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이 지금 돌아봐야 할 것

노동사회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이 지금 돌아봐야 할 것

편집국 0 4,003 2013.06.06 04:02

최근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1987년 이후 지난 20여 년 의 노동정치 역사를 1단계로 보고, 이 1단계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 작업이 실패했다는 판단 위에서 그런 것 같다. 필자의 생각도 같다. 기성 양대 정당에 대한 불만이 ‘안철수 현상’으로 폭발하고 <나는 꼼수다>가 기성 미디어를 조롱해도, 노동자정당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호소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제1단계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은 실패했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지역구 2석을 포함하여 국회에서 10석을 얻었을 때, 다음 선거에서는 원내 교섭단체 진입까지 바라볼 수 있다는 기대가 일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2008년 총선 직전 민주노동당은 분당했고, 선거 결과 분당된 두 정당의 의석수는 민주노동당만의 5석에 그쳤다. 정당 지지율은 민주노동당 5.7%, 진보신당 2.9%로, 둘을 합쳐도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얻은 13.1%에 훨씬 못 미쳤다. 이후 재보궐 선거에서 양 당이 각각 의석을 하나씩 추가했지만, 전반적으로 2008년 이후 민주노동당-진보신당에 대한지지 기반 축소,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조직력과 정치적 입지 약화 등으로 인해 한국의 노동자 정치는 2004년 이전 단계로 후퇴했다. 최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일부, 국민참여당의 통합으로 이루어진 통합진보당 역시 지지율 5% 이하에 맴돌고 있다.

세계적으로 볼 때 한국,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은, 후발자본주의의 경로를 겪은 나라들 중에서, 1980년대 군사정권 붕괴기에 노동자들이 대파업을 통해 정치․사회세력으로 등장한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 국가들 중 브라질은 노동자 출신의 룰라 대통령이 두 번의 임기를 마치는 등 성공한 사례로 거론되고, 남아공은 노조총연맹 코사투(COSATU)가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 혹은 공산당과 삼자연합의 긴밀한 협조관계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노동운동세력은 제1야당의 주요 연합세력도 아니며, 독자적인 노동자정당을 통한 집권 혹은 의회 내 주요 정치세력으로서의 입지 확보에도 실패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경과로만 보면, 한국은 1945년 이후 ‘후발산업화-노동운동 진출’이 가시화된 나라 중에서 노동자가 정치세력화에 실패한 사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노동자의 정당이 제도/비제도 정치현장에서 국가의 정책 결정과 의회의 입법, 그리고 사회변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도의 힘을 갖게 되는 상황’을 통칭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노동자정당이 선거에서 얻은 의석수와 지지율, 노동조합의 입법로비 성공 여부 등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의 정치적 영향력은 대규모 파업 등의 집단행동은 물론, 반(反)자본 사회여론의 동원, 기성 정당에의 로비 등을 통해 국가의 성격을 중립 혹은 친(親)노동자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다양한 방식으로 발휘될 수 있다. 

중요 변수가 된 민주노동당의 분당

지금까지 한국의 양대 노총 중 한국노총은 청원, 로비, 노사정위원회 참여, 기성 정당과의 정책연대 등을 거쳐 정당 직접 참여의 과정을 거쳐 왔고, 민주노총은 노동자정당 건설의 방법을 택해 왔다. 민주화 이후 결성된 노조세력의 경우, 민주노총처럼 정치적 힘의 행사를 집단행동과 독자정당 결성을 통해 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노총은 지난 번 총선과 대선에서는 한나라당을, 이번 2012년 선거에서는 민주통합당을 지지하고 선거연합을 함으로써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으나, 민주노총은 이제 통합진보당을 지지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실현하려 한다. 

