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 자본주의, 우리의 대안인가

노동사회

미국식 자본주의, 우리의 대안인가

admin 0 5,571 2013.05.08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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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2002. 9. 12(목)  
·곳: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

·사회: 김태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
·발표: 이찬근(인천대교수)   
·토론: 조준상(한겨레신문 기자)
·후원: Global Network

·정리: 이명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편집차장 
lee@klsi.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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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조준상 기자, 김태현 부소장, 이찬근 교수 ]

발제문: 이찬근

분식회계 사건의 실상

미국 분식회계 사건을 보면 상당히 치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엔론, 월드콤, 제록스의 분식회계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엔론은 저수익 자산을 회사 임원에게 고가로 매각해서 이익을 가공창출했고, 월드콤은 비용축소로 이익을 짜냈습니다. 제록스는 단기리스로 빌려준 것을 매출로 위장회계 처리를 한 경우입니다. 미국회계의 특성은, 투자자들에게 기업정보를 투명하게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수입과 비용 발생을 기간별로 처리하는 발생주의 회계를 취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의 문제점은 발생한 수입과 비용을 자의적으로 판단해 처리할 수 있다는 겁니다. 미국 상장사 대부분의 분기별 이익 실현치가 전망치를 약간씩 상회되어 있다는 점은 분식회계가 관행화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회계제도는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이익집단과 제도가 밀착되어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영국은 채권투자자의 입장을, 프랑스는 국가의 세수확보를 중시합니다. 독일은 관리(원가)회계를 중시합니다. 미국은 금융자본의 우세에서 자본시장 참가자에게 신속한 정보전달을 중시하는 자본시장회계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1980년말 성립된 국제회계기준은 시가주의회계, 연결회계, 현금흐름(cashflow)회계라는 3대 원칙에 입각해 있습니다. 이 회계기준은 애초 일본의 기업계열체계를 깨기 위해 도입된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 제도는 IMF 위기 이후 한국의 재벌체계를 파괴하기 위해서 한국에도 도입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계열사간 상호지분보유구조를 해체시키는 것은 시가주의 회계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갑시다. 1972년에 설립된 미국의 재무회계기준위원회(FASB)는 막대한 기준심사 자금을 대기업 기부금으로 충당하기 때문에 먹이사슬 관계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일례로 스톡옵션은 정상적 월급 이외의 월급이므로 비용으로 처리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결국, 미국의 세무·회계제도는 기업이 합법적으로 비리를 저지를 수 있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복합기업집단(conglomerates)이 붐을 이루었습니다. 복합기업집단은 인수와 관련된 영업권 계리가 불필요해 이익압박이 없었으며, 인수자산이 낮게 평가되어 향후 이익목표 달성에 기여하게 되었죠. 결국, 이 집단의 성행은 미국의 거대기업들이 수익성 저하를 극복하는 방안이었고 이를 세무와 회계제도가 지원했던 것입니다.

좀 더 미국 금권자본주의의 실상을 파헤쳐 봅시다. 타이코(TYCO)의 최고경영자(CEO)인 코즐로우스키(Kozlowski)는 2002년 6월 세금포탈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타이코는 엔지니어링 회사로 출발해서 GE급의 복합기업으로 부상한 곳입니다. 200여건에 달하는 인수합병으로 기저귀복에서 최첨단 해저 광케이블까지 총망라하는 기업이죠. 타이코는 지난 10년 간 경쟁적 기업인수로 사세를 확장합니다. 10년간 연 20%에 달하는 주식버블을 이용해 주식교환방식으로 인수자금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는 기업을 고가로 인수하고 막대한 영업권을 계상했습니다. 총인수가액 240억 달러 중 200억 달러가 영업권 자산으로 처리됐습니다. 

인수후에는 다운사이징과 스프링 로딩(spring loading)기법으로 이익을 실현한 것입니다. 스프링로딩은 GM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방법입니다. 대우자동차의 실적을 낮게 평가하여 손쉽게 인수하여 이익을 챙기는 방식이죠. 타이코는 주식버블의 붕괴와 함께 채무변제가 불가능해지자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이코 사례는 CEO 혼자 가능했던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증권거래위원회(SEC)는 타이코의 스프링로딩 제보를 받았으나 무혐의 처리했고, 이사회의 한 이사는 인수합병 컨설팅 대가로 1천만 달러를 받았으며 모든 이사진에게 스톡옵션이 제공되었습니다. 언론도 코즐로우스키를 최우수 CEO 25명 중 한 명으로 선정했으며, 월가는 사회적 책임이 강한 경영자로 칭송했었습니다. 

이제 하나의 질문을 통해서 오늘 주제의 핵심으로 들어가 봅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은 도덕성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미국 자본주의의 체제적 모순입니까? 

