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보다 연간 3개월 더 일하는 한국
2,113시간. 지난해 기준 한국의 취업자 1인당 평균 노동시간이다. OECD가 지난 8월15일 발표한 ‘2016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OECD 34개국의 평균 노동시간은 1,766시간이었다. 이를 하루 법정 노동시간인 8시간으로 나누면 한국의 노동자는 OECD 노동자들보다 평균 43일을 더 일한 것이 된다.
한국이 ‘장시간 노동’으로 악명을 떨친 것은 한두 해의 일이 아니다. 한국은 2008년 이후 7년째 장시간 노동을 하는 국가 순위 2위를 유지하고 있다. 1위는 멕시코로 연간 2,246시간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노동시간이 짧은 국가들은 독일(1,371시간), 네덜란드(1,419시간), 노르웨이(1,424시간) 등으로, 독일과 비교하면 한국 노동자들은 연간 742시간 더 일하고 있다.
장시간 노동체제는 주지하다시피 과중한 노동, 불균등한 노동시간 배분으로 인한 고용창출 제약, 노동생산성과 효율 저하, 일과 가정의 충돌, 여성고용률 제고에 있어 큰 제약, 정규직 시간제 고용의 정착과 확대 제약,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주권 약화 등 다양한 문제를 낳고 있다.
(OECD가 발표한 '2016년 더 나은 삶 지수'에서 한국은 장시간 노동 순위와 일과 삶의 균형 부문에서 조사대상 38개국 중 36위를 차지했다. ⓒOECD)
특히 장시간 노동은 일과 생활의 불균형을 초래함으로써 노동자의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OECD가 지난 6월 발표한 ‘2016년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38개국 중 하위권인 28위를 차지했다. 더 나은 삶 지수는 주거, 소득, 직업, 환경, 삶의 만족, 일과 생활의 균형(Work Life Balance) 등 11개 부문을 평가해 국가별 삶의 질을 가늠하는데, 한국은 일과 생활의 균형에서 사실상 꼴찌인 36위를 기록했다. 일과 생활의 균형 척도 중 하나인 주당 평균 근무시간이 50시간 이상인 노동자의 비율은 한국이 23.1%로 OECD 평균(13%)보다 무려 10%p 높았다.
일과 생활의 균형은 ‘일과 가족, 여가, 개인의 성장 및 자기 개발 등과 같은 일 이외의 영역에 시간과 심리적, 신체적 에너지를 적절히 분배함으로써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으며 삶에 대해 만족스러워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수면 부족을 느끼는 것은 물론, 가족과의 시간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한국 여성의 무너진 일·생활 균형
한국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일과 생활의 불균형을 경험하고 있지만, 맞벌이 기혼 여성 특히 자녀가 있는 여성의 경우 이 같은 불균형은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산업사회에서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남성 외벌이형 모델이 지배적이었다. 이 모델은 남성이 생계를 책임지고, 여성은 가정을 책임진다는 성별 분업에 기초한다. 그러나 여성들의 교육수준과 의식이 높아지고, 경제활동이 증가하면서 남성 외벌이형 모델은 변화하기 시작했고, 전통적인 성 역할에 대한 인식도 많이 변했다. 그럼에도 가사 분담의 변화는 사실상 미미하다. 통계청의 ‘2014년 생활시간조사 결과’에 따르면, 25~39세 남성의 가사 시간은 하루 평균 49분인 반면 같은 연령대 여성은 4시간 9분인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의 가사 시간이 남성에 비해 5배나 긴 것이다. 5년 전 조사와 비교해도 남자의 경우 고작 5분 늘고, 여성은 9분 줄어들었을 뿐이다. 심지어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여성가족패널조사’(2010)에 따르면 남성 외벌이 형태에서 가사를 거의 전담해 수행하는 기혼여성의 노동시간은 7.1시간이나, 여성 외벌이 형태에서 남편의 노동시간은 0.4~0.9 시간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스란히 여성의 불만족으로 이어진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노동패널’(2010) 분석에 따르면 여가에 대한 만족도(전체 평균은 5점 만점에 3.11점)를 조사한 결과, 육아기(0~7세)의 막내자녀를 둔 기혼 여성의 경우 맞벌이(3.07)든 외벌이든(2.79) 기혼 남성(맞벌이 3.12, 외벌이 3.20)에 비해 만족도가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가사 및 육아에 대한 책임이 일차적으로 여성에게 주어지는 탓에 기혼 여성은 경제활동의 제약마저 경험한다. 통계청 ‘지역별 고용조사’를 보면 2012년 여성의 연령별 경제활동참가율은 25~29세의 경우 71.6%였다가, 결혼․육아 등으로 30~39세에 56%대 수준으로 크게 하락하고, 40대 초반부터 다시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즉, 미혼인 20대 후반에는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았으나, 출산과 육아시기인 30대 때 경제활동참가율이 감소하고, 자녀의 취학 후인 40대에 다시 증가하는 M자형 패턴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경력단절을 경험한 여성들이 일을 그만둔 이유로 꼽은 것은 결혼 46.9%, 육아 24.9%, 임신·출산이 24.2% 순이다. 반면 남성의 경우에는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경제활동참가율이 꾸준히 상승하여 30, 40대에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이다가, 이후 다시 감소하는 역 U자형을 보인다.
