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노동사회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admin 0 3,260 2013.05.08 10:39

 


book%20%281%29.jpg 3·1 절을 맞아 일부 국회의원들이 708명의 친일파 명단을 발표했다. 명단에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비롯해 좌익독립운동가를 탄압했던 김석원(대한민국 국군 창군 멤버), 김창룡(창군 멤버, 보안사 전신 특무대장) 같은 일본군 출신 국군 고위층, 김성수(고려대 창립자, 동아일보 사주), 방응모(조선일보 사주), 현제명(‘희망의 나라’로 작곡가), 홍난파(‘고향의 봄’ 작곡가), 김활란(이화여대 총장) 같은 대표적 지식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일제의 날개 아래 둥지를 틀고서 부와 권력과 명예를 보장받으며 동포의 고혈을 빨아댄 자들에 대한 청산 작업이 반세기를 훨씬 넘겨 이제야 공론화되기 시작하는 이 ‘변태적이고 엽기적인’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책에 나오는 “현대 한국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43년~1953년 십 년을 알아야 한다”는 브루스 커밍스의 말이 ‘변태와 엽기’가 버무려진 한국 현대사라는 수수께끼의 힌트를 준다. 현대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반세기 전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

일제에서 해방된 1945년 8월 중순부터 ‘남조선’ 방방곡곡에는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기 시작했고, 그 해 9월6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출범했다. 이를 주도한 세력은 여운형, 안재홍 등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였고, 좌우파를 막론하고 민족독립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경향각지의 지도자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1945년 9월8일 진주한 미군은 불행하게도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탄압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같은 해 12월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미군이 보기에 조선인민공화국은 ‘공산주의’ 세력이었고, 이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인 밑에서 고위직에 올랐던 조선인들은 친일파로 여겨지고 있으며, 옛 주인만큼이나 대중들의 증오를 받고 있다. 모든 그룹이 일본 재산을 차지하고, 조선에서 일본인을 몰아내고, 독립을 즉시 쟁취한다는 공통된 생각을 갖고 있는 듯 하다. 조선은 선동가들을 위해 완전히 무르익었다. 정치 상황에서 가장 힘이 되는 유일한 요소는 연배가 지긋하고 좋은 교육을 받은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서울에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임시정부’의 귀환을 바라고 있으며, 다수를 차지하지는 않지만 가장 큰 단일 그룹이다(1945년 9월15일 H. M. 베닝호프가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 

미군은 조선에 진주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일단의 무리를 만날 수 있었는데, 김성수, 그의 동생 김연수, 조병옥, 윤보선, 장택상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일제 치하에서 동포를 탄압했거나,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배자에 빌붙어 입신양명하면서 제 한 몸의 안위를 도모했던 인물이다. 

이들은 미국의 강력한 지원 속에 1945년 9월16일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만들었다. 이들은 애초 반공이라는 이유만으로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를 지지했으나, 임시정부가 국제적인 승인을 얻지 못한 단체임이 드러나자 임시정부 지지를 철회했다. 한민당은 친일파 지주, 자본가들이 모여 좌익세력이 주도한 ‘인민공화국’ 반대를 목표로 결성되었으며, 반공국가 건설 및 대소전진기지 확보라는 자신들의 대한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파트너가 필요했던 미군의 후원을 받았다(김영삼과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한국 야당의 역사적 뿌리 역시 한민당이다). 

미국과 친일파가 세운 나라  

그 해 10월16일 이승만이 맥아더 전용기를 타고 조선으로 날아왔고, 나흘 후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일반에 이승만을 소개했다. 강력한 반공주의자라는 정치 신념을 배경으로 이승만은 한민당 인사들과 더불어 미군정의 정식 파트너가 될 수 있다. 같은 해 11월23일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은 개인 자격으로 조선에 돌아왔지만, 좌우 요인에 대한 암살, 신탁통치 반대 시위 조직, 우익 쿠데타 시도 등의 이유로 미군의 지원을 받진 못했다. 김구가 가진 극단적 민족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미군정은 불신했던 것이다. 