한국에서 지난 1단계의 정치세력화의 과정을 보면, 2004년 이전까지는 노조운동을 좌우하는 객관적 조건이나 노조 지도부의 전략적 선택이 가장 일차적인 변수였다. 그런데 2004년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10석을 얻은 이후에는 당, 그리고 분당 후 두 정당의 전략적 선택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좌우하는 중요 변수로 추가되었다. 즉, 사회운동이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기본이지만, 거꾸로 기존 정당의 구조와 활동이 사회운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2008년 민주노동당이 분당한 이후에는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양당의 노선이 노조운동과 더불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경로에 중요 변수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긴 하지만 노동대중 일반의 의식과 행동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 노동대중들이 노동자정당 혹은 진보정당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상부의 정당이나 노조가 아무리 노력해도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길은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통합을 거부한 채 남은 진보신당 측은 ‘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진정한 진보정치’, ‘진정한 사회주의 가치 추구’를 제창하고 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타협 노선과 원칙 노선의 대립은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 독자정당이 제도권에 진입하면 선거와 표를 의식해서 중간층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두 번의 전환기에도 넘지 못한 경제주의 지향 

한국 노동운동에게는 두 번의 전환의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1988년에서 1990년 사이의 전환기이고, 다른 하나는 1997~98년 무렵의 전환기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에 힘입어 성장한 새 노동운동은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노협)라는 새로운 전국단위 조직 결성에 성공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1988년의 노동법 개정 시도가 좌절하고 1990년 현대자동차 노조와 현대중공업 노조의 연대 파업이 실패함으로써, 이후 단위노조들이 점차 제도개혁, 정치투쟁, 노동자 연대보다는 회사 내에서의 높은 대우, 노조의 입지 확보에 치중하는 것을 방치하게 되었다.

사실상 이는 당시 노동운동이 도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다고 볼 수 있다. 엄청난 노동탄압에 맞서서 ‘방어를 위한 연대’를 구축할 수밖에 없었던 새 노동세력은 전노협, 민주노총의 조직화를 통해 그러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조직 기반을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 애초 중소기업 노동자들을 주로 기반으로 했던 전노협이 신생 대기업 노조들을 받아들여 민주노총으로 탄생하자, 외형적으로 그 조직력이 강화되었지만 노동운동의 주도권이 점차 대기업 노조들 쪽으로 이전했다. 그로 인해 민주노총의 노선도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됐다. 

대기업의 경우 고용안정, 사내 복지 등이 충족되기 때문에, 대기업 중심의 민주노총은 자신에게 닥친 ‘정리해고 문제’를 제외하고는 복지/노동/교육 등 노동자 일반의 재생산과 관련된 이슈에 있어서 조직적인 대응을 거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 재생산과 관련된 의제는 주로 시민단체들이 담당했고, 노조는 주로 임금과 노동조건 문제만 치중하는 경제주의 지향을 갖게 되었다. 

대한민국 ‘장교클럽’의 일원이 된 조직노동

1996~97년 총파업과 IMF 경제위기 이후 두 번째의 전환의 계기가 다가왔다. 이 시기에 노동법 개정 총파업투쟁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를 기반으로 <국민승리 21>이 만들어져 1998년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였고, 이후 민주노동당이 결성되었다. 당시 새롭게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IMF 측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였다. 그 대가로 노사정위원회라는 3자 협의기구의 결성, 노동자 정치참여 합법화 등을 제공하였다. 

노동 측은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반대를 했으나 결과적으로 정부와 자본 측이 요구한 정리해고제 등을 받아들였다. 즉, 현장조직의 와해를 감수하면서도 제도적으로 인정받는 노동자 정치활동이라는 길을 걷게 되었다. 그 결과 조직노동은 대한민국 ‘장교클럽’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그것은 사병들이 대거 사라지는 것을 감수한 대가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노동 양극화, 비정규직화, 노조 조직률 저하가 필연적으로 따라온 것이다. 

민주노총은 점차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이익대변 조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정치․사회적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그렇지만 장교클럽의 회원 자격증을 얻은 대가로 민주노동당은 2004년 선거에서 비례대표 8석 포함 국회의원 10석을 얻는 초유의 성과를 올렸다. 그런데 그 후부터 노동 측의 모든 정치활동은 ‘당의 과제’가 되었다. 선거 관련 모든 정치활동은 모두 당에 위임되었고, 민주노총은 임금, 고용 이슈에만 치중했다. 

