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 작용하는 개인들의 집합체가 사회인 것처럼 한 국가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국제사회의 다양한 법과 규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세계화의 진전,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국제사회는 더 밀접해졌다. 여러 분야에서 흔히 말하는 ‘통용되는 국제적 기준global standard’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고 노동법 영역이나 노동기준도 예외가 아니다. 국제노동기준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국제노동기구ILO의 협약이나 권고 등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외에도 세계의 여러 국가들이 인정하고 있는 보편적인 노동기준을 의미한다. 국제노동기준을 언급할 때 비슷한 수준의 경제력을 고려하게 될 터인데, 우리나라는 1991년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고 세계 10위 경제 대국이라고 하니 국제적 수준에 맞는 노동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한국의 경제 수준에 걸맞은 국제노동규범은?
국제노동기준을 언급할때 주요한 것으로는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유엔국제협약UN Global Compact, OECD 다국적기업 지침, 특정한 국제산별 노동조합과 다국적기업이 체결하는 국제산별협약International Framework Agreement이 있다. 그밖에도 책임 있는 관리Responsible Care,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표준화한 ISO 26000 등이 있다.
최근에는 한국과 미국, 그리고 한국과 유럽연합EU이 체결한 자유무역협정FTA 내용 중에 포함된 노동기본권과 관련된 조항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기준들은 그 용어부터가 생소하고 한국어로 번역하는 경우 용어가 통일되지 않은 것들이 많으며, 원문이 가진 의미를 정확히 표현하는 한글 단어도 없는 경우도 있어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이하에서는 최근 다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ILO 협약 비준과 관련한 주요 쟁점들을 살펴보고 그 외 노동조합 활동과 관련이 높은 국제적인 노동기준들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ILO와 국제노동기준
역사적으로 볼때,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ILO에 대해 관심이 높아진 것은 1991년 설립된 <ILO 기본조약비준 및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자 공동대책위원회>(이하, ‘ILO 공대위’)의 구성과 활동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ILO 공대위는 “자주적 단결권 확보를 중심으로 한 노동법의 실질적 개정”과 “민주노조 총단결 투쟁을 통한 민주노조 운동의 조직 발전”을 목표로 내건 한시적인 공동투쟁조직이었지만, 완강한 투쟁의 주체였으며, 민주노총 출범을 가져오는 조직적 토대를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당시 ILO 공대위는 전국과 지역의 사업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기 위하여 전국 9개 지역에 지역공대위를 조직하였으며, 노동법 개정 시안을 마련하고 대중투쟁을 벌였다. 1991년 우리나라가 ILO에 가입하자 한국 정부를 ILO에 제소하여 ILO로부터 한국정부와 노동법이 ILO의 기본정신인 ‘결사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는 판정과 노동법을 개정하라는 권고를 이끌어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뒤에도 정부의 노동탄압에 대하여 ILO 제소가 이루어졌고 협약 비준 운동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민주노총의 ILO 핵심협약 비준은 “26년간 지속해온 오래된 미완의 투쟁”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국제기준을 언급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국제노동기구, 즉 ILO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는 노동문제를 다루는 국제기구로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다. 노동조합에서 자주 ILO를 언급하다보니 국제 노동조합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ILO는 국제연합UN의 산하 기구이다. 그런데 유엔은 각국 정부들의 기구인데 유엔의 기구 중에서 ILO는 유일하게 노동자와 사용자, 정부가 함께 참여하는 노사정 3자 조직이라는 독특한 형태를 가진다. ILO 총회는 노사정 3자 대표가 참여하지만 각 회원 국가별로 정부대표 2명, 노사대표가 각각 1명씩 참여한다. 한국의 경우에는 정부와 경영계 대표로는 노동부, 경총이, 그리고 노동계 대표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번갈아 참여한다.
2018년 현재 ILO 회원국은 187개 국가이다. 남북 분단 상태에서 한국은 유엔에 가입한 것이 매우 늦었기 때문에, ILO에도 1991년 12월에 비로소 152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였으며, 1996년부터 비상임 이사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ILO는 매년 6월 제네바 본부에서 ILO 총회를 열고 협약과 권고를 심의하고 채택한다.
“26년간 지속해온 미완의 투쟁”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ILO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노동기준, 즉 국제노동기준을 정하는 일이다. ILO가 만든 ‘협약’은 국제조약, 즉 국제법의 효력을 가지며 회원국은 자발적으로 이를 비준해야 구속력을 갖는다. ILO 협약과 달리 ‘권고’는 국제조약이 아니고 법률적인 구속력은 없으나, 국가의 정책과 관행에서 일종의 지침이나 가이드라인으로서 역할을 한다.