부시는 “사과 궤짝엔 이상이 없다. 몇몇 썩은 사과가 문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현재 미국의 회계 개혁은 투명성(transparency)과 책임성(accountability)에 대한 처벌규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자기규제(self-regulation)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관점인데, ‘윤리경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국은 1997년의 위기이후 지난 5년간 미국식 경제개혁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방금 살펴보았듯이 미국식 자본주의에 구조적 모순이 있다면 그간의 개혁은 적극적으로 재검토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미국식 자본주의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최소한 ‘작은 안전장치’라도 고안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회계부정사건이 구조적 모순인지 아닌지를 전후 미국 자본주의에 대해 재조명함으로써 알아봅시다.

왜 구조적 모순인가

미국 경제 발달사는 포드주의황금기(50~60년대), 경제위기(60~70년대), 신자유주의시대개막(70년대말~80년대말), 글로벌 신자유주의체제 완성(90년대초~90년대) 그리고 2000년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세계 자본주의 GDP의 45%를 점유했던 포드주의 황금기는 한마디로 ‘경영자 자본주의’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경영자가 현금흐름(cash flow)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죠. 주주의 경영자 지배가 미약했던 이유는 주식시장의 약 90%가 개인투자자로 협상력이 취약했고, 적대적 M&A 시장이 없어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높은 실물이익으로 주주에게 최소한의 적정 배당금이 지급되었고, 이익이 유보가 되더라도 높은 성장률로 인해 정당화될 수 있었습니다. 슘페터적 산업조직 체제는 지속적 기술혁신과 생산성 향상을 견인했고 챈들러적 기업조직 혁신은 일자리를 보장함으로써 노사타협을 가능케 했습니다. 또한 케인즈적 거시경제정책은 저금리에 의한 산업투자를 촉진시키고, 정부는 재정지출에 의한 적극적 복지정책을 펼쳤습니다. 당시는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으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한 상태였습니다. 기업금융은 설비투자와 연구·개발(R&D)투자로 간주되었고, 기업재무는 일종의 내부자본시장기능의 역할을 했습니다. 

60년대 말부터 미국은 경제위기에 들어서는데, 독일과 일본이 산업발전을 통해 미국의 이윤을 잠식하자 이윤율이 하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의 기업들은 자본집약적 산업의 특성상 과잉설비투자에 따른 부담에 부닥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투자확대가 불가피했습니다. 미국의 기업들은 위기 탈출전략으로 복합기업(conglomerate)을 추진하지만 노조와 정치권의 반발, 회계·세무 재규제등의 장벽으로인해 실패합니다. 

1971년 미국의 고정환율제 포기와 변동환율제 채택은 금리의 자유변동을 유인하는 것으로 금융 투기화 조건을 형성했습니다. 이와함께 1973년 금융파생상품시장이 본격 개막됩니다. 

이때, 경제학 분야에 ‘주주이익 극대화’론이 등장합니다. 이른바 ‘대리인 이론'(agency theory)입니다. 대리인 이론은 주주-경영자의 관계가 주인-대리인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의 이익극대화를 위해 통제를 받아야 할 대리인인 경영자가 기업내부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인해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경영자를 감시하기 위한 제도로 사외이사제와 스톡옵션을 두고 경영자를 주주이익을 극대화시키도록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경영자는 기업의 단기실적과 주가관리자로 지위가 하락됩니다. 

다른 한편 석유위기와 함께 케인즈 경제학은 퇴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석유위기로 발생한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을 케인즈 경제학으론 설명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은 하이에크나 프리만같은 신자유주의자들이 학계를 장악하게 되고 경제위기를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여 발생한 위기로 간주합니다. 

70년대말과 80년대는 무척이나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미국이 산업자본주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이동한 시기’이며 신자유주의 시대가 개막한 시대입니다. 과거의 중앙은행은 실물자본의 원활한 흐름을 조정하는 역할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금융자본의 입장에서 중앙은행의 이 역할은 자신들의 이익극대화와는 큰 연관이 없었습니다. 금융자본에게는 실질금리가 최우선이었죠. 이제 중앙은행은 금융자본의 요구에 맞춰 인플레이션 억제를 최고의 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연방준비이사회 새 의장에 취임한 폴 볼커(Paul Volcker)는 강력한 반인플레이션정책과 통화주의정책을 펼침으로써 금융자본에게 금융정책에 개입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해줍니다. 

