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으로 보는 부르주아혁명

노동사회

프랑스혁명으로 보는 부르주아혁명

구도희 0 25,129 2013.11.05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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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는 2007년부터 세계의 노동운동 역사를 공부해오고 있습니다. 연구회는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주제를 정한 뒤 매월 한 차례 외부 특강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3년 9월30일 민주노총 교육원에서 열린 다섯 번째 특강을 정리한 것입니다.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께서 “부르주아혁명”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맡아주셨습니다. 특강과 관련된 ‘부르주아혁명과 노동자 계급’, ‘역사 속의 혁명’은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홈페이지(www.wolamohi.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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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최갑수라고 합니다. 저는 프랑스혁명사를 전공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르주아혁명에 대해 말씀 드리려 합니다. 
부르주아혁명은 프랑스대혁명부터 파리코뮌(Paris Commune)까지 거의 1세기 가까이 이어집니다. 우리가 주로 얘기하는 것은 프랑스대혁명(1789~1799년)이죠. 프랑스 국왕인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고, 후에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기 전입니다. 그런데 근대 이행기의 프랑스사에 있어서 혁명은 결코 한 번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1830년의 7월 혁명, 1848년의 2월 혁명도 있고, 파리코뮌도 프랑스혁명입니다. 이 프랑스대혁명부터 시작해서 파리코뮌 때까지 하나의 큰 과정까지를 넓은 의미로 프랑스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거죠. 다만 1789~1799년까지의 혁명만 지칭할 때는 프랑스대혁명이라고 말하죠. 
 
<최갑수 교수가 부르주아혁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프랑스대혁명의 발발
우선 프랑스대혁명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간단히 알아보죠. 1789년 5월5일에 루이 16세가 소집한 삼부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 삼부회는 혁명의회가 아니었어요. 루이 16세가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걷어야 하는데 마구잡이로 과세할 수 없으니 동의를 받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한 겁니다. 
그런데 프랑스 전국에서 모인 유력자들 중 제3신분 대표들이 자신들을 ‘국민주권의 담지자’라고 자처하고, 새 헌법을 만드는 데 자신들의 임무가 있다고 규정해 급기야는 제헌작업에 착수했죠. 이는 국왕이 원래 의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3신분들이 신민으로 남아서 왕이 요구한 과세에 동의해주는 역할에만 그쳐야 하는데, 신분제의회인 삼부회에 모여 갑자기 국민 주권의 담지자라고 주장하니까 왕은 이를 무력으로 해산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파리 민중이 개입한 바스티유 습격이 발생합니다. 이후 1789년 8월26일의 인권선언이 채택됐고요. 
프랑스혁명의 시기에는 민중들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왕을 죽여서 프랑스에 공화국이 들어섰고, 이후 민중혁명의 단계에 들어갔으나 다시 독재가 나타나는 등 일련의 복잡한 과정이 나타납니다. 
 
부르주아 혁명으로서의 프랑스대혁명
이제 프랑스혁명의 성격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프랑스혁명의 성격은 여러 가지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우선 혁명이 끝난 뒤 1820년대부터 부르주아 출신의 역사가들, 대표적인 인물로 프랑수아 기조(François Pierre Guillaume Guizot)가 이 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봤습니다. 부르주아혁명이라고 규정을 한 것이죠. 사실 당시에는 프랑스혁명이 무엇인지 모두들 정확히 알지 못했어요. 또 혁명은 누가 의도해서 일으킨 것도 아닙니다. 루이 16세가 혁명을 일으키려고 삼부회를 소집한 것이 아니잖아요. 민중들 역시 왕이 모이라고 해서 모인 거예요. 그런데 그 속에서 개별 혁명가들을 통제할 수 없는 엄청난 과정이 만들어진 겁니다. 소수의 부르주아 출신 혁명가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소위 민중층이 혁명에 대거 돌입합니다. 엄청난 일이 벌어난 거죠. 
