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통계약직노조 2년이 남긴 교훈

노동사회

한통계약직노조 2년이 남긴 교훈

admin 0 3,656 2013.05.08 09:35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조합의 517일간의 파업은 비정규직 투쟁의 ‘전설’로 자리잡고 있다. 전설로 불릴 수 있는 것은 한통 계약직 조합원들의 극한에 가까운 투쟁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하지만, ‘전설’은 사건이 갖는 의미의 위대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시간이 갈수록 ‘사실’과 ‘허구’의 경계가 서로를 침범한다. 전설에서 허구를 걸러내는 작업이 아마도 과거를 되짚어 보는 의미일 것이다. 한통 파업이 2년이 다 돼 가는 지금 우리가 한통의 517일을 새로 써보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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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워킹보이스 ]

어려웠던 노동조합 설립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이 노조를 설립하게 된 계기는 열악한 임금과 근로조건에서 비롯됐다. IMF 이전에는 보통 150만원을 받던 월급이 경제 위기 이후에는 85만원으로 깎였다. 또한 정부의 공기업 구조조정 정책에 따라 인력감축이 제기되었고 대상1호가 계약직이었다. 

실제로 전화국에 고용된 계약직들은 “3개월 계약만료에 따른 재계약 거부” 형식의 해고가 이루어졌으며, 2000년 11월경엔 7천명에 달하는 계약직이 해고됐거나 통보를 받았다.

2000년 1월, 서울 지국의 몇몇 한통 계약직들이 모여 열악한 현실을 얘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노조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애초엔 한통 정규직노조의 노조원으로 가입하려 했었다. 한국통신노조 규약에는 계약직도 조합원이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통신노조는 ‘희생자구제기금’, ‘단협적용’ 등의 어려움을 들며 계약직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계약직 노동자들은 2000년 3월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설립신고를 하였으나 복수노조 조항에 걸려 설립이 반려되어 왔다. 

한통 정규직노조의 대의원대회는 계약직의 정규직노조 가입도 독자노조 설립도 정규직 조합원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10월11일 한국통신 정규직노조 임시 대의원대회에서 계약직 노조가입조항을 삭제함으로써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조합은 합법적 노동조합이 되었다. 10개월만의 성과였다. 하지만, 이것을 성과라 말해야 하는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계급적 연대가 실패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2년이 흘렀건만 아직도 이것은 풀릴 기미가 없다. 일례로 2002년 하반기 민주노총의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에 서명한 민주노총 조합원은 65만중 10만에 불과하다. 아직도 정규직의 비정규직에 대한 시선은 평등하지 못하다. 

원직복직과 정규직화

2000년 11월30일, 114번호 안내국, 부산 본부에서 천명에 달하는 계약직이 해고됐다. 그리고 12월말 해고예정 통보를 받은 사람이 6천명이었다.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조합이 공사측과 세차례 본교섭과 실무교섭을 했지만 사측은 “계약해지는 경영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교섭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한통 계약직 노조가 12월13일 총파업 선언과 함께 내건 요구조건은 사측이 계약직을 도급으로 전환하는 것을 철회하고 6천명의 해고 통지자에 대해서 철회를 해 달라는 것이 주요 요구였다. 말 그대로 한국통신에서 일을 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요구사항은 겨울을 나는 과정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로 변화했다. 해고철회를 넘어 정규직화로 발전된 것은 단지 요구 사항의 변화만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한통계약직노조 전 대외협력국장 송봉준씨는 말한다. 말그대로 ‘억울한 마음’ 때문에 노조를 만들고 서울로 몰려들었던 개인의 시각에서, 서울 상경 투쟁과 이랜드 투쟁, 대우 자동차 매각 저지 투쟁에 연대하면서 조합원들이 자신들의 고용 문제를 ‘구조적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한 과정이라고 그는 말했다. 다른 한편으로 당시 계약직 노조의 조합원들은 도급 경험을 갖고 계약직으로 있던 소수의 조합원과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주겠다는 사측의 말을 믿고 계속 계약직으로 있던 조합원들이 대부분이었다. 연대 단위의 결합과 함께 요구 조건을 ‘정규직화’로 해야 한다는 말들이 외부로부터 제기되었고, 다수 조합원의 이해와 일치했던 점이 있다.

