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민족국가 수립의 길

노동사회

통일민족국가 수립의 길

admin 0 3,529 2013.05.07 11:22

1. 8·15 56주년의 의미

우리는 해마다 8월 15일이 되면, 그 날을 '해방의 날' 이라고 생각하고, 성대한 기념 행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속에서, 1945년 8·15가 우리 민족이 진정으로 외세의 굴레에서 '해방된 날'이었느냐는 데 대해 냉철한 반성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1945년에 '해방'되었다는 우리 민족은 반세기가 넘도록 분단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으며, 통일된 민족국가도 수립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데, 우리가 이런 상태에서 스스로를 '해방된 민족'이라 자처하는 것이 과연 적절할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8·15 56주년을 맞고 있습니다. 이 글은 오늘의 분단된 민족 현실을 놓고, 우리는 과연 8·15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민족의 내일을 위해서 지난번 '남북공동선언'을 어떻게 평가하고, 그 이행 실천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간단히 생각해보려는 것입니다.

1945년 8월 15일이 2차 세계대전 '종전의 날'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1945년에 전승국 미국과 소련에 의해 국토가 남북으로 분할 점령되고, 뒤이어 1948년 남북에 2개 분단 정부가 수립된 사실이 그대로 민족의 '해방'과 '자주독립'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는, 남과 북 어느 한쪽 정부가 우리 민족 전체의 정통성을 가지는 '민족국가'라고 인식하고, 8·15가 조국광복을 이룩하게 한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평가일 뿐, 객관적 현실이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설사 남측이나 북측의 어느 한쪽 정부가 우리 민족의 유일한 '민족국가'라 가정하더라도, 1948년에 그런 정부를 세울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1945년 8·15가 민족 '해방의 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1948년에 그와 같은 정부를 세우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분단정부이며, 분단국가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정부는 우리 민족의 자유 해방을 보장하는 주권국가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민족'이란 그 구성원들이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며, 더불어 사는 하나의 유기적 운명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민족국가'란 그와 같은 '민족공동체'의 운명을 책임지는 주권적 실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1948년이래 우리 민족의 현실은 국토의 절반, 민족구성원의 1/3∼2/3 이상이 그 국가주권으로부터 소외된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어떤 유기적 운명공동체도 자기 몸의 일부가 아직도 부자유한 상태에 매어 있거나, 자기 몸이 동강난 상태에 있을 때, 스스로 '해방된 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민족'의 입장과 '국가'의 입장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를 우리의 유일한 '민족국가'로 생각하는 입장에서는, 1948년에 정권 수립을 가능하게 한 미국이나 소련을 '해방자'로 생각할 수도 있고, 1945년 8·15를 '해방의 날'로 인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 Korea(고려) 민족의 입장에서는 1945년 8·15 직후 Korea에 상륙한 미군과 소련군은 2차 세계대전에 승리한 전승국 군인에 불과하며,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에 대한 분할점령자였습니다. 따라서 1945년 8·15는 '민족해방'이 아니라, '민족분단'이 시작된 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8·15 56주년을 맞게 된 우리로서는, 1948년이래 우리 민족이 남과 북에 두 개의 국민국가(nation-state)를 세우기는 했으나, 하나의 민족국가(nation-state)를 세우지 못했다는 객관적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945년 8·15의 의미를 분단 원년으로 이해하고, 21세기의 세계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진로를 어떻게 개척할 것인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지난해 2000년 6월15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 정상들은 평양에서 회담을 갖고,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했습니다. 

'남북공동선언' 제1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민족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하면서, 제2항에서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나가기로 하였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국가연합' 내지는 '연방국가'의 형태로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나가기로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선언은 민족통일문제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그 어느 한쪽이 고려민족의 민족국가인가? 
둘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어떤 형태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인가?
셋째, 통일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과제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입니다.

2. 민족국가란?

우리 고려(Korea) 민족이 근대적 nation-state ('국민국가' 또는 '민족국가'로 번역됨)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국 말, 그리고 조선왕국이 일제에 병탐된 뒤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노력을 '민족해방운동' 또는 '독립운동'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런데 고려 민족의 근대적 국민국가 수립운동은 1948년 고려 반도의 남과 북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분단국가를 세우는 것으로 귀결된 채, 반세기가 흘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고려 민족의 '민족국가'란 남과 북에 현존하는 '대한민국' 및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 국가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되는 것일까요? 