당시 프랑스혁명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정치 혁명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프랑스혁명이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고 하면, 정치혁명이 되는 거죠.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혁명 과정 중에 특정 세력이 국가 세력을 장악하는, 달리 말하면 권력층이 교체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프랑스혁명 당시 새로운 권력층으로 등장한 이들의 후예인 프랑수아 기조가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규정한 겁니다. 이후 역사학계에서 부르주아혁명론의 관점으로, 유사한 성격의 혁명을 찾아보니 그 보다 앞서 일어난 영국혁명, 미국혁명, 실패한 독일의 3월 혁명, 심지어는 1905년의 러시아 혁명까지 부르주아혁명이라고 규정을 하게 되는 겁니다.
역사학계에서 이 혁명을 거대한 사회혁명이라고 보는 관점은 20세기 중반에 와서 만들어집니다. 기조 같은 부르주아 출신의 역사가가 부르주아혁명론을 제공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나름의 계보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혁명의 실천 속에서 부르주아혁명론을 제기하고 이 이론을 풍요롭게 만든 것은 바로 유럽의 마르크스주의 진영입니다. 
부르주아혁명론이라는 것은 특정 혁명들을 범주화하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혁명이다’, ‘영국 혁명은 부르주아혁명이다’, ‘독일의 1848년 혁명도 부르주아혁명이다’라고 규정하는 거죠. 이렇듯 부르주아혁명은 개념으로 보면 굉장히 다양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일련의 혁명적 현상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하는 범주적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대적 혁명관에 기초한 부르주아혁명
이렇게 특정한 혁명을 부르주아혁명으로 보려면, 우선 근대적 혁명관이 나타나야 합니다. 서양에서 혁명을 ‘레볼루션(Revolution)’이라고 하잖아요. 이 용어는 전통적 의미에서는 자연현상을 가리키는 겁니다. 천문학자인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가 16세기에 <천체의 운행에 관하여>를 발표하는데, 여기서 천체의 운행을 말할 때 레볼루션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계절이 봄․여름․가을․겨울로 순환하는 것을 레볼루션이라고 한 거죠. 그런데 계절이 순환하는 것은 사실 진정한 의미의 변화는 아닌 원상태로의 복귀를 뜻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17세기만 하더라도 영국에서 일어난 영국혁명, 즉 청교도혁명(Puritan Revolution, 1640~1660년)을 당시에는 ‘대반란(Great Revolt)’이라고 했어요. 근대적인 혁명관이 나오기 전이었거든요. 반면 1688년의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은 당시에 ‘레볼루션’이라고 했어요. 영국이 전통적인 헌정질서로 복귀했다는 것을 의미했거든요. 
그리고 이 사이의 변화를 보면, 미국혁명(1775~1783년)과 프랑스혁명(1789~1799년) 사이에 계몽사상이라는 사상의 큰 조류가 나타나고, 진보의 관념이 나타납니다. 역사가 일직선적인 발전을 할 수 있다는 관념이 나타나는 거죠. 그러면서 이 시기, 특히 프랑스혁명의 시기에 혁명이라는 말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의 혁명이 됩니다. 바로 인간이 집단적 노력을 통해서 정치 및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게 되는 거죠. 
그리고 이 단어를 19세기 말엽 동아시아 세계에서 혁명(革命)이라고 옮긴 겁니다. 본래 동양의 전통적 세계에서 혁명이라는 것은, 반드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도 신라 때의 김씨 왕조가 고려 때 왕씨로 바뀌고, 다시 조선에서는 이씨 왕조로 바뀌죠. 전통적인 의미에서 혁명이라는 것은 한자에서 봐도 알 수 있듯이 근대적 의미의 레볼루션이 아니고, ‘천명을 바꾼다’ 즉, 왕조가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왕조 교체를 정당화시키고자 하늘의 명이 바뀌었다고 하는 것이고,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논변이 바로 천명사상(天命思想)입니다. 이처럼 동양에서 본래 혁명이라는 의미도 서양의 레볼루션처럼 전통적인 의미었어요. 
그런데 유럽에서 근대적인 의미의 레볼루션의 번역은 과거 전통적인 의미의 역성혁명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레볼루션이라고 하면 사회 정치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 급격하게 바뀌는 것을 상정하죠.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들 중 동학혁명을 예로 들면, 당시에는 혁명이라고 하지 않았고 ‘동학난’이라고 했어요. 왜냐면 혁명은 조선을 창건한 이성계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말했거든요. 그래서 서양에서도 청교도혁명을 대반란이라고 했던 거죠. 서양이든 동양이든 이렇게 의미가 바뀐 겁니다. 
