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학살

노동사회

한국에서의 학살

admin 0 4,542 2013.05.08 10:38

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는 재미있는 미술평론이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수상작은 정광균의 {피카소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에 대한 편견}이다. 여기서 이 평론을 선택한 조선일보의 정치적 맥락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피카소의 이 그림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강정구 교수의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의 책표지로 사용되었다. 피카소의 그림이 상징하는, 아이를 가진 여인을 군인들이 학살하는 장면에 대해 그림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두고 각기 다른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피카소가 그림을 그리고 제목을 {MASSACRES EN COREE}라 하여 사인을 한 날이 1951년 1월18일이라는 것이다. 곧 어떤 연유든 한국에서 학살이 있었다는 것은 진실인 것이다. 그것이 미국에 의한 북한 신천지역의 학살이든, 전쟁에 고통 당하는 여성들의 모습이든, 아니면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이라는 생물학적 해석이든 상관없이 전투원이 아닌 민간인에 대한 군인의 학살이라는 전쟁과 폭력을 고발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우리곁의 사실들

2002년 2월20일 현재 국회에는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사건에대한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등에관한법률'이 의원입법으로 발의되어 있다. 이 법안의 주된 내용은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민간인학살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국회에는 이 법안 외에도 전쟁을 전후해 일어난 학살문제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피해자들과 지역 시민단체들의 입법청원이 10건 이상 접수되어 있다. 이제 한국전쟁은 종전 반세기를 맞이하고 있는데, 이미 50년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에 와서 고통스럽고 혼란한 과거를 들추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학살(genocide)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최근에 담론으로 부상하고 있는 정치주제다.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이 제노사이드에 해당되느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1944년 렘킨(Raphael Lemkin)은 Axis Rule in Europe에서 제노사이드(genocide)는 그리스어 genus(종족, 부족)과 라틴어 cide(죽이는)에서 결합된 단어라 하였다. 렘킨은 제노사이드를 그들 집단자체를 말살시킬 목적으로 민족(국가) 조직들의 삶에서 핵심이 되는 토대를 파괴하는 여러 행위들의 조정된 계획을 말하고, 그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능력이 아니라 국가집단의 구성원으로서 개인들에 반하여 규제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넓은 범위에서 학살은 정치적, 사회적 학살을 포함하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학살을 제노사이드의 한 범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 학살에 대한 접근은 사회 일반의 인권의식 신장과 더불어 남북한 이데올로기 대결의 약화가 큰 지렛대가 되었다.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비록 형식적이지만 제노사이드 방지에 관한 협약이 이루어졌고 유엔을 중심으로 국제인권법에서 학살을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로 규정해오고 있다. 특히 뉘른베르그 전범재판은 그것이 2차대전 승전국에 의한 패전국의 재판임에도 불구하고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최근에는 서방세계의 국제정치적 이해이긴 하나 유고전범인 밀로세비치에 대한 전범재판이 열리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근대국가의 조직적인 학살이다. 그것은 대규모 국가권력의 동원과 궤를 같이하는데 전쟁이나 비상사태와 같이 인간의 권리가 무시되는 조건에서 발생한다. 

학살을 만드는 정치체제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반도에서는 통일국가 건설을 둘러싼 사회갈등과 정파간 대립이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번지고 있었다. 남한과 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은 하나의 땅에서 전혀 다른 상호적대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와 같은 정부수립의 주요한 원인에는 38선을 중심으로 남북한을 점령한 소련과 미국의 냉전주도권 다툼이 있었다. 그 틀에서 정권을 차지하려는 이승만의 노선은 남한의 국가구상이 자유민주주의 체제건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미반공을 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되기 전 제주도에서는 4·3사건이 발생해 수 만의 섬마을 주민이 죽게 된다. 현재 특별법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제주 4·3사건은 진상조사기획단에서 유족들의 신고를 접수받아 진상규명 작업에 들어갔다. 모두 1만5천여 명에 달하는 피해자가 신고를 했는데 국군과 경찰에 의한 피해자가 80%를 넘는다고 한다.

