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단계 정치적 노동운동의 방향

노동사회

현단계 정치적 노동운동의 방향

admin 0 2,958 2013.05.0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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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8일 경희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임시당대회에서 참가한 민주노동당원들  ▷ 출처:진보정치 ]

1. 문제 제기

노동조합과 노동자 정당이 노동운동을 조직적으로 대표하는 양대 축으로 성장해 온 것은 산업자본주의에서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특히 서유럽의 경우, 정치적 노동운동은 1920년대이래 민주화된 계급투쟁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정당정치의 주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때 이후 지금까지 약 80년 동안 서구 노동자 정당들은 1, 2의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왔다. 우리는 이 현상도 산업자본주의에서 민주 정치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사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정치적 노동운동의 서유럽식 성장을 당연시해 왔다. 따라서 이런 현상이 발견되지 않는 미국은 '예외' 사례로 간주되어 왔고, 아일랜드 노동당의 약세 역시 또 다른 예외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점의 연장선에서 한국 노동운동 정치세력화의 지연 혹은 실패를 "이상한" 현상으로 보아 왔던 것이다. 과연 정치적 노동운동의 조직화와 성장에서 어느 수준까지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현상일까? 

정치적 노동운동의 이념적 특성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혹은 심각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정치적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이념과의 결합은 역사상 어느 정도의 필연성을 지녔던가? 왜 사회주의 이념은 오늘날 정치적 노동운동의 이념적 기초로서의 적실성을 상실했을까? 또 현단계 정치적 노동운동의 이념·전략·정책 대안은 무엇인가? 최근 서유럽 좌파 정당들이 추구하는 "제3의 길"은 그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문제를 감안할 때, 현단계 한국 정치적 노동운동의 이념·정책·전략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까?

한편 정치적 노동운동의 조직적 특성과 동태적 변화 역시 관심을 끈다. 지난 세기 서구 정당정치의 핵심 조직으로 자리잡아 온 대중정당(mass party) 조직은 역사상 정치적 노동운동이 그 조직적 전형을 확립했다. 정치적 노동운동은 왜 대중정당이라는 독특한 조직양식을 추구했을까? 또 최근 서구 정당정치에서 대중정당 조직이 확연한 퇴조 조짐을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와 같은 현상을 고려할 때, 대중정당은 현단계 한국의 정치적 노동운동의 유효한 조직 방식인가?

이 글은 이와 같은 질문들을 중심으로 해서 한국 노동운동 정치세력화의 당위성 여부, 그리고 그 이념과 조직 방향에 관해 기초 성찰을 시도한다. 이를 위해 선진 노동운동의 사례와 경험을 검토하고, 여기에 한국의 특수 상황에 대한 고찰을 결합시켜 바람직한 방향을 도출해 보고자 한다.

2. 노동운동 정치세력화의 당위성

산업자본주의 초기 단계의 가혹한 노동시장 상황은 필연적으로 노동계급의 조직적 대응을 유발했고, 노동권익 보호를 위한 법제도 개혁의 필요성 역시 처음부터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볼 때, 조직 노동운동이 단지 노동시장에서의 조직화에 머무르지 않고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추구한 것은 필연적이었다. 의회주권의 확립과 선거권 확대로 대표되는 민주제도의 확립은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유리한 정치 환경을 제공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노동운동은 보편적으로 개혁·진보 부르주아 세력의 정치 후견 하에 놓여 있었다. 노동자 이익 보호에 대한 이들의 의지와 능력의 한계를 노동자들이 확인하면서 노동계급은 독자적 정치세력을 모색하게 된다. 국가의 노동운동 탄압이 강할수록 노동운동의 계급적, 전투적 성향은 강화되고 이념적 급진성 역시 강화된다. 또 노동자들의 요구를 자본가들이 유연하게 수용하지 않고 이에 배타적 태도를 강화할수록 노동의 정치세력화는 더욱 탄력을 얻게 된다.

