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시대가 자연사(自然死)하는 일은 없다. 새것의 탄생과 등장에 대해 반동(反動)의 폭력을 휘두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신의 야만적 실체를 드러내는 과정이자, 새것의 정당성을 반증해주는 일이 될 뿐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낡은 세력의 권력이 연장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그럼으로써 역사의 진전이 다소간 지연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역풍도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끝내 막아내지 못하고 만다는 점이다.
대세는 낡은 시대의 종말
오늘날 '대선'이라는 최대의 정치 일정을 앞두고 한국 사회가 보이고 있는 정치적 역동성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교체의 와중에서 벌어지는 공방이며, 구태의연한 세력과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사람들간의 전환기적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형성된 정치공간의 중심에 "노무현"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역사적 요구의 실체와 만나게 된다. 물론 보수정당의 대선 주자라는 점에서 노무현이 담고 있는 내용은 오늘의 역사가 최선으로 기대하는 것만큼의 수준에 미치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다음 시대를 위한 징검다리의 역할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그를 중심으로 한 정치·사회적 현상에서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난 3월, 두 주 동안의 서울 체류에서 가장 강력한 인상을 받았던 것은 한국사회 내부에 정치적 염증과 환멸을 몰아내는 새로운 활기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 과정이 정치적 흥행에 성공하면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노무현"이라는 사회 정치적 현상의 출현을 빼놓고는 설명되기 어려울 것이다. '조직과 돈'이라는 정치 공식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기존 질서에서, 게다가 주류언론과의 밀애(密愛)를 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기 쉽지 않은 정치적 기반과는 다르게 자발적 조직의 후원에 힘입은 그의 대중적 인기의 부상이 정치적 실체로 확인되어 가는 과정은 당연히 한국정치의 개혁적 요소를 강화시키는 쪽으로 가게 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정치의 현실에 좌절하고 절망했던 무수한 서민대중이 그의 대통령 감으로서의 자격에 대해서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해도 이전과는 다른 파격의 현실을 만들고 있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으며, 기존 질서의 홍보전략에 불과한 것이 드러난 이른바 "대세론"의 허구가 깨어져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노무현 현상 앞에서 무너지는 낡은 질서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면서, 서로간에 기선을 잡기 위한 정치적 선전일뿐이었던 대세론에 안주했던 일체의 정치적 시나리오와 대권투쟁을 위한 도상연습이 혼선에 빠지고 말았다. 기존 질서를 유지해왔던 여야 모두에게 이것은 충격이었고,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권 재창출과 정권교체라는 대립항의 해법이 전혀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여야 공히 전열의 재정비라는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것은 곧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는데 적합한 정당구조의 변화와 정치 과정의 일정한 교정을 요구했고, 그로써 그간 표출의 돌파구를 찾지 못한 민의를 수렴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정권장악의 기대를 품을 수 없게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치 과정의 변혁이 곧 정치 그 자체의 내용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정작 논의하고 정치적 결정으로 만들어나가야 할 바를 중심에 놓고 이것을 어떻게 성사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과정에 대한 변화로 나타나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저간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정치 변화는 인기가 떨어진 민주당의 고육책과, 이것이 일정한 효과를 보자 놀란 한나라당의 단기적 대응의 결과라는 측면이 더욱 크다. 즉, 가령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정치적 논의, 사회적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절차, 지역주의의 종말을 가져오기 위한 정책 등을 중심으로 과정상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른바 총수 1인 지배구조의 타파, 민의 수렴 통로의 확대 등은 중요한 민주정치의 장치로서 의미를 갖지만, 그 안에 담아낼 진정한 정치적 목표가 분명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진정한 정치개혁이 아니라 속은 그대로 있고 무늬와 포장만 바꾸는 격이 된다. 게다가 이것이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정치적 요구에 대한 역풍과 결합하면 실로 구태의연한 정황이 재현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냉전특권층을 패배시킬 중요한 기회
노무현에 대한 이인제의 공격이 이러한 정치과정의 개혁과는 별도로, 소멸되어야 할 냉전지형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한국정치가 돌파해야 할 것이 절차적 민주화 못지 않게 그 내용상의 진전이 절박함을 말해주고 있다. 이인제는 4월 초 현재, 한나라당이나 조선일보가 그 동안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해왔던 "이념 검증의 논리"로 노무현을 압박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정치에서 이념 논쟁은 어느 한쪽이 출발부터 불리한 싸움이다. "좌"는 악이고 "우"는 그런 대로 받아들일만 하다는 기본 토대 위에서 상대가 좌라는 것을 단어 하나에서도 입증하려고 든다면 상대는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게 된다. 진정한 좌우 논쟁이 가능한 조건이 아닌 것이며, 이념 선택에 대한 정치적 관용성이 없는 사회에서 이것은 정치적 살해의 의도를 가진 대단히 비열한 수법이 아닐 수 없다. 이인제가 결국 의지하는 보루가 이러한 냉전전술이라는 것은 그가 대권을 잡았을 경우, 이 나라가 어떤 고통에 또다시 처하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대권후보 가능성은 최대한 저지되어야 할 역사적 당위성이 있다.
