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무역은 없다

노동사회

자유무역은 없다

admin 0 3,506 2013.05.08 10:47

지난 3월5일 미국 부시 행정부는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브라질, 독일, 프랑스 등 유럽연합 회원국에서 수입되는 철강 제품에 8∼30%의 보호관세를 물리고 수입량을 한정하는 긴급수입제한 조처(세이프가드)를 발표했다. 3월20일부터 발효한 이 조처는 향후 3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축소된다.

이에 대해 각국 정부는 '자유무역'에 위반되는 보호무역주의 행위라는 공통된 반응을 보였다. 보복 조처 움직임도 두드러지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 철강 보호관세 하루 뒤인 3월6일 국민 보건을 이유로 미국산 닭고기 수입 중단 조처를 발표했다. 러시아가 연간 540만t의 철강을 미국에 수출하고 있다는 점에 비춰 '보복'이라 규정해도 그리 무리는 아니다. 

탈규제? 규제?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4월1일부터 최소 6개월 동안 할당량(쿼터)을 넘는 수입철강에 최고 30%의 단일 관세를 부과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는 "우리가 취하려는 조처는 보복이 아니다"며 "다만 미국의 세이프가드로 타격을 받게 된 중국, 일본, 한국과 같은 나라들의 제품이 유럽연합으로 밀려드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유럽연합 집행위는 미국의 세이프가드로 인해 유럽연합이 받게 될 피해에 대해 요구한 20억 달러 규모의 보상안이 거부되자, 지난 3월12일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외국 항공사들의 유럽연합 회원국에의 이착륙을 제한하고 세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9·11테러 이후 미국 정부로부터 15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은 미국 항공사들을 겨냥한 행동이다. 그러자 미국 상무부는 농업과 반도체 등 다른 분야로 보호 조처를 확대할 수도 있다고 맞장을 놓고 나섰다.

자칫하면 미국의 수입철강 보호관세 부과가 전면 무역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는 셈이다. 진보진영은 이런 사태의 전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고, 어떤 대응에 나서야 할까. 이 사태는 노동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이번 사태가 글로벌 노동정치를 위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세계 철강산업은 글로벌 수요 관리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 현실적 경로는 '초국적 단체교섭', 곧 글로벌 산업 차원에서 자본과 노동의 교섭이 될 것이다. 한발 양보한다고 해도 최소한 자본간 전면전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꾀해질 '자본의 공산주의'에 노동이 개입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세계 철강산업의 문제는 일국적인 전망에서 풀릴 수 없으며, 노동이 여기에 머물 경우 필연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자유무역'의 논리를 더욱 다그치는 계기로 악용될 뿐이다. 더욱이 그것은 '미국 너희들이 헤게모니를 계속 발휘하려면 철강산업을 개방하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철강산업 분야에서 글로벌 노동정치의 개입은,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지적한 "역사적으로 주어진 임금의 재교섭"이란 맥락에서 초국적 단체교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로벌 좌파 케인스주의'의 정책적 함의로 이어진다. 현재의 철강산업 사태에 대한 글로벌 노동정치의 개입은 산업 내부의 규제된 경쟁 환경을 창출하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보호관세는 '보호무역주의'인가

먼저 하나의 질문을 던져보자. 국내 진보진영이 미국의 철강 수입제한 조처를 '보호주의'라는 잣대로 비판하는 것은 과연 옳은 것일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수출입의 비중이 70%로 위기 이전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아지는 등 소규모 개방경제라는 현실적 조건에서, 한국이 자유무역 원칙에 따라 미국 정부와 철강 노동자를 비판하는 것은 정당한 관점인가.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자본이 지금까지 이용해 온, 위선에 찬 '자유무역' 논리로 미국 철강 노동자를 비난하는 우스꽝스러운 행위라고 판단한다.