“조선반도 남부는 공산주의 수립에 대단히 비옥한 토지가 될 수 있다”고 미군 사령관 하지는 생각했고, 이를 막을 목적으로 한민당 세력 중심의 친일파를 보호 육성했다. 그리고 반공친미국가를 방어할 물리력으로 군대와 경찰을 창설했는데, 이들 국가기구 역시 친일파와 우익으로 채워졌다. 일본 동경의 연합군최고사령부는 조선의 경찰이 “철저히 일본화되고 폭압의 도구로 효율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정확하게 보았지만, 미군정은 10월21일 친일경찰을 중심으로 경무국(현 경찰청의 뿌리)을 출범시켰다(출범 당시 경무국 고위급에는 이번 친일파 명단에 포함된 자들인 경무국 2인자 최경진, 충북청장 강보형(일제 전북 순사교습소장), 공안국장 한종건(일제 평남 경찰부 보안과장)이 눈에 띤다). 

친일파가 득세하는 ‘변태’의 역사는 대한민국 국군에도 마찬가지였다. 미군정은 1945년 11월13일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이듬해 1월15일 남조선 국방경비대를 창설했다. 그 핵심에는 정일권(만주군 헌병 대위 출신, 3군 참모총장 역임), 백선엽(만주군 장교 출신, 육군참모총장, 교통부장관 역임), 이응준(일본군 대좌 출신, 초대 육군참모 총장, 체신부 장관 역임), 신태영(일본군 장교 출신, 제3대 국군참모총장 역임), 김석원(친일파 명단에 포함된 인물로 일제시절 김일성의 빨치산부대를 뒤쫓았으며, 일본군 대좌를 지냈고, 한국전쟁 당시 1사단장 역임)이 있었고, 일본군 출신의 젊은 세대였던 박정희,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 (노태우 시절 국무총리를 지낸) 강영훈 등도 신진세력으로 참여했다. 

무산된 친일파 청산 

한반도의 분단을 사실상 결정지은 1948년 5월의 단독선거로 출범한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특별법을 제정하여 1948년 10월1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하고, 11월 25일에는 반민특위의 하부기관 설치를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조직법을 제정하였으며, 중앙사무국을 두고 각 도에 조사부를 설치하여 일제잔재 청산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군정과 친일파의 후원을 등에 업고 대통령에 오른 이승만은 친일파 경찰간부들이 체포될 단계에 이르자, 1949년 6월6일 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 사무소를 포위해 반민특위 소속 특경대를 강제해산하면서, 반민특위를 무력화시켰다. . 

이로써 “일본 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 및 모의한 자, 일본 정부로부터 작(爵)을 받은 자, 일본 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 일본 치하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독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또는 그 단체의 수뇌간부로 활동하였던 자, 군대·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업을 책임 경영한 자, 관공리 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 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 본부의 수뇌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자, 종교·사회·문화·경제 기타 각 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 데 협력한 자”(반민족행위처벌법 제1장 죄)에 대한 처벌은 물 건너가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친일파가 만든 남한의 친미반공국가체제는 더욱 튼튼해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비분강개한 해방공간의 시기는 이 책에서 일부에 불과하다. 현대사를 중심으로 멀게는 고조선부터 가까이는 북한 핵개발을 둘러싸고 북미간에 긴장이 고조되었던 1994년의 전쟁임박 상황까지 5천년이 넘는 우리 민족사가 브루스 커밍스의 ‘비판적인’ 시각으로 분석되어 있다. “이제는 통일되고, 위엄있는, 현대적인 한국을 상상할 때”라는 커밍스의 바람은 부시의 ‘악의 축’ 발언과 친일파 명단 발표가 어우러지는 2002년 3월이라는 시점에 우리 모두가 생각해볼 문제로 다가온다. (창작과비평사/3만8천원)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