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없는 진보’의 성찰과 정치세력화의 재구성

노동사회

‘노동 없는 진보’의 성찰과 정치세력화의 재구성

편집국 0 3,420 2013.06.06 04:23

온 세상이 화사한 꽃들과 초록으로 채색되는 계절의 여왕 5월, 그 첫날은 노동절이다. 세계 각지의 노동자들이 가족과 함께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축하하고 기념하는 축제의 날, ‘메이데이(노동절)’이다. 억압과 멸시와 천대를 물리치고 노동자의 날을 쟁취하기까지 숱한 역경과 고난을 견뎌 온 122년이 있었다. 노동절은 분명 즐거운 날이어야 한다. 하지만 올해의 노동절은 즐겁기보다는 우울한 구석이 더 많아 보인다. 노동자 삶의 조건 안팎으로 어두운데다, 쉽사리 밝아질 전망이 잘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노동 현실은 엄혹한 분단과 차별의 사슬에 묶여 있다.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직접고용과 간접고용, 일반 노동자와 특수고용노동자, 대기업과 중소영세기업, 국내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 사이의 문제 등 개별적 노사관계들이 그렇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쳐왔던 노동운동의 전선마저도 기업별, 지역별, 산업별 분열구조에 막혀 있다. 이러한 분단과 차별의 근저에는 자본의 무한 증식을 위한 노동의 유연화가 자리하고 있다. 그로 인한 파편화와 경쟁의 법칙 아래,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고용불안과 생활고의 늪으로 밀려가고 있다. 

총선 패배를 자초한 야권의 오만과 안이함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으니, 바로 4․11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노동운동 진영이 연대하고 지지했던 야당의 참패다. 총선거 승리로 암담한 상황을 타개하려 했던 여망이 산산이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부자 정권의 횡포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팽배한 상황에서, ‘사상 처음으로’ 야권 연합전선을 펴고도 오히려 집권세력에게 과반수 의석을 내주고 만 것이다. 

그 원인에 대한 진단은 대체로 야권의 오만과 안이함으로 집약된다. 반(反)이명박 정권 분위기에 취해 마치 집권한 것처럼 상황에 안주한 점, 연이은 위기 신호에도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한 지도력의 취약성, 이미 한물간 ‘이명박 정권 심판론’에만 열을 올림으로써 고달픈 삶을 사는 민중의 목마름을 풀어주지 못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에 비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정점으로 한 새누리당은 공천 과정에서 강한 집중력을 구사하며, 일사불란한 대오로 위기에 적극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명과 정강 정책을 바꾸어 복지와 민생의 약속 이행을 강조하는 한편, 한나라당 및 이명박 정권과의 단절론으로 야당 공세의 김을 빼버렸다. 또한 한미 FTA나 제주 해군 기지, 민간인 사찰 등은 ‘공동책임론’, ‘말 바꾸기론’ 같은 물타기작전으로 역공을 가하기도 했다. 거기에 방송과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언론들은 ‘거대 야당 견제론’과 ‘보수 위기론’을 대대적으로 유포하여, 보수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야당이 ‘이명박 정권 심판론’에 함몰되어 있는 사이, 박근혜 위원장은 현 정권과의 차별을 전제로 민생문제 해결을 강조함으로써,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이다. 

애초 보수 집권 세력과의 승부에서 이기기는 여러 정황상 어려웠다. 해방 후 거의 전 기간을 지배해온 데다 1960년대 이후에는 무력 강권으로 권력을 탈취하여 휘둘러왔음에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며 절치부심해오던 그들이다. 그렇지만 이명박 정권의 실정이 너무도 크고 분명했기 때문에, 이번 총선의 패배는 민주주의 발전과 변화를 바라는 국민의 여망에 비추어 너무나도 아쉬운 결과다.

노동의 참패 위에 진보진영의 약진? 

한편, 이번 총선거 결과 통합진보당은 13석을 얻어 숫자상으로는 사상 최대의 의회 진출을 기록했다. 모든 매체들이 “진보진영의 약진”이라 평가하고, 일부 보수언론은 사설까지 동원하여 통합진보당의 “성숙한 모습”을 기대하는 진풍경도 나타났다. 또한 민주통합당과 새누리당의 의석을 차지한 노동조합 출신 간부와 우호 인물이 과거보다 훨씬 늘어났다. 이 모두를 두고 ‘진보진영’이라고 친다면 그 세는 가히 약진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실제 진보진영 또는 노동운동진영의 상황을 보면 그리 환호할 일은 아닌 듯하다. 통합진보당의 의석수가 크게 늘어난 데 반해, 진보신당과 녹색당은 ‘해체’를 당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게다가 이번 선거에서 통합진보당이 획득한 정당 지지율은 10.3%로, 2004년 17대 총선 때 민주노동당이 얻은 13.6%에 많이 못 미친다. 또한 진보정당의 최전선이라 할 울산, 창원, 거제 등 이른바 ‘영남권 노동벨트’가 해체됐고, 비례대표 가운데 노동계라고 할 만한 인물들의 진출은 좌절됐다. 

나아가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진보세력들 내부의 갈등과 경쟁은 선거 결과를 망친 데 그치지 않고, 이후에도 진영들 간의 연대와 통일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대두될 만큼 심각했다고 한다. 이런 것들이 진보신당 일부와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이 뭉친 통합진보당과 재편된 진보진영의 종합성적표이다.

