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 노동운동에서 배우는 교훈

노동사회

전후 일본 노동운동에서 배우는 교훈

구도희 0 6,402 2014.01.06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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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는 2007년부터 세계의 노동운동 역사를 공부해오고 있습니다. 연구회는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주제를 정한 뒤 매월 한 차례 외부 특강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3년 11월18일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열린 여섯 번째 특강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종구 성공회대학교 부총장(산업사회학)께서 ‘전후 일본 노동운동에서 배우는 교훈’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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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받은 이종구입니다. ‘전후(戰後) 일본 노동운동에서 배우는 교훈’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1990년대에는 우리나라의 진보와 보수 모두가 일본의 사례를 통해 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진보, 보수 모두 ‘이제 일본은 별 볼 일 없다’고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일본 후쿠시마의 원전 폭발 사고, 독도 영유권 분쟁도 있어 일본에 대한 인식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일종의 시대적 트렌드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어찌 됐든 한국보다 엄청 큰 강국입니다. 이념 문제를 떠나 일본 내부에 대해 날카롭게 관찰해야 하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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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교수가 전후 일본 노동운동에 대해 설명 중이다. >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일본만 아는 한국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동계, 경영계, 학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델은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일본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본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에 구체적인 정보가 빈약합니다. 
제 얘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제 석사 논문의 주제가 ‘미군이 한 일본의 노동개혁’이었습니다. 논문 주제를 정할 때 한국과 연관있는 주제를 고민하다가, 한국과 일본 모두 미군정(美軍政) 하에 있었다는 사실에 착안했습니다. 그랬더니 진보적인 일본 대학원생이 “주제를 굉장히 잘 잡았다”며, 일본 연구자들은 미군정기에 대한 통사를 쓰지 않는건지, 못 쓰는 건지 아무튼 얘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반면 당시만 해도 드물던 한국 유학생을 가볍게 여기던 원로 교수들은 “미군정 하의 한국에 대해 써서 빨리 학위를 받지, 왜 이런 골치 아픈 얘기를 하려느냐”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의 미군정기(1945~1952)에 관한 연구는, 미군정기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현재 규정이 달라지기 때문에, 굉장히 민감한 문제더라고요. 우익과 좌익 모두에게 민감한 문제인거죠. 또 미군이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후 철수 당시 점령군 사령부의 문서가 든 캐비넷을 통째로 들고 가버리는 바람에, 일본의 현대사 학자들도 연구를 위해서는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 가야 했다고 합니다. 제가 연구할 당시에도 도쿄도립대의 한 경제학과 교수가 미국에 가서 자료를 찾아 겨우 미군정기 점령군의 개혁에 대한 연구를 개척했습니다. 이렇게 미군정기는 미개척 분야였는데다가, 일본 사회에 대한 감각이 거의 없어 당시 사회에 대한 상을 잡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헌책방에서 산 기지촌 ‘양공주’에 대한 특집을 실은 삼류 잡지 덕분에 사회에 대한 상을 잡고 겨우 석사 논문을 쓸 수 있었습니다. 즉, 극단적인 궁핍 속에서 살아가게 된 인간의 모습을 이해하고 나니까 당시 일본의 노동문제를 보는 시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미군의 첫번째 점령 조치, 노동조합법 제정
일본은 1945년 8월 이후부터를 현대사로 봅니다. 패전 후의 일본은 극도로 빈곤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던 때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결국 우리가 아는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인 것이죠. 반면 지금의 일본 사회는 정확히 1945년 10월10일을 기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패망한 일본에 10월4일 인권지령을 내세운 이후의 일본 사회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일본에서 제일 먼저 한 조치는 노동조합 운동을 합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의회에서 미군의 지시에 의해 노동조합법이 1945년 12월 통과되고, 이듬해 3월부터 시행됐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일본 천황이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선언(1946.1)하고 메이지 법을 철폐한 뒤 전후 신헌법을 공포(1946.11.3)한 것은 1946년 가을의 일입니다. 왜 미군은 신을 인간으로 끌어내리기 보다, 노조를 먼저 합법화했을까요. 그건 바로 점령정책의 핵심이 노동과 자본의 관계 재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계급 관계를 어떻게 재편하느냐 였죠.  