‘삼성문제가 왜 노동문제인가’를 노조가 모른다면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만, 자본주의 국가에서 ‘넓은 의미의 정치’는 정당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시민단체나 지식인의 활동도 정치고, 검찰과 경찰, 그리고 이른바 조․중․동 등 보수언론의 활동 또한 극히 정치적이다. 선거참여, 정권에 대한 지지/비판, 국회의 입법활동만이 정치가 아니라, 기존의 지배질서의 유지/변화에 관한 모든 일은 정치활동에 속한다. 나아가 구조조정, 정리해고, 기업의 총액출자 제한 등 노동자들의 삶과 가장 일차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사안들도, 기존 법의 개폐,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 사법부의 판결에 영향을 주는 여론과 정치적 함수관계를 갖고 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노동세력의 전체 사회적 영향력, 즉 자본-노동 간의 정치적 힘의 관계에 좌우된다.

당시 민주노동당이 얻은 10석으로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양대 노총이 나름대로의 정치방침을 세우고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그 나마의 10석도 별 의미가 없었다. 노동자 후보의 진출에 직접 영향을 주는 선거법, 정치자금법 개정 등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관련해서 극히 중요한 관문인데, 노조 측에게 그것은 오직 정치가들의 문제처럼 비춰졌다. 또한 한국의 경우 재벌문제는 단순한 경제적 이슈가 아니라 고용, 복지, 비정규직 문제 등 노동자와 관련된 극히 정치적 이슈였는데, 민주노총은 ‘삼성문제가 왜 노동문제인지’를 인지하지 못했다. 

선거 때만 이뤄지는 현장정치, 실종된 정치교육

이렇게 지배집단이나 자본 측은 언제나 정치를 하고 있는데 노동 측은 오직 선거 때만 대중들 앞에 나선다면, 이 게임은 시작하기도 전에 패배일 수밖에 없다. 정치는 독립변수로서도 역할을 하지만, 언제나 경제․사회적 조건들의 종속변수이다. 때문에 노동세력의 조직된 힘과 지속적 실천이 없이는 노동자정당의 기반은 마련되기 어렵다. 그런데도 2004년 이후 민주노동당이 약진하자 현장 노조활동가들은 정치활동을 경원시하고, 정치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현장 노동운동을 의식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지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이 서로 상호보완 관계를 맺지 못한 것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기반이 되는 노동자 정치교육은 거의 실종되었다. 

한편, 당시 민주노동당 역시 정당으로서의 정치적 실천을 실행하기보다는, 노동운동의 관성을 반복하는 행태를 보였다. 당은 대중조직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의회정치에서는 다른 정당과의 연합/타협 등 정치전술도 필요하며, 의원들은 개인이 아니라 당의 일원으로서, 대중조직의 대표가 아닌 정치 지도자로서 역할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정치 지도자들은 사사건건 ‘운동의 논리’에 발목이 잡혔고, 민주노총의 눈치를 보았다. 당도 의원들의 개인 활동과 명망성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선거정치와 대중적 기반 확대를 위해서는 자영업자나 중간층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정책 개발과 직접적인 대변 활동이 필요했지만, 실제로는 민주노총의 한계를 넘어서는 실천의 모델을 거의 만들지 못했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노동운동의 한계를 고스란히 안고 가는 양상을 보여줌으로써, 노동자 정치를 가시화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견고한 구조적 장애, 사라진 노동정치 주체 사실 한국의 노동자 정치는 극복해야 할 큰 산을 언제나 마주하고 있었다. 노동에 대한 부정적 문화, 노동자들의 낮은 계급 정체성, 강한 반공 이데올로기, 군소정당의 입지를 어렵게 만드는 대통령제와 소선거구제, 낮은 비례대표 의석 등의 정치현실, 그리고 산별노조의 취약성과 지역단위 노조 조직의 부재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제약은 하루아침에 돌파하기 어렵다. 