알다시피, 당시는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집권하고 있었습니다. 양 정부는 규제완화와 민영화, 소득세 인하, 인금인상 억제와 노조파괴 정책과 행동으로 신자유주의의 토대를 마련합니다. 전세계적으로 IMF와 세계은행이 중심이 되어 개발도상국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주입하기 시작했으며 우루과이 라운드를 통해 농업, 금융, IT시장의 개방을 유도합니다. 당시는 금융자본의 수탈체제가 가시화됩니다. 그리고 투자등급 이하의 고위험-고금리 채권인 정크본드(junk bond)시장이 활성화됩니다. 기업합병 및 인수 붐이 일면서 관련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으로 활용하여 발행규모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기업이윤 중 금융시장에 돌아가는 비중이 50년대의 30%에서 70%까지 상승하게 됩니다. 이처럼 많은 이윤을 금융시장에 주기 위해서는 당연히 실물자본 재투자를 줄이고 기업은 다운사이징 시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90년대초는 미국 경제가 불황에 시달릴 때입니다. 불황으로 미국 내부에서 소화할 수 있는 자금은 얼마 안되었고 월스트리트의 자금은 해외로 빠져나갑니다. 이때 바로 신흥시장론이다, 이머징마켓이다 하면서 한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와 멕시코등이 주목받았습니다. 그러나, 1994년 멕시코위기로 국제자금의 미국환류가 시작되어 1997년 동아시아 위기로 인해 이 추세가 더욱 강화됩니다. 월스트리트는 자금이 넘쳐나고 주가버블의 조짐이 발생합니다. 9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신경제론은 넘쳐나는 월스트리트의 자금에 돌파구를 열었습니다. 신경제론은 그리스펀의 진두지휘하에 IT산업발전으로 인플레이션없는 경제성장이 가능하다며 주가버블의 조짐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모든 자금은 IT산업에 투자되었습니다. 주가버블에 의해 기업부문은 과잉부채와 과잉투자의 결과를 낳았고 가계부문도 과잉부채와 과잉소비 현상을 낳았습니다. 또한 주가상승으로 다시 인수합병이 활개치기 시작했습니다. 

1970년대의 인수합병과 이후는 성격을 달리합니다. 70년대는 실물자본주도의 인수합병이었다면 80년대 정크본드시기부터 현재는 금융자본주도라 할 수 있습니다. 90년대의 인수합병은 주가버블을 이용하는 방식인데 기업의 수익률이 하락할 경우 인수합병을 통해 보전을 하는 방식입니다. 월스트리트의 생리상 인수합병이 발표되면 기업의 주가는 상승하게 되고(Announcement Effect), 이것을 통해 이익을 누리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인수합병은 주가의 끊임없는 상승곡선을 그리게 되죠. 

2000년대는 90년대의 주가버블 때문에 미국 경제가 파탄을 겪게 되는 시기입니다. 실현수익과 실현이익을 무시한 투자와 IT혁명의 파괴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함에 따라 2000년 3월 닷컴기업의 주가버블은 파열합니다. 2001년 9월11일 사태로 미국 증시는 다시 한번 곤두박질칩니다. 주가하락으로 과잉설비·과잉투자·과잉부채에 빠진 기업들이 위기를 맞고 서두에 살펴보았듯이 분식회계로 위기를 극복하려 하지만 실패하게 되죠. 2001년 말 엔론(Enron)부터 시작된 분식회계 스캔들은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럼, 미국의 분식회계를 잉태한 구조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우선은 미국경제가 금융투기화와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배하는 구조로 이루어졌고, IT 신경제론으로 주식버블이 유도된 점, 마지막으로 경영자가 주주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금융’에 있는 것입니다. 환율과 이자율이 자유변동제로 변화함에 따라 금융은 외환, 주식, 채권시장 모두에서 투기를 일삼게 되었던 것입니다. 1999년 파생금융상품 시장의 규모가 약 120조 달러에 달하는 점이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비은행 금융기관이었던 연기금이나 뮤추얼펀드, 보험도 직접금융화되면서 이들간의 성과경쟁이 치열해지고 이들도 투기화되기 시작합니다. 

아글리에타는 미국을 금융주도적 축적체제로 분석했습니다. 금융이 폐쇄공간에서 스스로 가치를 재생산하는 구조를 갖고 있으며, 1970년대 이후부터 계속해서 위기가 닥치면 새로운 활로를 만들어 금융주도 체제를 이어갔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은 현재의 위기를 돌파할 새로운 활로를 개척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의문점은 이러한 금융주도적 축적체제가 무한정 지속가능한가라는 점입니다.

