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4반세기를 반추하며

노동사회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4반세기를 반추하며

편집국 0 3,384 2013.06.06 04:45

우리 처음처럼

                                                     김수열

꽃이 진 자리에 
꽃은 피지 않는 것인가
그대 한 떨기 통꽃으로 진 
그 자리엔 스산한 바람 그리고 바람

더불어 꽃이 되자던 
그래서 한아름 꽃무리 이루자던
칼날 선 언약들은 
세치 혀끝에서 흩어져 사라지고

더러는 어쩔 수 없어 길을 떠났다 
마침내 꽃이 되어 
그대 진 자리에 선연히 다시 피마고 
다짐하고 다짐하며 소 울음소리로 길 떠났다 

더러는 잘못 배달된 우편물처럼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세월이 가면 그대도 가고 
그대가 남긴 그림자도 가고 
쥐꼬리만한 부끄러움이야 손으로 가리면 그뿐
황망하게 뒤돌아섰다 
향냄새 채 가시기도 전에 서둘러 길 떠났다 

이제 남은 건 
빈 산 빈 하늘 
아무리 뒤돌아봐도 텅 빈 들판

그래 이제 시작이다 
처음처럼 다시 시작하는 거다
빈 들판 가득 
바람으로 달려가는 거다 
가서 꽃으로 피어나는 거다 
때가 되면 
툭 
툭 
툭 
통꽃으로 떨어져 
빈 산 가득 꽃물결 이루는 거다 
빈 하늘 향해 꽃향기 날리는 거다 
우리가 만난 그 첫날 그 밤처럼 
뜨겁게 일어서는 거다 
다시 시작하는 거다 

올해도 6월 민주항쟁 기념행사가 열려 이런 저런 성찰의 논의들이 이루어진 듯하다. 그런데 20년 만에 겹쳐져서 온다는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의 열풍 탓인지, 그 반향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노동에 대한 얘기는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심각한 경제난 때문에 삶의 문제에 골몰한 탓도 있을 터이다. 민주항쟁의 연장선에서 노동은 별도로 논의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 자체가 바닥에 가라앉은 결과 정치적 사회적 논점에서 많이 비켜나버린 것은 아닌지 씁쓸한 느낌이다. 특히 통합진보당 사태로 진보 진영의 일각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와중이어서 더욱 그렇게 생각됐다. 그렇다고 노동 의제가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된 7월 이후에 활발하게 제기될 가능성도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처절한 절규와 언론 파업과 화물․건설 파업에, 분출하는 민주 공정 언론에의 열망과 생존에의 처절한 요구들이 그런대로 사회적 관심을 붙들어 매고 있는 정도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4반세기에 이른 우리 사회의 현주소는 어디이며, 사회개혁의 중심축이라는 노동운동은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 

87년 민주 항쟁 이후 민주화의 진전, 그리고…

올해는 1987년 여름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25년, 97년 총파업으로부터 15년이 되는 해다. 87년 민주항쟁의 1차적 목표는 반독재 민주화였다. 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고문사와 연세대생 이한열 군의 죽음으로 촉발된 6월 항쟁에서 외쳐진 ‘독재 타도 호헌 철폐’ 절규가 이를 말해준다. 이를 위해 국민들의 엄청난 피와 눈물과 땀방울이 시가지를 적셨고, 마침내 전두환은 6월29일 ‘항복’을 선언했다. 8개 항의 민주화 이행 약속이 그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6월 한 달 동안 내내 타올랐던 격렬한 혁명적 열기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빈약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노동기본권이 한 구절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은 항쟁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연말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 몰입했다. 미국이 시민혁명을 두려워 한 나머지 전두환에게 압력을 넣어 얻어낸 ‘미완의 혁명’, ‘절반의 성공’이 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튼 민주화 진전의 물길은 트였다. 1961년 5.16 군사반란으로부터 1987년 12월16일대통령 선거까지 26년 7개월 동안, 아니 노태우 정권 5년까지 합하면 31년 7개월 동안 잔혹한 군홧발 아래 짓밟혀온 민주주의가 겨우 숨을 쉬게 된 것이다. 그 후 국민기본권을 회복시키고, 인권 신장을 위한 법률과 제도의 제자리를 찾으려는 노력들이 지속되었다. 약간의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민주화의 도정을 멈추거나 되돌리지는 못했다. 아울러 반민주적 독재의 명분으로 악용되었던 남북관계도 2000년 6.15공동선언과 2006년 10.4 공동성명을 통해 화해와 협력이라는 큰 변화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노동기본권도 다른 것에 비해 더디기는 했지만 개선되어 간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토록 완강했던 수구보수 세력의 반발과 저항도 민주화 대세의 도도한 흐름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황량한 사막지대가 된 민주화의 광장

