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는 기회를 몰고 온다는 이야기가 새삼 걸맞을 때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지난 6월 2차 서해교전 당시만 하더라도 한반도 전쟁이라는 공포감을 떨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혀 뜻밖의 조일 정상회담이 이루어진 9월 말에 이르러서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 어디 이뿐인가. 파격적인 신의주 경제특구 지정, 경의선과 동해선 착공,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의 한반도평화선언, 한일 정상의 조미대화 촉구 선언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전망과 기대가 솟아오르는 듯 하다. 만약 이곳 한반도나 동아시아에서 이러한 큰 물결이 없었더라면 한반도에 드리워진 검은 먹구름은 암울함을 증폭시키면서 언제 걷히어질지 기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과 평화의 기로에 선 한반도
미국은 올해 1월부터 느닷없이 ‘악의 축’을 꺼내면서 이라크, 북한, 이란을 살생부에 올려놓았다. 이에 이곳 남녘 땅 민중·시민·사회단체 칠백 개가 모처럼 한 목소리로 전쟁 반대·미국 반대를 외치면서 성남공항으로, 그림자 시위로 도라산까지 쫓아다니며 악귀를 쫓아내는 굿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미국은 한 발자국 물러섰지만 여전히 전쟁의 불씨를 지피고 있었다.
전쟁의 불씨가 전쟁 국면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부랴부랴 임동원 특사가 북한을 방문해 남북은 6·15 공동선언을 복원시켜 남북 공조로 대비한다는 합의에 이르렀다. 이로써 1994년 6월 전쟁을 마치 부추기는 듯하다가 전쟁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공포에 싸여 클린턴에게 전화를 걸어 32분 동안 전쟁은 안 된다고 고함만 질러댄 김영삼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당연하고 현명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이것도 잠시, 금강산댐(북측은 임남댐)의 인공위성 사진이 미국에서 흘러나오면서 금강산댐 안정성 문제가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갑자기 옛날 전두환 식의 금강산 댐 수공 위협이라는 사기극이 재연되었다. 덧붙여 최성홍이라는 철부지 외교장관이 북한은 장대로 쥐어박아야 무언가 정신을 차린다는 식의 친미예속사대주의 발언을 함으로써 남북 공조의 복원은 다시 암초에 걸려 버렸다.
서해교전과 전쟁의 먹구름
여기에다 핵태세 보고서라는 비밀 보고서가 나와 미국의 한반도 전쟁 위협이 뻥치는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핵 공격대상 가상 7개국 명단에 북한이 들어 있고, 선제 핵공격 최우선 목표 5개국에 북한을 넣으면서 “즉각적이고 잠재적이며 예기치 못한 돌발상태가 가능한 나라”로 지목했고, 핵 선제공격의 구체적 사례로 맨 처음 들먹인 것이 ‘북한의 남한 공격’이었다. 이렇듯 한반도는 미국의 선제 핵공격의 0순위에 올라 와 있었다.
어디 이 뿐인가? 3월 말에 발표된 ‘미의회 한반도 보고서’는 미국이 햇볕정책을 지지하지 않고, 나아가 북한을 테러국 명단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한국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 4자 회담을 통한 평화협정에 회의적인 견해를 표명하면서, 북한의 재래식 무기 감축과 휴전선 부근의 군사력 철수를 요구하며, 2003년 이전에 북한의 과거 핵사찰을 요구하는 내용도 있다. 보고서는 이러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경수로를 중단하고, 미사일 협상에서 보상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며, 남북이 협상으로 재래식무기를 해결하는 방안에 반대하는 등 6·15 공동선언을 죽이려는 원칙을 열거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사석에서 “평화를 확고히 구축하지 못하고 임기 말을 맞는 게 천추의 한”이라는 자조적인 한탄을 했다고 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1999년 6월 1차 교전에 이어 2002년 6월29일 2차 서해교전이 발발했다. ‘전쟁 한번 해요. 한번만 똑바로 하면 안 들어온다’는 식의 전쟁광 같은 막말이 난무했다(한나라당 강창성 의원). 이에 남한 군부는 기존의 전쟁억제 지향의 5단계 교전수칙을 ‘시위기동 → 경고사격 → 격파사격’ 3단계로 단순화하여 선제공격 지향의 작전 지침을 하달했다. 더 나아가 이상희 합참 작전본부장은 “앞으로는 북 함정의 북방한계선(NLL) 침범 징후만 포착해도 해군뿐 아니라, 공군 전력과 백령도, 연평도에 위치한 지상군 전력이 합동으로 대응하며… 공군 전투기의 초계 비행 범위도 NLL 부근 쪽으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우발적이고 사소한 충돌이라 할지라도 육해공 합동작전이라는 전면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커졌고, 이러한 사태는 한반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고 가게 될 것이다. 또한 막가파 부시 미국이 2003~2004년에 전개할 것으로 보이는 한반도전쟁 획책을 고려할 때, 이러한 우발적 충돌이 전쟁의 빌미를 노리는 미국에게 낚시 밥을 제공해 주는 꼴이 될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은 더욱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남북 공조를 넘어 ‘동아시아 공조’로
그러나 7월이 되면서 북한은 놀랍게도 서해교전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남북 공조 체제를 복원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안으로는 배급제 대폭 축소, 가격·임금 현실화, 환율 현실화 등 경제개혁과 개방에 대한 전향적인 정책이 취해졌다. 경의선과 동해선 복원공사가 착공되는 등 남북공조가 복원되었다. 이어서 조러 간에 일년 만에 두 번째 정상회담이 열려 ‘철의 실크로드’가 합의되었고, 9월에는 충격적인 조일 정상회담이 발표되었다. 그러면서 파격적인 신의주 특구가 제시되면서 세계의 눈을 휘둥거리도록 만들었다. 남북 공조를 넘어 동아시아 공조가 작동된 것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김대중 대통령은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에서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와 북한의 개혁·개방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화답한 아셈회의는 햇볕정책 지지와 평화적 조미관계를 권유하는 ‘한반도 평화선언’을 하게 이르렀다. 이어 한일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남북대화·일북대화와 함께 미북대화를 병행 추진해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미북대화가 조속히 재개되기를 기대한다”고 미국을 압박했다. 일본 수상은 단독으로 미국에 북미대화를 촉구했다. 이 모두는 한국과 일본의 현대 외교역사에 전례 없는 미국에 대한 자주적인 행보이다. 이제 우리의 평화문제는 남북 공조와 동아시아 공조에서 아시아·유럽의 공조로 글로벌화 되고 있다.
