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평화를 희망한다.

노동사회

나는 평화를 희망한다.

admin 0 3,021 2013.05.08 10:08

book_5.jpg1983년 3월6일 일요일 선거일 저녁 녹색당은 5.5퍼센트의 지지를 얻어 독일연방의회에 27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핵무기 저지’를 최우선 목표로, 기존 정당들이 보여준 엄숙주의를 날려버리며 등장한 ‘녹색애벌레’들이 벌인 선거운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고 녹색혁명의 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10년 뒤 2002년 9월22일 치러진 독일 총선에서 사민당과 공동전선을 펼친 녹색당은 8.6퍼센트를 획득하여 창당이래 최고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제3당으로 도약했다. 이번에 얻은 표는 4년 전의 6.7퍼센트는 물론 과거 최고였던 1987년의 8.3퍼센트보다도 더 높은 것이다. 

1980년대 초 좌우 이념 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생태주의ㆍ여성주의ㆍ비폭력을 내걸고 등장한 녹색정치의 중심에 페트라 켈리가 있었다.   

평화, 생태, 여성 

『페트라 켈리-나는 평화를 희망한다』는 1979년 독일에서 ‘나머지 정치연합-녹색당’(이후 독일 녹색당)을 창당하고 1992년 의문의 죽음과 함께 녹색 신화로 남은 페트라 켈리(1947~1992)의 평전이다. 20여년 간 켈리와 함께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한 영국의 녹색주의자 새라 파킨이 ‘의무감’으로 쓴 책이다.

이 책은 페트라 켈리의 연인이자 녹색당의 오랜 동지였던 게르트 바스티안과 함께 주검으로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던 1992년의 추도식의 광경과 죽음을 둘러싸고 제기된 여러 가지 의문을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독일의 바이에른 지역에서 출생한 켈리는 할머니의 영향으로 정치와 사회에 대한 남다른 식견과 자질을 보이며 성장한다. 바이에른 지역은 히틀러의 선전부 장관이던 헤르만 괴링과 안전기획부장 하인리히 힘러, 아우슈비츠의 사령관 요셉 멩겔레 등이 출생한 나치의 온상과 같은 도시이고 이는 나중에 켈리의 정치적 행보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동독 출신으로 연합군 포로였던 켈리의 아버지 레에만은 전쟁의 상처가 깊은 사람이었다. 낭만주의자의 기질을 지닌 데다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의지가 부족했던 그는 페트라가 여섯 살 때 영영 집을 떠난다.

이후 미군장교와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후 워싱턴의 아메리칸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면서 인종차별, 냉전시대의 쿠바 사태를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휴가를 보낼 작정으로 찾은 체코에서 ‘프라하의 봄’과 소련군의 무력 진압을 현장에서 직접 겪게 된다. 그 후 로버트 케네디, 휴버트 험프리 등의 선거운동에 참여하며 현실 정치를 배우게 되었다. 

특히 여동생 그레이스의 죽음을 계기로 반핵평화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국 군인이던 양아버지가 원자폭탄이 투하된 한 달만에 선봉으로 상륙한 전력이 있었는데 일본에서 태어난 그레이스는 암으로 투병하다 열한 살의 나이로 죽었던 것이다. 페트라는 양아버지가 방사능에 감염되지 않았는지 두고두고 의심하게 된다.

독일로 돌아온 후 1971년 10월 페트라는 유럽공동체 집행위원회 총무부에 취직되어 일하게 되고 나중에 행정 사무관이 된다. 유럽공동체의 집행부 한가운데 들어와 일하게 되었다는 흥분도 잠깐 유럽공동체가 가진 섬뜩한 냉철함에 놀라게 된다. 결정되는 정책은 수백만에서 수천만의 사람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일인데도, 저녁 반찬으로 고등어를 구울까 청어를 구울까 하는 정도로 별다른 고민 없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녀는 거대한 베를레옹 건물 위에서 얌전하게 휘날리는 유럽공동체의 깃발은 종종 “오직 남성뿐인 유럽”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느꼈다.

유럽공동체에서 그리고 환경보호전국연합, 사민당 등에서 정치 경험을 쌓게 된 켈리는 반핵 평화주의운동을 본격 시작하면서 정치를 시작하였고, 1970년대 후반 언론과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페트라 켈리가 주도한 녹색당은 회원 수가 6천에서 1만6천으로 급성장하였고, 1979년 브레멘 지방의회 선거에서 녹색당의 후보들은 간신히 5퍼센트 문턱을 넘어 네 석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83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의회에 진입하였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 

의원 배지를 단 그녀는 핵미사일 반대와 동독 민주화 지원, 티베트 독립을 위한 운동을 벌이며,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했다. 그녀의 정치적 신념은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라는 것이었으며, 녹색당이 벌인 운동은 단순히 환경보호나 공해방지 등의 좁은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그녀의 인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현실정치와 타협을 거부했던 그녀는 현실주의자로 선회하여 연정을 주장하는 다른 녹색당원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녹색정치 돌풍 초기에 집중되던 언론과 시민들의 반응도 식어갔다. 게다가 25세 연상인 게르트 바스티안과의 만남은 불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바스티안은 나토의 사령관으로 미국이 독일에 핵미사일을 배치하겠다고 발표하자 이를 거부하고 사직서를 낸 장군이었다. 켈리를 사랑한 바스티안은 쇼핑과 복사일을 도맡을 정도로 철저하게 비서와 연인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0 년이 흐른 후 켈리는 한창 나이인 45세가 되는 1992년, 동지이자 연인인 바스티안과 함께 베를린에서 죽은 지 3주일이 지난 시체로 발견된다. 3주가 될 때까지 생사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들이 받은 정치적 소외를 짐작할만하다.

사건 초기 경찰은 동반자살이라고 규정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은 KGB, 중국첩자, 네오 나치, 동독비밀경찰 개입설을 끊임없이 제기하였다. 그러나 속시원한 결말은 내려지지 않은 채 종결되었다. 

“아이들 학교에 필요한 돈을 먼저 확보하고, 그 대신 전투기 비용 마련을 위해 우리 공군이 일일 찻집을 여는 그 날, 그 날이 곧 우리의 축제가 될 것입니다.”

부시 정권이 이라크에 다시 폭격을 퍼부으며 전쟁 시나리오를 써내려 가고 있는 오늘, 그녀의 절절한 녹색 희망을 생각한다.
원제목은 『The Life and Death of Petra Kelly』. 여성잡지 『if』의 편집위원인 김재희 씨가 번역한 이 책은 판매한 수익금의 일부를 한국-베트남 평화문화교류기금으로 쓸 예정이라고 한다.
- 양문출판사, 9800원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