실제로 이런 관점은 최근의 '반미' 분위기에 맞물려 국내에 전반적으로 퍼져 있는 게 사실이다. 「한겨레」의 경우 지난 3월7일치 사설 '미국의 부당한 긴급 수입제한'에서 "미국이 외국업체가 불공정 행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우선 여기서 해결책을 모색했어야 하는 것이 순서"라며 지적하는 등 그나마 맥락을 잘 짚고는 있다. 하지만 역시 '자유무역'의 논리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 사설은 "미국이 긴급 수입제한 조처를 취한 것은 다른 나라를 압박해 자기 나라 철강업체의 문제를 풀려는 떳떳치 못한 처사다. 미국 철강산업은 전반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져 외국 업체에 맞서기 어렵게 돼 있다. 따라서 철강산업이 경쟁력을 회복하려면 구조조정을 해야 하나 그러지 않았다. 그래 놓고는 그 부담을 긴급 수입제한이란 형태로 외국 업체에 떠넘기려 하고 있는 것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국 철강산업이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나, 다른 나라로 떠넘기려 한다는 것도 사실과 아주 다르다.

미국의 철강 긴급수입제한 조처를 비판하는 자유무역 잣대의 논리는 대충 이렇다. △ 철강산업의 일자리 3500개를 보호하기 위해 소비자는 20억 달러의 추가 부담을 져야 한다(「로스앤젤레스타임스」 3월6일치), △ 철강가격은 평균 5∼10% 오를 것이고, 철강산업에서 보호되는 일자리 한 개당 차, 트럭, 농장 설비, 산업 기계, 가정용 기기, 가구, 섬유 등을 생산하는 산업들에서 일자리 10개가 없어질 것이다(「워싱턴포스트」3월7일치), △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경제논리를 무시하고 철강산업노조와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일리노이, 인디애나, 메릴랜드, 웨스트버지니아 등 철강벨트를 상징하는 주들의 표를 의식한 행위이다, △ 미국 철강업체의 침체 원인은 수입철강 때문이 아니라 자체 구조조정에 실패한 철강회사들의 고질적 병폐에 있으며, 수입규제 조처는 근본 해결방안이 아니다 등등.

먼저 필자는 미국의 보호관세 부과가 "국내 산업이 수입 증가의 결과로 심각한 타격을 받을 위협에 놓일 경우, 정부가 무역장벽을 세우는 것을 허용한다"는 내용의 무역법 제201조에 따른 국민국가의 정당한 권한 행사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법 조항은 우리나라에도 있으며, 산업자원부에서 애초 "미국의 조처는 무역기구가 용인하는 '자국 산업의 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범위를 벗어난 과도한 조처로 보인다"고 언급한 것도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미국 부시 정권 스스로가 보호관세 부과를 보호주의라고 규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인 로버트 죌릭은 "정부의 조처는 자유무역 목표들과 일치하며, 세계화의 일부 지나침을 치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세계 철강생산에서 해외 각국들의 광범위한 개입이 미국 철강업자들에 치명적일 정도로 수요-공급의 힘을 왜곡했다며 "철강 시장에서 경제법칙은 작동하지 않으며, 현실은 철강업이 공정한 기반 위에 경쟁하고 있지 않다. 실제로 미국 철강업자들은 경제원리 때문이 아니라 각국 정부 정책 때문에 경쟁적인 불이익에 놓여 있다"고 설명한다. 곧 미국 정부는 '불공정'(unfair) 무역이 '자유'(free) 무역을 해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미국철강노동자도 강한 달러의 희생자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 철강산업과 철강노동자의 과거와 현재, 곧 실상이다. 우리에게 미국연합철강노조(USAW)는 40%의 수입관세 부과를 요구해 온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이 내세우는 주장의 핵심은 이것이 아니다. 미국연합철강노조는 전 세계에 미국 정부가 강요해 온 '자유무역' 체제가 철강가격 침체를 낳고 있으며, '강한' 달러가 이를 부채질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고평가된 달러가 미국 철강산업 침체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며, 미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등을 통해 강요하는 긴축정책과 금융자본 중심의 투자자유화가 세계경제 침체와 이에 따른 철강수요 감소 및 가격 하락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진보적 싱크탱크인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공동소장으로 있는 딘 베이커는 "20∼30% 고평가된 달러는 국내에서 생산된 철강에 비해 수입 철강에 20∼30%의 보조금을 주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고평가된 달러는 두 가지 경로로 영향을 준다. 하나는 세계 철강시장에서 미국 제조업체들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다른 하나는 외국인 투자자금을 미국으로 끌어들여 강한 달러를 유지하게 한다.