‘소독’과 ‘골뱅이’

2001년 3월29일 목동전화국 점거투쟁은 ‘최후의 선택’이었다. 목동전화국은 국제 온라인망이 갖춰져 있어 전략적으로 요충지였다. 전화국 점거 투쟁은 보안이 필요한 사안이라 정확한 날짜는 소수의 인원만이 알고 있었다. 공공연맹과 공투본에도 점거투쟁을 하겠다는 것은 알렸으나, 정확한 날짜는 알리지 않았다. 물론 연맹과 공투본은 적극 지원을 약속했었다. 점거투쟁을 위해 한통 계약직 노동조합은 한달 전부터 예행연습과 훈련을 해왔다. 조별로 조합원을 편성해서 산개시킨 후, 불시에 연락을 취해 00전화국으로 몇 시까지 집합하라는 연락을 취하면 조합원들은 뒤를 따르는 경찰들을 ‘소독’한 후 어김없이 지정된 전화국에 모여 집회를 하는 연습을 했다. ‘소독’은 한통 계약직 노동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뒤따르는 경찰들을 따돌리는 것을 의미했다.

점거투쟁을 준비하는 조합원들은 긴장 속에서도 꿈을 갖고 있었다. 롯데호텔의 단위사업장  파업이 전체 노동운동진영의 단결로 해결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의 싸움도 그렇게 번져나가 이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목동전화국 점거는 결과적으로 일회성 점거로, 과격한 ‘한통 해고자’들의 한낱 치기어린 행동으로 보도되었다. 

목동전화국 점거투쟁의 결과가 조직에게 미친 영향은 107일 동안 벌인 파업속에서 키워 왔던 노동운동에 대한 신뢰와 계급 의식이 서서히 소멸해가는 것이었다.

점거 투쟁 이후 조합원들은 투쟁 방향을 두고 ‘대중투쟁’과 ‘소수투쟁’을 주장하는 의견으로 나눠졌다. 대중들에게 한통계약직노조가 왜 싸우고 있는 지를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점거 투쟁을 포함한 선전 활동을 더 해야 한다는 것과 점거투쟁의 조직적 피해를 더 이상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의 인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조합원들이 내린 결정은 ‘소수투쟁’이었다.

목동전화국 점거가 아무 성과없이 끝나면서 조합원들은 이후의 투쟁 방향을 두고 혼란을 겪었다. 점거투쟁을 다시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조합원들 사이에서 지배적이 되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아무리 결의가 높아도 다음 번엔 더 큰 피해가 있을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점거투쟁으로 구속과 구류를 살면서 상경 조합원이 줄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미디어에 보도된 후, 조합원의 부모들과 가족들 또한 조합원들의 투쟁을 만류하기 시작했다. 투입된 노력에 따른 성과보다 피해가 클 것이라는 회의적 생각이 목동전화국 점거투쟁의 결과로 번졌다. 다음으로 점거투쟁에서 나타난 연대투쟁의 초라함이다. 점거투쟁이 올바른 노선이었는가, 아니었는가를 떠나 당시 연대 조직들과 상급 단위의 지원이 거의 없었던 점이 조합원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어졌다

2001년 하반기가 되면서 파업을 해오던 조합원들의 마음속엔 어느덧 두려움과 원망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밤만되면 술을 먹은 조합원들의 원망과 한숨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목동점거투쟁이 별다른 성과없이 끝난 후 연대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면 이후 파업의 장기화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사라지게 했다. 이에 대해 전노조위원장인 홍준표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목동점거 투쟁 이후 흩어진 조합원들을 새롭게 조직화하는데 실패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2001년 9월과 10월 사이가 되면 노조는 금액과 도급문제와 같은 ‘현안문제’에 치중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2002년 봄이 되면서 조직적 후퇴가 조합원들 사이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3월말부터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투쟁을 조직화해야 한다는 생각에 3월말 점거계획을 세우고, 4~5명씩 산개했다. 그리고 지도부는 교섭에 들어갔다. 지도부는 잠정합의안이 나올 경우 조합원을 소집하기로 했다. 4월에 나온 잠정합의안은 조합원에게 3년의 고용보장과 총액 20억원을 개별적으로 지급하고 쌍방고소를 취하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무엇보다도 회사측에서는 교섭 조건으로 노조의 해산을 제시했다. 