정부의 빗나간 일·가정 양립 정책
여성이 일을 그만두는 주요 이유로 육아, 임신·출산을 꼽고, M자형의 경제활동참가 패턴을 보이는 것은 일과 생활의 균형을 위해서 일과 가정의 양립이 전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일과 생활의 균형은 일과 가정의 양립과 거의 같은 뜻으로 혼용되어 자녀를 가진 직장여성의 문제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으나, 이는 단순히 일하는 여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여성이 일과 가정의 균형을 이루어 경력단절을 피하고 일을 지속해야 스스로의 경력경로를 개척하는 것은 물론, 여성고용률 제고, 남성 외벌이 모델 아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한 남성의 장시간노동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고령화, 저출산 문제에 부닥친 정부도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 두 팔을 걷고 나섰다. 지난 2014년 박근혜 정부는 “2014년을 일과 가정, 양립의 기틀을 마련하고 경력단절이 없는 나라를 만드는 원년으로 삼겠다”고 밝히면서, ‘일家양득 대국민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은 일하는 방식과 문화를 개선하여 노동자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고, 기업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면서 일과 가정의 균형을 찾아가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캠페인의 5대 핵심 분야로 △생산성과 효율성 제고, △유연근무 활용도 높이기, △회식ㆍ야근 줄이기, △육아부담 나누기, △자기계발 및 알찬휴가 지원을 제시했다. 아울러 일과 가정 양립정책으로 △임신·출산 근로자 보호, △육아·보육 지원, △근로시간 유연화 지원, △일·가정 양립 기업 지원, △기초고용평등질서 확립을 내세웠다.
문제는 정부가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한 정책을 본격 시행한 지 3년째이지만,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24명으로 3년 연속 OECD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는데다 정부 정책에 만족하는 직장인 여성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2016년 8월 직장인 여성 500명을 대상으로 정부의 저출산정책에 대한 인식을 물을 결과, 5.4%만이 만족스럽다고 답하고 56%는 불만족스럽다고 답했다. 연령별로는 20대의 만족 비율이 2.9%, 30대 2.0%, 40대 6.4%, 50대 이상 20.0%로 나타났다. 이들은 또한 현재 자녀 수와 향후 출산 계획까지 합한 평균 자녀수를 1.5명이라고 답했다. 이중 미혼자의 경우 향후 출산할 자녀 수는 1.1명으로, 출산할 계획이 없다는 응답도 38.3%에 달했다. 아울러 육아휴직제도, 유연근무제 등 정부 정책이 실제 기업 내에서 잘 적용되느냐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44.4%가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 그러면서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향후 정부가 주력해야 할 정책으로는 응답자의 절반(47.8%)가량이 ‘일자리 문제 해결’을 꼽았다.
이는 일과 가정 양립 정책의 대부분을 출산휴가·육아휴직 등 양육과 시간선택제 일자리 확대·지원 등에 맞춘 정부 정책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출산율과 고용률 제고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스웨덴은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복지 정책에 기반해 여성의 경제활동 지원을 강화함으로써 저출산 위기를 극복하고, 전일제 중심의 맞벌이 모델을 정착시켰다. 스웨덴의 정책과 사례는 한국의 일과 가정 양립의 발전방향을 위해 참고할 다양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일·가정 양립 정책은 스웨덴처럼
스웨덴은 여성들이 생애주기상의 요구에 따라 육아기 동안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을 제외하면, 전일제 고용을 통한 남녀평등의 실현이라는 목표에 다가가고 있다.
