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정신을 짓밟는 정부

노동사회

헌법 정신을 짓밟는 정부

admin 0 3,425 2013.05.07 11:07

나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라는 기본권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이것은 통일연대와 여러 통일운동 단체들이 모여 치르는 '8·15 통일대축전’행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집회와 시위가 국민의 권리 보장 차원이 아니라 경찰 내지 정부당국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경찰 내지 정부당국은 8월 14일 미8군 앞 집회는 불허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일단 공권력이 방침을 정하면 금지통고의 근거를 무엇으로 할지는 집시법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추측컨대, 이미 전국 미군부대 정문에는 주한미군노조(한국노총 소속)가 내년 7월까지 위장집회신고를 내놓았으므로 그게 이유가 되거나, 제5조 1항 2호의 '폭력집회가 될 것이 명백'하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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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회와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헌법 조항인데 정부와 경찰은 앞장서서 '허가제'를 고수하고 있다.  ▷ 노동네트워크 ]

집회와 시위를 허가받으라고?

우리 헌법은 제21조에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에 대한 허가제를 명문으로 금지하고 있다.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는 게 그것이다. 집회와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헌법 조항인데 정부와 경찰은 앞장서서 '허가제'를 고수하고 있다. 

보수적이라는 헌법재판소도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가지는 헌법적 의미에 대하여 "대의민주주의 체제에 있어서 집회의 자유는 불만과 비판 등을 공개적으로 표출케 함으로써 오히려 정치적 안정에 기여하는 긍정적 기능을 수행하며, 이와 같은 자유의 향유는 민주정치의 바탕이 되는 건전한 여론 표현과 여론 형성의 수단인 동시에 대의기능이 약화되었을 때에 소수의견의 국정반영의 창구로서의 의미를 지님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회불안만 우려해서 무조건 집회·시위를 '터부'시 할 것이 아니라 비폭력적이고 질서파괴의 것이 아니면 민주주의의 신장을 위해 위축시켜서는 안될 기본권으로 보호하여야 한다(헌법재판소 1992. 1. 28. 선고 89헌가8 결정)"고 판시하고 있다. 

게다가 "집회 및 시위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의 집단적인 형태로서 집단적인 의사표현을 통하여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자유민주국가에 있어서 국민의 정치적·사회적 의사형성과정에 효과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민주정치의 실현에 매우 중요한 기본권(헌법재판소 1994. 4. 28. 선고 91헌바14 결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집시법상 신고제도의 취지가 신고를 받은 관할 경찰서장이 그 신고에 의하여 옥외집회 또는 시위의 성격과 규모를 미리 파악함으로써 적법한 옥외집회 또는 시위를 보호하는 한편 그로 인한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사전조치를 마련하고자 함에 있는 것(대법원 1990. 8. 14. 선고 90도870판결)"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집회나 시위는 경찰이나 정부당국이 허용해주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집시와 시위의 자유는 다시금 한낱 장식에 불과한 기본권으로 전락할 처지에 놓여 있다. 집시법의 독소 조항과 경찰의 '우리네 마음'이라는 자의적 법 집행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언론은 늘 '시민들의 교통 불편'을 운운하며 교통혼잡으로 인한 손실을 계산하기 바쁘다. 

집시법 제5조의 악용

제5조 1, 2항은 "집단적인 폭행·협박·손괴·방화 등으로 공공의 안녕 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것이 명백한 집회 또는 시위"는 금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이 조항은 집회를 막는데 늘 빠지지 않고 사용하는 '전가의 보도'다. 다른 이유가 없을 때는 늘 이 조항을 들이댄다. 특히 이 조항은 민주노총이 주최자로 신고한 집회에 대한 금지 통고의 주된 이유로 사용되고 있다. "예전 이러이러한 민주노총이나 가맹연맹 주최 집회에서 폭력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이 조항에 해당하여 금지한다"는 식으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1995년 2월 주한미군범죄근절을 위한 운동본부가 서울역 광장에서 '세 모녀 폭행미군 소환 및 한미행정협정 개정을 위한 시민대회'를 하겠다고 신고한 것을 경찰당국이 "위 집회참가인원 중 다수를 차지하는 한총련이 1994년도에 총 27회의 폭력시위를 주도하였고, 다른 시도의 학생들까지 동원하여 집회에 합류시킬 예정인 점 등에 비추어 이 사건 옥외집회가 집단적인 폭력행사로 공공의 안녕과 질서유지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것이 명백"하다는 이유로 금지한 바 있다. 이에 운동본부가 취소소송을 낸 것에 대하여 법원은 "원고의 회원단체인 한총련이나 서총련이 종전에 개최한 집회에서 수차 집단적인 폭력행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정만으로는 원고가 주최하는 이 사건 옥외집회에서 집단적인 폭력행사가 있을 개연성이 명백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서울고등법원 1995. 5. 30. 선고 95구6146판결)"며 경찰당국의 금지통고를 취소한 바 있다. 

