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때 지더라도 …

노동사회

질 때 지더라도 …

admin 0 3,402 2013.05.08 11:13

세네갈의 승리와 '노동계급'

한국과 일본에서 60억 지구인의 축제 월드컵이 열리고 있다. 5월 마지막 날 열린 개막전에서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세네갈이 대회 2연패를 공언해온 프랑스를 격파했다. "우리는 작은 나라지만, 큰 사람이다." 경기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세네갈의 미드필더 카릴로 파디가가 말했다. 돈에 물든 월드컵이지만, 식민지였던 나라가 자신의 종주국이었던 나라를 침몰시키는 장면은 쓰라린 식민 경험을 가진 우리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또한 빈민가 출신의 흑인 선수들이 운동장을 누비면서 포효하는 장면은 잔잔한 감동을 넘어 해방감마저 느끼게 한다. 

원래 축구는 영국의 엘리트 계급이 시작했지만, 대중에 본격적으로 보급된 데는 노동계급의 역할이 컸다. 프로축구팀의 기원은 20세기 초 공장 노동자들의 축구 클럽이었다. 축구 선수로 선발된 노동자들은 점심용 샌드위치를 옆구리에 끼고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대중버스를 타고 일터로 갔다. 어느 영국 노동자가 한국 TV와의 인터뷰에서 "축구는 워킹 클래스(working class, 노동계급)의 운동이다"라고 말한 데서 축구에 대한 열정과 더불어 노동계급으로서의 자부심을 느꼈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월드컵과 한강대교 

80년대 군부독재의 문화 정책을 두고 3S라 부른 적이 있다. 독재정권이 섹스, 스포츠, 스크린을 집중 육성하여 일반 국민의 불만과 두려움을 무마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월드컵이야말로 스포츠의 대명사고, 신문 방송이 축구 이야기로 뒤덮인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이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진 게 사실이다. 아들들의 축재 혐의로 궁지에 몰린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해 부정과 부패에 얽히고 설킨 많은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하지만 힘있고 잘 사는 이들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탄식하고 있다. 

화합과 평화의 인류대축제가 열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노동조합 활동 때문에 감옥에 있는 노동자들이 수십 명이다. 국제노동기구(ILO)와 국제자유노련(ICFTU)을 비롯한 국제 사회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가 자행하는 노동자 탄압에 곤혹스러워 하면서 한국 정부가 노동기본권을 보장할 것을 거듭 촉구하고 있다. 월드컵 기운이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군 5월 말 영풍시그네틱스 여성 노동자들은 거듭 한강대교 철제난간에 기어올라야 했다. 이번 기회에 노조를 없애려는 악덕기업주를 세상에 고발하기 위해….

물신(物神)에 찌든 월드컵이 세계 60억 인구의 축제로 자리잡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다른 나라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부정부패를 저지른 자들은 감옥으로 보내고, 노조 활동으로 감옥에 갇힌 노동자들은 풀어주면 된다. 노동자들이 한강대교 난간에 매달리지 않아도 사장이 교섭장에 나타나면 된다.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 모순과 계급 갈등을 숨기려 하지말고, 공론의 장에서 대화하고, 타협하면 된다. 

민주노동당과 지방선거 

세계인의 축제와 소외된 이의 절규가 공존하는 가운데 6월13일 지방선거를 치른다. 보수정당을 등에 업은 지역 토호들이 판치는 지방 정치를 바꾸고자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인 민주노동당도 민주노총 후보 127명을 포함해 모두 217명의 후보를 출마시켰다(광역단체장 후보 7명, 광역비례대표 25명, 광역의원 후보 66명, 기초단체장 후보 12명, 기초의원 후보 107명). 이는 '국민승리21' 이름으로 40여 명의 후보를 낸 1998년 지방선거 때와 비교하면 다섯 배나 커진 규모며, 한나라당, 민주당에 이어 자민련과 제3당의 지위를 두고 경쟁하는 형국이다. 1998년 선거 결과는 두 명의 구청장(울산 북구, 울산 동구)과 스무 명 남짓한 기초의원이었다. 이번에는 울산 광역시장을 비롯해 그 두 배가 넘는 성과가 예상된다. 특히 처음 실시되는 1인2표제(정당투표제)가 민주노동당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부족한 일꾼과 돈, 일천한 경험, 추상과 원칙으로 나열된 정책, 세련되지 못한 선거 캠페인, 지역 사회에 파고들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도는 공약, 형편없는 인지도, 공허한 이념을 둘러싼 내부 분열, 어쩌면 레드 콤플렉스보다 더 무서울 지도 모르는 국민들의 정치적 허무주의….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문제 목록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은 장족의 성장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히딩크가 말하는 '승부의 세계'

"한국 사람들은 내게 질문한다. '과연 월드컵 16강에 오를 수 있을까?' 그 질문에 '예스'라고 확실하게 말하지 못한다. 승부의 세계에서 확실한 것은 결코 없다. 만약 경기도 하기 전에 승패가 정해져 있다면 스포츠는 존재 의미가 없다. … 세계 일류 팀이 되길 원한다면, 더 강한 팀과 싸워야 한다. 질 때 지더라도 두려움을 떨쳐내고 배우는 자세로 그들과 부딪쳐야 한다. … 국적과 언어와 문화가 다르지만 (한국은) 내가 선택한 나라며, 또한 가능성이 있는 나라다. 남들이 뭐라던 나는 내가 생각한 길을 갈 것이며, 마침내 성공으로 이어질 걸로 확신한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 『텔레그라프』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승부의 세계에서 확실한 것은 없다'. 한국팀이 16강에 오르지 못할 지도 모른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가 앞으로도 오래 동안 묵살될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기대만큼의 열매를 거두지 못할 수 있다. 6월에 펼쳐질 축구, 노사관계, 선거라는 '승부의 세계'에서 이미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질 때 지더라도 두려움을 떨쳐내고 배우는 자세로 부딪쳐야 한다'. 이게 어디 한국 축구선수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랴….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