가장 돋보이는 일과 가정 양립 정책은 1974년 도입한 부모휴가 프로그램이다. 출산휴가법제를 대체하며 도입된 이 프로그램에 따라 6개월이던 출산 휴가기간은 1990년 이후 16개월(480일)까지 연장되었고, 휴가 첫 390일 동안에는 총 수입의 80%를 지급받으며 남은 90일 동안은 정액임금을 받는다. 해당 프로그램 도입 이후 여성은 육아로 인해 더 이상 노동시장에서 은퇴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그 결과 양육기 자녀를 둔 여성의 고용률은 OECD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또한 스웨덴은 대표적인 복지국가답게 1990년대 초부터 매년 GDP의 2%이상을 보육 인프라 확보에 투자하고 있어 현재 스웨덴 보육시설의 90% 가량이 공공시설이다.
물론, 스웨덴에서도 2012년 기준 여성 노동자의 34%는 시간제로 일하고 있으며, 스웨덴 시간제 일자리의 90%는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스웨덴의 시간제 일자리는 한국을 비롯해 유럽 다른 나라에서처럼 저임금의 ‘불안한 일자리’를 의미하지 않고, 생애주기에 따른 노동시간 조정의 개념이 크다. 실제 스웨덴에서는 비자발적 시간제 일자리를 택하는 경우가 적으며, 시간제로 일한다 하더라도 전체 여성 시간제 노동자 중 79%는 오랜 시간 일하는 시간제(20~34시간)를 택하고, 짧은 시간 일하는 시간제(1~19시간)의 비율은 21% 정도이다. 시간제에서 전일제로 언제든 전환이 가능한 비중 역시 30%에 이른다. 또한 2002년 시행된 차별금지법에 따라 시간제 노동자들은 경제적 보상 및 처우에서의 직접적인 차별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불이익도 받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라 스웨덴은 육아와 가사부담을 덜어주는 정책 실시와 함께 ‘유리천장’을 제거하고 양성평등을 추구하기 위한 제도개선과 투자에 집중한 결과, 여성고용률은 74.1%, 의회 내 여성 비율은 43.5%,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27.5%에 달하게 되었다. 반면, 한국의 경우 국회 내 여성 의원 비율은 17%(20대 국회), 500대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2.3%, 여성고용률은 49.9%에 불과하다.
거스를 수 없는 일·가정 양립의 흐름
한국의 노동시간 체제는 개발주의 시대의 노동투입형 장시간 노동체제에서 법정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양적으로 변화했다. 그러나 남성 외벌이 모델을 전제로 한 장시간 노동체제와 일 중심의 문화는 좀처럼 바뀌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여가 시간 혹은 가정에서의 시간을 축소하며 일과 삶을 맞바꾸는 등 질적 변화는 크지 않았다.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가 크게 늘었고, 개인의 삶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요구도 커졌지만 개발주의 시대의 노동투입형 체제는 강고해 보인다.
그럼에도 현재의 장시간 노동체제는 변화된 경제 상황, 노동시장의 변화, 인구학적 변화, 가족제도의 변화, 삶의 질 향상을 원하는 노동자들의 요구 등으로 인해 이미 지속가능성을 잃고 있다. 이제 남성 외벌이 모델이 아닌 부부 맞벌이 모델에 맞는 제대로 된 일과 가정 양립 정책이 필요한 때다. 일과 가정의 양립은 일과 생활의 균형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여성 고용률 향상, 출산율 제고, 직장 중심의 삶의 패러다임 변화, 성평등 진전 등 다양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따라서 일하는 기혼 여성뿐만 아니라 기혼 남성은 물론, 미혼 남녀에게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 정부는 고용률 70% 달성이라는 정책 목표를 배경으로 한, 기존의 질 낮은 시간제 일자리 정책이 아닌, 정규직 시간제 일자리 정책, 근무형태의 변경이 가능한 시간제 일자리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 또한 시간제 노동에 대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보육문제 역시 대선 때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가 공약으로 내걸었던 무상보육, 무상 유아교육 정책으로 회귀하고, 보육예산 및 공공 어린이집을 확충해야 한다.
기업 역시 직장 중심 문화, 인력 최소화 전략을 바꾸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장시간 노동 규제와 노동시간에 대한 기업 근로감독 강화가 필요하다. 아울러 육아와 돌봄이 남녀가 동등하게 해야 할 의무이자 권리라는 인식을 지역사회와 공유하는 일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