하지만, 집회 며칠 전에 신고를 하는 관례에 비추어 수개월이 걸릴 수도 있는 법원을 통한 구제절차는 실효성이 없고, 결국 경찰당국의 편의적인 법 집행을 가능하게 해 주는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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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 집회 신고

위장 집회 신고는 요즘 들어 기승을 부리는 신종수법인데, 미리 집회장소를 선점하여 다른 단체의 집회를 막는 방법이다. 집시법 제8조 제2항은 "둘 이상의 집회신고가 있고, 그 목적으로 보아 서로 상반되거나 방해가 된다고 인정될 경우에는 뒤에 접수된 집회신고의 금지를 통고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경찰당국은 목적이 상반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무조건 다른 집회 신고가 있는 경우에 이후 집회 신고를 금지하고 있다. 이미 이는 작년 아시아유럽회의(ASEM) 때 경찰당국이 강남 일대의 집회를 막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이다.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시내 주요 집회장소에 모두 장기집회신고가 되어 있어 다른 단체는 이제 서울시내에서 집회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다. 

대학로는 주변 카페, 소극장 등 70여 업체 상인들로 구성된 대학로문화발전추진협의회가 7월 25일부터 9월 25일까지 3개월 간 오전 10시∼오후 7시 마로니에 공원에서‘건전한 시위문화 정착을 위한 캠페인'을 갖겠다고 집회신고를 냈다. 이 단체는 신고기간 매일 마로니에공원에서 종로 5가까지 2㎞ 구간에서 1개 차로로 거리행진을 벌이겠다고 신고해 시위대의 단골 행진구간도 원천 봉쇄했다. 

경찰청 앞은 더 가관이다. 서울 미근동 경찰청 인근에 위치한 임광토건은 7월 23일부터 12월 31일까지 무려 6개월 동안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 30분까지 3백 명이 참가하는 '건전한 시위문화 정착을 위한 캠페인'을 임광빌딩 앞에서 갖겠다고 신고했다. 임광토건 측은 20층 짜리 자사 빌딩에 입주한 업체들이 시위로 업무에 지장이 많다는 항의를 받자 이 같은 묘안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관광특구 명동 운영위원회도 8월 7일부터 30일까지 명동성당 인근 한빛은행 앞에서 오후 2∼6시 '시위근절 및 노점상 철거 집회'를 갖겠다고 신고했다. 

얼마 전인 8월 초,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부당노동행위 사업주 구속처벌을 위한 총력투쟁 결의대회'를 서울지방경찰청에 신고한 바 있다. 개최 장소는 '종묘공원 집회 후 탑골공원 → 종각 → 광교 → 명동성당 앞(에스콰이어 로터리)까지 2개 차로 이용 행진 후 에스콰이어 로터리에서 마무리 집회를 갖는 걸'로 하였다. 이에 대해 서울지방경찰청은 금지 통고를 했는데, ① 행진로인 종로2가에 온두라스 대사관(삼성타워빌딩 2층)이 있고, ② 세운현대상가 상우회에서 7월 9일부터 8월 31일까지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홍보 캠페인' 후 시사영어사 앞까지 행진을 한다는 집회신고가 있으며, ③ 또한 사단법인 사랑채에서 '노인복지·권익신장 궐기대회'가 같은 장소에 신고되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민주노총은 장소를 바꾸어 서울역에서 집회를 하고자 남대문 경찰서 정보과에 문의하니, 서울역에는 인간성회복국민운동본부에서 '인간성회복국민운동결의대회'를 개최한다는 집회신고가 되어 있었다.