선진 산업민주국가 노동운동의 이와 같은 특징에 비추어 볼 때 한국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추이는 선진국 사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분단과 한국전쟁이 가해 온 이념과 제도의 제약이 정치적 노동운동의 성장을 지연시켜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권위주의 정권에서 국가주도형 산업화를 거친 한국에서 1987년 민주개방 이후 지난 10여 년 동안 진행되어 온 조직 노동운동의 변화 방향은 예외라기보다는 오히려 보편적 경향에 더 부합한다.

우선 노태우 정부가 1989년 이후 강화했던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과 자본의 이에 맞춘 비타협적 자세는 보다 계급적이고 비타협적인 민주노총의 조직화를 초래했다. 다음 김영삼 정부가 추진했던 노동법 개정이 결국 반노동적인 방향으로 귀결되자 노동운동은 비로소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본격 모색하게 된다. 그 결과 국가와 자본에 비타협적이고 계급적인 민주노총이 정치세력화를 먼저 주도하고 1997년 독자로 대선을 치른 후, 마침내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이 모든 과정과 계기는 정치적 노동운동의 보편적 성장배경과 대단히 유사하다.

노동시장의 또 다른 정상조직인 한국노총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기성 정당의 정치적 후견에 안주하려는 태도를 여전히 견지한다. 1997년 대선에서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보수세력과 제휴해서 이들이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데 일정 수준 기여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급변한 세계 자본주의 환경 속에서 한국 경제가 좌초하는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가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펼쳤던 신자유주의 정책노선은 실업의 격증과 고용 불안정을 가중시켰다. 또한 실질임금은 삭감되고, 빈부격차는 커졌으며, 노동환경이 악화되는 등 노동자들의 고통이 커졌다. 민주노총의 조기 이탈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가 조직했던 노사정위원회에 끈질기게 남아 있었던 한국노총은 두드러진 소득 없이 부담만 주어 왔던 노사정위원회를 마침내 탈퇴함으로써 이를 좌초시켰다. 한국노총이 현 단계에서 독자 정치세력화를 적극 모색하게 된 것은 지난 4년여의 좌절을 통한 자각의 결과로서 이 역시 선진 노동운동의 보편적 경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1987년 이후 지금까지 노동운동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추진 과정은 결코 한국 사례를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하게끔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노동자 정당에 대한 정치적 지지의 추세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서구 노동자 정당들 역시 정당 조직 후 수십 년 동안 득표율이 대체로 10% 미만 수준에 머물렀다. 1920년대 서구 좌파 정당들이 득표율을 30% 이상으로 끌어올리면서 정당 구도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한 것은 1차대전을 전후해 서구 국가들이 보편적으로 겪었던 특수한 정치·사회·경제 요인들이 중첩된 결과다. 따라서 서구의 이 경험을 기계적으로 일반화해서 노동자 정당의 주요 정치세력화를 필연적인 현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미국에서 노동자 정당이 주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한 것을 굳이 '예외'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1차대전 이후 독립한 아일랜드에서 노동자 정당이 지속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머물러 온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노동자 정당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군소정당에 머물러 있더라도 이것을 기이한 현상으로 간주할 이유는 없다. 

이렇게 볼 경우 1987년 이후 진보적이고 친노동 성향을 띤 정당들이 주요 선거에서 얻은 득표율이 대체로 2%를 넘지 못하는 미미한 수준에 머무른 것 역시 예외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더욱이 이 시기 한국 정당정치의 특성들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첫째,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한국의 특수 요인에서 형성된 보수 독점의 정치지형을 감안해야 한다. 둘째, '보수정당들의 담합을 통한 민주주의 이행'이라는 한국적 방식의 기형성 역시 고려해야 한다. 보수정당들은 새로운 정치세력의 진입을 가로막는 장벽을 견고하게 구축했던 것이다. 셋째, 그 결과 기존 정치세력들이 조장한 지역주의가 강력한 위력을 떨쳐왔다. 이것은 계급균열의 정치적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억제해 왔다.