'대한민국' 헌법 제3조에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제1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 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이다”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최고 법규범인 헌법 규정에 비추어 볼 때, 현재 고려 반도를 통치 지배하며, 고려 민족을 대표하는 국가가 두 개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고려 민족에는 두 개의 '민족국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의 같은 고려 민족을 대표하며, 통치하는 '민족국가'가 두 개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족'이란 하나의 유기적 운명공동체로서 그 민족의 의사를 대표하는 국가란 한 개밖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50년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자의 헌법 논리에 기초하여 각기 자기만이 고려 민족을 대표하며, 고려 반도를 통치하는 유일한 정통 정부라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리고 쌍방 국가는 다른 일방을 '괴뢰 정권'이라 호칭하고, 그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정책을 추구했습니다. 따라서 1992년에 남북 쌍방이 조인 비준한바 있는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라 통칭됨)나, 이번 남북 정상들이 발표한 「남북공동선언」은 모두 앞에 말한 각자의 헌법규정에 위반되는 초헌법적 행위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통치행위론'을 운운해도 법치주의의 원리에서 말하면 '위헌'임이 분명합니다.

문제는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모두 전체 고려 반도를 지배 통치하고, 전체 고려 민족을 대표하는 '민족국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유일한 '민족국가'로 자처했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모두 1948년 고려 민족 구성원들이 각각 건설한 '국가'(state)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국가들은 각각 당해 지역 주민을 대표하고, 당해 지역을 지배 통치하는 '국민국가'지만, '민족국가'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반도를 놓고 벌어진 민족 내적 및 세계적 패권투쟁은 남북 쌍방 정권들이 자기 욕망을 헌법에다 규정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반세기 동안 싸움질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 냉전 대결 시대에 만들어진 헌법 규정들의 한계를 인식해야만 할 필요가 있음을 알게됩니다.

3. '국가' 통일의 몇 가지 길

그러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앞으로 하나의 '민족국가'를 건설하려고 할 경우, 어떤 통합의 길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남과 북에 현존하는 두 개의 국가들을 통합하려고 할 경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남측국가가 북측국가를 타도하고, 남측 헌법대로 하나의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길. 
둘째, 북측국가가 남측국가를 타도하고, 북측 헌법대로 하나의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길.
셋째, 남측국가와 북측국가가 합의에 의해서 하나의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 쌍방 모두 현존하는 헌법을 폐기하여, 평화적으로 하나의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길.
넷째, 남측국가나 북측국가가 서로 자기 헌법을 일부 수정 또는 폐기하고, 쌍방이 합의하는 헌법에 따라 연방형태로 하나의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길.
다섯째, 남측국가와 북측국가가 모두 '민족국가'가 아닌 분단국가(divided-state)임을 인정하고, 서로 상대방의 국가(state)를 당해 지역의 정당한 통치실체로 인정하는 국가연합을 만들어, 일정한 시간 후 동질성을 회복한 다음 하나의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길.

이상 다섯 가지 길 중에서 첫째와 둘째 길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지난 반세기 동안 추구해 봤던 길입니다. 냉전 대결시대에 모든 사람들에게 통일이란 첫째 길 아니면 둘째 길이라며, 양자택일이 강요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첫째, 둘째 길은 남과 북이 그 동안 피 흘리는 노력을 경주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실현되지 못한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국민의 정력을 쏟을 가치가 있는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옳을지는 사람에 따라 판단을 달리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첫째, 둘째 길은 서로 상대방의 타도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쌍방이 모두 피해를 보고, 잘못하면 비극적 공멸의 운명을 초래할 뿐 통일을 실현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과거 50년 전에 비하면 남북 쌍방의 살상 파괴력은 엄청나게 커졌으며, 남북이 모두 세계 속에서 상호의존관계를 심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첫째 둘째 통일의 길은 그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타도를 추구하며 반세기를 지낸 우리 민족으로서는 역사가 진정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물어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첫째, 둘째 길은 역사의 요청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가 우리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읽어 공존공생의 길을 찾는 길이야말로 역사의 요청에 합당한 통일의 길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셋째 길은 1954년 '제네바회담'에서 남북 쌍방이 '유엔 감시하 인구비례 총선거', 또는 '중립국 감시하의 총선거' 후 의회에서 통일헌법을 제정하고, 남북 쌍방 헌법을 폐지하여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하자고 제의한 이래, 남북 쌍방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주장한 통일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 남북 쌍방이 직접 대화와 협상을 해보지도 못한 채, 서로 선전용으로 사용된 통일의 길입니다. 