 
산업혁명, 혁명사상 잉태의 토대가 되다
이처럼 우리가 부르주아혁명을 논하려면 혹은 어떤 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혁명이라고 규정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혁명은 근대적인 현상이라는 관념이 나와야 해요. 서양에서는 이것이 프랑스혁명 시기에 명확히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근대적 혁명의 결정적인 증좌는 변화가 정상상태가 되는 겁니다. 사실 ‘변화가 정상상태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말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동서양의 전통사회 속에서는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여기서 전통사회는 서양으로 따지면 프랑스혁명과 영국혁명 이전 시대고, 아시아는 유럽으로부터 충격을 받기 이전의 농업 문명사회죠. 이 사회 속에서는 이를테면 ‘우리는 다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우리 옛말에 가난은 임금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이 있죠. 당시에는 물질적 생산성이 극히 낮아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서양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인간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고, 지상에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적어도 사상적으로는 계몽사상에서 먼저 나타났습니다. 또한 그 사상을 물질적, 정치적, 사회경제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산업혁명이고, 프랑스혁명입니다. 그래서 혁명 중에 부의 재분배도 일어난 겁니다. 
프랑스혁명 이전에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보수주의가 필요 없었어요. 조선시대를 예로 들면, 임꺽정이 왕을 죽여 봐야 자신이 왕이 되는 것 외에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방법이 없었거든요. 그러나 이제는 프랑스혁명을 통해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만한 역량이 만들어지게 된 거죠. 이제까지 역사의 국외자고, 통치의 대상이었던 일반 민중들이 이론적으로 나라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엄청난 거예요. 왕이 없는 세계가 가능해지게 된 거죠. 다만 동양에서는 불가능했습니다. 위민사상까지는 가능해도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 했죠. 그런데 서양에서는 17~18세기의 일련의 노력을 통해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또 종교 개혁 속에서 그런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루소(Rousseau, Jean Jacques) 때에는 인민이 권력의 주체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사고의 지평을 넘어서는 위대한 지적 혁명입니다. 
 
왕이 없는 세상을 꿈꾸다
그렇다면 기득권 세력은 어떻게 됐을까요. 변화를 그대로 두면, 정치 무대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가담하게 되잖아요. 변화 전에 정치는 왕이나 그 측근들이 하는 거였어요. 어떻게 감히 백성들이 정치를 할 수 있겠어요. 정치계급이라는 것을 아무리 넓게 잡아도 극히 제한적이었죠. 그런데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이제는 누구나 다 정치에 개입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물론, 여성과 노예는 참정권이 배제됐고, 재산이 없는 사람도 처음에는 정치에서 배제됐어요. 그러나 적어도 인민이 주권자라는 것, 통치의 대상에 불과했던 이들이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됐습니다. 또 혁명을 통해 민중이 혁명 무대에 대거 개입하게 됐습니다. 프랑스혁명 기간 동안 왕을 죽이고 체제도 바꿨으며, 민중들을 위해서는 일정하게 토지 재분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변화가 나타나는 겁니다. 이게 근대성의 핵심으로, 변화의 정상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기득권 세력은 보수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낸 거죠. 이는 근대적 혁명관이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또한 그것은 유럽이 전 세계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의 근거가 되죠. 구체적인 내용은 모든 사람이 자유민(自由民)화 되는 겁니다. 혁명이 일어난 겁니다. 그런데 전통적 의미의 예속은 사라졌지만 유토피아가 오지는 않고, 계급사회가 왔죠. 그럼에도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 이것은 엄청나게 위대한 사상입니다. 그렇게 신분 질서와 예속 노동이 사라지고 모든 이가 자유로운 신민이 됐으며, 그 위에 시장 자본주의 경제가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르주아 질서라고 하죠. 이것이 혁명기에 나타납니다. 