이처럼 극도로 불리한 정치지형을 고려할 때,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8%를 상회하는 놀라운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제3당으로 부상했다는 것은 정치적 노동운동사의 획을 긋는 일대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비례대표제의 제한적 도입이라는 제도개혁의 긍정적 효과, 3김 중심의 지역정치 및 사당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혐오와 거부, 그리고 현 정부의 반노동적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노동자를 위시한 하층 계급의 반감이 복합 작용한 결과다. 따라서 이 선거는 정치적 노동운동에 정당성을 확고하게 부여했으며, 또 정치적 노동운동 세력 확대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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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8%를 상회하는 놀라운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제3당으로 부상했다는 것은 정치적 노동운동사의 획을 긋는 일대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진은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 출처: 진보정치 ]

3. 정치적 노동운동의 이념·정책·전략 방향

노동운동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서구의 경우 자유주의의 이념적 후견에서 탈피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결과 노동운동은 19세기 서구 자유주의의 이념 대안으로 성장했던 사회주의의 다양한 조류와 결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주적 절차와 방식에 의한 사회주의의 실현이 정치적 노동운동의 이념 목표로 설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의 이념·정책 내용은 지난 80년 동안 대단히 중요한 변화를 거듭해 왔다.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계획경제라는 정통 사회주의 노선은 1930년대 자본주의 위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폐기되었고, 케인즈주의·포드주의·적극적 복지국가가 결합한 수정된 사회민주주의가 이를 대체했다. 그 후 1970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위기는 다시 케인즈주의와 복지국가의 존립기반을 와해시켰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공세로 대표되는 새 경제 상황 속에서 서구 사회민주주의는 1990년대 이후 '제3의 길'이라는 새로운 이념·정책·전략 노선을 제시했다.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이와 같은 이념적 궤적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본격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정치적 노동운동의 이념·정책·전략 노선을 설정하는 데 선진 노동운동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성찰은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할 사실은 서구 정치적 노동운동이 뚜렷한 위기와 쇠퇴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 역사적 시점에 한국 정치적 노동운동은 그 조직화의 첫 걸음마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서구 정치적 노동운동을 이처럼 위기 국면으로 몰아 넣은 구조적 요인들로부터 한국의 정치경제, 노동시장, 그리고 노동운동 역시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생산관계 변화의 가속화, 그에 따른 계급구조의 재편 혹은 파편화, 소위 세계화로 대표되는 초국적 자본주의의 가중되는 압력 등은 한국 노동운동의 이념·정책적 대응을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어렵게 하고 있다.

계급 구조의 파편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현 시점에 노동자 독자노선에 입각한 정통 사회주의의 실현이 민주적 절차에 의한 정치적 노동운동의 이념적 노선이 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사실 선진국 정치적 노동운동에서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1990년대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2차대전 이후 서구 좌파의 이념과 정책과 노선을 사실상 주도했던 케인즈적 복지국가 노선은 어떠한가? 1970년대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이후 격화된 국가 간의 경제적 다툼, 그리고 급속히 심화되는 세계화 경향 속에서 포드주의 생산에 입각한 케인즈주의 복지국가 노선은 국민경제의 경쟁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켜서 재정, 물가, 고용, 국제수지 등 핵심 거시경제 지표를 크게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간주되어 된서리를 맞게 되었다. 대외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한국 경제의 현실을 감안할 때 케인즈적 복지주의의 기계적 답습은 한국의 정치적 노동운동의 이념과 정책 대안이 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뤄진 국가주도 산업화전략으로 한국 경제의 사회안전망 구조가 극도로 취약한 점을 감안할 때 복지정책의 적절한 확대는 당연한 요구사항이 되야 할 것이다.