‘악의 제국’ 미국의 전쟁 획책
이 시점에서도 미국은 여전히 비밀 대북 핵전쟁 연습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1998년 금창리 핵위기 당시 미국은 세이머 존슨 미 공군기지 제4전투비행단 소속 F-15E 전폭기가 핵폭탄의 일종인 BDU-38을 탑재해 플로리다의 폭격장에 투하하는 모의 훈련을 반복 실시해 대북 핵 선제공격이 말이나 소문이 아니라 실재임을 보여주었다. 이는 북한에 대한 핵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미국무부 공식보장문서를 전달하기로 한 1994년의 북미제네바협정을 위배한 것으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국제협약쯤은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진짜 ‘악의 제국’이라는 심증을 굳혀준다.
여기에다 9월20일 발표된 부시 독트린이라는 미국의 신국가안보전략은 선제공격, 미국 단독행동, 대량살상무기 반확산을 위해 선제공격, 북한의 제2 이라크화, 미국의 압도적 군사우위 유지, 미국 군사력에 도전하는 어떠한 씨앗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영속적인 무소불위 패권주의 등을 선언해 세계를 경악케 했다. 특히 북한을 이라크 다음으로 불량국가로 규정하여 제2의 이라크 가능성을 한층 더 높였다. “북한은 지난 십년 동안 세계의 주요탄도미사일 조달처"였으며 “북한은 (판매용의) 점점 더 성능 좋은 미사일을 시험해오면서 자신들의 대량파괴무기도 개발했다”고 했다. 체니 부통령은 북한 핵무기 보유설을 기정사실화 했다. 국내 반민족적인 주류 언론은 사기극인 줄 뻔히 알면서 북한 핵보유를 기정사실화 했다.
친미예속사대주의를 넘어
그러나 이러한 황야의 무법자 짓거리를 자행하는 미국도 한반도 평화를 지지하여 펼쳐지는 남북, 동아시아, 범세계적인 공조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시라는 깡패두목이 먼저 김대중 대통령에 전화로 북미대화를 위한 특사파견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지각 변동은 한반도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해 준다. 경의선과 동해선의 복원이 시작되어 냉전의 철벽이 뚫리기 시작했고, 남북종단 철로가 개통되고, 더 나아가 시베리아와 중국의 동북3성이 한반도와 유기적으로 결합될 전망이다. 이들 여러 움직임은 남북한 개별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일본·러시아·중국과 합주곡을 울린 결과이고, 앞으로 지속적인 동아시아 공조체제의 서막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남북 공조와 동아시아 공조를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전쟁광이 득실거리는 공화당 지배의 미국과 이에 부화뇌동하는 일본과 남한의 친미예속사대주의자들의 책동에 대항해 우리의 민족생명권을 확보할 수 있는 첩경임을 직시해야 한다. 동시에 이 과정에서 우리 남과 북은 민족공동체로, 또 동아시아는 유럽연합과 같은 동아시아협력체로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한반도·동아시아·세계의 평화는 물론이거니와 북한·시베리아·중국 동북3성의 경제개발로 남한·일본·러시아·중국에 수십 년 간의 경제 활성화를 가져오면서 경제공동체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동시에 세계경제에도 활력을 불러 올 것이다.
이러한 탈미(脫米) 동아시아 협력체로의 길에 남과 북은 공조와 자주로 조정자와 균형자로서 그 직분을 정립함으로써 21세기 동아시아와 함께 하는 한반도 시대라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맡은 바 역사적 직분을 다할 때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지, 그냥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직분은 바로 미국 제국주의 세력, 이에 부화뇌동하는 일본과 남한의 친미예속사대주의자들의 반역사적인 책동을 극복하려는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