 
부르주아혁명,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은 프랑스혁명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프랑스혁명을 주도한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조차 몰랐어요. 왜냐면, 미증유의 일이었거든요. 당시 사람들이 가진 분석틀은 먼 옛날 로마 공화정 당시의 경험뿐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프랑스혁명에 대해 “로마 공화국의 옷을 입었다”고 한 겁니다. 물론, 당시 프랑스혁명에 대해 알아내려는 노력을 많이 했지만 대부분은 몰랐어요.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거든요. 
반면 동양에서는 역성혁명이 흔했어요. 청나라, 원나라 등 왕조가 여러 차례 교체됐죠. 심지어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은 농민 출신인데 황제에 올랐어요. 그런데 서양에서는 전통시대에 귀족들의 헤게모니가 워낙 강해서 역성혁명이 없었어요. 유럽에서 왕조가 바뀐다는 것은 마치 큰 집의 대가 끊겨서 작은집이 대를 잇는다는 것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프랑스혁명 당시 대낮에 왕을 죽인 거죠. 이런 까무러칠 일이 혁명기간에 벌어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것은 혁명이다’라고 인식한 거죠. 프랑스혁명의 시기에는 자신들이 겪고 있는 엄청난 변화가 혁명이라는 것을 알고, 명확하게 ‘혁명’이라고 불렀습니다. 프랑스혁명이 사회혁명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죠. 그러나 어떤 혁명인지는 당시에는 거의 몰랐다가, 1820년대에 소위 자유주의 성향의 역사가들이 부르주아혁명이라고 부르게 된 겁니다. 물론, 마르크스의 관점과는 다르고요. 어쨌든 중세에 도시에서 성장한 부르주아가 경제적 능력이 점점 커지는데 반해 정치에서는 소외되자,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합니다. 이렇게 프랑스혁명에 의해서 부르주아 질서가 나타나게 됩니다. 
마르크스는 이를 자신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전망에 결합시켰죠. 또한 부르주아혁명을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해가는 결정적 계기로서 파악했습니다. 이 관점은 프랑수아 기조한테는 없었어요. 부르주아혁명이라는 것은 부르주아로 불리는 사람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이 부르주아의 계보를 따져보면 중세 도시에서 나온 평민이지만 구체제에서는 제일 잘 사는 유산자들로, 사회적 능력은 있지만 정치권력에서 배제됐다가 계몽사상을 통해 재기하고 새로운 지배 계급이 된 것이죠. 그리고 이들은 귀족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귀족과 결합합니다. 
 
사회혁명론의 계보
이제 사회혁명(social revolution)에 대해 보죠. 사회혁명에 대한 전망은 마르크스 이전에 이미 제기가 됐습니다. 부르주아혁명은 사회혁명의 하나이고, 프롤레타리아 혁명도 사회혁명의 하나입니다. 우선 홉스(Thomas Hobbes, 1588~1659)가 출발점입니다. 그리고 해링턴(James Harrington, 1611~1677)이 있습니다. 해링턴은 혁명이 재산소유권의 급격한 이동에 입각한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역사학파가들이 발전단계설을 제기합니다. 이들은 ‘생계양식’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생산양식의 이전 형태입니다. 이 개념이 왜 중요하냐면, 유럽 사람들이 어느 시점에서인가 자신들이 중국보다 앞섰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들이 ‘상업사회’를 만들었다는 거죠. 18세기 초까지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는 중국이었어요. 그런데 유럽 사람들이 1750년 경부터 자신들이 앞섰다고 명확하게 인식하고, 자신들이 문명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유럽 사람들은 그 전에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기독교 세계로 봤습니다. 그런데 1715년부터는 문명(Civilization)이라고 봤어요.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상업사회를 만들어 낸 거죠. 
이후 스튜어트(James Steuart, 1690~1757)가 사회․경제적 변화와 사회혁명을 연결시켰어요. 그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지난 3세기 동안 유럽사에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 도처의 정부들은 그 기획을 전적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봉건적이고 군사적인 것은 이제 자유롭고 상업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스튜어트는 봉건 영주 세력이 분쇄돼서 상업 사회가 등장하고, 그 속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인식을 합니다. 물론 부르주아혁명이라는 말은 아직 안 썼지만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고, 이 사고 방식은 아담스미스, 리카르도와 연결되어 정치·경제 영역으로 들어가는 거죠.