한나라당의 경우에도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의 정치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구호가 냉전시대의 복귀와 강화라는 것에 머물러 있는 한, 집단지도체제를 받아들이든 대세론을 허물고 새로운 경선 구도로 가든, 아니면 민의를 수렴하는 국민경선제의 확대를 시도하든 결과는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 정치조직의 근간을 지배하고 있는 그 '영혼'이 낡은 시대의 소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들이 주체가 되는 정치는 반동적 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노무현을 빼놓고 현재 격돌하고 있는 이인제와 이회창의 경우, 누가 정권을 쥐는가의 개인적 차이만 있을 뿐이지 다를 것이 없다. 여타 인물들이 한나라당의 경선 과정에 등장하고 있는 추세지만, 한나라당의 기본지형을 바꿀 의도가 없는 한 그것은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인제가 한나라당의 이탈자라는 사실과 관련해서 이것이 그가 한나라당의 이념과 가치에 반기를 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대권후보 가능성이 좌절된 탓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현재 이인제의 행동방식은 그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노무현이 만나고 있는 역풍은 그 개인에게만 몰아치고 있는 역풍이 아니다. 그를 중심으로 해서 한국사회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새로운 역사에 대한 희망이 당하고 있는 현상이다. 노무현으로서는 최대한 중간을 잡아내야 한다는 집권 전략에 의해, 평소 그의 개인적 소신이 있다해도 일단은 '우향우' 행보를 일정하게 하지 않으면 안될 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의 본질적 선택이 될 것인지 아니면 수사적 차원의 움직임이 될 것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겠으나, 한국의 정치현실을 고려할 때 그와 같은 일정한 보수화 전술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책임과 한계가 온전히 그 개인의 몫이 아님은 분명하다.
노무현의 노무현다움을 확보하고, 또 그의 현재적 한계를 돌파해서 역사의 진보라는 대의에 맞추어 그가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치환경의 근본적 변화를 모색하는 일체의 개혁적·진보적 역량의 총동원"이 요구된다. 그래서 노무현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발언들이 우향우의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되거나,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미국에 대한 비판이나 재벌체제에 대한 논쟁, 기득권 질서에 대한 저항적 자세 등이 보다 강화된 자신감을 가지고 표현되려면 대중적 분위기의 변화가 함께 따라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노무현은 날이 갈수록 "본질적으로" 보수화 되는 경로를 거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부담의 가중을 의미하게 된다.
진보진영에 기대되는 유연성과 융통성
노동운동을 포함한 진보진영에서 노무현에 대한 인식과 지지 여부의 문제는 사실 간단치 않다.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배신과 좌절의 경험으로 나타나면서 부정적인 김대중 학습효과가 노무현에게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민주노동당의 독자후보 선출에 대한 패배주의를 강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노무현 현상을 떠받치고 있는 대중의 움직임과 갈망을 신속하게 읽어내고, 이것과 최대한 결합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노동운동은 대중과는 유리된 채 자기 이익만 앞세우는 집단처럼 인식될 소지가 높아진다. 대중들의 움직임은 운동가의 머리 속보다 빨리 진행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 대중의 권리 행사가 이루어질 때 역사는 진전하는 것이다.
실로,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그 시대적 단계가 해결하고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은 어느 정도 제약되어 있고, 그 제약을 지속적으로 뛰어넘으려는 노력이 필요한 한편, 그나마 형성된 새로운 정치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일은 그 역량의 강화를 위해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노무현 현상에 대하여 노동운동이 장기적 관점과 현재의 역사적 국면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토대로 포괄적인 융통성 내지는 유연성으로 대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한국정치의 이념 지형상 노무현 현상으로 대변되고 있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공간의 형성은 민주노동당 자신에게도 중요한 발판이 될 수 있으며, 바로 여기서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전술적 연합의 가능성도 엿보이는 것이다. 노동운동 진영의 정치적 진출이 번번이 좌절되고 있는 것이 답답하고 안타까운 노릇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따져보면 결국 제도정치권에 대한 진입의 통로 마련이 대중적으로 지지 받지 못한 결과다. 이것은 노동운동을 비롯한 진보진영 전체에게 뼈아픈 대목이자, 진보진영의 대중정치력에 대한 깊은 자성의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이다. 노무현 현상을 폭발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는 노사모의 행동방식은 이 나라 정치의 새로운 스타일과 저력의 유형이라는 점에서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노무현이 진보진영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정치적으로 소화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가 미국과의 대응에 있어 우리가 바라는 만큼의 자주성을 견지할 것이라고 소망하는 일도 순진한 정치적 상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조직과 돈, 지역과 학벌, 분단의 정치공학, 즉 봉건적 정치문화와 냉전 체제적 특권구조를 타파하는 일에 노무현 현상이 나름의 기여를 하게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가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해서 갖고 있는 나름대로의 일정한 비판적 시각은 진보진영에게 불리할 것이 없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지지의 대상이지, 과중한 비판으로 좌절시켜야 할 대상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아니다. 이런 면모에서 노무현 현상이 창출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요구와 행동방식, 그리고 그 방향에 대해서 노동운동, 또는 진보진영은 매우 민감하게 파악하고 반응해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중의 갈망에 주목하자