중대선거구제도 도입과 비례대표의 확대가 없이 지역구에서 노동자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비례대표의 획기적인 확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선거법 개정 없이 현재의 조건에서 노동자정당이 다수당이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거기에다가 1990년대 이후 글로벌화한 경제조건, 노동시장 유연화 경향, 노동의 양극화 및 파편화, 안정된 고용조건을 누리지 못하는 각종 비정규직 노동자의 확대, 서비스 노동자의 비중 증대, 청년층의 개인화 및 실업률 증가 등은 노동조합 조직률을 10% 아래로 떨어뜨렸으며, 계급정치의 기반을 침식하고 확대 가능성을 제약했다. 1990년대 이후 세계 각 나라의 노동정치, 노동자정당이 전반적으로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에 이 현상이 특별히 한국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긴 하다. 

노동자 정치운동은 일차적으로 조직노조가 주도할 수밖에 없는데, 1990년대 이후 생산직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과 사무직 정규직 노조들은 상당한 수준의 임금과 복지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정치 일반이나 복지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한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파편화된 조건, 동원과 참여를 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의 부재로 인해 더욱 탈정치화 되었다. 그래서 결국 한국에서 노동자 정치의 ‘주체’가 실종되었다.

지역단위 실천과 지도자, 성공사례 만들어내야

그러나 이러한 객관적인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한국의 노동자 정치가 2004년을 정점으로 해서 내리막길을 걷게 된 데는 상층부의 책임이 크다 할 것이다. 2008년의 분당 사태는 조직 노동자들 내부에서 노동자정당에 대한 불신과 환멸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물론 분당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입지가 강화되었을지는 미지수다. 

어쨌든 당시 신당을 추진 사람들은 신당운동을 통해 내부 혁신의 동력을 상실한 노동운동에 외부적인 충격을 던져줌으로써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현장의 노동자 정치가 거의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노선을 선명히 하면 대중들이 결합할 것이라는 사고는 1980년대 이후 계급노선을 강조해온 진영의 고질적 한계이다. 한국의 노동대중들은 당의 이념적 입장의 애매함 때문에 지지를 철회하는 것 아니라, 실제로는 현실정치에서의 힘의 역학을 고려하여 문제해결 능력이 있는 기성 야당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도정치에 편입되는 순간 노동자 출신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비판하던 중앙 중심 정치, 인물 중심 정치, 사회민주주의 방식의 타협적 노선에 점점 더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노동자 정치가 후보 중심, 인물 중심으로 가게 되면, 애초 독자적 정치운동을 했던 당위에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결국 한국 노동자 정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평소에 지역단위에서 노동자, 자영업자, 청년실업자 등을 포괄하는 지역 정치운동의 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주로 선거 정치에 몰두했다는 데 있다. 지역 기반 없이 선거정치에 나설 경우 패배는 너무나 명약관화한 일이다. 

선거와 무관하게 지역의 노동 현안, 민생 현안을 들고서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내고 그 성과를 바탕으로 지방자치선거나 총선에 나섰다면, 전국에서 몇 곳이라도 중요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성공신화는 다른 지역으로 확대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나 현재나 한국 노동자 정치의 가장 큰 한계는 지역기반이 없고, 지역단위의 실천이 없고, 지역단위의 지도자가 없다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은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 노동정치에게 필요한 세 가지 리더십

노동자 정치 혹은 진보정치가 노동자 대중은 물론 사회적 약자들의 가시권과 선택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음 3가지의 지도력이 필요하다. 

첫째, 정책적 지도력이다. 대중들을 설득할 수 있는 대안들을 만들어내서 공론의 장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 거대 여야 정당이 ‘좌선회’하면서 과거 민주노동당이 내세웠던 구호와 공약을 도용해서 여론화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상 힘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노동자 정치 측에서도 그러한 내용을 표현, 전달, 대중화하는 과정에서 실패했음을 말해준다. 진보정치가 ‘자신의 지식인’, ‘자신의 미디어’, ‘자신의 대중스타’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고지식한 방식으로 주장을 외치면서 자신의 진정성을 몰라주는 대중들을 꾸짖어 온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사실 정책은 그 내용보다도 ‘누가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중요하다. 재벌개혁이든 복지든 그 정책이 대중들에게 가시화되기 위해서는 실현 가능성이 있어야 하지만, 정당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상징하는 정치가와 지식인을 만들어내야만 그 문제를 사회에 각인시킬 수 있다. 지금까지 양대 노총이나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모든 조직에서 여전히 정책부서는 주변으로 몰려 있었고, 지식인이나 미디어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지도자는 거의 없었다. 