프랑스혁명기에 오게 되면 이런 요소가 많았어요. 이미 혁명기에 바르나브(Barnave, 1761~1793)가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혁명이라고 봤습니다. 부르주아 출신인 바르나브는 혁명가 중 온건한 사람으로, 죽기 직전에 옥중에서 <프랑스혁명 서설>을 씁니다. 한 구절을 보겠습니다. “사회적 상태의 진전은 점진적으로 권력의 새 원천을 만들고 구래의 원천을 약화시키며 힘의 균형을 바꾼다. 그러므로 정부들은 때로는 감지할 수 없는 느린 발전에 의해, 때로는 폭력적 충격에 의해 형태를 바꾼다. 기술과 상업이 인민에 침투하고 근면계급을 통해 새로운 부의 수단을 창출하게 되면, 정치법에서의 혁명이 준비된다. 토지소유가 귀족을 낳은 것처럼, 산업적 소유권은 인민의 힘을 증가시킨다. 그들은 자율을 얻을 것이고, 세상사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할 것이다.” 바르나브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부르주아 혁명에 대해서 근본적으로는 알기 어려웠죠.
그리고 부르주아 혁명에 대한 생각이 명백히 나타나는 것이 뢰드레(Pierre Louis Roederer, 1754~1835)를 통해서입니다. 뢰드레는 산업 자본가 출신으로, <1789년 혁명의 정신>에서 “프랑스혁명의 주된 동기는 토지나 사람을 모든 노예상태로부터, 그리고 산업을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유권이나 자유에 관한 이해관계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 당시 존재했던 권리 상의 불평등을 참을 수 없다는 그 사실, 바로 평등에 대한 열정이었다. (중략) 국민이 자유와 소유권을 위해 했던 행위는 오직 그들의 권리의 평등을 얻기 위해 했던 행위의 결과이자 부작용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혁명은 평등을 위한 열정에서 비롯돼 터져 나왔는데, 결과는 사적 소유권의 확립과 자유였죠. 혁명은 부르주아들이 소유권을 지키겠다는 계산을 하고 나온 게 아닙니다. 귀족들이 자신들을 우습게 본다며, 국가 권력에 참여하겠다고 나선 거예요. 그런데 그 속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혁명의 결과를 보니, 사람과 토지가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고 사적 자유권이 확립됐으며, 상업의 자유와 산업의 자유가 확립된 겁니다. 
이렇게 혁명가들의 의도와 실제 혁명의 결과는 엄청난 괴리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어요. 특히 프랑스혁명의 경우에는 더 몰랐고요. 본래 사회혁명이라는 것은 역사의 심오하고 엄청난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나온 겁니다. 이것도 일종의 지적 분노예요. 정치적 변화만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으니, 이 시기에 언뜻언뜻 흔적을 남긴 겁니다. 
이 토대 위에서 마르크스가 우리가 알고 있는 부르주아혁명론을 만들어낸 겁니다. 또한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사회혁명론을 사적 유물론과 결합시킵니다. 물론, 사적 유물론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과정이 있었어요. 
그 중 1843년에 쓴 <헤겔법철학비판>을 보죠. “이 부분적이고 정치적일뿐인 혁명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그것은 시민사회의 한 부분이 자신을 해방시키고 보편적 지배에 도달한다는 것, 어떤 특정계급이 자신의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사회의 보편적 해방을 도모한다는 것에 근거한다.” 역사상 최초의 보편계급은 부르주아지였고, 마지막 보편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더 읽어보죠. 