쌍방 국가가 합의하는 총선거 방식으로 통일한다는 것은, 남북 쌍방 국가가 합의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매우 쉬운 방법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실현 곤란한 통일방안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유지를 고집하지 않을 수 없는 남북 쌍방 국가 당국이 총선거 방식에 합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총선거란 쌍방 중 어느 일방은 다수가 되어 승리하고, 다른 일방은 소수가 되어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 필연적인 정치제도입니다. 그런데, 쌍방은 그 어느 쪽도 선거 결과 자기들이 소수가 되어도 좋을 그런 선거방식을 수락하겠다고 동의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넷째 길, 연방국가 방식에 의한 통일의 길이란, 1960년대이래 북측 당국이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그 동안 남측은 북측의 '연방제통일방안'은 미군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남한 내 통일운동단체들의 활동보장 등을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와 같은 전제조건들이 충족되면, 결국은 대한민국을 타도하고, 남쪽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치영역을 확장하려는 전략에 불과하다고 비판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1990년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을 통일한 방식도 이 길이었습니다. 다만 독일 통일의 경우, 쌍방의 헌법을 합의에 의하여 일부 수정 또는 폐기한 것이 아니라, 서독 헌법은 유지하고 동독 헌법을 폐지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흡수통일'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다섯째 길, 국가연합식 통일방안이란 대체로 1980년대이래 남측의 정당들이 주장해온 통일 방안입니다. 그러나 국가연합식 통일방안은 그것이 남북 쌍방에 현존하는 국가적 실체를 서로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이유로, 북측 당국에 의해서 민족을 영구분단 하려는 획책이라고 비판받아오던 것입니다.

그러나 2000년을 맞아 남북 쌍방당국은 6.15 '남북공동선언'을 통해서 넷째와 다섯째 통일 방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남북공동선언이 인정한 바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가지는 공통성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이 두 가지 통일방안이 가지는 공통성은 그것이 모두 '복합국가식 통일방안'이라는 점입니다. 복합국가식 통일방안이란, 두 개 이상의 국가가 연합해서 하나의 '연합국가' 또는 '연방국가'를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통일방안은 두 개 이상의 국가적 실체가 존재할 것을 전제로 하는 통일방안입니다. 

둘째, 이 두 가지 통일방안은 이미 존재하는 두 개 이상의 국가적 실체가 서로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 존중하며, 평화적 공존관계를 가질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기존하는 두 개 이상의 국가가 서로 상대방을 타도하려는 패권투쟁을 하는 상태에서는 '국가연합'도 '연방국가'도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 두 가지 통일방안은 통일된 하나의 '민족국가'를 수립하되, 일시에 단일한 정치 경제체제를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서로 다른 체제를 인정하면서 점차적으로 추구한다는 공통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4. '남북공동선언' 2항 통일 방안이 갖는 의의와 문제점 

저는 앞에서 첫째, 둘째, 셋째 통일의 길이 가지는 문제점과 한계에 관해서는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넷째와 다섯째 통일방안에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남북공동선언'의 의의와 문제점을 검토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남북정상들이 통일문제에 관해서 쌍방이 주장하고 있던 통일방안에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선언한 것은 앞으로 민족통일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남북공동선언' 2항은 남북 쌍방 당국이 상대방이 주장하는 통일방안에 대해서 처음으로 서로 신뢰를 표시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남북 쌍방은 상대방이 주장하는 통일방안에 대해서 “우리측을 타도하려는 전략이다” 또는 “분단상태를 영구화하려는 음모다”라며 불신하여 왔습니다. 그리하여 상대방이 주장하는 통일방안을 찬성하는 발언을 하면 형사처벌까지 하였습니다. 