둘째, 정치적 지도력이다. 지방의회든 국회든 기존 제도정치에 진출한 의원 중에서 자신의 이상과 의지를 견지하면서도 유연하게 실천하는 정치가를 만들어내야 한다. ‘좋은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는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훌륭한 철학과 품성, 역사의식, 대중적 친화력, 상황 판단력과 돌파력 등이 겸비되어 있어야 한다. 

지방의 소도시 시장에서 시작하여 30년 동안 원칙을 양보하지 않은 채 상원의원이 되어 뜻을 펼친 미국의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의 끈기를 배워야 한다. 정당정치가 발달한 유럽에서는 당이 미래의 정치가를 훈련시키는 학교의 역할을 하지만, 한국에는 당이 그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른 길을 통해서라도 미래의 정치지도자를 육성해야 한다.

셋째, 현장 지도력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신규 노동자의 조직화, 혹은 풀뿌리 조직화를 실천하는 지도력을 양성해야 함을 의미한다. 비정규직, 빈민, 자영업자, 청년 등 기존의 조직노조의 외곽에 있고 동시에 지역사회에서도 소외된 층에게 어떻게 다가가서 어떻게 그들의 대변자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지도력들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길게는 30년, 짧아도 10년 이상 걸린다. 상당한 개인적 인내, 조직적 투자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척박한 한국의 실정에서 노동자 정치가 뿌리내리려면 그 정도의 시간은 필요하다. 1990년대에 시작했더라도 지금은 결실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밑바닥 문제 해결자’들이 87년 대투쟁 버금가게 조직돼야

한국 노동자 정치의 곤경은 노동운동의 취약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양자의 곤경은 그들이 ‘바닥 노동자들의 문제해결자’ 역할을 해주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 즉 돈은 일차적인 문제해결자이다. 따라서 돈과 영향력이 없는 조직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의지와 열정이 있어도 그 역할을 못 하게 된다. 대기업 노동자들의 높은 연봉과 막대한 조합비는 ‘자본이 의도한 대로’ 오직 그들만을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전체 노동세력의 입지 강화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파편화되고 개인화된 오늘의 피곤한 노동대중에게 어떻게 하면 노조나 노동자정당이 멘토가 되어 줄 수 있을까?

필자는 오래 전부터 ‘사회세력화 없이 정치세력화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사회세력화는 재벌, 복지, 노동, 교육 등 사회적 의제를 노동의 의제, 진보정치의 의제로 자기화하는 작업이다. 특히 노동정치세력은 빈곤층 삶의 재생산과 관련된 영역에 우선적으로 개입해 들어가야 한다. 직업훈련, 사회안전망, 건강과 보험, 주택과 교육 등의 영역이 그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987년 대투쟁에 버금가는 새로운 조직화 작업이 시작되어야 한다. 지역노조, 여성노조, 청년노조 등 사회운동노조의 역할이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다. 현장 노동자 정치 모임, 건강과 복지 모임 등이 새롭게 조직될 필요가 있고, 노동운동 이념을 모색하는 노동자 학술 교육 모임도 필요할 것이다. 특히 20대의 고학력 청년 노동자의 역할은 갈수록 중요해 질 것이다. ‘조직’과 ‘사회운동’이 인기가 없는 시대에, 전통적 조직화의 방식이 아닌 세력화, 사회운동성 강화, 그리고 그것을 통한 노동세력 일반의 거시권력 관계에서의 영향력 확대가 노동자 정치의 성공을 보장해 줄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6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