“이 계급은 사회 전체를 해방시키지만 그러한 시도는 사회 전체가 스스로를 이 계급의 상황 속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러므로 예를 들면 화폐와 교양을 가질 수 있거나 마음대로 얻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 시민사회의 어떤 계급도 자신과 대중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열광이라는 계기가 없다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어떤 독일 민족의 혁명과 시민사회의 특정 계급의 해방이 일치하고, 그에 따라 한 신분이 그 사회 전체의 신분으로 여겨지기 위해서는 거꾸로 그 사회의 모든 결점들이 다른 한 계급에 집중되어 있어야만 하고, 나아가 이 다른 특정 신분이 보편적인 장애의 신분, 즉 보편적인 제약들의 화신이어야 하고, 더 나아가 사회이 이 특정 영역이 사회적 결사체 전체에 대한 악명 높은 침해로서 여겨져야만 하고, 그에 따라 이 영역들로부터의 해방이 사회의 보편적인 자기해방으로서 나타나야만 한다. 프랑스의 귀족과 성직자들의 부정적-보편적 의미는 바로 옆에 있으면서 대립하고 있었던 부르주아지라는 계급의 긍정적-보편적 의미를 규정하였다.” 
실제로 부르주아가 해낸 것은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만 충족시킨 것이지만, 자신의 해방을 통해 사회 전체 다른 계급의 신분의 해방을 가져왔다는 겁니다. 마르크스는 아직은 프랑스혁명을 사회혁명으로 보지 않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독일이데올로기>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혁명이라는 것을 구상해내죠. 그리고 중요한 점은 앞서 말했듯이 마르크스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사회혁명론을 사적 유물론과 결합시킨 겁니다. 그 결과 마르크스에게 부르주아혁명이란 ‘부르주아 자본가들이 수행한 혁명’이라는 제한된 의미를 넘어,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결정적 계기라는 거시적 전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부르주아 없는 부르주아혁명론의 태동
이제 이론과 실천으로서의 부르주아혁명을 보겠습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와 반혁명>에서 혁명의 계보를 다음과 같이 설정합니다. “1648년에 부르주아지는 근대적 귀족과 연합하여 왕권, 봉건적 귀족 및 지배적 교회에 대항하였다. 1789년에 부르주아지는 인민과 연합하여 왕권, 귀족 및 지배적 교회에 대항하였다. 1789년의 혁명은 그 본보기로서 1648년의 혁명만을 가지고 있었고, 1648년의 혁명은 그 본보기로서 에스파냐에 대항한 네덜란드인의 봉기만을 가지고 있었다. 두 혁명들은 시간상으로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그 본보기들보다 1세기 정도 앞서 가는 것이었다.” 이어서 보죠. 
“1648년과 1789년의 혁명은 결코 영국의 혁명, 프랑스의 혁명이 아니었다. 그 혁명들은 유럽적 규모의 혁명들이었다. 그 혁명은 낡은 정치 질서에 대한 사회의 특정한 계급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 혁명들은 새로운 유럽사회를 위한 정치질서의 선언들이었다. 이 혁명들에서 승리한 것은 부르주아지였다. (중략) 1648년의 혁명은 16세기에 대한 17세기의 승리였고, 1789년의 혁명은 17세기에 대한 18세기의 승리였다. 이 혁명들은 그것들이 일어난 당시의 세계의 부분들, 즉 영국과 프랑스의 욕구를 표현했다기보다는 그 당시의 세계의 욕구를 표현하였다.” 이는 독일 혁명을 지켜보면서 독일 부르주아들에게 영국과 프랑스 부르주아들의 행동을 본받으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지는 거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독일은 귀족의 세력이 너무 센 반면, 소부르주아와 농민은 나약해서 부르주아한테 의존합니다. 부르주아들은 혁명 초기부터 민중의 개입을 우려했는데, 프랑스혁명 때 민중이 개입하면서 부르주아혁명의 단계를 넘어 버리는 것을 봤거든요. 이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1748년 이후부터는 혁명계급의 역할을 하지 않았고, 결국 1848년 이후부터는 부르주아혁명의 과제를 노동자 계급이 담당합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현장에서 본 거예요. 그리고 혁명운동의 기운은 하락합니다. 1848년 독일혁명은 그래서 실패하게 되고요.
마르크스는 이 같은 경험을 통해 영구혁명론적인 생각, 즉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혁명이 아니라 그 이후의 단계도 수행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언뜻 합니다. 물론, 실제 민중의 개입은 혁명의 개입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만, 결코 부르주아혁명의 테두리를 넘지 못했죠. 다시 마르크스로 돌아오면, 부르주아가 혁명계급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결국 프롤레타리아가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데, 당시 국제 상황과 맞물리면서 프롤레타리아가 정치계급, 정치권력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부르주아혁명관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다 투영되어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원한 것은 사실 독일의 부르주아혁명이예요. 그런데 독일의 부르주아혁명이 잘 안 될 것 같으니 결국 기댈만한 것은 프롤레타리아혁명 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의 발전 단계를 건너뛰어 갈 수도 있는 거죠. 