양대 노총은 “노동대중의 마음을 열지 못해 총선에서 패배했다.”고 자인했다. 민주노총은 노동벨트가 붕괴된 가운데 지지후보 60명 중 겨우 8명을 당선시켰다. 한국노총은 7명을 배출했지만 민주통합당 5명 중 2명은 정치인 출신이고, 새누리당 2명은 조직의 공식 지지를 받은 이들이 아니다. 이러한 결과가 양대 조직에 미치는 충격은 매우 클 것이다. 

양대 노총이 통합진보당 또는 민주통합당과 적극적으로 연대 및 지지활동을 했던 것에 비추어 보면 너무도 초라한 성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총선거 결과를 둘러싸고 향후 조직 안에서 갈등과 암투가 재연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민주노총은 특정 진보정당 지지와 관련한 정치방침 결정을 둘러싸고 날카로운 논쟁과 갈등을 겪을 여지가 높다. 한국노총은 정기대의원대회 개최가 사상 최초로 성원 미달로 무산될 정도의 심각한 내부 분열 상태를 해소해야 한다. 

난관과 장애를 맞이한 노동계의 투쟁 계획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양대 노총은 이명박 정권과 대치전선을 펼치면서, 이번 총선거 승리를 통해 노동조합운동을 옥죄고 있는 집단적 노동관계법의 전면 개정과 비정규직노동자 문제, 노동시간 단축 문제, 정리해고 규제 강화 등의 현안 과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 하나의 방법으로 입법투쟁 또는 8월 총파업투쟁을 예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국회의 과반수 의석을 장악함으로써 이의 실천에 중대한 차질을 빚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명박 정권 아래 악화한 환경이 더욱 악화했으니, 부담이 보통 큰 게 아닐 것이다. 더욱이 새누리당은 정강과 정책을 변경하고 선거 기간 내내 민생문제 해결을 위한 국민과의 약속 이행을 강조했지만, 이들의 정체성은 성장주의와 시장주의의 본질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 있지 않다. 새누리당의 복지정책이나 경제민주화 공약은 구체성과 개혁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평가다. 또한 새누리당은 한미 FTA나 제주 해군 기지는 이명박 정권의 기조를 유지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재정 적자의 급증을 배경으로 그나마 약속했던 복지정책의 변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부자감세’와 ‘반(反)복지’를 기본으로 하는 이명박 정권의 정책기조를 어느 정도나 변화시킬지는 미지수다. 

특히 노사관계에 대해서는 이명박 정권과 궤를 같이 할 것으로 보인다. 노사 간에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개정된 집단적 노동관계법과 관련해서, 이제 시행 시작단계이고 별 문제가 없다는 판단 아래 아예 관련 공약을 내놓지도 않았다. 민주통합당도 민생, 복지, 경제민주화 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지만, 구체성과 실효성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경제민주화를 다룰 전문가 의원이 부족한 점은 여야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보면 선거 전 우렁찼던 목소리만큼 19대 국회가 민생문제 해결에 적극적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만큼 투쟁에 나서야 할 노동계의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치밀한 대선 대응과 정치세력화의 재구성이 요구돼 

혹자는 총선거 패배로 정권 교체의 열기가 많이 가라앉은 듯하다며 우려한다. 당분간 각 정당, 정파 사이의 책임 공방과 지도부 재편으로 어수선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로 인해 자칫하면 정권 교체의 열망이 냉각될 위험성도 없지 않다. 또 새누리당이 총선 승리의 여세를 몰아 ‘박근혜 대세론’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보고 패배감에 젖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부터 성급한 비관론에 빠질 이유는 없다. 

총선거보다 더욱 확실하게 이 나라 권력구조의 핵심을 결정하는 대통령 선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는 말처럼 언제 어떤 변수가 작용하여 민심이 요동칠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더욱이 새누리당의 승리가 갖는 한계 또한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번 승리는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기댄 지역주의와 연고주의의 산물이자, 보수․영남․재벌․조중동의 합작품이다. 그래서 새누리당이 잘했다기보다는 야권연대의 실책에 편승한 반사이익이라는 평가도 있다. 

또한 이 나라 전체 역량의 절반 가까이가 집중돼 있는 수도권에서 새누리당은 ‘완패’했다. 지역구 후보자들의 득표율을 보면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을 합한 것이 43.9%로 새누리당의 43.3%를 앞섰다. 범진보와 범보수의 비율이 48.79% 대 48.24%라는 분석도 있다. 국민들은 아직 ‘힘 있는 자’, ‘누르는 자’가 중심이 된 신자유주의 세력의 교체를 위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노동진영은 연말 대선에서의 정권 교체를 이뤄내기 위해 모든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아울러 ‘노동 없는 진보’의 현실을 냉철하게 되짚어보고,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그 의의와 성격, 원칙과 기준을 재정립하여, 노동자 대중이 적극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제시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물론 노동자 정치세력화만이 노동운동 위기의 타개책이 될 수는 없을 것이고, 그것 하나만으로 만사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동운동 안팎의 조건들을 면밀히 살피고, 운동 전체의 침로를 설정하기 위한 하나의 중대한 계기로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한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노력의 경주가 요구되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6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