그러나 2008년 이래 상황은 돌변했다. 지난 4년여 민주화의 광장은 황량한 사막지대가 되어버렸다. 집권 초기 범국민적 촛불 시위에 놀라 한 발 물러섰던 이명박 정권은 얼마 후 곧바로 반격을 개시했다. ‘경제 살리기를 위한 법과 원칙의 준수’가 그 명분이었다. 4대강 사업, 한EU-한미 FTA, 제주 해군기지 건설 등이 강행되고, 용산 주민들에 대한 참혹한 철거도 마다하지 않았다. 인권보호 기능은 폐기되고 과거사 정리도 대부분 중단되었다. ‘김대중-노무현 흔적 지우기’가 정책 행정의 곳곳에 스며들었고,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기 위해 국회도 여론도 무시한 인사정책이 강행되었다. 지역 패권에 힘입어 국회를 장악한 한나라당은 ‘민생’을 빙자해 날치기 과반수 의결을 거듭 자행했고, 민주화를 지지 지원했던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은 갖가지 억압과 차별에 치를 떨어야 했다.

이런 집권 세력에게 남북관계의 증진을 기대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 국민들은 지난 52개월을 대립과 긴장 속에 가슴 졸이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국민의 저항은 필연, 이를 누르기 위해 정권은 광범한 민간인 사찰을 범했다. 그럼에도 정권 막판에 대통령 측근들의 이런저런 비리와 부정으로 위기에 몰리자, 집권당은 이름도 정강 정책도 모두 바꾸는 책략을 펴 역공의 기회를 노렸다. 나아가 집권당과 청와대는 4.11 총선거에서 승리한 후 통합진보당의 내분을 빌미삼아 곧바로 민주진보 진영에 반격을 가해왔다. ‘종북주의’ 색깔시비가 그것이었다. 총선에서 내세운 복지․민생․경제민주화는 애당초 부담스러운 것이었는지 언급이 없다. 5․16 군사반란과 유신독재의 만행을 옹호하는 집권 여당의 강력한 대선 후보는 국회의원의 ‘국가관’을 운운하고, 당 대표는 극우 극작가가 지은 좌익분자 살생부를 끼고 ‘빨갱이 국회의원 접근금지론’을 편다.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애당초 ‘기업 프렌들리’를 선언한 정부였다. 노동 유연화와 법과 원칙에 의한 노사관계 선진화만이 경제 살리기의 해법이라는 주장 앞에, 노동자들의 항의와 반발은 ‘조직 이기주의’, ‘정규직 노동귀족들의 횡포’로 규정되고, 가차 없는 징벌이 가해진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연이은 죽음이 의식될 리 없고, 권력의 언론 장악에 저항하는 언론 파업은 법과 질서에 대한 반역으로 취급될 뿐이었다. 그 뿐인가. 검찰과 법원은 권력형 비리와 경제권력에 면죄부를 남발하고, 친일파 군사반란의 독재자를 위한 기념관이 세워지고, 학살의 주범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사열을 받고 골프를 즐기며 출신고교에 흉상이 세워진다고 한다.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인가. 독재자와 그 후예들이 존경받고 큰소리치는 세상, 87년 이전의 반공주의, 국가주의로의 총체적 회귀다.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선언이었던 노동운동

6.29 선언은 노동자들에게는 군부독재 권력의 총두목이 물러가는 절차일 뿐이었다. 그리고 기본권은 법전의 장식품일 뿐, 오랫동안 지속돼 온 억압상황을 변화시키겠다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다. 그것은 민주항쟁 과정에서마저도 노동자의 절박한 요구가 묻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항복 선언’은 허구였고, 노동자 권리는 스스로 떨쳐 일어나 쟁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전국과 전 산업의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난 노동 쟁의이며 대중적 항거였다. 목표는 ‘인간답게 살아보자’는 요구로 집약되었다. 중화학 대기업 생산직으로 주력을 이룬 노동자들은 단결과 투쟁의 폭발력을 확인하고, 오랜 패배주의와 좌절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새로운 노동운동의 주체를 형성하고, 사회적 민주주의 쟁취와 노동자계급의 정치역량 강화를 위한 계기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노동자들은 이후 투쟁과 조직화의 과정에서 민주노조 진영을 구축하여, 노동 배제적인 정책을 물리치고 노사 간 힘의 균형관계를 확립하고자 했다. 민주노조 진영은 지노협-업종협-전노협을 거쳐, 마침내 1995년 민주노총의 출범으로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형을 형성했고, 사회변동의 중심축으로서 위상과 역할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노총의 개혁을 추동했다. 