미국의 일본 개조개혁의 핵심은 경제개혁으로, 그 핵심조치는 노동조합의 합법화, 농지 개혁, 재벌 해체였습니다. 노동조합의 합법화와 동시에 노동기준법, 노동관계법도 정비됐습니다. 일본 노동관계법의 원형은 뉴딜의 와그너법(Wagner Act)입니다. 이 와그너법 체제가 일본에 그대로 들어오면서 경제사적으로 중대한 논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노동개혁의 관점에서 전쟁 전과 후의 일본 사회를 별개로 봐야 할 것이냐, 연속된 사회로 봐야 할 것이냐를 따지는 논쟁이었습니다. 정치를 중시하는 강좌파(講座派) 입장에서 보면 권력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으니 다른 사회인 반면, 노농파(勞農派) 입장에서는 연속된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법칙의 관철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일관성이 있거든요. 물론, 점차 노농파 쪽의 주장이 맞는 것으로 인정되고요. 
 
미군의 지원으로 성장한 노조
1931년에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키고 정치의 주도권을 잡은 일본군이 지향하는 사회 모델은 히틀러의 나치스 독일이었습니다. 천황의 대권에 의해서가 아닌 시스템과 관료들의 통제 아래 움직이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던 거죠. 그래서 나치스 모델로 사회를 개조하려는데 일본 천황과 수구파들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다케마에 에이치라는 일본 교수가 점령 당시 미군 노동담당 과장들을 인터뷰한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일본의 노동법 입법 과정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미군이 노동기준법을 만들 당시 일본 후생성 관리들에게 노동법 기안을 만들어 갖고 오라고 했더니, 순식간에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노동기준법을 가져 왔다고 합니다. 여성의 생리휴가를 전 세계 최초로 법에 규정할 정도로요. 그래서 미군이 어떻게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기안을 갖고 왔느냐고 물으니, 일본 관리들이 “태평양 전쟁 때 마련한 건데 일본 내 사회적 저항이 심해서 실시하지 못했다”고 했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만주사변 이후부터 연속되는 일본의 관료주도형 사회에서는 노조를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제도의 하나로 보고 있다는 거죠. 
이처럼 전쟁 후의 모든 연속성은 관료제도로 담보됩니다. 모든 엘리트들이 제거되고, 관료들 중 특히 경제관료들이 득세했는데 이들은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국가 총동원령 체제에서 관료 통제 하의 일사불란한 사회를 설계․운영했는데 일본에서는 이들을 ‘혁신관료’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미군의 간접통치를 수행하는 관료 조직으로 남았으며, 전후 자민당의 주력 부대가 되어 여태까지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미군은 일본을 철저히 민주주의화하고, 비무장 평화국가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일본의 중화학공업, 군수 물자 생산능력을 전부 해체해 무력화시킨다는 계획이었죠. 또한 맥아더 장군은 노동조합에 대해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학교”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미군들이 노조를 지원한 목표 중 하나는 일본이 민주주의화 되더라도 향후 우익 세력이 재기할 수 있기에 이를 막을 수 있는 사회적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가장 강력한 세력은 노동운동 세력과 사회주의 정당이었고요. 