 
부르주아혁명론의 분화
이 같은 마르크스의 토대 위에서 부르주아혁명론이 정식화하는데, 여기서 대표적인 인물이 카우츠키(Karl Johann Kautsky, 1854~1938)입니다. 제2인터내셔널이 조직되고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시기에 사회주의 운동권에서 부르주아혁명론이 정식화되는 겁니다. 다음의 글은 카우츠키가 1905년부터 1917년 사이에 러시아혁명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혁명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놓고 멘셰비키, 볼셰비키와 자신의 관점을 요약한 거예요. “혁명에 관한 멘셰비키의 사고방식은 다음과 같이 환원될 수 있다. 러시아 부르주아혁명의 승리는 오직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지도하에서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권력을 넘겨주어야만 한다.” 이것은 철저한 단계론입니다. 당시 러시아는 농민이 여전히 예속되어 있던 전제정치 시기니까요. 
그런데 부르주아는 더 이상 혁명에서의 역할을 하지 않았어요. 유산자인 부르주아가 왜 그런 일을 하겠어요. 그래서 멘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을 해서 부르주아한테 권력을 넘겨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부르주아혁명을 만들어 내면 새로운 사회, 즉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조건이 만들어져서 그 때 혁명을 해 사회주의로 간다는 주장이었죠. 
거기에 비해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은 “시대에 뒤처진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자신들만의 혁명을 끝까지 지도할 능력이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적 독재’를 통한 혁명의 완전한 승리가 중세 국가를 추방하고, 미국의 속도로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을 창조하고, 도시와 시골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강화하고,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넓은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혁명의 승리는 서구에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강력을 자극을 줄 것이다. 그리고 서구는 러시아를 구질서의 복귀라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줄 뿐만 아니라,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적 간격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정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라고 했죠. 레닌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독재 단계를 거치고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 간다는 거죠. 상대적으로 짧죠. 
그리고 트로츠키(Leon Trotskii, 1879~1940)의 생각을 보죠. “러시아에서 민주주의혁명의 완전한 승리는 농민 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을 기반으로 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태가 아니라면 이루어질 수 없다. 필연적으로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임무가지 떠맡게 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동시에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강력한 자극을 줄 것이다. 오직 서구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만이 러시아를 부르주아적 복고로부터 보호하고,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결론으로 이끌어 줄 가능성을 확보할 것이다.”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레닌과 트로츠키는 혁명관의 견해가 달랐어요. 그러다 레닌이 1917년 4월3일에 <4월 테제>를 발표합니다. 이는 일종의 영구혁명론적이고, 트로츠키적인 관점을 상당히 끌어들인 거죠.
그리고 레닌의 사후 4년 간의 권력 투쟁 끝에 스탈린이 권력을 잡고, 트로츠키가 밀려나게 되면서 스탈린주의적 해석이 정통해석이 됩니다. 그리고 스탈린주의는 멘셰비키류의 엄격한 역사발전 단계론을 부활시키고, 1924년부터 영구혁명론을 비판합니다. 그래서 본격적인 의미의 마르크스주의 역사서술은 스탈린주의 등장 이후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울러 좌파 역사서술은 1940년대에 스탈린주의의 역사발전도식과 탁월한 과거구성능력의 결합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급진적인 관점들을 담아냈죠. 
마무리 발언하겠습니다. 부르주아혁명론은 현재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으로 학계에서는 거의 형해화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좌파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특정 혁명의 부르주아혁명 여부의 문제는 이미 논쟁의 주 무대가 아니예요. 하지만 부르주아혁명론은 사회주의혁명의 적실성 여부와 관계없이 여전히 오늘날의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출현과 그 작동방식을 이해하는 주요한 통로의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긴 시간 동안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르주아혁명론의 뿌리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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