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수 "입사 동기에서 30년 삶의 동지로"

노동사회

임재수 "입사 동기에서 30년 삶의 동지로"

admin 0 5,249 2013.05.08 09:05

노동운동보다는 신앙인으로서 노동운동을 알았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노동운동을 해야한다고 생각했거든. 내게는 노동운동이 곧 신앙이었어. 그래서 사람들이 박순희라 부르면 나도 어색해. 내 이름을 박 아녜스로 아는 사람이 더 많을 거야. 수녀원에 입회하려던 것을 노동사목으로 방향을 바꿔 노동자가 된 것을 두고 평범하지 않다고 하지만 내가 살아온 삶이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야. 오히려 내 삶을 평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이 사회의 문제가 아닐까 싶어. 거꾸로 된 사회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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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부지부장은 임 총무를 비롯하여 민주노조운동에 앞장섰던 동지들과 관악산에 모여 노동운동에 관한 토론을 하곤 했다. 사진은 1983년 여름 관악산을 찾은 모습. 원안은 임재수 총무와 박순희 부지부장 ]

노동사목의 길로

1974년 원풍모방에 입사하여 1년 만에 대의원을 맡고 부지부장이 된 박순희 씨는 스무살이 되면서 고민에 빠졌다. 혼인을 할 것인지 수녀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였다. 지도신부의 설득으로 박 부지부장은 수녀가 되는 대신 노동사목을 하기로 결심하고, 1966년 대한모방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6년 후 대한모방을 나온 그는 당시 회사로부터 폭행을 당해 입원 중이었던 원풍모방(당시 한국모방) 지동진 지부장 면회를 간 자리에서 노조활동을 함께 해보자는 부탁을 받아 원풍모방에 입사하게 되었다.

민주노조운동에 열성으로 매달린 결과, 박 부지부장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사회정화 조치로 섬유노조에서 제명되었고, 이것을 빌미로 회사에서도 해고되었다. 이어 1982년 원풍모방노조가 공권력의 폭력과 언론이 합세한 민주노동운동 파괴 작전으로 무너진 '9·27 사태' 때, 다친 조합원들을 병원에 옮기고 집을 구해주었다는 이유로 제3자 개입금지 조항에 걸려 1년6개월의 형을 받고 수감되었다.

jyoung_04.jpg10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한 박 부지부장은 1983년 8월15일 특사로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그는 서울에 노동운동 역량이 집중되어 있음을 보고 전주로 내려가 전주교구에서 노동사목 일을 시작했다. 노동사목이라곤 전혀 없던 불모지에서 1984년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를 세웠고, 노동상담, 교육, 조직, 문화활동, 노동야학 등을 맡았다. 그리고 6년 동안 전주에서 활동한 다음 대전으로 옮겨 맞벌이 노동자를 위한 샘골 놀이방을 세우는 등 3년 동안 노동사목 활동을 했다. 

서울로 다시 올라온 박 부지부장은 노동자복지협의회와 노동운동협의회에도 참여했고,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세워진 이듬해 전노협 지도위원으로 일을 도왔다. 그리고 1995년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회장에서 현재 민주노총 지도위원까지 활동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어느 모임에서 박 부지부장이 자신을 소개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안녕하세요, 박 아녜스입니다." 노동운동을 하시는 분이 분명한 데 천주교에서 부르는 본명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모습이 남다르게 보였다. 이에 대해 박 부지부장은 어렸을 때부터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 신앙인으로서 노동사목을 하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박 아녜스를 자신의 이름으로 생각하고, 또 사람들도 그렇게 알고 있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원풍모방노조 부지부장, 해고, 구속,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대표, 민주노총 지도위원, 국민승리21 부대표, 민주노동당 당기위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상임대표로 이어진 삶의 긴 여정에서 가슴에 남아 있는 한 명을 꼽으라 했을 때 박 부지부장은 오랜 고민 끝에 한 명의 기억과 함께 손수 조사한 약력까지 들고 사무실을 찾아주었다. 

원풍모방 입사동기 임재수 총무

박 부지부장이 입사한 때인 1974년 원풍모방에 입사한 임재수 총무는 같은 직포과에서 양복짜는 기계를 고치는 일을 했다. 같은 부서에 같은 반이기도 했던 임 총무는 들어온 지 2년 만에 대의원이 되었다. 박 부지부장이 보기에 유머도 많고, 사람관계를 잘 유지했던 임 총무는 직포과 활동을 믿고 맡길 정도로 노조활동에도 열성이었다. 그리고 1978년 노조 총무직을 맡게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박 부지부장과 임 총무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임 총무는 대자보라든지 서류정리와 같은 일을 꼼꼼하게 챙기면서 신나게 일을 했다. 박 부지부장은 임 총무가 1970년대에 받았던 크리스찬 아카데미 교육자료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모아 놓았다며 그의 열성을 증명해 보였다. 박 부지부장과 임 총무도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에도 원풍모방노조에서 새로 선출된 대의원교육을 크리스찬 아카데미에 의뢰하여 진행하기도 했다. 