현재 ILO 협약은 189개이고, 권고는 205개이다. ILO는 189개 협약 가운데 매우 중요한 8가지 협약을 핵심 협약이라 정하고 각국에 비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2018년 현재까지 29개 협약만을 비준하고 있으며, ILO가 강조하고 있는 8개의 핵심 협약 중에서는 4개만 비준하고 있다.
한국정부가 비준한 ILO 협약의 개수는 29개로 여타 국가들에 비하여 대단히 저조하다. ILO에 늦게 가입했기 때문에 여타 선진국가들과 동일한 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1991년 ILO에 가입한 이후로 27년이 흘렀으니 대략 1년에 1개꼴로 협약을 비준해온 수준은 납득하기 어렵다.
특히 2014년 이후로는 어떠한 협약도 비준하지 않고 있다.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그리고 강제노동과 관련된 협약 4가지는 조속히 비준해야 함에도 여전히 일정조차 제시하지 않고 있다. 결사의 자유와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87호와 98호 협약은 국제노동기구 회원국의 80%가 가입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2018년 현재 87호를 비준한 국가는 155개국, 98호를 비준
한 국가는 165개국이다. 187개 국가 중에서 결사의 자유와 강제노동 금지 원칙 관련 4개 핵심 협약을 전부 비준하지 않은 나라는 6개국(중국, 마샬제도, 팔라우, 퉁가, 투발루, 한국)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한국은 이미 1996년 OECD 가입, 2006년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 진출 때 이 협약을 비준하겠다고 약속한바 있으나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심지어 2010년 체결한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에도 “협약을 비준하도록 노력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지만, 8년이 다되도록 이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
노동계에서는 ILO 협약 비준과 더불어 단결권, 단체교섭 보장을 위한 제도 개선으로 사실상 행정관청에 의해 심사제도로 운영되고 있는 노조설립신고제도, 복수노조 자율교섭 보장, 손해배상과 가압류 금지, 전임자 임금 노사 자율, 공무원·교사·교수의 노동기본권 보장,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권, 공격적 직장폐쇄 금지, 산별교섭 제도화와 공공무문 대정부 교섭 보장, 단체협약 일방해지권 제한, 필수유지 업무 문제도 관련 조항 삭제 등을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보편적인 국제적 노동인권 수준에 비추어 보면 한국의 ILO 협약 비준 실태는 매우 심각하다. 내년이면 1919년 창립된 ILO가 창립 100주년을 맞는다. 일각에서는 100주년 행사와 결부시켜 한국정부가 ILO 협약을 좀 더 많이 비준하지 않겠느냐는 희망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ILO 핵심 협약 비준 문제는 생색내듯이 정부가 처리할 시기는 지난 지 오래다. 노사정이 논의하고 합의할 문제도 아니고, 국제적 기준에 따라 마땅히 처리해야 할 문제이다. 쌓인 노동 적폐를 언제까지 그대로 방치할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코피 아난 전 총장 주도로 만들어진 유엔의 글로벌 콤팩트 유엔 국제협정UN global compact은 2018년 8월8일 작고한 코피 아난Kofi Atta Annan 전 유엔 사무총장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다. 그는 1999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그 취지를 처음 설명했고 2000년 7월 유엔본부에서 이를 공식 발표했다. 유엔 국제협정은 기업들이 세계화라는 도전 속에서 국제사회의 집단적인 노력을 통해 책임 있는 세계시민으로 활동할 것을 추구한다. 국제연합이 사용하는 ‘Compact’라는 단어는 ‘구두 약속’이나 ‘계약’의 중간 의미를 담고 있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국제연합이 정한 환경, 인권, 노동기본권 등 10가지 원칙이며, 참여를 희망하는 개별 기업이 자발적으로 이 원칙들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하는 일종의 ‘신사협정’과 같은 것이다.
이 협정은 국제연합 사무총장이 직접 주도하고 국제연합과 개별 기업체 양측 간에 맺는 협정의 형태를 갖지만, 협정의 논의 과정과 이행을 위한 토론에는 정부, 사용자, 노조 및 시민단체 들도 참여를 한다. 개별 기업들은 자발적으로 이 협정을 인준하게 되며, 이를 인준한다 하더라도 특별한 구속력 이나 법적 강제력은 없다. 다만 국제연합은 국제협정을 승인한 기업들이 이 사실을 언론에 공표하고 정기적으로 사업보고서나 연례 보고서를 제출하고 노출하여 이행 사항을 공개할 것을 기대한다.