분식회계 사건의 파장: 연금문제

1998년의 LTCM의 분식회계 사건과 2001년의 엔론(Enron)사건을 대조하여 살펴봅시다. 우선 LTCM은 선진국 국채와 러시아 국채간의 가격차이를 이용해 투기를 벌인 헤지펀드입니다. 이 기업은 미국의 안보전략 상 러시아에 국가부도가 없을 것이라는데 착안해 사업을 벌였다가 빗나가자 미국 채권시장을 붕괴 위험에 빠뜨린 사건입니다. 당시 LTCM에게 자금을 빌려 준 은행이 너무 많아 금융위기를 우려한 미국 정부는 시장개입을 하지 않겠다던 방침을 변경하여 36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엔론의 파산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이와는 대조적이었습니다. 파산할 경우 600억 달러의 부실채권이 발생하는 심각한 사태였지만 연방준비은행과 정부는 팔짱을 낀 채 어떤 개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엔론의 파산이 미국 금융시스템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엔론에 대출한 은행들은 이미 자산유동화기법(ABS, CBO)등으로 대출채권 부실화 위험을 덜어낸 상태였으며 그 피해는 연기금, 뮤추얼펀드, 보험사들이 고스란히 떠 안았습니다. 결국 궁극적인 피해는 연금 가입자등 소액투자자들에게 돌아갔습니다. 두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은행권은 불특정 다수에게 위험을 전가시켰고, 금융 당국은 이같은 ‘위험의 사회화’를 금융시스템의 안전성을 유지하는 메커니즘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엔론은 산업자본의 금융그룹화라는 새로운 추세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산업자본은 속속 그룹으로 변신하고 있고, 대기업의 재경부문은 종래의 전략지원기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이윤센터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엔론사태는 대출은행의 도덕적 해이도 보여줍니다. 엔론의 부채는 당초부터 대단한 고위험 부채였는데 대출은행들은 위험의 사회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이용해 충분한 대출심사없이 자금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대출은행들은 자산유동화 채권을 무리없이 소화시키기 위해 세계굴지의 은행을 파트너로 참여시켰고 메릴린치와 같은 투자은행을 세일즈로 내세워 채권이 투자등급인 것처럼 포장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위험의 가능성을 알고 있던 대출은행들과 엔론의 대주주들 그리고 그 위험을 모르고 투자한 연기금, 뮤추얼펀드들간의 비대칭성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회사의 부실이 공개되기 전에 대출은행과 대주주 그리고 경영진은 투자에서 손을 뺏지만, 자사 주식과 채권을 매입한 종업원과 연기금, 뮤추얼펀드의 소액투자자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습니다. 엔론사의 연기금을 관리하는 Trustee는 엔론 경영진의 영향에 장악되어 있어 종업원들에게 자사 증권에 투자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었습니다. 401k 플랜(개인적립형 기업연금)에 따른 엔론사의 연기금도 58%나 자사주식을 매입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피해는 고스란히 종업원들의 몫이 되었습니다. 아글리에타는 연기금을 평가하면서 ‘연기금자산은 임노동자 계급의 소유가 아니라 사용자에 의해 압출되고 관리되는 기금이다’라는 비판을 거세게 했습니다. 엔론사태는 영미형의 연금개혁이 민영화와 자본시장 운영을 요체로 함으로써 그 공정성과 타당성에 큰 타격을 입힌 사례입니다. 

영미식 연금개혁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과거의 공적연금은 세대별 부담으로 젊은 세대가 선배 세대의 연금부담을 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령인구비율이 증가하면서 재정부담이 발생할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공적연금을 축소하고 기업연금과 개인연금의 비중을 높이자는 연금개혁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런 취지로 개인적립형 기업연금(401k)이 도입되었습니다. 401k는 개인명의로 연금계좌를 개설하고 취업기간 중 회사와 개인의 공동부담으로 기금을 적립해 포트폴리오 투자를 운영함으로써 노후 생계비를 저축하는 방식입니다. 정부는 참여기업과 개인에게 세제혜택을 부여하여 401k를 권장했습니다. 영미형 연금개혁의 근본 정신은 자신의 노후생계비는 스스로 저축을 통해 개인이 책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입니다. 미국 노동자는 401k에 찬성할 이유가 없었으나 1980년대의 주가상승으로 스스로 투자자가 되어 돈을 불릴 수 있다는 생각에 설득을 당한 것입니다. 

금융자본에게 연기금 추진은 상당한 매력을 지닙니다. 공적연금의 세대간 방식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으므로 투자의 형태로 전환한다면 새로운 사업분야가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정부의 재정적자는 바로 인플레이션과 금리상승을 유발하므로 금융자본에게 가장 불리한 상황을 초래합니다. 따라서 재정적자 감소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려고 합니다. 현재 미국 연금개혁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미국 자본시장 내에서 연기금과 뮤추얼펀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35%에 달합니다. 한국은 아직 국민연금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2015년이면 노령화에 따라 자금이 없어질 것이라 예상됩니다. 정부는 돈을 불리기 위해 주식투자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엔론사태처럼 신자유주의에 바탕한 연금개혁은 새로운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연금문제가 공적연금의 재원충당 문제에서 발생했다면 반드시 미국식 연금개혁이 유일한 길은 아닙니다. 기타 외국의 연금개혁논의 중 영국의 로빈 블랙번이 제안한 ‘주식기부세(share levy)'는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스웨덴의 임노동자기금과 유사한 성격의 사회적 기금 확보방안인데, 각 기업이 연간 이익의 10~20%를 신규발행해서 공공사회보장기금에 기부하여 미래의 연금 부족분을 충당하자는 것입니다. 