4월말 대의원대회. 참가조합원의 80%가 잠정합의안에 찬성했다. 송봉준 대외협력국장은 대의원대회에서 그렇게 많은 인원이 합의안에 찬성할 줄 몰랐다며 스스로도 놀랐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더 이상 계약직으로 남아있을 수 없는 상태에서 계약직 노조가 의미가 없었다고 그는 평가했다. 그러나, 막상 노조해산이 결정나고는 많이들 울었다. 스스로 노조해산을 결정한 그 마음이야 오죽했겠을까.

‘노동조합이 싫다’

비정규 노동운동의 ‘전설’이었던 한국통신계약직노조의 파업은 한국통신과 5월 노조의 해산과 도급업체로의 취업알선을 합의하면서 결국 마무리 되었다. 517일 동안의 파업은 개인들에게 많은 피해를 안겼다. 한 명은 사망했고, 다른 이는 언어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면서 이혼한 경우도 있었다. 

한통계약직노조가 비정규직 문제를 대중화하는데 큰 기여를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많은 고민이 있다. 노조 해산과 함께 지역마다 동지회가 결성되어 한 달에 한 두 번씩 만나고 있지만, ‘노동조합’이라고 하면 설레설레 고개부터 가로젓는다. 노동자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단결해야 하는 것에는 맞장구를 치지만 노동조합은 싫다. 그들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대한 경험은 이렇게 남아있다. 이 부분은 아마도 지금 노동운동에 몸담고 있는 개인과 조직들이 모두 고민해야 할 지점일 것이다.

한통계약직노동조합이 노동운동에 남긴 것은 비정규직 문제를 본격적으로 고민하도록 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 문제는 결코 단위사업장에서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점이다. 단위사업장의 비정규직 투쟁은 극한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았으며, 결국 조직적 피해만이 남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법제도적 개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정규직과의 연대는 여전히 중요

한통계약직노조의 위원장에서 현 민주노총 부위원장에 당선된 홍준표 부위원장의 어깨에는 많은 짐이 걸려 있다. 취재를 위해 만났던 그의 얼굴엔 상당히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그의 한 손에는 조만간 나올 한통노조백서의 초고가 있었다. 

“지금과 같은 민주노총의 구조로는 도저히 비정규직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비정규직 조직화에 대한 중앙 조직의 역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비정규직 조직화를 담당하는 부서가 있지만, 인원도 적을 뿐만 아니라 이 일만 전담하고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는 민주노총에 ‘비정규실’을 만들겠다고 했다. ‘비정규실’은 비정규 관련 사업을 집중적으로 고민하고 집행할 수 있는 전담 부서를 뜻한다. 중앙의 전담부서를 만들어 비정규직 관련 사업을 일원화시키는 것이다. 비정규직은 단지 정규직의 반대를 뜻하지 구체적인 측면에서는 고용형태별로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런 다양성에 맞는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연맹별로 자신들의 업종에 독특한 비정규직들을 묶어내는 고유의 사업들이 펼쳐져야 한다. 이런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다. 비정규직 조직화를 전문으로 하는 활동가 양성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는 돈의 문제다. 

비정규직의 문제는 비정규직 홀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정규직과 연대할 때만이 해결될 수 있다는 말도 그는 빠뜨리지 않았다. 

한통계약직노동조합은 지금 사라졌지만 그들의 투쟁은 민주노조운동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화는 사용자측에서 조장하기도 했지만,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자신의 고용을 보장하는 안전판으로 생각하며 방치하고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 과정에서 근로조건은 더욱 차이가 나고 그럼으로써 이 악순환은 계속 되고 있다. 

비정규직이 50%를 넘어선 지금 전체 노동자의 둘 중 하나는 비정규직이란 사실은 ‘너’ 아니면 ‘내’가 비정규직임을 뜻한다. 이제 더 이상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로 뭉쳐야 할 때가 온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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