'강한' 달러를 포함해 미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등을 통해 수출한 세계적 긴축정책이 미국 철강산업 침체를 낳는 근본 원인이라면, '개별 기업 단위의 고용에 기반한 의료보험'은 미국 철강산업의 경쟁력을 가로막고 있는 직접적 원인이다. 현재 미국 철강업계는 60만 명에 이르는 퇴직 철강노동자와 그 부인에 의료보험비 등 '상속비용'(상식적으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 비용의 역사적 배경은 1980∼1990년대 구조조정 과정에서 철강업체를 떠난 노동자를 위한 사회보장(?)이다)을 지급하고 있다. 상속비용의 사회화는 미국연합철강노조의 또 다른 핵심 요구이다. 130억 달러에 이르는 이 상속비용은 미국 철강업계 재편과 구조조정을 어렵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현역 철강노동자는 15만 명에 불과하다는 점에 비춰, 상속비용 부담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는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 대학 교수 등 미국 경제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바다. 노조는 '개별기업 단위의 고용에 기반한 의료보험'이 철강산업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핵심 원인이기 때문에, 세금으로 충당되는 전국적 의료보험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시 정권은 노조의 이런 요구는 외면한 채 오는 11월 중간선거 승리를 위해 보호관세라는 것만 받아들였다. 철강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진짜 필요한 조처는 외면하면서 선거용 생색만을 낸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부시의 보호관세 부과는 '위선'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부시의 정책을 '위선'이라고 비판하는 다른 차원의 논리도 있다. 존재하지도 않는 자유무역의 논리를 내세워 다른 나라에게는 개방을 강요하면서 자기 나라의 문턱은 높이는 '위선자'라는 비판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는 부시의 '위선'이라기보다 오히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강요되는 '자유무역'이란 이데올로기 그 자체가 위선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80년대 미국의 경제정책과 철강업계 구조조정

1980년대 초 레이건 정권이 들어서며 미국의 경제정책은 '거대한 반전'을 겪는다. 복지주의·규제주의 국가에서 시장화와 탈규제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이전에 가격 경쟁으로부터 보호됐던 미국의 은행 시스템은 시장력과 합병에 노출됐다. 자본은 뉴딜형 노사관계를 공격하고 나섰다.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던 폴 폴커는 당시 미국 정책 결정자 사이의 분위기를 "세계경제의 통제된 해체가 1980년대의 정당한 목적이었다"고 설명했다. 1979년 10월6일 폴커는 그 해 달러가 두 차례나 기업, 은행, 투자자 사이에서 지급준비 통화로 기피되는 일이 벌어지는 등 달러에 대한 '신뢰의 위기'가 발생하자, 통화량을 대폭 줄이는 대대적 긴축에 나섰다. 이에 따라 은행간 단기금리의 기준이 되는 연방기금금리(FFR)는 1980년 4월 연 19%, 1981년 1월 연 20%를 기록했다.

이런 폴커의 정책은 레이건 정권에서 지속됐다. 레이건 정권은 한편으론, 인플레이션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긴축통화정책과 고금리를, 다른 한편으론 수요를 자극하기 위한 수단으로 군비 지출을 대폭 늘리는 확장재정정책을 폈다. 그 결과 달러 가치는 급등했고, 미국 무역적자는 급속히 심화했다. 미국의 고금리 정책은 상품 가격 폭락과 함께, 많은 부채를 지고 있던 중남미를 흔들었다. 이것이 중남미의 "잃어버린 10년"의 근본 원인이다.

무역적자가 너무 심하자 미국은 일본의 경쟁력을 하락시키는 수단으로 엔화 강세를 부추긴다. 이것이 1985년 '플라자 합의'다. 그 뒤 미국의 수출은 회복됐고 무역적자는 완화했다.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선진7개국은 1987년 루부르 협정을 통해 플라자 협정을 조금 완화시켰다. 플라자 합의에 따른 인위적인 엔화 강세로 일본 대기업들은 동아시아 진출에 박차를 가했고, 국내에서 대기업이란 고객을 상실한 일본 은행들은 돈을 굴릴 곳이 마땅치 않자 부동산 등 자산시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자산거품은 1991년 터졌고 그 이후 일본은 10년이 넘게 장기침체에 허덕이고 있다.