신규발생 주식은 5년 간 매각을 금지시키므로 주가와 회사의 현금흐름에 부담을 주지 않으며 소비자에게 부담을 전가하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적 기금 확보방식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큽니다. 이렇게 조성된 사회기금을 사회적 형평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지역사회개발, 노령화사회대비, 재취업프로그램, 교육 및 의료부문 지원 등에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일자리 창출과 관련되어 큰 의미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현재 유럽의 시민사회단체가 주도하고 있는 토빈세 운동은 신자유주의 진영에서 금기시되는 공공 재원의 확충을 의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시각 전환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도 토빈세나 사회적 기금 같은 새로운 세제 도입이 절실히 필요하며, 민주노동당이 제안하는 부유세는 이런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갖습니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문제점

이제 정리를 하도록 합시다. 저는 미국식 자본주의가 ‘이탈모델(exit model)'이라 생각합니다. 이탈모델은 자유방임주의를 이데올로기로 하는데, 기업이 맘에 들지 않으면 주주, 종업원, 소비자가 즉시 이탈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비효율적 자원배분이 개선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탈모델은 이동성을 강조하는 모델로 신자유주의와 일맥상통합니다. 미국이 이탈모델에 편향적으로 의존한 것은 막대한 자원과, 무한한 기회, 지정학적 안정성이란 특수한 조건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탈모델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완전경쟁의 극히 이상적 가정을 하고 있습니다. 완전경쟁상황이라면 이탈을 선택한 누구나 다른 기업을 찾을 수 있지만 오늘날과 같은 독과점체제가 지배적인 상황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독과점기업은 초과이윤을 누릴 수 있으므로 비효율성을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는 여유가 있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는 큰 부담이 됩니다. 따라서 독과점체제에 늘상 존재하는 비효율화와 부실화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압박 프로그램이 필요한데 이것이 ’발언(voice)'메커니즘입니다. 

이탈모델의 파행성에 대해서 좀 더 살펴봅시다. 이탈모델의 기업지배구조는 주주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합니다. 주주는 이탈권뿐만 아니라 1970년대부터 지배구조개혁을 통해 얻은 발언권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는 두 권리 모두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합니다. 노동시장유연화는 이탈권을 전제로 하지만, 새로운 일자리는 과거의 일자리에 비해 사실 질적으로 낮은 일자리를 의미하며 그렇다고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노동자의 참여도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탈모델의 비대칭적 구도가 미국기업 회계조작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내부의 부실과 부정에 대해 외부자에 비해 쉽게 알 수 있는 처지에 있는 노동자라 할 지라도 발언권이 없음으로 무력하게 당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탈모델은 상향이동을 전제로 합니다. 개인 능력과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지위가 높은 집단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상향이동은 극히 일부에게만 선택 가능하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적 주변집단에서 상향이동한 사람은 그 집단의 발언자인데 그들이 이동함으로써 주변집단은 점점 더 개선 가능성을 상실하게 되는 처지에 놓입니다. 이같은 이유로 미국 사회운동은 영향력이 약하고 공적의료보험파탄과 공교육 파탄, 흑인·소수 민종의 열악한 지위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한국도 빠르게 이탈모델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탈모델은 배운 자, 가진 자, 재능있는 자에게 치우쳐 있어 기득권층이 대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예를 들어 기득권층 자식들이 조기 유학하는 것이 큰 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발언가능자의 이탈로 인해 한국사회교육을 더욱 낙후시키는 악순환에 빠지게 합니다. 지역간 불평등도 같은 논리입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강남과 강북 등 삶의 질에 민감한 자들은 이탈을 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곳에서 발언을 통해 삶의 질을 계속 높이고 잔류한 자들은 별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해 열악한 상황이 계속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탈권의 활성화로 양극화가 발생한다면 한국사회경제의 경쟁력은 약화될 것이고 기득권층에게도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낳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이탈모델은 국민 모두를 다 끌고 올라가지 않는 모델이므로 발언권을 통해 전체가 올라갈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해야 합니다. 이탈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발언권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다시 말해 이탈권은 갖되 사회적 문제의식을 높여 강력히 발언할 수 있는 발언집단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각 영역간 발언권을 높이는 방식을 제안해 보면, 노동의 경우 IMF 사태 이후 한국의 화이트칼라계층에게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졌습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사회적 모순을 체계적이고 강도있게 비판할 수 있는 집단이므로 노동자의식을 높여 사회경제 개혁을 위한 발언메커니즘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음은 정치입니다. 지금의 양당정치체제는 선거를 의식해서 상호간 차별성을 상실하고 수렴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신생·군소 진보정당을 키워 새롭고 다른 발언을 키워내고 이를 정치적 아젠다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기업은 노동자 기업경영참가가 우선적으로 중요합니다. 전면적 지배구조참여보다는 일차적으로 문제가 노출된 소수 기업을 대상으로 일차적 수준에서 지배구조참여를 노려야하며 감사위원회 추천권 확보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현재 진보언론은 재정난을 겪고 있으면서도 군소 규모로 난립하고 있어 사회 영향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따라서 대표적 언론이 필요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통폐합도 고려해야 합니다. 대학 중에서 신자유주의체제를 반대하는 대학이 없습니다. 소수 대학을 비판 진영의 메카로 정하고 대안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우수한 활동가를 키워내야 합니다. 