현실의 정치적 역량과 역사적 조건을 염두에 두지 않는 전략의 선택은 진보진영이 그간 어렵게 축적해놓은 성과마저 허물고 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렇게 될 경우, 진보진영은 스스로를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고 말 것이며, 그로써 장래를 도모할 수 있는 교량적 정치 공간조차 유실할 수 있다. 대중의 바다에 떠 있지 않은 배가 어디를 갈 수 있겠는가? 이것은 대중의 의사라면 그저 따라가는 대중추수주의가 아니라, 대중의 갈망을 끌어안고 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끊임없이 이끌고 가려는 노력을 전제하는 것이다.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현실을 무겁게 받아들여 주목하지 않으면, 역사가 기껏 마련한 무대에 서지 않으려는 것이며 굴러온 복을 차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거듭 강조하거니와, 노무현 현상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정세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노력이 요구된다. 그것은 일단 노무현에 대한 엄호로 시작된다. 왜냐하면 그를 공격하는 세력은 진보진영을 공격해온 세력과 동일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현재의 역사적 단계에서 정치적 청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집단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허물어지면, 그만큼 진보진영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파고가 높아지며, 진보진영이 설자리는 또한 그만큼 좁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냉전특권세력들의 공세에 맞서는 "우당적(友黨的) 반격"이 요구되는 시점인 것이다. 이와 함께 노무현 진영이 중간지대를 확보하려는 전술에 대한 집착이 지나쳐 수구 냉전세력의 포섭전략에 말려 들어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견제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 2002년 중하반기에 펼쳐지게 될 대선 공간에서는, 정치과정에 대한 개혁세력, 냉전지형과 특권적 사회경제구조를 타파하려는 진보역량, 한반도의 평화와 자주를 위해 투쟁해온 세력, 한국정치 지형에서 중간을 잡고 있는 합리적 중도보수세력이 모두 결합하여 기존의 낡은 질서를 깨고 새로운 시대를 펼쳐나가는 기회로 삼는 정치적 지혜가 필요하다.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화두는 이러한 결합의 새로운 구조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로 보인다. 특히 이인제나 이회창으로 포섭되지 않는 보수진영의 지식인, 사회계층이 노무현에게 기울고 있는 현상은 그런 의미에서 한국정치의 통합력 제고와 관련해서 주목할만한 현실이다.
전환시대의 전략,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사실, 노무현의 정치역량이 어느 정도 될 것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그 개인에게만 의존하는 정치전략은 매우 위험하다. 뿐만 아니라, 노무현에게서 우리는 실질적인 정치적 내용을 충분히 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기회의 부족이기도 하겠으나, 그가 가진 역량의 한계에서 오는 문제일 수 있다. 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노무현 안에 담을 정치적 내용의 정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는 오늘의 현실을 타파하는데 힘을 기울여 온 모든 운동의 노력을 요구한다. 물론 이것은 노무현 지지를 전제로 삼을 때의 일이다. 그에 대한 지지를 반대하는 견해가 노동 또는 진보진영 내부에 압도적이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논의를 필요로 할 것이다.
노무현 개인의 정치적 성공과 좌절이 이 역사의 현실에서 본질적 핵심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새로운 통로를 개설해나가는 일에 필요한 조건의 하나가 된다는 의미에서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현상을 통해서 드러난 한국사회 내면의 요구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펼쳐나갈 것인가의 문제를 중심에 놓는다면, 그의 성공이나 좌절의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는 지속적인 정치적 열정을 가지고 오늘의 한국 현실을 새롭게 타파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이 노무현 현상에 담겨진 열망의 핵심들을 집권 전략을 위해 배반할 경우, 그에 대한 비판은 준열해질 것이며, 우리는 새로운 정치판을 구상하고 장기전에 들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중요하게 부과되는 질문은 현 단계에서, 노무현 현상 외에 우리가 이를 뛰어넘어 역사를 진전시킬 새로운 정치공간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있다면 다행이겠으나 없다면, 기왕의 대세론에 종말을 선포하고 있는 이 움직임이 냉전형 특권세력의 역습에 그대로 노출되어가도록 놔둘 것인지 깊이 성찰하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실로, 전환의 시대이다. 이 와중에서 우리는 역풍과 싸우며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장악해야 한다. 기회가 쉽게 오는 것은 아니며, 그 기회를 현실로 만드는 일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간만에 정치적 활력으로 소생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열정은 우리 모두에게 귀중한 자산이자 역량이라는 점에서 결코 소홀히 할 일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