 
미군과 의기투합해 성장한 일본의 좌익 세력
일본은 패전 후인 1945년 10월11일 정치범들을 석방했는데, 이들 중 마지막까지 비전향을 고수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 자체적으로 석방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 미군이 일본에 들어왔음에도 정치범 옥사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미키 기요시(三木淸)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옥사하자 미군을 비난하는 국제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이에 미군은 공산당 지도부 등 정치범들을 대거 석방했습니다. 그렇다보니 공산당 서기장 도쿠다 규이치(德田球一)가 석방 후 제일 먼저 한 일은 미군부대 앞에서 ‘해방군 만세’를 부른 것입니다. 그 다음 공산당은 전당대회를 열어서 ‘해방군 규정’을 하고, 소위 2단계혁명론에 입각해서 미군의 전후 개혁을 부르주아 혁명단계로 규정했습니다. 한마디로 미군의 점령정책에 협조한다는 거죠. 반면 사회당 계열은 중간에 전향하고 산업보국회(産業報国会)를 통해 전쟁에 협력했기에 전후 초기에는 사회적으로 발언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공산당계가 지도하는 노동운동이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일본 노동운동과 미군과의 관계를 더 잘 드러내는 일화가 있습니다. 미군정 노동과장을 인터뷰 한 기록에 따르면, 노동운동가들이 해운노조를 조직할 때는 미국 군함이 노동운동가들을 태우고 다니며 노조 조직을 도왔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무실에 AFL(미국노동총연맹)과 CIO(산업별조합회의) 규약을 두고, 사람들이 노조를 만들었다며 찾아오면, 산별노조에 해당할 경우 CIO 자료를 주고, 직업별일 경우 AFL 자료를 줬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의 좌익 세력은 철저하게 반미․반자본주의 조직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미군과 의기투합해 만들어진 조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노동운동의 주도권 문제, 작업 현장에서의 리더십 문제와도 직결됩니다. 1947년에 동경대 사회과학연구소에서 전국의 노조에 대한 실태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자료를 보면 활동이 활발한 조합은 대개 전후(戰後)에 새로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전후에 만들어진 조합은 굉장히 활발한 노동운동을 했고, 조합 지도부의 성격은 화이트칼라로, 말하자면 사원 층입니다. 대기업 중심의 고학력 관리직들이 리더십을 장악한 거죠. 화이트칼라들이 주도권을 잡은 이유는, 노조 일을 하려면 미군을 통해야 하는데, 이들은 영어를 할 줄 알아 미군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측의 이해관계와 노동운동 내지는 공산당의 이해관계가 상당히 결합되어 있었는데, 일례로 도쿠다 규이치가 어느 날 기관사들을 데리고 미군 사령부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국철노조에서 집행부를 새로 뽑았다며, 미군에게 새 집행부를 소개했습니다. 미군 입장에서 공산당 서기장이 왜 갑자기 기관사들을 데리고 왔나 생각해보니, 군정 당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데리고 온 것으로 감이 잡히더랍니다.  
 
공산주의 이념 대립에 휘말린 일본 노동운동
그러다가 중국 정세 때문에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미국의 전후 구상은 일본을 비무장 평화국가로 만든다는 것으로, 이를 위한 전제는 태평양 지역에서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 정권을 파트너로 삼는 것입니다. 미국 국무성 내의 아시아 파트의 주도권은 전통적으로 주중 대사관 출신과 주일 대사관 출신 사이에서 오락가락 합니다. 태평양 전쟁 전에는 일본파들이 득세했고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는 중국파들이 득세했습니다. 따라서 전후 처리에 있어서도 중국파가 주도권을 갖고, 트루만 정권-장개석 정권이 아시아를 관리한다는 구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을 철저히 무력화시키자는 계획이 있었는데, 중국 대륙에서 장개석 정권이 모택동의 공산당에게 밀리고 맙니다. 마침 미국에서는 매카시즘 광풍이 불었고요. 매카시는 중국 대륙을 잃어버린 이유가 “국무성 내의 빨갱이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1948년 1월6일 로열 미육군장관은 연설을 통해 일본은 “이제 아시아 공산주의의 침략을 막는 요새로서 기능해야 한다”고 밝힙니다. 이는 모든 것이 뒤바뀐다는 뜻이었습니다. 