그러나 주변 조건은 한국 노동운동의 급성장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라는 경제 상황을 배경으로, 노동자들은 6월 민주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발화점으로 하여 상당한 생활조건 개선과 노동현장 민주화, 그리고 노동기본권 쟁취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채 10년도 안 돼 권력과 자본은 노동자들에게 ‘신경영전략’에 이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거센 파도에 순응하도록 요구했고, 노동운동은 이를 거부했다. 그로 인한 충돌이 1996년 말과 97년 초 사이에 벌어진 전국적인 총파업 투쟁이었다. 

여기서 노동운동은 김영삼 정부의 오만한 횡포를 응징했지만, 노동의 유연화 공세를 근원적으로 차단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IMF 외환위기라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여, 엄청난 혼란과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나라 지배 세력들은 ‘경제 살리기’를 내세워 국제화․세계화․신자유주의정책으로 내달렸다. 독점자본주의 독재정권 아래서 민주주의의 회생을 위해 싸워 왔다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도 그랬거니와, 이명박 정권은 정치적으로는 민주화 정부를 부정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처음부터 ‘기업 프렌들리’ 기조를 내세워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을 더욱 확장했다. 

민주화와 신자유주의화의 4반세기, 노동 없는 진보 

노동 현장은 숨 막히는 경쟁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낙망으로 아수라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은 경제위기와 실업의 위협 아래 불안과 울분으로 나날을 지냈다. 정규직 노동자는 일상화된 구조조정 위협과 노동강도 강화에 숨 막혀 하고, 비정규직 및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들은 극심한 고용불안과 빈곤 및 차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간접고용과 특수고용과 같은, ‘노동의 분단’을 노리는 새로운 직종들이 자본의 철저한 경제원칙에 의해 창조되어 왔고, 그런 흐름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한편, 민주화와 신자유주의화로 집약되는 지난 25년, 노동운동은 생존권과 민주적 권리를 사수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과 함께 운동의 혁신을 추진했다. 운동 방향 또는 기조의 재확립, 기업별노조의 극복과 산별노조 건설, 노동자 정치세력화, 현장 조직력의 복원, 지도력의 확립, 노조 운영의 개선 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민주노총의 경우 산별노조 건설은 조합원의 80%가 해당될 정도가 되었고, 정치세력화는 민주노동당을 거쳐 통합진보당의 의회 진입이라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정규직 남성 중심이라는 달갑지 않은 특성에, 조직률 하락, 현장 조직 무력화, 지도력 부재 현상은 달라질 조짐을 거의 찾을 수가 없다. 각급 조직마다 정파들의 정처 없는 아귀다툼도 여전하고, 노동운동의 통일성, 연대성, 도덕성에 깊이 파인 상처를 치유할 방도도 쉽사리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나마 진전됐다는 산별노조 건설의 경우에도 강점인 조직의 집중력이나 통합력, 그리고 현장의 활성화는 아직도 취약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노동 없는 진보’의 허상에다 당내 패권주의의 농단에 파산 위기로 몰려 있다. 

결국 노동운동 25년 역사의 현주소는 노동 없는 민주화에, 신자유주의와 노동 유연화의 거친 파도를 타고 넘지 못했고, 권력과 자본이 펼쳐 놓은 또 하나의 그물 -때늦은 복수노조 허용에 교섭창구 단일화, 그리고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마저 겹쳐 갈수록 어려운 국면을 맞고 있다.

다시 돌아올 거대한 변화를 기다리며

질풍노도와 같은 노동자들의 기세와 함성이 자본의 전횡을 뒤엎을 듯이 전국을 뒤흔들던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부터 4반세기가 흘렀다. 그때 태어난 아이는 벌써 스물다섯이다. 머리띠를 동여매고 목청껏 ‘노동 해방’을 부르짖던 20대, 30대 젊은이들은 이제 머리가 희끗 희끗한 중장년이 되어 있다. 세상은 변하는 것이고, 역사는 발전하기 마련이라는 믿음은 지금도 그대로지만,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이나 노동운동의 처지는 전례 없이 각박해 보인다. 

그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운동 혁신의 중요한 방책으로 ‘임원직선제’가 도입되어 시행을 눈앞에 두고 있다. 여러 대안이 마땅치 않은 마당에 변화의 한 계기를 만들어보려는 충정은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조직 원리나 역사적 경험, 그리고 현실적인 가능성 등에 비추어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어 왔고, 따라서 조직적 혼란과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아울러 민주노총이 답답하기 그지없는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벌인다는 총파업 투쟁도 운동의 근본적인 변화의 전기로 발전되라는 기대를 얼마나 충족시킬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직 희망을 향한 실험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노동자 서민대중의 변화에 대한 갈망은 나라 안팎에서 광범하게 확산되고 있고, 노동운동의 혁신에 대한 인식과 요구도 팽배해 있다. ‘제2의 산별노조 건설 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에 갈수록 힘이 실리고,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세상만사 변하지 않는 진리는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변화는 오기 마련이지만, 그 바람직한 방향은 주체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6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