10가지 원칙 중에서 노동기준은 4가지 원칙을 정하고 있는데, 기업들은 결사의 자유를 지지하고, 단체협상권을 효과적으로 인정해야하며, 강제노동과 아동노동을 폐지해야하고, 고용과 직장에서 차별을 폐지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이 협정은 초창기에는 50여개 기업이 참여했고 2004년 10월까지는 1,896개 참여했다. 2018년 현재 1만 3,219개의 사업체나 비사업체가 참여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2003년 한국국제봉사기구가 처음 가입한 뒤, 2005년에는 한국전력이 가입했다. 현재는 256개 한국 업체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 협정에 참여 여부는 자발성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의무가 발생하는 것도 아니지만 노동조합의 입장에서는 협정을 체결한 기업들이 10개 원칙을 준수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들을 하고 있는지, 어떠한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는지 주시하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의 국제연대에 연결돼 있는 OECD의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1961년에 결성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외국인 투자를 촉진하고 보호하는 활동을 했다. 1970년대부터 다국적기업들의 인권침해 문제가 UN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현안문제로 대두되자 1976년에 「OECD 국제투자 및 다국적기업에 관한 선언과 결정Declaration and Decisions on International Investment and Multinational Enterprises」의 한 부분으로 다국적기업지침(이하, ‘지침’)을 제정하게 되었다.
다국적기업(또는 초국적 기업)이라고 하면 흔히 대기업을 떠올리지만 국제적인 정의로는 “2개 이상의 국가에서 생산 활동을 하는 다수의 해외자회사를 소유하거나 통제하며, 이들의 국경을 넘은 활동을 1개국에 위치하는 의사결정 센터에서 총괄하는 기업”이므로, 규모와 무관하게 2개 국가에서 사업을 하는 경우는 모두 해당이 된다.
이 지침의 적용 범위는 ① OECD 회원국 소속의 다국적기업 ② 회원국은 아니지만 이 지침을 수락하기로 한 국가들(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에 소재한 다국적기업 ③ 이들 국가에 모기업을 두고 제3세계에 세운 현지법인, 이와 반대로 ④ 제3세계 국가에 모기업을 두고 OECD 회원국이나 지침을 수락하기로 한 국가에 자회사를 둔 경우이다.
한국 등 34개 OECD 회원국과 비회원국 10개국을 포함하여 총 44개국이이 지침 준수를 수락하였다. 지침은 수락한 국가 공동의 명의로 다국적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을 부여하는 국제규범이다.
이 지침은 1) 개념 및 원칙 2) 일반정책 3) 정보공개 4) 인권 5) 고용 및 노사관계 6) 환경 7) 뇌물공여, 뇌물청탁 및 강요 방지 8) 소비자 보호 9) 과학 및 기술 10) 경쟁 11) 조세 등 모두 11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광범위한 기업윤리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특히 정보를 공개할 의무, 고용 및 노사 관계 관련 의무, 지침의 이행 절차에 관련한 내용이 중요한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각국 정부는 이 지침을 효과적으로 이행하기 위하여 <국내연락사무소(NCP)>를 설치해야 한다.
이 지침은 2011년에 다시 개정되었는데 기업의 공급망에까지 적용하고 인권에 관한 별도의 장을 신설하는 등, UN이 2011년에 발표한「 기업과 인권에 대한 이행 원칙UN Guiding Principles on Business and Human Rights」의 내용을 대거 반영했다. 이 치침은 법적 구속력은 없다. 그러나 비사법적 절차이기는 하지만, 국가가 다국적기업으로부터 인권침해를 당한 경우 피해자에게
구제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는 국내연락사무소의 위상과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가령 다국적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나 이해당사자는 위 지침에 위배되는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 경우 국내연락사무소에 제기를 하면 국내연락사무소는 이의제기 사안에 대해 검토하고 조정·중재 등을 통해 문제해결을 지원한다. 국내에서 다국적기업에 일하는 노동자들이라면 눈여겨볼 제도이다. 특히 아시아 각국에서 한국계 다국적기업에 대한 이의제기가 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국내연락사무소는 산업자원부 소속으로, 2000년 설립된 이후로 부실한 운영으로 인해 노동계와 시민사회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국내 연락사무소 운영과 관련하여 국제민주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와 양대 노총이 참여하는 개혁 네트워크 논의가 진행 중이다.
국제노동규범의 활용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볼 때 ILO 협약은 가장 강력하고 보편성을 갖고 있는 국제노동기준이다. 따라서 협약 비준운동에 좀 더 적극적으로 벌일 필요가 있다. 특히 핵심 협약 비준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OECD 다국적기업 지침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실효성을 강화하기 위하여 국내연락사무소NCP 운영과 제도 개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국적기업 지침 활용과 한국 NCP 개혁 문제는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 노동운동과의 소통과 연대와 직결된다. 정부가 ‘신남방정책’을 통해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국가들과 돈독한 무역투자 관계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아시아에서 노동인권 침해로 악명이 높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편, 다양한 국제기준에 대한 이해와 활용에 관한 문제는 전문적인 영역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중장기적 안목 속에서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하는 전략 마련이 필요하다. 따라서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연구하고 성과를 축적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통해 지속적인 감시와 정책 생산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조직적인 지원이 필요하며, 노조 활동가들을 위한 다양한 수준의 교육이 진행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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