실제 1947년 1월에 전국적인 규모의 총파업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미국에서 초강경 진압의사를 밝히자, 일본 국철 노조 간부는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한다”고 선언합니다. 총파업을 중지한다는 것으로, 바람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 것이죠. 그럼에도 미군은 노조를 봐주지 않고, ‘민주화 동우회’라는 조직을 위에서부터 심기 시작했습니다. 민주화 동우회는 미군 사령부의 지도를 받아 각 직장에서 지도부 교체작업에 돌입함으로써, 반공 노동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반공 노동운동에 앞장 선 것이 사회당 계열이었고, 좌파 사회당계는 나중에 총평(總平: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을 조직합니다. 미군은 이를 통해서 급진적 노동운동의 현장 조직을 허물고, 임금 통제를 하며 일본경제를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동 탄압으로 돌아선 미군, 반미로 돌아선 일본
극심한 궁핍에 시달렸던 전후 일본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정부에서 화폐를 발행해 기업에 융자나 보조금을 주었습니다. 노동자들이 파업하면 경영자 측은 정부 보조금을 받는 관계라 인플레이션도 심했습니다. 그러자 미군은 1948년 12월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며 경제안정화정책을 실시합니다. 이 정책의 주요 내용은 보조금과 특혜 융자의 혜택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임금인상은 없다며, 미군은 조직화된 사업장을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텔레비전이 없던 시기에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장치라는 이유로 대중선전에서 중요한 위상을 가진 영화사 노조를 시작으로, 신문사, 철도노조와 민간기업인 도시바 노조를 마지막으로 많은 노조를 진압했습니다. 1949년에 도시바의 호리카와 앞 공장의 농성이 끝나면서 전후의 급진적 노동운동 세력은 약화되고, 1955년도까지 일본에는 노동협약이 없는 상태, 즉 ‘무협약 시대’가 왔습니다. 일본 노동조합에서 협약이 다시 만들어진 것은 1955년 이후입니다. 또한 총평에 대해 우리는 ‘좌파의 총 아성’인 것처럼 알고 있는데, 사실 총평은 1950년대에 미군 사령부의 하향식 지도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총평이 만들어지기 직전인 1950년 6월11일에 레드퍼지(Red Purge) 조치가 발표됩니다. 이 조치로 인해 공산당 기관지 ‘적기’가 폐간됐고, 공산당 지도부 전원이 수배됐습니다. 당시 공산당원을 비롯해 10만 여명 정도가 해고됐습니다. 방식은 미국 정보부대에서 작성한 ‘문제 있는 사람(active trouble maker)’이라는 표현이 적힌 명단에 의한 지명해고였습니다. 더구나 해고 명단의 내용이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사용자들이 명단을 부풀려 소위 편승 해고를 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이 기회에 아니꼽게 보던 사람들을 해고한 거죠. 심지어 미군은 ‘이 명령에 의한 해고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단서까지 붙였습니다. 결국 이 당시 해고된 사람들의 복직 문제는 1950년대 말까지도 일본의 주요 노동쟁의의 배경이 됩니다.
아울러 1948년 7월에는 미군이 소위 공공부문의 쟁의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단결권만 인정하고 쟁의권은 사라졌습니다. 일방적인 조치였죠. 그러자 철저한 친미파이던 일본의 사회운동 혹은 노동운동 세력이 순식간에 반미로 돌아섭니다. 이는 1970년대까지 일본 공공부문 노사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됐습니다. 당시 일본 노동운동의 주력부대가  철도, 전력, 체신, 공무원 노조 등 공공부문이었거든요. 특히 철도노조가 쟁의권 박탈의 목표가 됐습니다. 이처럼 미점령기에 일본의 공공부문 노사관계와 민간부문 노사관계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장기 보수’ 1955년 체제의 성립
미군에 의해 만들어진 총평이 다시 좌경화하는 계기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1951.9) 때문입니다. 당시 전후 자유주의자의 슬로건은 소위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것이었고, 공산당도 이에 동조했습니다. 문제는 이 강화 조약에 누가 참여하느냐 였습니다. 말하자면 미국 입장에서는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니, 일본과 빨리 강화 조약을 맺어 반공 진영의 파트너로 일본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 자유주의자들은 스탈린과 모택동을 포함한 모든 교전 당사자들과 전면 강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당시 자유당인 보수파와 미국은 미국·영국과만 강화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며 소련과의 강화는 거부했습니다. 그렇게 일본의 국론이 갈라졌는데, 결국 미국의 의도대로 ‘반쪽 강화’를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총평은 반미로 좌선회를 하고, 이에 동조하지 않는 세력들은 동맹(同盟, 전일본노동총동맹)을 조직했습니다. 현재 일본 최대 노총인 렌고(連合, 일본노동조합총연합)의 선배들은 당시부터 총평 노동운동에 대해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일본의 노동운동은 갈라지게 됐습니다.