이상의 각 부문별 발언메커니즘의 강화는 사회중간층의 형성을 통해 크게 뒷받침되고 전체적인 정합성을 극대화시키리라 봅니다.

 줏대 있는 세계화가 필요하다

한국은 IMF 외환위기 사태이후 전통적 제조업에서 자신감을 급격히 상실했고, 그렇다고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에서 전망과 가능성이 확실한 것도 아닙니다. 결국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의 문제인데, 이에 대해서 정치권은 핵심적 과제로 다루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고 진보진영도 대안적 관점이 부재한 듯 합니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전통적 제조업 분야에서 계속 경쟁력을 유지하고 제조업이 창출하는 부를 기반으로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을 키워나가는 것이라 봅니다. 이를 위한 정책적, 제도적 뒷받침을 이제 고민해야 합니다. 오늘날 글로벌 스탠다드라고 여겨지는 정책과 제도의 규범은 경제발전 결과이지 결코 원인이 아닙니다. 선진국들이 개도국에게 요구하는 제도들은 결코 선진국이 자신들의 발전과정에서 행한 정책, 제도와 같지 않습니다. 그들도 자신들의 현실에 맞게 제도와 정책을 디자인했습니다. 이점이 우리에게 창의적인 접근이 요구되는 까닭이고 줏대있는 세계화가 방향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전통적 제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앵글로 색슨식보다는 독일의 라인형 체제가 가능할 것입니다. 중간 기술형 기업은 꾸준한 학습에 의해 기술축적이 가능하므로 이를 전략산업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은 국내를 대상으로는 이익이 없고 국제성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의 경쟁력을 향상시켜야 합니다. 막대한 재원은 앞서 밝혔듯이 사회적 기금확보를 통해 가능하리라 봅니다. 

이제 발제를 정리하겠습니다. 미국자본주의는 자체적 모순때문에 금융투기화, 주주이익 극대화를 추구했으며 이 과정에서 회계부정사건이 터졌습니다. 미국적 모순의 대외확산이란 특성을 지닌 금융세계화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우리를 위태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줏대있는 세계화를 큰 방향으로 설정하고 세계화의 부작용을 극복하는 작은 안전장치를 부단히 개발해야 합니다. 이것은 관세장벽 해체요구에 대해 비관세장벽으로 대응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안정장치의 예는 주식의 이익참가권과 의사결정참여권을 분리하거나, 은행·보험업종에 대한 국적자본체제강화, 외환시장에 써킷브레이크제(circuit break) 도입, 동아시아 통화동맹 강화를 들 수 있습니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이탈모델로 소수만 승자가 되고 다수를 패자로 전락시키는 아주 비민주적 모델입니다. 따라서 열악한 조건에서도 유례없는 산업화와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한 동기부여가 강한 한국인에게는 맞지 않는 모델입니다. 그러므로 각 사회조직에서 진보적인 발언이 입지를 갖도록 제도개혁을 추진하고 이들 상호간에 국가전략에 대한 합의를 모아내는 사회중간층의 의사소통기구를 강화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자본주의가 당면한 과제는 전통 제조업의 경쟁력을 일정기간 유지하면서 동시에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을 육성하여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제도와 기획이 필요하며 이에 입각해 사회적 투자를 확대해야 합니다. 따라서 노동계는 어떤 제도와 정책이 바람직하며 사회적 투자의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토론문