1994년 미국과 일본 정부간에 이뤄진 엔 약세와 달러 강세에 암묵적 합의를 이룬 이후 강한 달러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2000년부터 2001년까지 12차례에 걸쳐 연방기금금리를 연 2%로 낮췄음에도 이에 상응해 달러 가치를 내리는 데는 실패했다. 그 원인은 1995년 이후 주기적인 위기로 점철된 세계경제에서 미국 경제가 담당하고 있는 최후의 피난항 역할 때문이다. 9·11 테러 이후 부시 정권의 적극적 군사주의는 이 테러로 인해 미국 경제의 헤게모니가 흔들리고 불안정성이 깊어지면서, 이것이 결국 강한 달러의 연착륙이 아닌 경착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극심한 위기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달러도 법정 불환 지폐인 이상, 궁극적으로 달러의 힘은 미국의 힘에 달려있다. 하지만 이 힘은 미국이 갖고 있는 몇 가지 별도의 근거들에 의존한다. 좌파 케인스주의자인 게리 A. 딤스키 캘리포니아 대학 교수는 지난해 10월 발표한 '미국 경제는 중력의 법칙을 피할 수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달러의 힘을 뒷받침하는 별도의 근거들은) 미국의 군사력, '분쟁지대'로부터 떨어진 미국의 지리적 위치, 미국 경제의 엄청난 규모와 미국 금융시장의 정치함과 상대적 개방성, 꺼리기는 하지만 부유한 자산을 소유한 이민자들을 최소한 수용하려는 미국의 의지와 일자리 창출 능력, (유럽연합이나 일본과 같은) 확실한 대안의 쇠퇴 등이 그것이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달러의 신뢰위기'를 낳을 수 있는 힘들이 쌓여가고 있다. 그 하나는 소비 지출을 유지하고 부채를 계속 빨아들일 수 있는 미국 가계의 능력, 이에 따른 세계경제 '최후의 소비자'로서 미국 가계의 지위가 의심할 여지없이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경제의 피난항이라는 미국 경제의 지위가 결과하는 강한 달러가 연간 3천억∼4천억 달러에 이르는 무역적자를 낳고 있고, 이 추세는 쉽게 반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스스로를 '자유무역'을 신봉하는 케인스주의자라고 부르는 폴 크루그먼까지도 지난해 8월 「뉴욕타임스」에 실린 칼럼에서 '1985년 플라자 합의'를 선례로 들며 강한 달러에 대한 인위적 하향 조정을 촉구했다. 크루그먼이 다른 나라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그의 논리 밑바탕에 '미국 예외주의'(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9·11테러는 강한 달러의 연착륙 가능성을 날려버렸다.

자유무역은 보편 규범이 아니다 

이런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며 미국 철강업계는 문자 그대로 '엄청난' 구조조정을 경험했다. 1980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 철강업계가 구조조정을 위해 투자한 돈은 자그마치 600억 달러에 이른다. 이 기간 중 국내 수요는 39% 증가했지만, 철강생산 능력은 15% 축소됐다. 전체 철강노동자의 56%인 243,600명이 해고됐다. 앞서 언급한 이른바 '상속비용'은 노조가 구조조정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퇴직자를 위한 사회보장 차원에서 요구한 것을 사용자들이 받아들인 결과이다. 이런 구조조정의 결과, 미국 철강산업은 철강 1t을 생산하는 데 드는 시간이 64% 하락해 유럽이나 일본과 견줘도 손색이 없을 만큼 생산성이 향상됐다는 게 미국 철강업계와 노조의 주장이다.