또한 당시 좌경(左傾)했다는 총평의 노선이 진짜 혁명적 조합주의였냐고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일본의 전후 복구는 순식간에 끝났고, 일본 정부도 1955년 경제백서에서 “이제는 더 이상 전후가 아니다”라고 종결 선언을 했습니다. 이때부터 일본의 고도경제 성장이 시작됐고, 정치적으로는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쳐져서 자민당이 만들어졌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문제로 갈라섰던 좌파 사회당과 우파 사회당은 후에 갈라지기는 하지만 당시 하나로 합쳤습니다. 공산당은 레드퍼지 조치로 쫓겨난 뒤 ‘산촌공작대’라는 일종의 빨치산 비슷한 투쟁을 하다가, 1955년 7월 집단지도체제의 도입과 무장투쟁을 포기한 이른바 ‘육전협 결의(六全協決議)’를 채택하고 의회로 들어왔습니다. 이를 통틀어 ‘1955년 체제’라고 합니다. 일종의 안정된 장기 보수정권이 만들어지게 된 거죠. 총평 역시 자민당 장기 집권의 구성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일본 춘투의 배경과 흐름
그래도 총평이 춘투를 과격하게 전개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 일본 경제사에서 신규 노동자의 유효 구인 배율이 1을 넘음으로써 구인난이 발생하는 시기는 1954년 무렵부터입니다. 이후에는 노동시장에서 만성적 공급부족 사태가 지속돼 시장압력에 의해 노동자들의 임금은 해마다 10% 이상씩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도경제성장과 총평의 임금인상을 합리화해주는 절차로서의 춘투가 결합된 거죠. 이처럼 일본 전후 자본주의의 고도성장과 총평이 잘 결합되어 1973년까지 하나의 시스템으로 잘 유지됐습니다. 
그런데 1973년에 4차 중동전쟁이 일어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석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고도성장은 끝나고 패닉이 일어납니다. 전후 일본 경제의 중심은 중화학 공업이었는데, 오일 쇼크로 인해 이 같은 소위 중후장대산업(重厚長大産業)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됐습니다.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로까지 급속히 떨어졌고, 일본의 노동조합은 더 이상 임금인상 투쟁을 위주로 하는 노동운동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은 고도경제성장의 환경 속에서 해마다 임금인상이 계속됐기에 작업장에서는 사실상 투쟁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노동조합의 현장 조직은 공동화되고 있었습니다. 경제성장률이 하락하는 상황 속에서 총평·동맹 모두 노동운동의 목표를 임금 인상 대신 정사원 중심의 고용유지로 대타협을 했습니다. 당시 특수강 공장에서 일하던 학생운동 출신 노동자가 쓴 ‘공장에서 사는 인간들’이라는 수기에 따르면 구조조정 당시 중도입사자들·여사원·고령자를 먼저 해고하고, 정규 채용직들은 노조가 마지막까지 보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일본 노동운동에서는 춘투에 의한 임금인상 중심의 운동방식보다는 정책 참가 노선을 통한 제도개선 투쟁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이 정책추진노조회의에 모든 노조가 참가하고 여기에서 노동조직의 재편 문제가 다시 부상해서 1979년에 중립노련과 신산별이 ‘총연합’으로 통합된 데 이어 1982년에 전민노협(全民勞協, 전국민간노동조합협의회)으로 확대됩니다. 이후 전민노협이 연합(聯合, 전일본민간노동조합연합)으로 발전했고, 1989년 11월 렌고(連合,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동맹·총평 등은 렌고가 만들어지기 한 달 전 해산했고, 렌고로 가지 않은 세력들은 젠노렌(全勞聯, 전국노동조합총연합)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공산당계인 전노협(全勞協, 전국노동조합연락협의회)이 있습니다. 