이찬근 교수님의 발제를 잘 들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미국자본주의를 주주자본주의, 이탈모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탈모델조차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식 기업지배구조와 관련해 그동안 주목받지 않은 사안들을 지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뮤추얼펀드의 이중성

현재 미국 뮤추얼펀드는 미국 기업의 가장 큰 소유자입니다. 3조 달러에 가까운 주식을 통제하고 있으며 75개 거대 뮤추얼펀드들이 미국 기업 의결권의 44%를 통제합니다. 뮤추얼펀드는 투자자를 대신해 무능력하거나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경영진에게 책임성을 요구하여 투자자의 이익을 극대화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기업경영진의 이해를 우선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뮤추얼펀드가 투자자금이 되는 401k(개인적립형 기업연금)와 연기금 자산을 기업으로부터 유치하면 막대한 수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가장 큰 뮤추얼펀드 중 하나인 피델리티는 파산한 타이코 주식의 5.3%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1999년 이 회사는 타이코의 401k를 운영해서 200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뮤추얼펀드와 경영진의 이해관계 때문에 최고경영진의 높은 급여와 경영진에게 백지회사자금을 대여하거나 회계부정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하기 어렵습니다. 발언권을 높일 경우 401k와 연기금 자산을 유치할 수 없고 높은 수수료 이익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한국 정부도 퇴직금을 기업연금으로 전환시키려고 하는데 미국과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보험사들이 기업의 단체보험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리베이트등 각종 부정이 벌어지는데 그 규모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금융감독강화를 통해서 부정을 막을 수 있을 지는 회의적입니다. 퇴직금을 기업연금으로 전환하는 목적이 퇴직소득의 안정성이라면 차라리 퇴직금의 사외적립을 의무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사외적립된 퇴직금을 노동자와 사용자가 공동으로 운용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행 퇴직보험제도가 왜 활성화되고 있지 않은지 파악을 하는 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회계감사기관의 이해상충

미국 행정부는 지난 7월 공개기업 회계개혁법을 시행했습니다. 이 법은 회계감사기관의 이해상충을 제거할 목적이었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첫째는 회계감사기관의 형식적 고객은 기업이지만 기업에 투자한 투자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목적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개혁법은 회계감사기관이 고객(기업)에게 비회계 서비스(회계와 관련이 없는 법률 및 전문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업의 회계위원회가 승인할 경우 회계감사기관이 세금관련 서비스(비회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단서조항을 달았습니다. 회계감사기관의 세금에 관한 조언과 세금 계획은 기업이 세금을 절약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습니다. 따라서, 기업들은 큰돈을 내고 회계감사기관의 절세계획을 삽니다. 

종종 이 계획은 합법이 아닌 불법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게끔 합니다. 미국 국세청은 각 기업의 절세계획을 살피고 법적 근거에 따라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습니다. 회계감사기관은 기업의 절세계획이 국세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 할 경우를 대비하여 투자자에게 절세계획의 취약점을 알리거나 숨겨야하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 서비스 제공 여부를 해당 기업의 회계위원회에 맡긴다면 절세계획의 취약점이 투자자에게 전달될 수 없습니다. 둘째 개혁법에 따르면 자신의 회계감사 고객에게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지만 고객 이외의 다른 모든 이들에게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별 무리없어 보이지만 미국 기업회계시장의 독과점 구조를 감안한다면 문제점이 있습니다. 미국의 기업회계는 일명 빅5(아서앤더슨, 언스트앤드영, KPMG, PwC, 들로이트앤드투쉬) 기업이 공개기업 90%이상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제공하는 컨설팅 서비스의 유형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가령 A회계기업이 B회계기업으로부터 절세계획을 구입한 기업에게 컨설팅을 제공할 때 그 절세계획의 취약성을 지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면 B회계기업의 절세계획은 A의 절세계획과 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결국 A회계기업 자신의 절세계획의 취약점을 지적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미국 자본주의의 회계개혁은 큰 성과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개혁법은 무엇보다 회계감사가 하지 말아야 할 비회계 전문서비스 항목에 세금관련 서비스를 포함시키고 판단 여부를 기업 회계위원회에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회계기업이 회계감사 고객이 아닌 비고객 기업에게도 비회계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고 오직 회계감사에 충실하도록 규정해야 합니다.

미국식 모델의 현 주소

이제 교수님께서 발표한 미국식 모델이 얼마나 한국에 침투해 있는지 그리고 행동양식을 바꾸고 있는지에 대해 몇마디 하겠습니다.