정부가 수립되고 10월19일 여순사건이 터지자 정부측 진압군은 무리한 토벌로 애꿎은 주민들을 가담자로 처리해 즉결처분거나 국방경비법으로 탄압하였다. 당시 사건의 주모자와 지방좌익들 대부분은 벌써 지리산 일대로 옮겨갔음은 물론이다. 곧이어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좌익활동을 뿌리뽑기 시작한다. 이듬해인 1949년에는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해 좌익사상범들의 선도보다는 반정부 인사들의 관리를 전국의 시, 군, 면단위까지 확대해 나간다. 또한 빨치산 작전이 태백산지구와 지리산 지구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국군에 의한 학살이 전쟁전에 시작된다. 

1949년 12월24일 성탄전날에 경북 문경석달 마을에서는 국군 제3사단 25연대 3대대 7중대 병력 70여 명이 석달마을의 24가구 127명의 주민 중 86명을 별다른 이유 없이 학살하였다. 피해자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32명, 여자 42명, 65세 이상 노인 10명을 포함해 5세 미만의 영유아까지 11명이 죽었다. 석달마을의 비극은 남상순의 소설 {흰뱀을 찾아서}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사건의 피해자인 '언니'의 삶을 통해서 작가는 당시 현장에서 천운으로 살아난 실제인물을 그리고 있다. 이 사건은 당시 미군의 공식보고 문건으로 한국군에 의한 학살 사실과 지휘관, 피해자의 전모가 밝혀졌다. 하지만 사건의 책임부서라 할 수 있는 국방부에서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응답이 없다.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소리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정책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과 학살

한국전쟁이 터지자 제일 먼저 반정부인사들에게 삶의 고통과 생명의 위협이 찾아들었다. 굳이 '인사'라고 할만한 사람들은 대부분 월북한 상태였지만 겉으로나 속으로나 이승만 정권에 협력하지 않으면서 정부의 통제속에 있는 사람들이 학살의 표적이 되었다. 전쟁당일(서류형식상) 내무부 치안국은 장석윤 국장 명의로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형무소 경비의 건] 전통문을 각 지방경찰서로 보낸다. 그리고 [불순분자 구속의 건}(6월29일), [불순분자 구속처리의 건](6월30일), [불순분자 검거의 건](7월11일)에 관한 내용이 치안국장 명으로 하달된다. 이러한 서류들은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에 직접 관계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은 근래에 와서 지역의 기자들과 현대사 연구자들에 의해 피해규모가 밝혀지고 있으며, 국민보도연맹원 중앙조직의 결성과 배경 등에 대해서도 논문이 생산되고 있다.

형무소의 재소자에 대한 학살은 아직까지 공식기록으로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피해자와 목격자의 증언으로 볼 때 학살은 전국의 형무소에서 이루어졌다. 전쟁 당시 형무소의 재소자 일원일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학살의 징표는 수감인원의 급작스런 감소다. 뿐만 아니라 1960년 국회의 학살조사에 의하면 대구형무소 재소자 1,402명의 명단을 확인한 상태다. 이 명단에는 신원이 확인된 제주 4·3관련자 200여명이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사형을 언도받지 않은 수감자들이었는데도 학살당했던 것이다. 최근 새로운 증언으로 김천, 전주형무소의 학살이 사실로 나타났다. 

미국과 유엔군의 참전, 9·28 서울점령으로 이전의 남한지역이 다시 정부의 통제속에 놓였다. 이 과정에서 강화도 갯벌에서는 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해서 인민군 점령 때 그들을 도왔다는 혐의로 주민들이 죽어 나갔고, 경기도 고양 금정굴에서도 역시 우익청년조직인 치안대와 태극단에 의해 주민들이 학살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 반공주의를 포장한 보복이었던 것이다. 11월 이후 학살은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을 대상으로 한 후방의 작전지역에서 발생한다. 주로 11사단에 의해서 저질러진 학살은 전북 남원에서 함평, 나주, 화순, 경남의 거창, 산청, 함양 등지에서 부지기수로 벌어졌다. 