주요 시설이라고 금지하는 경우

집시법 시행령 제8조에서 정하고 있는 주요 도시, 주요 도로를 보면 사실상 서울시내 거의 모든 도로가 '주요 도로'로 지정되어 있다. 따라서 교통소통을 위하여 필요한 때는 언제든지 주요 도로에서의 집회나 시위를 금지할 수 있게 집시법이 규정하고 있으므로, 이 또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될 수 있는 조항이다. 더구나 최근 정부는 4대문 안 도심에서는 집회인원을 500명, 그 외 지역은 1천명으로 제한하는 방향으로 법개정을 하겠다는 기막힌 발상을 내놓았고, 경찰 또한 이에 뒤질세라 주요 도로에서의 집회를 엄격히 제한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조항 때문에 광화문 일대, 경찰청 일대, 대학로 일대에서의 집회와 시위가 자주 금지되고 있다. 

현재 대사관 100미터 안에서는 집회는 물론이고 행진조차 금지되어 있다. 도시 구조상 100미터는 사실상 그 장소에서 집회를 금지하는 것이고, 행진까지 금지함으로써 주요 행진로에 대사관이 하나라도 들어서게 되면 앞으로 그 행진로는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 뻔하다.

삼성그룹은 1997년 삼성본관 빌딩 옆의 태평로 빌딩에 싱가포르 대사관을 입주시켜, 당시 계열사였던 이천전기(1998년 퇴출 후 일진그룹이 인수) 노동자들의 집회를 '원천봉쇄'한 바 있다. 삼성은 해고노동자들이 100미터 떨어진 삼성생명 빌딩 앞에서 집회를 하자, 엘살바도르 대사관을 삼성생명 본사 사옥 21층에 유치함으로써 다시금 집회를 '원천봉쇄' 했다. 다시 새로 들어선 종로 2가 국세청이 입주해 있는 삼성타워에서 집회를 하자 작년 6월 온두라스 대사관을 유치하였다. 한편 익명을 요구한 경찰의 한 관계자가 "해고노동자 집회 및 각종 민원과 관련된 집회·시위 등에 시달리는 일부 대기업들이 현행 집시법 규정을 활용해 임대료를 대폭 할인해주는 등의 방법으로 군소 국가 대사관을 유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고 한 보도는 전한다. 

정부가 헌법지켜야 

위에서 열거한 것들뿐만이 아니다. 사용자 집 근처나 장관 집 근처에서 집회라도 할라치면 주거 지역이라는 이유로 금지 통고한다. 또 지난 6월 16일 제2차 민중대회에서는 신고하지 않은 '대통령의 상징물'이 있다는 이유로, 건설운송노조와 전교조 집회는 신고한 집회 인원보다 30명을 초과했고, 시간이 25분 지났다는 이유로 공권력을 투입해 강제로 철거하거나 시위자들을 연행·구속했다. 집시법에는 폭발물 등 위험한 물건이 아니거나, 신고 내용에서 현저히 일탈한 경우가 아니면 해산명령을 내리거나 철거할 근거가 없음에도 경찰당국이 집시법을 자기 마음대로 악용한 것이다. 집회 장소에는 정복을 입고 주최자에 통보하고서만 경찰관이 출입할 수 있음에도 사복형사가 대학생이나 기자로 가장하여 사진 촬영을 하거나 아예 무전기를 들고 들락거리는 경우도 많다. 어디 이 뿐인가. 7월 7일 경주에서는 사복경관이 시위대로 가장하여 택시유리창에 돌을 던져 깨뜨린 폭력시위 조작사건까지 있었다. 

최근 언론세무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문·방송 등의 매스 미디어가 국가권력과 소수의 독점자본에 독점됨으로써 사회의 여러 이해관계 집단이 자신들의 의사를 충분히 표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집회 및 시위의 자유가 가지는 역할과 기능은 더욱 중요하다. 즉 집회 및 시위의 자유는 집권정치 세력에 대한 정치적 반대의사를 집단적으로 표명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며, 민주주의 사회라면 어디서나 보장받는 기본권이라 할 수 있다. 국가가 헌법을 수호하기는커녕 앞장서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침해하는 요즘 상황은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라 할 수 있다. 이런 공권력의 '범법' 행위가 더 이상 묵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 57호