그랬던 쌍방이 상대방의 통일방안과 자기 측의 통일방안에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이것을 긍정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의 상호 불신관계를 청산할 의사가 있음을 표명한 것입니다. 이는 서로 타도를 추구했던 지난날의 정책에 대한 180도 전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타도 추구에서 공존공생 추구로 정책방향을 바꾸는 것은 역사적인 전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남북 쌍방의 통일 방안은 모두 복합국가식 통일방안이며, 그것은 두 개 이상의 국가가 서로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고, 공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필수 조건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복합국가 구성체의 일부가 다른 구성체들에 대한 '타도'나 '흡수'를 추구할 경우 쌍방 합의에 의한 '국가연합'이나 '연방국가'는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반세기 동안 상대방에 대한 타도를 추구하던 남과 북이 평화롭게 함께 더불어 사는 국가연합 또는 연방국가의 단계를 거쳐 통일 민족국가를 추구하겠다는 것은 중대한 역사적 전환이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북공동선언'이 우리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서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이번 '남북공동선언'에는 남북간의 평화정착 문제에 관한 분명한 합의내용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50년 6월 25일∼1953년 7월 27일 기간에 치열한 전쟁을 치렀고, 그 후 50여년 동안 소모적, 적대적 군비경쟁을 하는 불안정한 휴전협정 체제 하에 있었습니다. 이런 두 당사자가 '국가연합'이든 '연방국가'이든 함께 더불어 사는 하나의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면, 지난날의 전쟁에 관한 종전처리, 즉 평화협정의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은 필수적 조건입니다. 그런데 쌍방간의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소모적 군비경쟁을 종식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런 합의 없이, 통일방안 문제에 합의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6·15 '남북공동선언'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원수('남북공동선언'에서는 “남북 정상”이라고 표현되어 있음)가 서명 발표했습니다. 따라서 이 공동선언은 분명히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가의사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공동선언'에는 남북 쌍방이 서로를 국가적 실체로 인정하는 문제에 관해서 분명한 언급이 없습니다. 

지난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서는 “쌍방 사이의 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했었습니다. 이 경우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닌 … 잠정적 특수관계”라고 한 것은, 이 합의서가 남북 쌍방이 서로를 별개의 '민족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6·15 '남북공동선언' 2항에서 쌍방이 복합국가식 통일방안에 의하여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것은 쌍방은 서로를 국가(state)로 인정한다는 것인지 아닌지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남북 쌍방이 서로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쌍방 사이에서는 '국가연합'(confederation)이든, 연방국가(federation)이든, 복합국가식 통일은 성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통일 '민족국가'를 지향하는 입장에서 남과 북은 서로를 '나라'로 인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남북이 '복합국가식 통일'을 지향하자면, 서로를 하나의 국가(state)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못한 점이 이번 '남북공동선언'의 두 번째 문제점이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셋째, '남북공동선언'은 통일 문제에 관해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실천에 관해서는 아무런 보장이 없는 것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남북 쌍방 중 어느 일방이 이 공동선언을 무시하는 행동을 할 경우, 이 선언은 하루 아침에 휴지 쪽이 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것입니다. 특히 어느 일방의 권력 담당자가 바뀌었을 경우 신임 권력자가 이 '남북공동선언'을 승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하면, 남북관계는 다시 과거의 냉전 대결적 적대관계로 회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현재의 남북관계는 아직도 탈냉전의 과제를 완수한 것도 아니며, 통일 '민족국가' 수립을 시작한 단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냉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5. 민족 통일을 위한 당면과제

21세기를 맞으면서 우리 민족이 통일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해결해야만 할 과제는 다름이 아니라 이번 '남북공동선언'이 갖고 있는 한계점, 문제점들을 극복 해결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첫째, 남북 쌍방간의 전쟁종결처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북·미·중 '4자회담'을 하루속히 속개하여 평화협정을 체결해야만 합니다.