임 총무와 함께 노동자로서의 긍지와 사명감을 부단히 알려온 노조 활동도 1980년 사회정화 조치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고된 다음 박 부지부장은 수배 중에도 조합원들을 일일이 만나러 다녔고, 이때 박 부지부장이 만난 사람 또한 임 총무였다. 마치 간첩이 접선하는 것처럼 조심스레 만났다며 당시의 아슬아슬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박 부지부장이 임 총무를 기억하는 특정한 시기가 따로 있지 않았다. 1974년 원풍모방에 함께 입사한 후부터 지금까지, 같은 공간에 있지 않은 시간조차도 그와 임 총무는 끊임없이 서로를 챙기는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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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풍모방노조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와 함께 대의원 교육을 실시했다. 사진은 1977년 수원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원풍모직 직포와 대의원 교육을 마치고 참가자들과 함께 한 자리. 원안은 임재수 총무와 박순희 부지부장 ]

정화조치 후 삼청교육대로

정화조치로 여자 간부들은 시골집(지방)으로, 남자 간부들은 삼청교육대로 보내졌다. 그리고 임 총무는 당시 노조활동에서 핵심적인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80년 12월 보안사에 잡혀가 심하게 고문당했다. 

보안사에서 이십여 일 동안 조사를 받은 임 총무는 12월30일 원주38사단에 끌려갔고, 1981년 1월23일에서야 나왔다. 박 부지부장은 임 총무가 삼청교육대에서 풀려 나온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갈비뼈가 세대나 부러지고, 짧게 자른 머리는 군화발에 맞아 심하게 상처가 난 상태였다.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뼈에 가죽만 씌워놓은 것 마냥 해골처럼 골격만 남은 채로 나오는 임 총무의 모습을 떠올리며 박 부지부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는 보안사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동안 어디로 끌려갔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임 총무 부인이 충격으로 유산한 가슴아픔 일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우선 치료를 하는 게 급선무였다. 어느 정도 치료된 후에도 임 총무는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있었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임 총무 처갓집 동네에서 농사지은 고추, 마늘, 젓갈을 팔 수 있게 되었고, 박 부지부장과 함께 여기저기로 고추와 마늘 자루를 이고 다니면서 팔았다. 

한독운수 노조위원장 시절

박 부지부장은 1983년 전주교구로 내려가 전주에서 노동사목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박 부지부장은 임 총무가 택시운전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때가 1987년이었는데 블랙리스트가 잠시 풀려 봉천동 소재 한독운수에 취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한독운수는 택시회사로는 124대 택시에 250여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큰 회사였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박 부지부장은 임 총무가 한독운수 노조위원장이 되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이 소식에 박 부지부장은 원풍모방 총무일을 맡아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도 또다시 노조위원장이 되었냐며 임 총무에게 잔소리했지만 임 총무는 자신의 삶을 노동자의 삶으로 받아들인 것뿐이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독운수 노조위원장의 일을 해나갔다.

그러나 한독운수에 민주노조를 세운 임 총무를 회사에서 곱게 볼 리 없었고, 한독운수노조가 단체행동에 들어가자 1992년 회사는 그를 해고했다. 그리고 임 총무는 그 다음해에 구속되었다. 전주에 있던 박 부지부장은 임 총무 부인과 함께 몇 차례 면회를 갔는데, 그러면서 그를 변호하던 이원영 변호사를 알게 되었다. 구로공단 앞에서 노동법률, 특히 산재문제를 다뤄왔던 이원영 변호사는 임 총무의 성실한 태도를 눈여겨보았다가 임 총무가 석방된 다음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고,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박부! 임총무!"

전주에 있던 박 부지부장은 1988년 노동자대투쟁 후 대전에서 3년 동안 사목활동을 한 다음 1991년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같은 공간에 있지는 못했지만 박 부지부장과 임 총무는 노동운동 공간에서 언제나 연락의 끈을 놓지 않았다. 현재 임 총무는 이산 법률사무소에서 공증실장을 맡고 있다.

박 부지부장이 집회에 워낙 많이 참가해 매스컴에 자주 나와 텔레비전을 더 보게 된다는 임 총무는 지금 나이를 생각해서 좀 덜 싸우라고 충고한다. 그러면서도 박 부지부장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기사나 자료가 신문에 실리면 하나도 빠짐없이 스크랩을 해놓고 전화로 알려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박 부지부장과 임 총무는 70년 민주노동운동동지회(70민노회)와 원풍모방 상집간부 모임에서도 만나지만, 이런 자리가 아니더라도 박 부지부장은 틈틈이 임 총무의 사무실을 찾는다. 이번 민주화운동보상 신청을 할 때도 원풍모방 노동자들 모두 그의 사무실에 모여 준비했으며, 임 총무가 거의 모든 서류를 작성했다고 한다. 또, 원풍모방 조합원 중 법적 어려움을 겪는 조합원을 상담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박 부지부장은 임 총무와 1974년부터 만나오면서 한번도 의견충돌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임 총무는 조직이 겪는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을 융통성 있고, 균형감 있게 해결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문제를 풀어간 그의 모습은 박 부지부장을 비롯한 여러 조합원들에게도 믿음을 주었다. 

지금 그는 변호사 사무실 업무가 쉽지 않을 텐데 끊임없이 노력하며 새로운 변신을 추구하고 있다. 박 부지부장은 1970년대 노동운동을 하고 현재까지 현장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나마 잘 알려져 있지만 임 총무처럼 당시 노동운동을 함께 했음에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며 이런 사람들을 알려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원풍모방노조 운동을 시작으로 인연을 맺어온 지도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서로를 "박부, 임총무"라 부른다는 박 부지부장은 지난 30년의 회상을 마치려는 듯 빛 바랜 사진에서 조심스레 눈을 뗐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6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