주주자본주의라는 면에서 한국의 주식시장은 아직 1차적 발행시장 기능에 머물고 있습니다. 제도는 많이 도입되었지만 제약이 많아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기업의 이해당사자들 중 한 집단인 노동자의 발언(voice)권이 보장받고 있지 못한 면은 미국식 자본주의가 관철되는 면으로 보입니다. 회계제도는 미국식 자본회계가 한국 현실과 부적응하고 있다고 봅니다. 중장기 투자가 육성과 시가주의가 모순되고 있어 유보하고 있는 점은 도입된 모델과 기존 모델이 상호충돌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주자본주의 아래에서 재벌해체가 이루어질 경우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재벌해체가 선단식 경영을 해체하고 독립적인 전문대기업을 육성하는 것이면 삼성전자, 포항제철, 현대중공업 등이 과연 세계경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수익성을 강조하는 금융 구조조정 과정에서 금융기관의 행태가 변화하고 기업대출이 감소해 오히려 과소투자가 발생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고, 만일 은행법 개정으로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가 무너질 경우는 IMF 이전과 같은 연성예산제약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의 먹고사는 문제

한국 경제는 일본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끼어서 경쟁력을 잃어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민경제의 관점을 단순히 부르주아 문제틀이라고 내치지 않는다면 진보진영이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이라 보입니다. 최대한 국민경제를 보호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첫째 개발독재의 핵심이었던 수출지향-수입대체 전략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수입대체가 생략된 수출지향은 수입유발계수(수출 1단위가 낳는 수입의 비율)를 점점 높이고 있으며 더 높아질 것이라 예상됩니다. 현재의 금융부문 재편은 수출지향-수입대체 전략에 도움이 안됩니다. 고용창출에도 도움이 안됩니다. 정부의 금융구조조정은 대형화를 통해 해외로 뻗어가는 것인데 이것은 국내 산업 공동화를 낳을 수 있습니다. 이미 국내 우량 대기업을 포함한 대기업이 국내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않고 직접 금융시장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벤처산업입니다. 벤처 육성은 기본방향은 옳았지만 주식시장과의 섣부른 결합으로 많은 휴유증을 남겼다고 봅니다. 벤처는 기본적으로 수출과는 거리가 먼 내수산업입니다. 즉 벤처산업은 국내시장에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보다 벤처가 대체하는 국내 다른 부문의 부가가치를 이전시켜오는 측면이 강합니다. 

이에 비추어 한국 자본주의의 고용창출 능력은 여전히 자동차, 조선, 철강 등 제조업 부문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국민경제를 떠받칠 수 있는 부문은 여전히 제조업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선 노동자의 경영참여입니다. 작업장 단위부터 전략적 의사결정에 이르기까지 노동자의 경영참여는 결과적으로 상당한 생산성 증가를 낳을 것입니다. 이와 함께 발제자가 제안한 주식기부세와 새로운 사회적 기금 조성을 하청업체까지 포함하는 재투자와 분배를 위한 유용한 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경영참가가 보장된다면 경쟁력 이데올로기의 수용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둘째는 한·중·일 3국간의 출혈경쟁을 방지하기 위한 제조업 중심의 원탁회의가 꼭 필요합니다. 유럽연합의 모태가 되었던 유럽철강공동체가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핵심은 노동자의 경영참여에 있습니다. 또한 남북관계가 평화와 화해로 나아가고 있는 것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이 두 축을 기반으로 국민경제가 생존하기 위한 진보진영의 ‘그랜드 비전’을 설립하는 노력이 절실해지고 있음을 강조하며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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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 답변

질문자: 두 분 모두 현정부의 재벌개혁에 대해서 부정적이신데 노동계는 재벌개혁의 입장을 내놓은 상태입니다. 재벌개혁의 제도가 작동하느냐와는 별개로 개혁은 당위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미국식 재벌개혁이 아니라면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발제자: 개발독재 모델의 모든 부분이 폐기처분 대상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한국의 재벌이 성장 엔진임을 부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재벌의 존재와 재벌의 문제점을 치유하는 방식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재벌개혁을 모든 재벌에 일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 재벌에게만 적용해야 합니다. 

질문자: 현재 얘기되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정부로부터의 독립성을 뜻하고 있습니다. 은행중심의 자본주의로 가기 위해서는 규제가 필요하고 규제는 국가가 담당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 개발독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필요한데 현재의 방식이 아니라면 어떤 방법이 있다고 봅니까?

발제자: 한국은 관치금융의 측면이 불가피하다고 봅니다. 한국의 자본시장 개방정도는 너무 심각합니다. 이에 대한 안전장치는 한국은행밖에 없다고 봅니다. 개입이 필요합니다. 

토론자: 한국은행은 1997년에 법이 바뀌어 물가를 잡는 역할에 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모습은 그 법에 충실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독립은 정부로부터 자율이 아니라 정부 내에서 자율이라고 봅니다. 완전한 독립은 적절치 않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