평화협정의 당사자 문제를 놓고, 평화협정 당사자는 “남북간이어야 한다”, “북미간이어야 한다”고 종래 주장을 고집하는 것은 비현실적 형식론입니다. 남·북·미·중 4자는 전쟁 당사자였습니다. 따라서 전쟁 종결 처리를 의미하는 평화협정은 실질적인 주요 전쟁 당사자들 4자 사이에서 체결하는 것이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협정에서 주한미군 문제도 논의되어야 할 것은 당연하며, 최소한 주한 미군의 적대적 지위는 변경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이 평화협정에서는 미군을 포함하는 남북간 군비통제 내지 군비축소 문제에 관한 확실한 규정을 도출해야만 합니다. 미국 측이 고려반도에서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평화협정 문제와 분리해서, 북측의 핵 개발이나 미사일 개발을 일방적으로 제약하려 한다면, 이는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패권주의일 따름입니다. 자국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아무리 약소국이라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기 수호를 위해 자신의 무기를 가지는 것이 주권국가의 정당한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남북간 상호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쌍방의 헌법과 법률을 개폐하는 문제, 1992년에 조인 비준된 '남북기본합의서'가 국제법적 효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 국회 동의 절차를 밟고, '국제연합' 사무국에 등록하는 문제 등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앞으로 개최될 '남북당국자회담'에서 조속히 이를 해결하여야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제1조는 모두 남과 북의 분단국가를 전체 민족의 '민족국가'로 인정하려 한 것이기 때문에,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가 남과 북이 서로를 “인정 존중한다”고 한 사실이나, '남북공동선언' 제2항의 복합국가식 통일방안과 상충하는 것입니다. 쌍방 당국은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와 작년의 '남북공동선언'이 서로 조화할 수 있도록 하루속히 '국가'의 개념에 관해 분명한 해석을 내려서 발표하도록 합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남북기본합의서'에서의 '나라'라는 말은 '민족국가'를 의미하고, '남북공동선언'에서 '복합국가식 통일방안'을 수용한 경우의 '국가'는 '민족국가'(나라)가 아닌, '국민국가'(state)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남과 북의 관계를 “잠정적 특수관계”라고 하더라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쌍방이 모두 서로를 실효적 지배지역에서의 '국가적 실체'로 인정하면서, 앞으로 하나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것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봉건시대의 왕국이나 제국들이 근대적 국민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어떤 민족은 단일한 국민국가를 건설했기 때문에 '국민국가'와 '민족국가'는 동일한 것이지만, 어떤 민족은 복수의 '국민국가'를 건설하거나, 다수 민족이 연합한 '연방국가'를 건설했기 때문에 근대적 nation-state를 때로는 '민족국가'로 번역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합중국은 nation-state지만, '민족국가'라고 할 수 없고, 또 '이라크' 역시 nation-state지만, '민족국가'는 아닙니다. 아랍 민족은 여러 개의 왕국 또는 국민국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민족국가'가 아닌 '국민국가'로 보고, '남북기본합의서' 제1장 남북 화해의 규정에 따라 상호 인정 존중하면서, '남북공동선언'대로 함께 통일 '민족국가'를 건설해 가자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고려 민족은 하나뿐이기 때문에 Korea에 두 개 이상의 '민족국가'는 있을 수 없지만, 두 개 이상의 '국민국가'는 있을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과 북이 '남북공동선언'을 토대로, 복합국가식으로 통일 '민족국가' 건설을 추진해 가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 민족사에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작년의 '남북공동선언'이 뜻밖의 사고로 유실되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그 이행 실천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일이 시급합니다. 국가 정상들의 '공동선언'이란 국가간의 조약과 같은 국제법적 구속력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국가원수간의 '신사협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원수(국가의사의 최종결정자)가 바뀌었을 경우, 전임자가 발표한 '공동선언'을 후임자가 승계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의 남북관계를 놓고 말할 때, 이번 '남북공동선언'보다는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가 국회의 비준동의 절차를 밟아 국제연합에 등록할 경우에는, 더 확실한 국제법적 구속력을 갖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북 쌍방당국이 진심으로 '남북공동선언'을 이행 실천할 의사가 있다면, 하루속히 '남북공동선언'에 따른 '남북통일협정'을 체결하도록 해야만 합니다. 물론 이 '남북통일협정'의 내용은 우리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할 또 하나의 과제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서로 체제를 달리하는 남과 북이, 서로 타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롭게 하나의 '민족국가'를 건설하고 더불어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고려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 상황이 '남북공동선언' 이행실천에 장애가 되는 상황으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6·15 '남북공동선언' 1주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세계적 초강대국 미국 대통령의 정책 변화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여실히 통감하고 있는 실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끝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현대 세계의 정치는 강대국들의 패권 추구에도 불구하고, 각국 국민들에 의한 정치이기 때문에, 남북간의 문제도 남북 주민들이 '남북공동선언'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이행 실천을 뒷받침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북공동선언'에 서명한 국가원수 중 그 어느 일방이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게 되거나, 또는 불의에 사망하든 선거에 의해서 변경될 경우, 새로운 국가원수가 '남북공동선언'에 뜻이 없으면, 한반도 사태는 언제라도 다시 냉전 대결 시대로 복귀할 수 있는 현실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남과 북의 국민이 항상 깨어 있어서, 겨레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차기 집권자가 외세의 압력에도 흔들림 없이, 굳건한 입장에서 반민족적 후퇴를 하지 못하도록 예방하기 위해 국민적 지지를 집중하도록 노력해야만, 20세기 초의 망국이래 우리 민족이 겪은 비극을 극복하고, 우리가 그 동안 추구해온 통일독립 민족국가를 21세기에는 확실하게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5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