미군에 의한 학살 역시 피해자들의 민원이 급증하고 있다. 국방부에는 캐나다군에 의한 사건을 포함해 54건이 접수되었고 주한미국대사관에는 60여 건이 넘는 사건이 제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미공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한 폭격과 기총소사로 피난민에 대해서 작전지역내 방어선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이미 AP통신이 발행한 『노근리 다리』에서 미국측의 문건을 통해서 밝혀졌다. 결국 현장 지휘관의 책임아래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해 사살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세상을 살 때는 기억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현재의 것은 과거로부터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다.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말하지 못하였고, 그네들의 과거를 애써 감추어야 했다. 정부 수립이후 이 땅의 정권은 학살문제를 공개하거나 언급하는 것을 금해왔다. 그나마 1960년 4·19 직후 1년여의 시간을 제외한다면 학살문제는 우리 현대사에서 잘려나간 역사다. 

이제 학살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정부의 공식답변, 정책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부에서는 지난 2000년부터 학살 문제에 대한 업무지침서를 만들어 일부지역과 사건에 한해 이미 조사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국방부는 자료조사를 공개해 달라는 유족과 시민단체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 진상규명을 위한 공정한 조사인지 의심을 받고 있다. 이미 노근리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정부는 어떤 경우라도 국가권력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전쟁 상황의 불가피성, 양비론으로 그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며 작전의 정당성을 이유로 피해자들의 학살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국회에서 민간인학살에 관한 각종 입법청원과 법안에 대한 행정자치위원회의 심의가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벌써부터 국회의원들 사이에서는 민간인 학살문제가 이데올로기 시비로 번질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학살 문제를 사상투쟁으로 왜곡해 몰고 가는 것은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시민사회 형성에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상규명은 물론이고 멀쩡한 사람까지 사상범으로 내모는 데에 반공만큼 확실한 무기는 없기 때문이다. 의원들이 피해자들의 요구를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다만 이 문제의 진상규명이 정부와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시작되면 몰고 올 파장을 뻔히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유족의 삶을 바로 세우고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국가의 책임을 물어 제도를 개혁하는 것은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과정은 지난 현대사를 다시 써야하는 하는 중요한 일이다. 학살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것이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오늘의 정치체제를 바꾸고 인적청산을 가져오는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공세의 그 몹쓸 폐단은 지난 반세기 동안 겪어야 했던 유족들의 목소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00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주최한 '금요일의 문학이야기'에서 소설가 이문구는 자신의 과거지사를 털어놓았다. 충남 보령이 고향인 이문구는 해방 후 좌익할동을 한 선친이 남로당에 가담해 군 총책을 관리하다가 6·25를 맞았다. 그리고 선친으로 말미암아 하루아침에 온 집안 남자들이 모두 학살되어 버렸다. 그는 10살 때부터 빨갱이 자식이라는 멍에를 안은 채 외롭게 자라야 했다. 전시에 있었던 군민대회나 궐기대회에 동원되어 시위를 벌일 때면 '빨갱이의 씨를 말리자!'하고 외쳤다고 한다. 이문구는 "열 두세 살짜리 소년이 빨갱이의 씨를 말리자하고 악을 쓸 때는 '내가 나를 죽이자'고 악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그는 열 살 때부터 자신은 언제 죽을까 하는 생각만 머릿속에 남아 있었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어떻게 하면 안죽을 수 있나 하는 생각만 가득했다고 한다. 학살로 인한 충격은 정신병리의 일종으로 질환이다. 그것은 인간을 황폐화시킬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사회관계를 이루지 못하게 한다. 분단과 전쟁으로 반세기 넘게 그랬던 것처럼.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