그런데도 미국 철강업계는 동아시아 금융위기 직후인 1997년 이후 4년 동안 업계 전체의 33%인 31개 업체가 파산했다. 특히 2000년 3분기 이후 철강업체 파산이 가속화했는데, 이는 있지도 않은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며 1999년 6월부터 2000년 5월까지 연방기금금리를 1.75%포인트 올린 연준의 통화정책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국내 수요가 39% 증가했지만, 미국 시장에서 차지하는 수입철강의 비중은 1990년 18%에서 1998년 32%로 높아졌다. 높은 달러 때문에 값이 싸진 수입 철강이 미국 국내 철강을 급속히 대체한 것이다. 유럽연합 집행위가 4월1일부터 보호관세 30% 부과의 뜻을 밝히며 "우리가 취하려는 조처는 보복이 아니다. 다만 미국의 세이프가드로 타격을 받게 된 중국, 일본, 한국과 같은 나라들의 제품이 유럽연합으로 밀려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우려한 것은 정확히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현실이었다는 얘기다.

물론 파산한 미국 철강업체들의 상당수는 철광 원석을 최종재로 가공하는 '종합' 생산업자이다. 미국 내부에서도 이 업체들은 철 조각들을 재순환시키는 '미니' 철강업체들에 시장을 빼앗기고 있다. 미국 철강산업 자체의 구조조정 필요성을 부인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는 미국 철강 노사 모두 인정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앞서 살펴보았듯이, 문제의 핵심은 미국 철강산업 내부에 있지 않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이런 측면에서 국내 진보진영은 각 국가가 부과하고 있는 보호관세가 그 의도와 무관하게 왜곡된 세계화가 빚는 부정성에 대한 국민국가에 정당한 권한 행사라는 성격을 띤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철강산업의 문제는 위선에 찬 자유무역이 아니라, 국민국가를 매개로 한 정치의 등장이라는 얘기다. 이 정치에 노동정치 또한 포함돼야 함은 물론이다. 현실의 '자유무역'은 문자 그대로의 자유무역이 아니라 투자자를 '보호'하는 각종 조처들을 국제화·규범화시키는 위선에 찬 과정이다. 미국 철강노동자는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무역 논리에 기대어 보호관세 부과를 바라본다면 글로벌 노동정치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봉쇄되고 만다. 자유무역은 보편적 규범이 아니라 각국 실정에 맞는 실용주의적 원리로 사고돼야 한다.

'자유무역' 대 '노동의 정치'

찰스 킨들버거는 1937년 '국제 단기자본 운동'이란 글에서 '세계경제는 그 안정을 위해 하나의 헤게모니 국가(미국)를 필요로 하고, 이 헤게모니 국가의 통화(달러)가 특권을 지니는 것은 당연하며, 다른 국가들도 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유명한 논지를 펼쳤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니 (올해 1월1일 유럽연합 단일통화인 유로의 공식 유통에 따라)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면, 강한 달러에 바탕한 지금의 미국 경제는 무대를 세계경제로 하는 '대마불사'나 마찬가지다.

강한 달러가 연착륙보다는 경착륙을 향해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동시적 전복'이라는 유토피아적 기획이 당분간 여전히 불가능하다면 미국 철강노동자를 포함해 각국 철강노동자의 고통을 줄이고 미래를 꿈꿔볼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어야 할까. 미국 예외주의에 바탕한 불공정한 '대마불사'를 더 이상 불가능하게 하는 것, 그 시작은 난무하는 보호관세 부과가 낳는 의도되지 않은 가능성에 글로벌 노동정치가 개입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투자자만을 위한 과정에 그치고 있는 자유무역의 자리에 '정치'를 갖다놓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미국은 아마 생각하기도 싫은, 그러나 이미 부분적으로 현실화하고 있는 끔찍한 시나리오를 추진할 것이다. 미국에게 강한 달러의 경착륙을 막는 유력한 방법의 하나는 대안이 없도록 하는 것, 결국 대안이 가능하지 않도록 다른 국가와 지역의 성장 수준과 속도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관리하는 것이다. 1980년대 달러가 맞은 신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미국의 경제정책 반전이 중남미에 "잃어버린 10년"을 가져온 것은 그 한 예이다. 지난해 12월 이후 아르헨티나 경제의 몰락을 미국이 수수방관하며 지켜본 배경에, 중남미 역내 경제협력체로 성장할 수 있는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를 깨고 미국 주도의 미주자유무역협정(FTAA)을 관철시키기 위한 미국의 국가안보적 전략 때문이었다는 지적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