 
일본은 왜 기업별노조가 주축이 됐나
일본 노동운동의 역사는 이 정도로 정리하고, 일본의 노사관계를 얘기해 보겠습니다. 일본은 왜 기업별 조직 체계인가에 대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일본의 노조간부들을 만나보면, 모두 산별노조로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전후 노동운동사에서 보면 기업별노조로 방향을 틀게 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1952년의 전력산업 노동쟁의입니다. 일본에서 전산(電産, 일본전력산업노조)은 전후 노동운동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선 조합원 숫자가 많았고 사업장이 전국에 걸쳐 있는데다, 전력회사이기 때문에 통신망이 잘 갖춰져 있었습니다. 또한 고학력자 조합원들이 많았습니다. 전산은 점령기의 노동운동을 선도하였으며, 가장 선진적인 투쟁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 만든 임금체계를 ‘전산체계’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공무원 임금체계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연공적 평등주의죠. 생활급 사상에 입각해서 근속연한이 많을수록 생활비가 올라갔습니다. 이는 단순히 회사에 오래 있었던 기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숙련에 관한 보상입니다. 이처럼 관리자의 사정권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극도로 축소해서 임금 결정의 주도권을 노조가 가진 것이 전산임금체계인거죠. 1946년에 만들어진 이 임금체계는 이후 일본에서 새로 만들어진 노조가 임금 교섭을 할 때 기본 모델이 됩니다. 다만 화력·수력처럼 발전소 형태에 따라 지역별 환경이 달라 발생하는 생활비의 차이는 보정해주었습니다. 이처럼 전산은 전국적으로 단일 임금체계를 만듦으로써 산업별 노동조합의 모델이 됐습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서 전력산업법을 개정해 전력산업의 분할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지역별로 회사를 쪼갰고 이와 동시에 전산도 해체됐습니다. 1984년 세계 최대 단일노조인 국철(国鉄) 노조에도 같은 사례가 똑같이 적용됐고요. 당시 정부는 국철을 노선별로 분할하고, 국철 청산사업단을 만들어 국노 조합원들을 이 사업단에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화차를 절단하게 하거나, 철로에 난 풀을 뽑게 했습니다. 노조를 탈퇴할 때까지 들볶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마지막에는 한 달에 1만 명씩 노조를 탈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0만 명 규모의 노조가 절반인 5~6만 명 정도로까지 대오를 지킨 것은 기적이라고 하죠. 1980년대 당시 일본 정부는 국철을 분할하면서 동시에 많은 공공부문을 민영화 했습니다. 이 당시 일본의 소위 신자유주의 개혁을 이해하는 것은 전후 일본 노동운동사에 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배경 지식이 됩니다. 
 
냉전의 종식과 급진적 노동운동의 몰락 
총평의 세력기반이 지역과 공공부문인데, 공공부문이 신자유주의라는 물결 속에서 무너지니 총평도 구조적으로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총평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당, 일본의 좌파 세력을 ‘총평 사회당 블록’이라고 불렀는데, 이 블록 자체도 구조적으로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다 1989년에 렌고가 만들어졌고,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냉전시대가 끝났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자민당은 대기업, 지역의 자영업자, 농민을 지지기반으로 했고, 자민당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노동부문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사회당의 영역이었습니다. 국내 정치에서 노동 쪽의 창구가 사회당의 역할이었던 거죠. 또한 국제관계에서는 자민당이 할 수 없는 외교는 사회당의 영역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 북한과의 관계라든가 국교 정상화 전 중국과의 관계 등을 사회당이 맡았습니다.