우파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의 무차별 확산에 대한 좌파의 새로운 대안으로 1990년대 이후 제시된 '제3의 길' 노선을 수용하는 것은 어떠할까? 생산적 복지, 고용안정에 대한 물가안정 우선성 논리의 적극적 수용,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통한 실업문제 대처, 노동조합에 대한 재정적, 정책적 의존 및 영향력 축소 내지는 차단, 세계화에 대한 능동적 대응, 탈물질주의 가치의 적극적 수용, 시민운동 조직과의 조화로운 공존 모색 등이 제3의 길이 제시하는 내용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 상황에서의 적실성에 관해서는 분명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며, 다양한 정책과 노선을 선별 수용하려는 노력이 바람직하다. 

요컨대 서구 정치적 노동운동이 백년 이상 발전시켜 온 이념, 전략, 정책, 노선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성찰이 필요하며, 여기에 현단계 한국 정치, 경제, 사회, 이념 지형을 함께 감안해서 우리의 이념, 전략, 정책을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고려할 한국의 특수 상황들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도 측면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여전히 수많은 개혁과제를 안고 있다. 정치적 노동운동의 성장을 위해서는 이 개혁의 적극적 추진에 노동운동의 힘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선거법, 정치자금법, 정당법의 전향적 개혁이 요구된다. 또 대통령 1인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을 보다 민주적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제도개혁 역시 시급한 실정이다. 과연 대통령제가 노동운동의 성장에 유리한 권력구조인가 하는 문제 역시 심각한 고민과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 

서구 노동운동은 일찍이 이와 같은 정치제도 개혁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 부르주아 세력과의 전략적 연대를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 한국의 노동운동이 직시해야 할 점은 현재 이와 같은 정치개혁 운동을 가장 조직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 시민운동 단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정치적 제도개혁을 목표로 한 시민운동과의 전략적 제휴는 현단계 노동운동이 우선 취해야 할 노선이다.

둘째, 한국 정치의 구조적 이념적 지형, 그리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변화 양태, 노동시장의 상황 등을 감안할 때 노동계급의 전폭적인 정치적 동원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노동운동의 조직적 성장, 득표력 신장을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따라서 보다 계급 연합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토대로 한 정책과 노선 수립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 진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 사회적 민주주의와 경제적 민주주의의 창조적 결합을 모색했던 스웨덴 사민주의의 경험이다. 물론 급변하는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스웨덴 사례를 기계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금물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희생되고 있는 하층계급을 어떻게 묶어서 안정된 지지기반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고, 이를 위한 이념적 슬로건으로 '사회적 시민권', '경제민주주의'는 한국 상황에서 여전히 위력적일 수 있다.

요컨대 현단계 한국 정치적 노동운동의 이념적 지표는 "민주주의"의 제도적·실질적 확립에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 제도 개혁을 적극 요구하고, 사회적 시민권을 확대하고 경제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 마련이 그 핵심이 될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이념·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시민운동단체와의 제휴와 연대 강화, 그리고 화이트칼라를 포함한 포괄적인 임금수령자 계층과 여타 하층계급 사이의 전략적 연대를 적극 모색해야 할 것이다.

4. 정치적 노동운동 조직의 바람직한 방향

역사적으로 서구의 보수, 자유 등 전통적 우파 정당들은 원내정당, 명사정당의 조직적 특징을 띄었다. 반면 노동자 정당들은 의회 밖에서 먼저 조직되었으며, 조직 당시부터 대체로 노동조합과 강력한 연대를 구축한 다음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았다. 이를 통해 당비를 내는 다수의 평당원들의 전국 조직에 기반한 대중정당 조직의 전형을 확립한 바 있다.

