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런 메싱 지음 / 김인아 외 번역 / 동녘 출판 / 2017년
언제부터인가 ‘객관적이다’, ‘중립적이다.’라는 말을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감정적’이거나 ‘편향된’, 그래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릴 때 쓰이는 것을 종종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말들이 사전에 있다는 것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무언가가 현실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과학’입니다. 그렇다면 또 다시 질문. 과연 과학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일까요?
『보이지 않는 고통』은 위의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책입니다. 저자인 캐런 메싱은 1976년 생물학과 교수로 갓 임용된 자신이, 노동조합의 의뢰로 방사선에 노출된 노동자의 안전보건에 관한 연구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겪은 일들을 술회합니다.
30년이 넘는 시간이 담긴 이 책은 무척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 자신이 여성 과학자로서 겪은 차별, 노동자와 전문가 간의 계급 차이와 인식의 간극, 과학적 객관성과 노동 현장(삶)의 괴리, 유의미한 연구 결과가 나왔음에도 변하지 않는 노동현장과 연구자가 겪는 무력감 등등……. 하지만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문가에 의해 노동자의 고통이 비가시화 되는 메커니즘입니다.
전문가는 어떻게 노동자의 고통을 비가시화 하는가
노동자의 고통이 비가시화 되는 원인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연구 기금이 모이지 않는 것입니다. 노동자와 과학자가 협업하는 연구는 경영상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새로운 질문들을 도출하는 탐색적 연구는 기피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과학자의 인식과 노동자의 경험 간 격차입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테니스 엘보”라고 불리는 근골격계 질환을 테니스를 두 시간쯤 쳐서 생긴 결과라고 자신 있게 진단하면서도, 반 년 간 주 50시간씩 전선을 잡아당기고 벗겨내는 업무가 같은 근골격계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를 “공감 격차”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셋째, 연구방법의 과학적 객관성이 지니고 있는 한계입니다. “위험이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증가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위험 발생이 예외적인 5% 안에 들지 않아야 한다고 검증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검증되기 위해서는 충분히 많은 표본이 필요합니다. 이를 노동자의 삶을 통해 본다면, 수많은 시간 동안 A라는 위험물질에 노출된 노동자들 중 엄청난 수가 B라는 질병에 걸리고 나서야 ‘과학적’으로 입증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동자의 고통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노동자들은 산업재해 신청 및 보상 과정에서 지난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연구에서 보상에 이르는 직업보건의 모든 체계가 노동자들에게 공감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진화해온 것”입니다. 직업병에 걸린 삼성 반도체․LCD 공장 노동자들이 산재 인정을 받기까지 기나긴 투쟁 과정이 있었고, 현재도 투쟁 중이라는 사실을 생각했을 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객관적인 과학’ 만들어가기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샌드라 하딩은 “어떤 특정한 위치에도 속하지 않는 지식이란 불가능”하다고 하며 “역사적으로 덜 왜곡된 지식과 더 왜곡된 지식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딩은 과학의 객관성을 최대화 하는 방법으로 객관성의 기준을 연구과정에만 적용시킬 것이 아니라, 연구가설과 가설의 배경을 이루는 사회․문화적 맥락(연구자 자신의 제한된 인식) 역시 연구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캐런 메싱의 경험담은 샌드라 하딩이 제시한 문제제기와 대안을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연구가 노동자들의 삶을 더 낫게 만든 것 같지 않다고 자조하면서도, 동료 과학자와 시민들에게 타인의 고통에 함께 귀 기울이자고 제안합니다. 누군가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며 재구성한 과학은 덜 왜곡된, 그래서 더 객관적인 과학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학은 우리의 삶을 조금 더 낫게 만들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