냉전시대가 끝나고 사회당은 노동운동의 기반이 무너진 상황에서 지역 조직을 건설하겠다고 나섰는데, 이미 지역 조직은 공산당과 공명당이 잡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지역 조직의 취약성과 냉전 해체가 그대로 총평 사회당 블록의 구조적 침몰을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보수 정당끼리 분열과 집산을 반복하는 것이 현재 일본의 상태입니다. 일본 정치권이 장기적인 비전을 세우지 못하고 이합집산만 반복하는 상태다 보니, 결국 일본 사회의 주도권은 관료세력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는 일본 노동운동에 관한 이해를 통해 일본 사회에서 누가 건전한 세력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일본의 어떤 세세력과 교류하고 연대해야 하는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질의응답>

* 종종 실패한 노동운동의 사례로 일본 노동운동이 거론되곤 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노조 운동은 여전히 위기 상황에 놓여 있고요. 우리 민주노조 운동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일본의 사례에서 교훈을 삼아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 일본 노동운동이 실패의 사례로 거론되기는 하지만, 총평 노동운동의 가장 큰 성과는 지역 단위 노동운동이 건재하다는 점입니다. 여전히 커뮤니티 유니온처럼 기업별 노조의 바깥 영역에 있는 지역별 운동의 유산이 남아 있습니다. 총평은 민간대기업 부분에서는 세력이 별로 없고 공공부분이 주를 이뤘는데, 공공부분의 특성상 세금이 잘 걷힐 때는 공공부문 노사 관계가 원만하지만 세금이 잘 걷히지 않을 때는 관계가 좋지 않습니다. 그럴 때 상황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은 자체 결속력입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총평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현장 조직의 취약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당파 문제에 대범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민주노조 운동이 위기라고 하셨는데,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4.19나 6.10항쟁처럼 밑으로부터의 운동에 의해 세상을 변화시킨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조직에 순응하고, 권위에 대해 복종하는 가치관을 가졌죠. 반면 한국은 그렇지 않잖아요. 몇 번의 성공 내지는 준성공의 경험이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 일본 내 실업자들의 상황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 일본의 사회안전망은 생각보다 튼튼해서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절망적이지는 않습니다. 또한 브라질, 남미에서 온 일본 이민 2세·3세들이 완충지대를 이루고 있어서 대량해고 상황에도 일본인들은 마지막에 해고됩니다. 
다만 공장의 해외이전으로 인해 대량해고가 발생하곤 하죠. 이와 관련해 일본의 고용 상황을 살펴보면,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 대기업들 역시 국내 고용보다 해외 고용이 많아진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5~6년 전쯤 일본 전기노련(電機勞聯)을 방문해 해외 공장 이전에 따른 산업 공동화 문제에 대한 일본 노동운동의 방침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곳 노조 사람들은 회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해외 생산이라도 확대해야 하고, 회사 전체 수익이 좋아지면 종업원 처우 역시 좋아지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반면 JAM(일본금속노조)에 가서 같은 질문을 하니 우파 동맹계인데도 흥분하며 지적재산권 보호가 노동운동의 핵심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특히 금형의 사례를 들면서, 대기업의 요청에 의해 한참을 고생해 금형 샘플과 설계도를 만들었는데 주문을 안 하더랍니다. 그래서 알아보니 샘플과 설계도를 그대로 중국에 갖고 가서 금형을 만들고 있더라는 거죠. 그러나 이는 누군가를 상대로 개선 요구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경영자 단체와 정부를 상대로 ‘지적재산권 보호 대책을 세우라’는 것이 현재 운동의 주요 흐름이라고 합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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