역사적으로 대중정당 조직은 ① 자발적으로 재정과 조직 부담을 지려는 대규모의 평당원을 조직 기반으로 삼으며, ② 노동조합 혹은 종교단체 등 시민사회 영역의 지원세력과 긴밀한 제휴체제를 확립하고, ③ 시민사회의 세력의 이익을 대표하기보다는 시민사회 내의 특정 계급 혹은 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와 같은 특성을 지니는 서구 대중정당은 명백히 계급정치의 산물이었다. 즉 서구 시민사회가 20세기 들어서 급속히 계급적 특성을 강화시켰고, 또 그에 따라 계급적 이해관계에 입각한 정치적 대립과 동원화가 강화되어 갔던 서구의 정치적 상황이 대중정당의 발전을 가져 왔던 것이다. 서구의 이와 같은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정당활동에 대한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유발시키는 일차적인 유인은 물질적이라기보다는 이념적이다. 사회계급 간의 격렬한 이념 대립이 대중정당 조직화의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에서 2차대전 후 계급타협의 움직임이 강화되고, 좌우파 정당간의 정책 대결이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의 성장과 더불어 현저히 약화되고, 또 생활수준의 전반적인 향상이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현저히 약화시킴에 따라 대중정당의 조직적 쇠퇴가 가속화된 것도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서구의 좌파정당은 노동계급의 이익보다는 다양한 사회세력의 이익을 골고루 대변하려는 전취정당(catch-all party)의 경향을 강화시켰고, 특정 이념의 실현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선거에서의 승리와 그에 입각한 정권획득 자체를 목표로 삼는 선거 전문 정당으로 변모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필연적으로 정당조직에 대한 노동계급의 참여를 감소시켰고, 또 노동조합과 정당과의 관계 역시 긴밀성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한편 매스미디어의 발달은 거대 정당조직에 의한 정치적 동원화의 필요성을 감소시킴으로써 대중정당 조직의 쇠퇴를 촉진시켰다. 당 재정의 당비 의존도를 서서히 줄여 갔으며, 그 대안으로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확대시켜 왔다. 그 결과 오늘날 서구 정당들은 시민사회와의 연계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약화된 반면, 국가에 대한 정당활동의 의존도는 보다 강화된 소위 담합정당(cartel party) 특성을 뚜렷이 띄게 되었다.

서구 좌파정당 조직의 이와 같은 역사적 변모에 비추어 볼 때 한국 정치적 노동운동의 바람직한 조직적 양태는 무엇일까? 과연 한국의 정치적 노동운동도 서구 좌파 정당이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대중정당 조직의 시대를 앞장서서 개척해 갈 수 있을까?
서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본격적 대중정당 조직의 성장은 기대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수십만, 수백만 당원의 자발적 조직화는 앞서 얘기했듯이 서구 사회에 팽배했던 계급간의 이념적 대결과 대립의 산물이었다. 한국 시민사회에 그와 같은 계급적 대립, 그에 따른 계급적 동원화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자발적 당원화를 토대로 한 대중정당 조직의 발전은 뚜렷한 한계를 보일 것이 명백하다.

더구나 많은 서구 좌파정당들이 그러했듯이 정당 조직의 양적 팽창은 필연적으로 조직의 관료화를 초래한다. 관료화는 조직의 동맥경화를 초래하고 이념·전략의 유연성과 활력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무엇보다 민주성의 희생이라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대중정당을 지향한다는 명분 아래 조직의 무분별한 양적 팽창을 추구하는 것은 현명한 방안이 못 된다.

특히 기피되어야 할 것은 서구 좌파 정당들이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활동하며 팽창시켜 온 현재의 조직기구를 그대로 답습해서 정당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정당이라는 정치조직은 특정 이념의 신봉자(Believers)와 정치경력 추구자(Careerists)들의 혼합물로 채워져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경력추구자의 숫자가 신봉자를 압도하게 마련이고,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정당의 조직기구는 갈수록 팽창되는 경향을 뚜렷이 보여 준다. 따라서 최초 조직은 가능한 한 간결한 모습을 띄는 것이 좋다.

