할 일이지 노동운동이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올바른 노동운동은 선거에서도 노동자의 관점을 확대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식으로 편협한 순수주의를 고집하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다. 다양한 영역에서 진지를 확보하는 것은 모든 운동의 기본 전략이다.
'노풍'의 급락과 민주당의 내부 분란은 보수정당이 갖는 역사적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노동자정당의 정치적 진출이 절실한 시점이다. 노동운동이 보수정당의 꽁무니를 따라다니거나, 반대로 급진적 관념론에 사로잡혀 선거를 무시한다면 이는 노동운동의 후퇴이자 동시에 한국 사회의 퇴보를 가져올 것이다. 만약 민주노동당이 이번 대선에서 1백만 표 이상을 얻는다면, 한국의 노동자들은 보수정당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애증이 교차하는 분열된 계급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자립한 계급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