정당의 조직을 모색할 때 또 고려해야 할 요소는 기존 정당들의 조직적 특징이다. 1987년 이후 보수 독점 정치지형 하에서 지역주의가 기승을 부림에 따라 한국 정당들은 소수 정치 엘리트의 사적 소유물로 전락해 갔다. 사실 한국 기성 정당들에게는 명사정당이라는 용어조차 사치스럽다. 한국의 정당들은 자신의 출신지역을 식민지로 만든 소수 정치 엘리트들의 사당(私黨)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들 간의 담합과 대립에 따른 정략적 이합집산은 다양한 사당들의 명멸로 이어져 왔던 것이 지난 십년 간의 한국 정당정치의 주소였다. 이와 같은 사당의 조직적 특성은 그야말로 철저한 비민주성, 전근대적 봉건성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다. 정당의 조직과 기구는 사실상 유명무실하지만, 소유주(owner)가 충성에 대한 대가로 자의적으로 배분해 주는 정치적 보상에 불과하다. 비단 당직 뿐 아니라 공직 후보의 결정 역시 소유주의 의사가 일방적으로 반영되어 왔다. 지역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상황 속에서 공천은 곧 당선이라는 등식이 성립했으므로 공천을 볼모로 한 봉건적 사당정치는 맹위를 떨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정당정치의 이처럼 저급한 수준은 정치적 노동운동이 조직적으로 성장하기에 좋은 여건을 제공하고 있다. 노동운동 조직은 무엇보다 조직의 민주적 특성을 핵심 요건으로 삼아야 하며, 이를 무기로 기성 정당들과 경쟁을 벌여 나가야 할 것이다. 특히 연초에 민주당이 실험했던 국민참여경선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지지의 폭발 현상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고찰을 바탕으로 정당 조직의 바람직한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첫째, 대중정당 조직화의 무리한 추진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당활동에 적극 동참하지 않는 '허수' 당원의 형식적 조직화는 불필요하다. 둘째, 초기 단계 정당의 조직기구는 간결성과 효율성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 또 정당활동의 주도권은 단순한 경력추구자들(careerists)보다 이념적 소신에 입각한 신봉자들(believers)이 행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주요 당직 인선과 공직후보자의 결정은 무엇보다 민주적·참여적 절차와 방식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 만약 충분한 당원 확보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국민참여경선제 도입을 적극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5. 결어: 정치적 노동운동의 일원성

노동운동의 일원성 확립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노동시장의 조직을 분할하고 있는 상황이 한국 노동운동의 조직력 성장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현재 한국의 정치적 노동운동은 민주노총의 적극적 지원을 받고 있는 민주노동당이 사실상 독점적으로 대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노총은 별개의 정치세력 조직화를 모색하고 있다. 만약 한국노총의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어서 정치적 노동운동 역시 조직적 일원성을 상실하게 된다면 그것은 한국 노동운동에 또 다른 불행이 될 것이다. 한국의 정치적 노동운동이 분열되어야 할 사회적 배경과 이념적 요인은 결코 없다. 따라서 조직 분열은 사회적·이념적 필연성보다는 노동운동 세력들 간의 명분 없는 주도권 다툼의 산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명분 없는 조직적 분열과 대립은 정치적 노동운동의 잠재적 지지세력의 실망과 저항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며 노동자 정당의 정치적 동원력을 심각하게 훼손할 것이다. 

따라서 노동운동의 성장을 위해 현재 가장 바람직한 모습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양대 노총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력일 것이다. 그럴 경우 노동조직의 결집된 지지와 지원을 바탕으로 민주노동당은 보다 유리한 입지와 조건에서 예컨대 시민운동 단체와의 제휴와 협력을 모색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노동운동 세력의 이와 같은 단결과 단합을 위한 협의와 조율이 적극 추진될 필요가 있다. 또 그와 같은 협의는 과거 책임을 따지기보다는 보다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이와 같은 시도가 비현실적이라면, 한국노총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모색은 궁극적 조직통합으로 가기 위한 과도적 방편이어야 할 것이다. 정치적 노동운동이 조직적으로 분열되고 반목하기에는 이들이 상대해야 할 보수적 정치세력이 지나치게 강력하다. 모처럼 도약의 호기를 맞은 한국의 정치적 노동운동이 조직간의 분열과 대립으로 또 다시 쓰라린 좌절의 나락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열망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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